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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따라 교회가 이 땅의 희망 돼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따라 교회가 이 땅의 희망 돼야” 교회 연합기관·교단 성탄 메시지 이영훈 기하성 대표총회장 “존중과 사랑으로 손맞잡자” 한국교회 주요 연합기관과 교단들이 성탄 메시지를 통해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회개와 성찰을 촉구하고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교회가 이 땅에 희망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대표회장 김종혁 목사)은 “세계 각국에서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국내에선 12·3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안 결의가 있었다”면서 “정당들이 대립과 분열을 멈추고 불안 상황을 속히 수습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교회를 향해 “모두가 정치적 문제에 집중할 때 생업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과 병실과 거리에서 외로움에 울고 있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자”면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군인과 경찰을 격려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자”고 제안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총무 김종생 목사)는 "국회의 신속한 대응으로 다행스럽게 계엄령은 해제됐고,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리게 됐다"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정치적 혼란의 한복판에 개입하시어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전했다. 각 교단 총회장도 한국교회 성도들이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고 각자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시대적 역할을 감당해 달라고 주문했다. 김종혁 예장합동 총회장은 "소외된 이웃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며 "우리가 받은 사랑을 나누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영걸 예장통합 총회장은 "전쟁뿐 아니라 지진, 홍수, 가뭄 등 여러 가지 자연재해로 가족과 재산, 일터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이들에게도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함께하시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이어 "비상계엄 선포 사태가 사회적 혼란을 가져왔지만 갈등과 불신이 치유되고, 참된 정의와 평화가 임하기를 함께 기도하자"고 권면했다. 이영훈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대표총회장은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정치가 위기상황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했는지 참회하며 깊은 반성과 기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정치권은 사회적 안정과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한국교회 성도들은 존중과 사랑으로 손을 맞잡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김정석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이규환(예장백석) 박상규(한국기독교장로회) 류승동(기독교대한성결교회) 이욥(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등이 '성탄의 기쁨과 희망, 위로와 소망'을 주제로 메시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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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5
  • ‘이웃에 방해 되지 않게’ 이 교회의 45년 새벽송 전통
    ‘이웃에 방해 되지 않게’ 이 교회의 45년 새벽송 전통 사라져 가는 새벽송 문화 지키는 서울 영안교회 사라져가는 새벽송의 문화를 지켜가는 교회가 있다. 서울 영안교회(양병희 목사)는 개척 초기인 45년 전부터 코로나19로 인한 2년간을 제외하고는 공백없이 매년 성탄절 전야에 성도 가정을 방문해 캐럴을 부르는 전통을 이어왔다. 24일 밤에도 영안교회 성도들은 3~4명씩 팀을 나눠 성탄의 기쁨을 전했다. 올해 영안교회는 교구마다 약 30가정씩, 총 300여 가정을 방문해 새벽송을 진행했다. 새벽송 팀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저 들 밖에 한밤중에’ 등 성탄절 찬송가를 부르며 조용하지만 밝고 따뜻한 목소리로 복된 소식을 전했다. 이날 밤 9시에 시작한 새벽송은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이름은 새벽송이지만 사실상 ‘밤송’에 가깝다. 새벽송은 ‘새벽’과 노래한다는 뜻의 한자 송(頌)의 합성어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새벽에 찬송가를 부르며 복음을 전하는 행위를 말한다. 한국교회는 서양 선교사들이 하던 크리스마스 캐럴링(Christmas Caroling)과 새벽기도라는 한국적 전통이 결합해 새벽송이라는 형태로 발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영안교회의 새벽송은 이웃의 평안을 고려해 소리 크기를 조절한다. 과하지 않게 울리는 찬양 소리가 좁은 아파트 복도에 고요하게 울린다. 한 곡을 부른 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건넨 팀은 성탄 카드와 새해 달력을 전달하고 조용히 자리를 옮긴다. 경기도 구리시에 사는 남예준(7)·남예은(5) 남매 집에도 새벽송 팀이 방문했다. 전날부터 직접 과자 바구니를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팀을 기다린 남매는 찬양 소리가 들리자 문을 활짝 열고 팀을 맞았다. 예준군은 찬송을 따라 불렀고 예은양은 준비한 과자를 새벽송 팀에 건넸다. 새벽송 팀은 어린이들에게는 미리 준비한 선물 상자를 전달한다. 방문한 가정의 문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등의 성경 구절이 담긴 카드를 붙이며 새벽송을 마무리한다. 양병희 목사는 “목자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소식을 전했듯 새벽송은 우리도 찬양과 나눔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자 시작한 아름다운 전통”이라며 “다만 성도 가정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같은 기쁨의 시간이 되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도시화와 개인주의로 인해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이 점차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며 “특히 요즘 세대는 새벽송을 경험조차 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영안교회는 이 전통을 통해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 이웃과 교감하는 문화를 지켜가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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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5
  • [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현장] "뉴욕 부호보다 선교사" 새문안교회·연세대 세우고 청년 교육
    [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현장] "뉴욕 부호보다 선교사" 새문안교회·연세대 세우고 청년 교육 [3·끝] 언더우드와 그로브 교회 ‘한국 최초의 선교사, 32년간의 성공적인 사역을 마치고 그의 보상을 받다.’ 11월 초 미 동부 뉴저지주의 노스 버건 마을, 소박한 주택들이 늘어선 서민 동네 언덕바지에 그로브 개혁 교회가 있다. 교회 묘지엔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의 이름 등을 간단히 새긴 비석이 누렇게 변한 늦가을 잔디 위에 놓여 있었다. 건강 악화로 요양차 귀국한 고향에서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16년 소천할 때, 그의 소원은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소원은 사후 83년간 이뤄지지 못했다. 형제들이 의논해 그의 시신을 조선으로 옮기는 대신 그 돈을 언더우드가 세우고 돌아온 조선의 학교들을 지원하는 데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1999년에야 마침내 그의 몸은 한국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자리 잡았다. 고향 마을 교회 언덕엔 비석 하나만 남았지만, 그의 30여 년 헌신은 한국에서 놀라운 열매를 맺었다. ◇”뉴욕 백만장자보다 조선의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5년 제물포를 통해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조선에 온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 조선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1898년 뉴욕에 있는 큰형 존(1857~1937)의 편지가 도착했다. 1896년부터 ‘언더우드 타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사업이 날로 번창하자 동생에게 “뉴욕으로 돌아와 사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함께 함경도 전도 여행을 떠났던 캐나다 의료 선교사에게 그 편지를 보여준 뒤, 주저 없이 찢어버리면서 말했다. “뉴욕에서 백만장자로 사는 것보다 한국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사로 사는 것이 더 멋진 삶 아니겠소!” 동생은 대신 형에게 한국 선교를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형은 1901년 발표한 타자기 ‘언더우드 5호 모델’이 큰 인기를 끌면서 이후 20년간 200만대 이상을 판매하는 성공 가도에 막 들어선 참이었다. 형은 동생의 편지를 받고 학교 부지 20만평 구입 자금 5만3000달러를 보냈다. 지금 연세대학교는 이 돈으로 산 땅에서 시작됐다. 형이 이후에 추가로 보낸 10만달러로 세운 건물은 지금 연세대 본관인 석조 건물 언더우드관이다.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가기 1년 전인 1915년, 언더우드는 자신이 설립한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열어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형은 당대의 ‘스티브 잡스’” 언더우드가 졸업한 뉴저지 뉴브런즈윅 신학교는 당시 미국 해외 선교 열기의 중심이었다. 언더우드는 이곳에서 인도 선교사의 꿈을 키우다 조선으로의 소명을 자각했다. 이 대학의 김진홍 언더우드 석좌교수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은 그 시대의 ‘스티브 잡스’ 같은 사업가였다”고 설명했다. 14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도서관 건물과 서가 등은 언더우드가 공부하며 해외 선교의 뜻을 굳혔던 당시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고 있다. 도서관 한편엔 한국 연세대에서 2011년 마련한 언더우드 기념물도 설치돼 있었다. ◇”이루어질 것이라 말하라” 조선에서 그는 국왕부터 천민까지 모두 만났고, 의주까지 목숨을 건 전도 여행을 세 차례나 다니며 거리에서 전도했다. 1886년 훗날 경신중·고가 되는 고아원을 세웠고, 그해 거둔 조선 아이 10명 중 몸이 너무 허약했던 한 아이가 훗날 임시정부 외무총장과 부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1881~1950)이었다. 언더우드는 성경을 번역하며 1890년 최초의 한영·영한사전을 출판했고, 1887년엔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이 놀라운 추진력은 그의 집안 내력에서 왔다. 영국 출신 이민자로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던 언더우드 집안의 가훈은 ‘불가능은 웃어넘겨 버리고, 그 일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 말하라.’ 해외 선교를 꿈꾼 부모는 5남매 중 가장 똑똑했던 셋째 호러스 언더우드에게 집안의 모든 지원을 집중, 교육했다. 선교는 언더우드 가족 모두의 소명이었던 셈이다. 어린 언더우드가 출석했던 뉴저지의 그로브 개혁 교회는 개축돼 옛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교회 지하에는 옛 건물의 부속 예배실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설교단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젊은 언더우드가 해외 선교의 뜻을 세우고 기도했을 자리다. 11월 초 방문했을 때 이 교회 스티브 게르모소 담임 목사는 “우리 교회는 이 지역 이민자 커뮤니티의 중심 역할을 하며, 언더우드의 삶은 지금도 이 지역사회에 모범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13살 때인 1872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온 언더우드가 1885년 조선으로 떠나기 전까지 미국에서 산 기간은 13년. 훗날 조선에서 선교한 기간은 30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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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5
  • [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 현장] 군산 앞바다서 침몰 사고… 고향엔 묘소 없이 한글 비석만
    [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 현장]군산 앞바다서 침몰 사고… 고향엔 묘소 없이 한글 비석만 [2] 아펜젤러와 수더턴 생가·교회 1902년 6월 11일 밤 11시쯤, 군산에서 서쪽으로 37㎞ 떨어진 어청도 서북쪽 바다. 제물포를 떠나 목포를 향해 순항하던 558톤급 기선 구마가와마루(球摩川丸)에 675톤급 기선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가 충돌했다. 뱃머리를 들이받힌 구마가와마루는 순식간에 앞쪽 절반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배에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길이던 헨리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와 그의 배재학당 조사(助事) 조한규(혹은 조성규), 목포 출신 여학생이 함께 타고 있었다. 배는 2분 만에 침몰했고, 아펜젤러 선교사는 46명 승객 중 실종·사망한 18명 중 한 명이 되고 말았다. 아펜젤러와 동승했다가 가까스로 구조된 미국인 광산업자 J F 볼비는 아펜젤러의 마지막 모습을 “허리까지 잠긴 물 속에서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더듬어 잡으려고 애쓰고 있었다”고 전했다. 아펜젤러가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첫 개신교 선교사로 제물포항에 내린 지 17년,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배재학당을 세워 조선의 청년들을 가르치고 한국 감리교의 어머니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의 전신 벧엘 예배당을 세웠던 아펜젤러는 조선의 바다에 묻혔다. 조선에서 봉사한 다른 선교사 윌버 스웨어러(1871~1916)는 그해 아펜젤러 선교사 추도사에 이렇게 썼다. “아펜젤러에게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자기희생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한국인을 위해 오랫동안 희생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도 한국인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쳤다는 말이 지금 한국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가 살려면 살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교사와 어린 소녀를 깨우려 노력하다가 희생당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난달 30일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의 한적한 시골 수더턴의 마을 묘지. 조선의 바다에 묻힌 아펜젤러의 육신 대신 그의 위대한 헌신을 기리는 순직비가 서 있었다. 검은색 묘석 앞면엔 그의 얼굴과 생몰일이, 뒷면엔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복음을 전해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데 앞장섰다’는 비문이 새겨졌다. 여기서 멀지 않은 아펜젤러의 고향 교회 ‘임마누엘 레이디스 교회’의 존 니더하우스 담임목사는 “2021년 한국의 성도들이 세워준 것”이라고 전했다. “저는 36년 전 이 교회에 오기 전엔 아펜젤러 선교사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15년 전 한국인 신학생에게서 아펜젤러에 대해 문의를 받았고, 그분의 헌신에 관해 공부하게 됐지요. 여전히 한 달에 한두 번은 한국의 순례객들이 찾아옵니다. 그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아, 우리 교회는 매달 전 세계로 파송된 선교사 30~40명의 생활 자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부 벽에는 일본, 루마니아, 태국, 인도 등 ‘아펜젤러의 후예들’이 파송된 선교국을 표시한 세계 지도와 선교사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예배 참석 성도 300명 안팎인 작은 시골 교회가 매달 30~40명의 선교사를 후원하는 열매를 맺은 것도 놀라운 일. 이 역시 아펜젤러 선교사의 유산이다. 아펜젤러는 개신교 최초의 한국어 세례식과 여성 세례식을 집전했고, 최초로 한국어로도 설교했다. 아버지를 삼켜버린 이역만리 조선 땅에서, 아펜젤러의 자식들도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했다.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1885~1950)는 이화학당의 6대 당장(堂長)을 지낸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 아들 헨리 닷지 아펜젤러(1889~1953)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재학당의 당장으로 20년간 조선 청년들을 가르쳤다. 1885년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처음 조선 땅을 밟은 그의 여정의 시작은 뉴저지 드류 신학교다. ‘청년’ 아펜젤러가 신학을 공부했던 이 학교에는 그가 학교에 입학하며 친필로 남긴 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외증손녀 실라 플랫(76) 여사는 “실제로 뵙진 못했어도, 유년 시절부터 아펜젤러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가족에게 들으며 성장했다”고 전했다. “근래 들은 가장 아름다운 일화는 할아버지가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항에 내릴 때의 얘기였어요. 두 분은 장로교와 감리교로 교단은 달랐지만 어서 조선으로 가 아픈 이들을 고치고 배움에 목마른 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하나였죠. 그래서 두 분이 합심하셨대요. ‘우리, 누가 먼저 조선 땅에 발을 디딜지 다툴 것 없이, 팔짱을 끼고 함께 내리세나!’ 하하하.” 실라 여사는 “”증조부도 처음 1~2년은 낯선 언어와 문화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영사전 작업을 시작했다고 들었다”며 “덕분에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한 외할아버지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물론, 그 딸인 내 어머니까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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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3
  • [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현장] 전주·군산에 학교 세워… 아들 셋 조선 땅에 묻고도 "나는 행복합니다"
    [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현장] 전주·군산에 학교 세워… 아들 셋 조선 땅에 묻고도 "나는 행복합니다" [1] 윌리엄 전킨과 유니온신학교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와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는 “누가 먼저 조선 땅에 발을 디딜까 다투지 말자”고 의기투합해 팔짱을 끼고 함께 제물포항에 발을 디뎠다. 내년은 이들로부터 시작된 한국 선교 140년. 고국에서의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은자의 나라’ 조선에 도착한 초기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워 선진 지식을 가르친 교사이자, 서구 의술로 병을 고친 인술의 실천자였고, 조선인의 마음속에 독립의식을 심어준 스승이었다. 본지는 한국교회미래재단(이사장 소강석 새에덴교회담임목사) 탐방단과 함께 지난달 27일부터 6일간 140년 전 시작된 선교 역사의 흔적을 따라 미국 동부 지역을 순례했다. 1908년 2월 윌리엄 전킨(1865~1908) 선교사가 선교지 전주에서 풍토병으로 별세할 때 남긴 말을 딸 메리는 이렇게 전했다. 지난달 31일(현지 시각)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전킨 선교사의 모교인 유니온 장로교 신학교. 선선한 바람 아래 햇볕은 따뜻하고, 단풍물이 듬뿍 든 나무들 사이 건물이나 집 앞에는 알록달록한 핼러윈 장식물들이 놓여 있었다. 붉은 벽돌 건물 신학교 도서관 깊숙한 곳에 사료관이 있다. 사서는 레이놀즈(1867~1951) 선교사가 번역한 성서와 당시 선교사들의 서신이 담긴 영인본 책자 등 가지런히 놓인 자료들 사이에서, 전킨의 죽음을 전한 딸의 편지글이 담긴 팸플릿을 들어 보여줬다. 판사의 손자, 목사의 아들, 훤칠한 키에 맑은 테너로 성가를 부르면 홀리듯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전킨. 그는 1892년 11월 조선에 도착해 1893년 전주, 1896년 4월부터는 군산을 중심으로 조선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1894년 11월 큰아들 조지, 1899년 1월엔 넷째 아들 시드니가 풍토병으로 사망했고, 1903년 4월엔 다섯째 아들 프랜시스가 생후 20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 아들을 조선에서 모두 풍토병으로 잃어 조선 땅에 묻어야 했던 것이다. 참척(慘慽)의 통한을 가슴에 품고도 전킨 부부 선교사는 1903년 남학생들을 위한 영명학교(현 군산 제일고)를, 1904년 군산 여학교를 세웠다. 콜레라 등 전염병이 돌면 몸을 던져 환자를 돌봤고, 거리에 넘쳐나는 고아들을 거둬 먹이고 길렀다. 본인도 원체 병약한 체질이라, 남장로교 선교본부가 그의 건강을 걱정해 군산을 떠나 전주 시내 반경 6마일 안에서만 사역하도록 명령했다. 딸은 “그때 군산의 성도들이 아버지가 떠나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서고, 서울과 미국으로 전보를 보내 군산에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할 만큼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고 썼다. 전주에서 눈을 감을 때 전킨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참 좋군요. 저는 갑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그를 기억하기 위해 전주여학교는 전킨(한국명 전위렴)을 기념한다는 의미로 이름이 ‘기전(紀全)중·여고’가 됐다. 전킨 별세 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그의 이름을 새긴 직경 90㎝의 대형 종을 만들어 태평양 건너 그가 담임하던 전주 서문교회에 보냈다. 서울을 중심으로 연희전문학교와 배재학당 등을 세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직후 호남과 충청에서 활동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다. 전킨은 군산에서 시작해 호남 지역에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워 부모 잃은 아이들과 아픈 사람들을 돌보며 미국 선교 역사에서 ‘7인의 선구자(frontier)’로 불린 남장로교 선교사 일곱 명 중 한 사람이었다. 남장로교의 본산 유니온 장로교 신학교 도서관에는 한국 선교사들의 자료도 풍부하게 소장돼 있다. 1891년 10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들어온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신학생 대상의 해외 선교 지원자 모집 집회에서 조선 선교를 독려하는 연설을 했다. 막 밴더빌트대를 졸업하고 에머리대에 진학한 윤치호(1865~1945)도 함께였다. 이들이 환등기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한 미지의 선교지 조선의 모습이 미국의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이들 중에 유니온신학교의 레이놀즈와 캐머런 존슨, 매코믹신학교의 루이스 테이트가 있었다. 레이놀즈는 전킨의 친구였다. 곧 이들은 남장로교 해외선교실행위원회에 자신들을 조선으로 파송해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이들은 북장로교와 감리교가 기반을 다진 평양과 서울, 호주 장로교가 맡은 영남이 아닌 충청 이남과 호남 지방으로 왔다. 유니온신학교를 거쳐 버지니아의대에서 공부한 클레멘트 오언(1867~1909)은 1898년 목포에 도착해 목포와 광주에 진료소를 열고 한센인들을 포함해 환자를 돌봤다. 1909년 오언이 급성폐렴으로 사망한 뒤엔 로버트 윌슨(1880~1963)과 윌리 포사이드(1873~1918) 등의 의료 선교사들이 이어받았다. 조선인들도 외면한 한센인을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모습에 감동해 기독교인이 된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 최흥종(1880~1966)은 훗날 한센병 환자들을 도운 여수 애양원을 세운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했고, 광복 후 혼란기엔 여순 반란사건 당시 아들을 죽인 범인을 양아들로 거뒀으나 6·25 때 끝내 순교한 손양원(1902~1950) 목사가 일했던 곳이다. 유진 벨(1868~1925) 선교사 가문이 4대까지 선교사명을 이어간 곳도 호남 지역이고, 유진 벨의 진외증손인 인요한(미국명 존 린튼) 의원이 ‘순천 사람’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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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2
  • 노벨상으로 하나님 구원 더 멀어져"…한강 '목사 삼촌' 편지
    노벨상으로 하나님 구원 더 멀어져"…한강 '목사 삼촌' 편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삼촌인 한충원 목사가 조카에게 장문의 공개편지를 남겼다. 대전의 한 교회 담임목사로 있는 한충원 목사는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에게 보내는 삼촌의 편지’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 한 목사는 “사랑하는 조카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면서도 “노벨상 수상으로 인해 오히려 형님 집안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더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조카의 작품에 대한 평가로 한국 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형님 집안과 아예 단절된 상태에서 조카의 연락처를 전혀 몰라 불가피하게 공개편지를 보내게 됐다”며 “조카와 나의 단절도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미워하고 배척하신 형님에게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목회자의 사명감으로 이 편지를 공개한다”며 한강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의견을 늘어놨다. 한 목사는 “『채식주의자』에 대한 외설성, 청소년 유해성 논란과 관련해 형부·처제의 관계 및 장면 묘사는 충분히 비판받을 만하다”며 “D H 로런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그런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묘사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절제력과 분별력이 약한 청소년들에게 읽혀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에게도 추천하기가 두려운 작품으로 여겨진다”고 강조했다. 한 목사는 한강의 다른 소설 『소년이 온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등과 관련해 “제주 4·3사건과 6·25 한국전쟁은 이념 대립의 비극적 산물이고, 5·18은 독재정권 재탄생에 반대하다가 확대된 비극적 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건을 한쪽의 관점만으로 평하는 듯한 시각을 작품에서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는 문학 작가도 이념이나 지역 갈등을 부추겨 정치 이익을 얻으려는 정치인의 세몰이에 영합하는 듯한 작품을 쓰지 말고 공평한 자세로 써야 한다”며 “과거의 상처를 헤집지 말고 양쪽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카는 마치 대한민국이 정의롭지 못해 살 만한 나라가 아닌 것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작품을 몇 편 쓴 것으로 알고 있다”고도 했다. 끝으로 한 목사는 “내가 지금까지 조카에게 한 말들이 조카의 마음을 아프게 찌를 것을 생각하니 나도 이 편지를 쓰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며 “‘빛을 찾고 싶다’는 조카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위대한 작가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출처:중앙일보]
    •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2024-11-14

실시간 종교 일반(해외, 국내) 기사

  • 신학연구의 상향적 및 하향적 관점 제시
    주재용 박사(전 한신대학교 총장)는 최근 1,399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인 '교부문헌으로 쓴 초대 그리스도교 사상사(동연출판사)'를 저술해 한국신학계의 주목을 받고있는 중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명예원장 민경배)이 추최한 학술 발표회에서 본인의 신학의 방향과 강조점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완성되어왔는지를 교부시대를 연구하면서였으며,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은 제 309회 월례발제회에 주재용 박사(전 한신대학교 총장)를 주 강사로, 논찬에 고사무엘 목사(박사학위 취득 예정), 사회에 김동석 박사(믿힘연구원 원장) 등 참석한 가운데 지난 12월 5일 서현교회당(담임 이상화 목사 시무)에서 개최했다. ▲ 주재용 박사는 '나의 신학의 길-초대 그리스도교 사상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주제 발제를 담당했다. 주재용 박사는 교회사학 교수였지만 본래는 신약성서를 전공해 학사부터 박사까지 가려고 했다고 밝혔다. 그의 학사학위 논문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보상사상(報償思想), 석사논문은 '마가복음 13장에서의 Parousia 예언 이해'였다면서 대학원을 졸업한 후 학교의 교수충원계획에 따라 교회사로 전공을 바꿧다고 설명했다. 당시 한국의 각 신학교는 시급히 충원해야 할 분야가 교회사였기 때문이나 이 과목은 학생들에게 인기도 없고, 자신의 학교에는 교회사를 전공한 교수도 없어서 W. 워커의 교회사책을 참고하는 등 교회사를 다시 공부해야만 했다고 회상했다. 주 박사가 초대교부들에게 관심 갖은 이유는 신학 형성의 뿌리를 연구함으로서 본인의 신앙의 전거를 성서와 함께 교부들의 생애와 사상에 두고 싶었던 바람과 오늘의 교회와 신학적 문제의 해답을 초대 기독교 사상적 발전 절정기인 4~5C에 활동한 교부들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그와 같은 연구 결과 그들은 철학적 통찰력과 철저한 수사학적 훈련, 수도원에서의 영성훈련을 통한 신학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음을 발견했다는 설명이다. 학위 취득 후 귀국한 1974년 무렵 본인은 세계교회사와 한국교회사 모두를 강의해야 했고, 한국교회의 100주년과 겹치는 시기였는데 강의를 위한 한구교회사의 자료를 검토하면서 한국개신교의 출발을 한국의 청년들(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등)이 세례를 받은 해(1876년)부터임을 주장해 기존의 내한 선교사들(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라 등)의 시기(1884년)부터 계산해 한국교회사의 시기구분을 다시 해야함을 주장했다고 밝혔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교회사학자로서 예장으로부터 이단정죄를 받은 후 탈출한 기장에 대한 정체성을 강조했고, 기장 1백주년 기념사업으로 '한국기독교 100년사(1992년)'의 책임지필자로 활동했고,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사(1998년)'을 집필했다고 설명했다. 주 박사는 개인적으로 이단으로 판단하는 행위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한다면서 이단과 정통을 구별하는 표준을 세우기도 어려우며, 해석이 없는 성경의 문자적 말씀이 표준이 되는 것인지, 기독교의 교리가 표준이 될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비췄다. 빈센트(Vincent of Lerns)는 교리에 대해 "어느 곳에선,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믿어져야한다"고 했으나 그 같은 교리가 표준일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으면 이단인지, 한번 이단으로 정죄되면 영원히 이단인지, 기장 총회가 예장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았으면 지금도 이단인지 등에 대한 궁금증을 밝히고, 교회사에서는 이단으로 정죄 받은 자가 정통이 되는 경우도 있고, 교권 싸움에서의 승자가 정통으로 패자가 이단으로 정죄 받는 경우도 있다고 강조했다. ▣ 이단이라는 단어의 변화 이날 주 박사는 이날 5세기의 키릴과 네스토리우스가 교리적인 논쟁으로 시작해 정치적인 싸움으로 번졌던 그리스도론 논쟁을 일례로 들어 교리와 교권의 다툼에서 승패가 나뉘었던 상황을 설명 하면서 기독론이 기독교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했는지, 이것이 교회정치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설명했다. 이단을 의미하는 헬라어인 '하이레시스(hairesis)'는 신약성경에 '선택', '집단'이라는 의미로 쓰였고, 틴데일의 영역본에서는 '종파(sect)'로 한글표준 새번역에는 베드로후서 2장 1절에서만 '이단'으로 번역 되었을 뿐 다른 구절은 모두 '파당'으로 번역되었다고 주 박사는 설명했다. 킹제임스 성경(1611년)에서 하레이시스는 '이단(heresy)'으로 번역 되면서 신약성경이 2세기 이후의 이단 개념의 배경으로 인식된 변화를 설명했다. 요세푸스는 하이레시스를 철학의 특수학파 또는 공통의 견해를 가진 집단의 의미로 사용해 비정통이나 반정통의 이미가 아닌 별개의 동종 집단 정도를 의미 할 뿐 여기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었다고 주 박사는 밝혔다. 하이레시스(hairesis)가 반정통(anti-orthodoxia)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세기 후반부터라고 추정했다. 주 박사는 기장교단이 이단으로 정죄 받은 것에 대한 유형을 교회사에서 찾다가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키릴(Cyril)의 논쟁에 관시을 가졌고, 이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했다고 한다. ▣ 키릴과 네스토리우스의 논쟁 논쟁의 과정적으로 키릴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총주교) 였고,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총주교)였는데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가장 문화적 및 학문적, 경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곳을 담당했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은 동로마제국 수도의 주교로서 황제에 의해 임며ㅇ되며 제국 내에서 교회적 및 정치적인 권위가 있는 곳을 담당하는 자리로서 두 지역 주교들은 전통적으로 경쟁 및 적대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두 주교의 사이가 더 악화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428년 경 키릴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감독들이 직위를 박탈당해 콘스탄티노플로 피신했는데 황제가 이 고발 재판을 네스토리우스엑 위임했고, 키릴은 이에 앙심을 품고,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네스토리우스를 따라 콘스탄티노플에 온 전속신부 아나스타시우스가 428년 11월에 마리아에 대해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칭호를 부인하는 설교를 해 파문이 일었고, 동서방교회를 막론하고 동정녀마리아에게 적용되어진 마리아숭배심이 확고해지는 것과 연관되는데 이 칭호를 부인함은 마리아의 모성의 영관만 뿐 아니라 교회의 케리그마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으로 주 박사는 설명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 해 성탄절에 아나스타시우스 신부를 변호하는 설교를 했고, 키릴이 이를 문제삼아 공격해 결과적으로 위임되었던 재판과는 무관하게 네스토리우스가 '테오토코스'를 부인한다는 교리문제를 전면에 세웠다고 한다. 즉, 자신의 재판을 신학적 논쟁으로 둔갑시킨 것이라고 평가했다. 논쟁이 지속하자 키릴과 네스토리우스는 로마의 감독(교황) 켈레스틴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그는 키릴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로마 교황은 430년에 로마 회의를 소집해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10일 이내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기로 했으며, 집행권은 키릴에게 줬다고 한다. 키릴은 위임 받은 사실공개 및 네스토리우스에게 통보하고, 12개 항목의 저주문을 첨가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안디옥학파(네스토리우스)는 주로 상향적 사고(인성→신성)를 했고, 플라톤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알렉산드리아학파(키릴)는 하향적 사고(신성→인성)를 하는 특징이 있었지만 이런 입장은 신학적인 것응 아닌 당시 교계의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안좋은 반감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로마 교황의 지지를 얻지 못한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을 총주교로 임명한 의 지지를 얻어 에베소공의회(431년) 소집을 요청했지만 키릴파는 네스토리우스가 회의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회의를 개최해 그를 정죄했고, 뒤늦게 도착한 네스토리우스는 회의의 불법성을 규탄하며, 키릴을 감독직에서 해임하기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회의 후 양파는 각자의 결정을 황제에게 보호하고 지지를 호소하나 황제는 키릴과 에베소의 메존, 네스토리우스를 모두 구속 수감했음에도 갈등이 진정되지 않자 그 해 9월 칼케돈에서 양측을 접견했다고 한다. ▣ 네스토리우스의 패배 원인 황제는 접견 중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주변 감독들의 부정적 감정을 듣게 되는데 그 내용은 콘스탄티노플 지역의 감독들을 총주교로 추천했지만 타 지역의 네스토리우스가 임명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감정이 않좋았고, 그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자 즉시로 이단들을 포함해 그 도시와 교회들의 개혁작업을 강력히 추천해 피해를 입은 감독들의 감정이 상했다는 것 등이었는데 의견 청휘 후 황제는 네스토리우스를 안디옥 근처 수도원으로 추방, 키릴을 석방해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 복직시키는 등 결과적으로 네스토리우스는 키릴과의 논쟁에서 패배했다고 평가했다. 주 박사는 네스토리우스의 패인은 신학적 논쟁이 아닌 교권의 싸움에서 밀린 것으로 평가하고, 키릴이 회의 예정보다 일찍 도착해 회의의 사회자가 될 에베소 멤논 감독의 지지를 얻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다수의 감독과 사제를 대동하고 승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그 숫자는 200명 대 43명으로 차이가 컷다고 밝혔다. 네스토리우스는 황제의 힘만 믿고 승리를 낙관했고, 예정된 시간 안에 도착하지도 않는 등 안일하게 대했다는 것이 주 박사의 견해다. ▣ 433년 재연합의 신조와 키릴 양측의 갈등은 진정되지 않았고, 교회의 평화가 파괴될 위기에 직면하자 황제는 양파의 화해와 연합을 위해 설득과 압력으로 조정작업을 했으며, 양파는 433년 재연합의 신조를 작성, 키릴은 알렉산드리아학파를 대표해, 안디옥 요한은 안디옥학파를 대표해 서명함으로서 표면상 일단락 됐다고 주 박사는 설명했다. 주 박사는 여기에 주목할 점은 서명 전에 각파가 내세운 조건으로서 키릴 측은 네스토리우스를 정죄 및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자기의 12 항목 저주문을 수용할 것과 요한 측은 키릴의 2개 조건을 모두 철회할 것을 논의했다. 그러나 키릴이 끝까지 철회하지 않자 요한은 동료인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해 평화를 얻었고, 키릴은 라이벌인 네스토리우스를 정죄 및 자신의 신학을 포기한 셈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선택의 기저에는 당시의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통일정책으로 활용했는데 교회가 분열되는 것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교리논쟁에 개입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 박사는 평가했다. '433년 재연합의 신조'에 대해 주 박사는 근본적으로 '안디옥학파의 신조(Creed of Antiochenes)'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안디옥학파의 신조라고 평가하고, 433년 신조는 키릴의 신학이기 보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에 가까웠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이상한 결론이 난 이유는 키릴은 신조의 내용보다 경쟁자를 처단하는 더 구체적으로 키릴의 문제를 다룰 재판판인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제거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이며, 키릴 또한 해당 신조를 주의 깊게 읽지 않은 채 자신이 주장하는 두개의 용어(theotokos, henosis)를 보고 자신의 신학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했다고 평가했다. 주 박사는 네스토리우스의 입장에서 만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한다면 이교도의 '신들의 어머니' 라는 칭호도 용납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고, 하나님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히브리서 7장 2절)'라는 내용도 있기에 이교적이거나 성서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나님의 어머니와 사람의 어머니 칭호를 모두 포괄하는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를 교시 한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에 대한 칭호 '테오토코스'를 부인함이 아닌 그 칭호를 사용함에 신중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분석했다. 네스토리우스의 마지막 변증서인 『헤라크레이데스의 바자』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키릴은 네스토리우스가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숭배이 칭호요 교회 케리그마적인 전승의 칭호를 부인한다고 지속적으로 공격한 것이라고 한다. 주 박사는 결국 칼케돈신조가 정통신조이고, 그 근간이 교황 레오 1세의 '교서'와 433년 재연합 신조이며, 재연합의 신조가 안디옥학파의 신조에 근거한 것이기에 그 학파의 기독론과 일치하는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이 이단일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 키릴과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 기독론의 학문적 정의는 한 그리스도 안에 어떻게 인성과 신성이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한 그리스도를 이루기 위해서 두 본성을 어떻게 연합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이 기독론 논쟁이 약 100년 가까이 지속됨은 주요 전문 술어 개념의 혼란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용어들은 헬라어의 '우시아(ousia)', '후포타시스(hupostasis)', '프로소폰(prosopon)', '푸시스(phusis)'이며 이들은 삼위일체 형식에도 사용된다고 밝혔다. 주 박사는 용어를 둘러싼 사용에서 가파도기아 신학자들과 네스토리우스가 사용하는 다양한 용례를 설명하고, 이들은 각기 다른 술어를 사용했으되 모두 삼위일체를 말한 것인데 이러한 용어를 둘러싼 혼란은 키릴과도 상호 이해를 어렵게 했다고 설명했다. 두 본성의 연합의 개념에서 키릴은 '본체의 연합(union of hupostasis)'으로 네스토리우스는 '품격의 연합(union of prosopon)'으로 사용했는데 용어의 의미를 각기 자신만의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키릴의 기독론은 '구별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본질의 연합'이고, 네스토리우스 기독론의 핵심은 '두 본성의 구별, 한 품격에서의 연합'이라고 설명했다. ▣ 헤라클레이데스의 바자(The Bazaar of Heracleides)에 나타난 기독론 '바자'는 네스토리우스의 마지막 변증서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네스토리우스를 연구하기 위한 대부분의 자료가 그르 비판했던 키릴과 에베소희의의 자료에 의존했기에 정당한 평가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점이 있어왔지만 루프스가 1905년에 네스토리우스의 단편들을 모아 「네스토리아나(Nestoriana)」를 출판했고, 학자들은 네스토리우스의 마지막 변증서인 바자에 주목했다고 주 박사는 설명했다. 네스토리우스라는 이름 대신 헤라클에레데스라는 이름을 바자에 사용한 것은 네스토리우스나 그 추종자들이 정죄 받은 네스토리우스의 명칭을 사용할 수가 없어서 현자로 안려진 '헤라클레이데스'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고있다고 한다. 바자의 헬라어 원본은 현존치 않으나 6세기 중엽 완성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12세기의 사본이 19세기 초에 발견되어 1908년 베툰 베이커가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교훈」을 출간하기 전까지 영미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고, 1910년 베드얀의 시리아어 역본 출간, 1910년 나우가 불어 역본 출간, 1925년 드라이버와 호지슨의 영역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바자에 네스토리우스는 이단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기독론의 입장을 밝혔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두 본체의 연합인지, 품격의 연합인지에 대한 것과 두 본성의 구별방법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키릴과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 논쟁은 한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고 동시에 참 사람이 될 수 있느냐로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존재 방식과 그 관계라고 주 박사는 설명했다. 주 박사는 네스토리우스는 우리(사람들)가 하나님을 믿게 됨은 예수가 사람과 똑같은 인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공감살 수 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바자 이전에 소크라테스는 네스토리우스가 테도도코스라는 용어에 대해 신중했을 뿐이라면서 이단이 아니라고 변호한 일도 있었다고 밝혔다. 바자 이후에는 네스토리아나를 출판한 루프스는 네스토리우스는 로고스가 성육신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해도 인간성을 취한 후 '두 아들'이 있다고 주장한 바가 없다고 했고, 베툰-베이커는 그의 기독론이 정통신조인 칼케돈 신조에 나타난 기독론과 교황 레오 1세의 교서의 기독론과 일치하기에 소위 네스토리우스 주의자들과는 다르다고 평가했다고 밝혔다. 네스토리우스에게 여전히 부정적인 사람도 있었는데 렐톤은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 신성과 인성의 철저한 구별은 그리스도에 있어 두 본성은 진정한 연합을 이룰 수 없고 단지 연결에 불ㄱ과하기 때문에 여전히 이단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한다. 주 박사는 키릴과 네스토리우스의 논쟁에서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이단으로 정죄받았지만 과연 이단인지, 정죄한 교회의 성회는 오류가 없었는지에 문제를 제시하고, 교회의 회의사(史)에는 인간의 절투와 욕망으로 많은 오류를 범했던 일이 많다며, 요한 후스의 경우 개혁회의에서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키릴과의 논쟁에서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자로 정죄는 받았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해석하는 관점이 키릴과 달랐을 뿐 이단자는 아니었다고 주 박사는 강조하고, 그가 일관되게 진술한 기독록의 형식은 '두 본성의 구별과 한 품격에서의 연합'이며, 이 형식은 '433년 재연합의 신조'와 칼케돈 신조(451년)와도 일치했지만 교회사에서는 그를 이단자로 기술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주재용 박사의 신학적 사고는 알렌산드리아학파의 유형보다는 '안디옥학파'의 신학적 사고유형이라며, 이 신학적 사고의 유형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선택(관점)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습, 곧 그의 형상(image)과 모양(similitude)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완전한 원형(pro-totype)이라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적인 삶에서 체험한 온갖 영적 육적 유혹을 이기기 위해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도덕적 투쟁을 하면서도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마가복음 14장 36절) 하시라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영적 투쟁으로 승리해 완전한 인간이 되기까지 성장했만, 겸손하여서 교만하지 않고,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스브로 죽기까지 복종하는 모범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주 박사는 초기 교회가 신성의 굴욕(성육신과 십자가의 고난)과 인성의 높임(무릎 꿀을 때 높임)을 동시에 받은 그를 '참 하나님이고 참 인간'이라고 형식화했으며, 이 형식은 객관적인 사실적 진술보다는 신학적-신앙적 진술, 곧 케리그마적 진술이라고 설명하고, 완전한 인간인 그는 하나님의 계시자요 현현자라는 점에서 하나님이라고 강조했다. 또 완전한 인간인 그는 하나님의 계시자요, 현현자라는 점에서 하나님이고, '그와 하나님은 하나다'(요한복음 10장 30절)라며 신성과 인성의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밝혔다. 주 박사는 고령의 나이로 인해 아마도 '교부문헌으로 쓴 초대 그리스도교 사상사(동연출판사)'은 필생의 연구를 가름하는 역할을 할 것이며, 이날 한교사에서의 강의도 평생 마지막으로 하는 것인데 평생의 학문적 동료였던 민경배 박사가 속해있는 곳에서의 강의여서 기쁜 마음이라는 뜻을 비췄다. ▲ 고사무엘 전문연구원은 논찬을 담당했고, 주 박사의 발제는 한국의 교회사학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고사무엘 전문연구원은 주재용 박사가 저술한 '교부문헌으로 쓴 초대 그리스도교 사상사'는 한국교회사학계에 귀중한 학문적 성과라면서 1,399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방대한 저술은 단순히 역사적인 기술을 넘어서 교회사 연구방법론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며, 주 박사의 연구방법론의 탁월성과 신학적 공헌, 현대적 함의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다. 연구방법론은 철저한 사료의 검증과 맥락에 따른 이해를 고평가했는데 '헤라클레이데스의 바자'를 발견한 것과 이를 통한 분석은 기존의 교회사학계가 가진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신학과 역사학, 언어학을 넘나든 연구방법론을 성공적으로 구사했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잇었는데 예를 들면 기독론을 설명하면서 제시했던 단어들인 '우시아', '후포스타시스', '프로소폰', '푸시스' 등에 대한 혼란을 명확히 분석해 초대교회에서의 논쟁의 본질을 들어냈다고 밝혔다.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에 대해 '두 본성의 구별과 한 품격에서의 연합'이라는 고나점으로 재해석함으로서 전통적 기독론의 이해를 더욱 심화시켰고, 특히 네스토리우스가 단순 이단자가 아닌 신학적적으로 관점을 달리했던 신학자임을 논증했다고 분석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디옥학파를 구별해 분석해서 현대교회가 직면한 신학적 다양성의 문제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다는 점도 신선했음을 강조했다. 주 박사가 사실에 대해 학문적 탐구와 재해석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요즘의 교회사연구자들에게는 중요한 방법론적 지침을 제시한 것이며,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열거하기 보다는 그 안의 숨어있는 의미와 현대적 적용을 고민하는 방식의 깊이감 있는 연구의 필요성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주 박사는 발제를 통해 이단 정죄는 신중히 다뤄야함과 교부들의 신학 형성의 배경을 연구함으로서 철학적인 통찰력과 수사학적 훈련, 영성 훈련을 강조하는 등 현대 신학교육계가 가야할 방향에 대한 중요한 제언이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 김동석 박사(믿힘연구원 원장)은 사회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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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30
  •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따라 교회가 이 땅의 희망 돼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따라 교회가 이 땅의 희망 돼야” 교회 연합기관·교단 성탄 메시지 이영훈 기하성 대표총회장 “존중과 사랑으로 손맞잡자” 한국교회 주요 연합기관과 교단들이 성탄 메시지를 통해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회개와 성찰을 촉구하고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교회가 이 땅에 희망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대표회장 김종혁 목사)은 “세계 각국에서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국내에선 12·3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안 결의가 있었다”면서 “정당들이 대립과 분열을 멈추고 불안 상황을 속히 수습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교회를 향해 “모두가 정치적 문제에 집중할 때 생업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과 병실과 거리에서 외로움에 울고 있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자”면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군인과 경찰을 격려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자”고 제안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총무 김종생 목사)는 "국회의 신속한 대응으로 다행스럽게 계엄령은 해제됐고,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리게 됐다"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정치적 혼란의 한복판에 개입하시어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전했다. 각 교단 총회장도 한국교회 성도들이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고 각자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시대적 역할을 감당해 달라고 주문했다. 김종혁 예장합동 총회장은 "소외된 이웃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며 "우리가 받은 사랑을 나누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영걸 예장통합 총회장은 "전쟁뿐 아니라 지진, 홍수, 가뭄 등 여러 가지 자연재해로 가족과 재산, 일터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이들에게도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함께하시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이어 "비상계엄 선포 사태가 사회적 혼란을 가져왔지만 갈등과 불신이 치유되고, 참된 정의와 평화가 임하기를 함께 기도하자"고 권면했다. 이영훈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대표총회장은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정치가 위기상황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했는지 참회하며 깊은 반성과 기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정치권은 사회적 안정과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한국교회 성도들은 존중과 사랑으로 손을 맞잡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김정석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이규환(예장백석) 박상규(한국기독교장로회) 류승동(기독교대한성결교회) 이욥(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등이 '성탄의 기쁨과 희망, 위로와 소망'을 주제로 메시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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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5
  • ‘이웃에 방해 되지 않게’ 이 교회의 45년 새벽송 전통
    ‘이웃에 방해 되지 않게’ 이 교회의 45년 새벽송 전통 사라져 가는 새벽송 문화 지키는 서울 영안교회 사라져가는 새벽송의 문화를 지켜가는 교회가 있다. 서울 영안교회(양병희 목사)는 개척 초기인 45년 전부터 코로나19로 인한 2년간을 제외하고는 공백없이 매년 성탄절 전야에 성도 가정을 방문해 캐럴을 부르는 전통을 이어왔다. 24일 밤에도 영안교회 성도들은 3~4명씩 팀을 나눠 성탄의 기쁨을 전했다. 올해 영안교회는 교구마다 약 30가정씩, 총 300여 가정을 방문해 새벽송을 진행했다. 새벽송 팀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저 들 밖에 한밤중에’ 등 성탄절 찬송가를 부르며 조용하지만 밝고 따뜻한 목소리로 복된 소식을 전했다. 이날 밤 9시에 시작한 새벽송은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이름은 새벽송이지만 사실상 ‘밤송’에 가깝다. 새벽송은 ‘새벽’과 노래한다는 뜻의 한자 송(頌)의 합성어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새벽에 찬송가를 부르며 복음을 전하는 행위를 말한다. 한국교회는 서양 선교사들이 하던 크리스마스 캐럴링(Christmas Caroling)과 새벽기도라는 한국적 전통이 결합해 새벽송이라는 형태로 발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영안교회의 새벽송은 이웃의 평안을 고려해 소리 크기를 조절한다. 과하지 않게 울리는 찬양 소리가 좁은 아파트 복도에 고요하게 울린다. 한 곡을 부른 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건넨 팀은 성탄 카드와 새해 달력을 전달하고 조용히 자리를 옮긴다. 경기도 구리시에 사는 남예준(7)·남예은(5) 남매 집에도 새벽송 팀이 방문했다. 전날부터 직접 과자 바구니를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팀을 기다린 남매는 찬양 소리가 들리자 문을 활짝 열고 팀을 맞았다. 예준군은 찬송을 따라 불렀고 예은양은 준비한 과자를 새벽송 팀에 건넸다. 새벽송 팀은 어린이들에게는 미리 준비한 선물 상자를 전달한다. 방문한 가정의 문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등의 성경 구절이 담긴 카드를 붙이며 새벽송을 마무리한다. 양병희 목사는 “목자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소식을 전했듯 새벽송은 우리도 찬양과 나눔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자 시작한 아름다운 전통”이라며 “다만 성도 가정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같은 기쁨의 시간이 되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도시화와 개인주의로 인해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이 점차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며 “특히 요즘 세대는 새벽송을 경험조차 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영안교회는 이 전통을 통해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 이웃과 교감하는 문화를 지켜가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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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5
  • 「내한 선교사 연구2」 발간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는 최근 「내한 선교사 연구2」(홀리북클럽)를 발간해 19세기 경 세계적으로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쳤고, 당시 조선마저도 국운이 쇠락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을까 실의에 빠져있던 중 그리스도교를 이 땅에 희망과 평화를 전파한 서양의 선교사들의 활약과 공로상을 알리는 노력을 기울이고있다. 류금주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은 지난 2011년 「내한 선교사 연구」를 발행한지 13년 만에 「내한 선교사 연구2」를 발행하게 되었다면서 과거에 다루지 않았던 한국기독교초기의 선교사들을 추가로 이번 기회에 다뤘다고 밝혔다. 류 원장은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인 이승만은 예수를 믿기 이전의 젊은 시절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들어내던 인사였지만 정치범 혐의로 한성감옥에 투옥 되어 죽음 직전에 예수를 만나 회심하고 성령의 은사를 받고 나서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선교사들을 향해 그들의 조국에서는 도덕 높은 남녀로서 자신의 좋은 나라와 부모처자를 떠나 외로이 조선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이 믿는 도(道)를 전하여 좋은 세상이 되도록 노력하는 자비함에 감동했다는 이야기를 「독립정신」(1904)에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이 되어서 민족에 큰 역할을 했던 것처럼 「내한 선교사 연구2」에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였던 8명의 선교사와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발전된 대한민국으로 만든 한국인들에 대한 수많은 좋은 이야기들이 수록되어있다고 설명했다. 류 원장은 내한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한국기독교는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 등 을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이 수립되게 한 것이라면서 한국의 근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초기 한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역사를 알아야하며, 그것을 제공하려는 노력을 한국교회사학원이 기울이고있고, 구체적으로 「내한 선교사 연구2」 등을 발간함으로서 현실화하려는 노력중이라고 밝혔다. 「내한 선교사 연구2」는 2021~2023년간 만 2년간 동 연구원이 월례세미나에서 주 발제로 다뤘던 내용들을 수정 보완하면서 책으로 엮어 냈다고 한다. 로버트 토마스, 성경을 주고 떠나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류금주), 초기 내한 선교사 조지 존스의 선교와 교육(한정열), 간호선교사 에스더 쉴즈의 한국 사역(권평), 피득 선교사의 권서, 성경 번역 활동(정용), 언더우드 2세의 교육과 신학과 업적(김동석), 내한 감리교 선교부의 정책 변화와 빅터 채핀의 선교사역(송훈), 미국 남 장로회 여성 선교사 유화례의 교육 선교(최영근), 한국 최조의 오순절 교단 설립자 파슨스와 옵스테드(최재웅) 등이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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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4
  • 탄핵을 주장 성명서 발표
    ▲ NCCK 회장 암브로시우스 조성암 한국정교회 대주교. ▲ 실행위원들은 회의 후 성명서를 낭독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는 최근 정기총회를 갖고, 회장에 암브로시우스 조성암 대주교(한국정교회)가 취임 한 이후 첫 실행위원회로서 임시실행위원회를 지난 12월 13일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개최하고, 대통령을 탄핵함으로서 헌정질서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담은 성명서를 채택, 발표했다. 동 임시실행위는 지난 12월 3일 대통령 담화로서 비상계엄이 선포된 이후 국회에서 계엄해제요구결의안이 가결되고, 탄핵소추안을 표결하는 등의 진행경과를 실행위원들에게 설명하고, 이후 곧바로 NCCK 총무 명의로 입장문을 발표하는 등 대처를 했다는 보고와 세계개혁교회커뮤니온과 일본그리스도교교회협의회, 호주연합교회 등 각국의 기독교단체들이 지지성명을 보내왔다는 내용이 공유되었다. 김상근 NCCK시국회의 회장은 이날 참석해 매일 여의도에서 활약중이라며서 NCCK 회원교단 중심으로 각 교단의 교단장 연명된 목회서신을 성도들에게 발표할 것과 전국의 시민집회에 성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할 것, 교단장들의 국회의장 면담 등을 추진할 것 등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NCCK실행위원회의 명의로 탄핵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각 교단장의 목회서신은 골조는 유지하되 실행위원들이 요구한 내용들(그리스도인들의 회개, 현 상황이 발생하게 된 원인인 극단적인 정치적 부딛힘에 대한 자제, 그리스도교적인 언어를 담은)을 김종생 NCCK 총무가 회원교단간 협력으로 결과물을 차후 발표하도록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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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13
  • [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현장] "뉴욕 부호보다 선교사" 새문안교회·연세대 세우고 청년 교육
    [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현장] "뉴욕 부호보다 선교사" 새문안교회·연세대 세우고 청년 교육 [3·끝] 언더우드와 그로브 교회 ‘한국 최초의 선교사, 32년간의 성공적인 사역을 마치고 그의 보상을 받다.’ 11월 초 미 동부 뉴저지주의 노스 버건 마을, 소박한 주택들이 늘어선 서민 동네 언덕바지에 그로브 개혁 교회가 있다. 교회 묘지엔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의 이름 등을 간단히 새긴 비석이 누렇게 변한 늦가을 잔디 위에 놓여 있었다. 건강 악화로 요양차 귀국한 고향에서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16년 소천할 때, 그의 소원은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소원은 사후 83년간 이뤄지지 못했다. 형제들이 의논해 그의 시신을 조선으로 옮기는 대신 그 돈을 언더우드가 세우고 돌아온 조선의 학교들을 지원하는 데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1999년에야 마침내 그의 몸은 한국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자리 잡았다. 고향 마을 교회 언덕엔 비석 하나만 남았지만, 그의 30여 년 헌신은 한국에서 놀라운 열매를 맺었다. ◇”뉴욕 백만장자보다 조선의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5년 제물포를 통해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조선에 온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 조선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1898년 뉴욕에 있는 큰형 존(1857~1937)의 편지가 도착했다. 1896년부터 ‘언더우드 타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사업이 날로 번창하자 동생에게 “뉴욕으로 돌아와 사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함께 함경도 전도 여행을 떠났던 캐나다 의료 선교사에게 그 편지를 보여준 뒤, 주저 없이 찢어버리면서 말했다. “뉴욕에서 백만장자로 사는 것보다 한국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사로 사는 것이 더 멋진 삶 아니겠소!” 동생은 대신 형에게 한국 선교를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형은 1901년 발표한 타자기 ‘언더우드 5호 모델’이 큰 인기를 끌면서 이후 20년간 200만대 이상을 판매하는 성공 가도에 막 들어선 참이었다. 형은 동생의 편지를 받고 학교 부지 20만평 구입 자금 5만3000달러를 보냈다. 지금 연세대학교는 이 돈으로 산 땅에서 시작됐다. 형이 이후에 추가로 보낸 10만달러로 세운 건물은 지금 연세대 본관인 석조 건물 언더우드관이다.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가기 1년 전인 1915년, 언더우드는 자신이 설립한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열어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형은 당대의 ‘스티브 잡스’” 언더우드가 졸업한 뉴저지 뉴브런즈윅 신학교는 당시 미국 해외 선교 열기의 중심이었다. 언더우드는 이곳에서 인도 선교사의 꿈을 키우다 조선으로의 소명을 자각했다. 이 대학의 김진홍 언더우드 석좌교수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은 그 시대의 ‘스티브 잡스’ 같은 사업가였다”고 설명했다. 14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도서관 건물과 서가 등은 언더우드가 공부하며 해외 선교의 뜻을 굳혔던 당시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고 있다. 도서관 한편엔 한국 연세대에서 2011년 마련한 언더우드 기념물도 설치돼 있었다. ◇”이루어질 것이라 말하라” 조선에서 그는 국왕부터 천민까지 모두 만났고, 의주까지 목숨을 건 전도 여행을 세 차례나 다니며 거리에서 전도했다. 1886년 훗날 경신중·고가 되는 고아원을 세웠고, 그해 거둔 조선 아이 10명 중 몸이 너무 허약했던 한 아이가 훗날 임시정부 외무총장과 부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1881~1950)이었다. 언더우드는 성경을 번역하며 1890년 최초의 한영·영한사전을 출판했고, 1887년엔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이 놀라운 추진력은 그의 집안 내력에서 왔다. 영국 출신 이민자로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던 언더우드 집안의 가훈은 ‘불가능은 웃어넘겨 버리고, 그 일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 말하라.’ 해외 선교를 꿈꾼 부모는 5남매 중 가장 똑똑했던 셋째 호러스 언더우드에게 집안의 모든 지원을 집중, 교육했다. 선교는 언더우드 가족 모두의 소명이었던 셈이다. 어린 언더우드가 출석했던 뉴저지의 그로브 개혁 교회는 개축돼 옛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교회 지하에는 옛 건물의 부속 예배실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설교단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젊은 언더우드가 해외 선교의 뜻을 세우고 기도했을 자리다. 11월 초 방문했을 때 이 교회 스티브 게르모소 담임 목사는 “우리 교회는 이 지역 이민자 커뮤니티의 중심 역할을 하며, 언더우드의 삶은 지금도 이 지역사회에 모범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13살 때인 1872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온 언더우드가 1885년 조선으로 떠나기 전까지 미국에서 산 기간은 13년. 훗날 조선에서 선교한 기간은 30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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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5
  • [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 현장] 군산 앞바다서 침몰 사고… 고향엔 묘소 없이 한글 비석만
    [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 현장]군산 앞바다서 침몰 사고… 고향엔 묘소 없이 한글 비석만 [2] 아펜젤러와 수더턴 생가·교회 1902년 6월 11일 밤 11시쯤, 군산에서 서쪽으로 37㎞ 떨어진 어청도 서북쪽 바다. 제물포를 떠나 목포를 향해 순항하던 558톤급 기선 구마가와마루(球摩川丸)에 675톤급 기선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가 충돌했다. 뱃머리를 들이받힌 구마가와마루는 순식간에 앞쪽 절반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배에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길이던 헨리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와 그의 배재학당 조사(助事) 조한규(혹은 조성규), 목포 출신 여학생이 함께 타고 있었다. 배는 2분 만에 침몰했고, 아펜젤러 선교사는 46명 승객 중 실종·사망한 18명 중 한 명이 되고 말았다. 아펜젤러와 동승했다가 가까스로 구조된 미국인 광산업자 J F 볼비는 아펜젤러의 마지막 모습을 “허리까지 잠긴 물 속에서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더듬어 잡으려고 애쓰고 있었다”고 전했다. 아펜젤러가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첫 개신교 선교사로 제물포항에 내린 지 17년,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배재학당을 세워 조선의 청년들을 가르치고 한국 감리교의 어머니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의 전신 벧엘 예배당을 세웠던 아펜젤러는 조선의 바다에 묻혔다. 조선에서 봉사한 다른 선교사 윌버 스웨어러(1871~1916)는 그해 아펜젤러 선교사 추도사에 이렇게 썼다. “아펜젤러에게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자기희생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한국인을 위해 오랫동안 희생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도 한국인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쳤다는 말이 지금 한국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가 살려면 살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교사와 어린 소녀를 깨우려 노력하다가 희생당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난달 30일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의 한적한 시골 수더턴의 마을 묘지. 조선의 바다에 묻힌 아펜젤러의 육신 대신 그의 위대한 헌신을 기리는 순직비가 서 있었다. 검은색 묘석 앞면엔 그의 얼굴과 생몰일이, 뒷면엔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복음을 전해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데 앞장섰다’는 비문이 새겨졌다. 여기서 멀지 않은 아펜젤러의 고향 교회 ‘임마누엘 레이디스 교회’의 존 니더하우스 담임목사는 “2021년 한국의 성도들이 세워준 것”이라고 전했다. “저는 36년 전 이 교회에 오기 전엔 아펜젤러 선교사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15년 전 한국인 신학생에게서 아펜젤러에 대해 문의를 받았고, 그분의 헌신에 관해 공부하게 됐지요. 여전히 한 달에 한두 번은 한국의 순례객들이 찾아옵니다. 그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아, 우리 교회는 매달 전 세계로 파송된 선교사 30~40명의 생활 자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부 벽에는 일본, 루마니아, 태국, 인도 등 ‘아펜젤러의 후예들’이 파송된 선교국을 표시한 세계 지도와 선교사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예배 참석 성도 300명 안팎인 작은 시골 교회가 매달 30~40명의 선교사를 후원하는 열매를 맺은 것도 놀라운 일. 이 역시 아펜젤러 선교사의 유산이다. 아펜젤러는 개신교 최초의 한국어 세례식과 여성 세례식을 집전했고, 최초로 한국어로도 설교했다. 아버지를 삼켜버린 이역만리 조선 땅에서, 아펜젤러의 자식들도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했다.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1885~1950)는 이화학당의 6대 당장(堂長)을 지낸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 아들 헨리 닷지 아펜젤러(1889~1953)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재학당의 당장으로 20년간 조선 청년들을 가르쳤다. 1885년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처음 조선 땅을 밟은 그의 여정의 시작은 뉴저지 드류 신학교다. ‘청년’ 아펜젤러가 신학을 공부했던 이 학교에는 그가 학교에 입학하며 친필로 남긴 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외증손녀 실라 플랫(76) 여사는 “실제로 뵙진 못했어도, 유년 시절부터 아펜젤러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가족에게 들으며 성장했다”고 전했다. “근래 들은 가장 아름다운 일화는 할아버지가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항에 내릴 때의 얘기였어요. 두 분은 장로교와 감리교로 교단은 달랐지만 어서 조선으로 가 아픈 이들을 고치고 배움에 목마른 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하나였죠. 그래서 두 분이 합심하셨대요. ‘우리, 누가 먼저 조선 땅에 발을 디딜지 다툴 것 없이, 팔짱을 끼고 함께 내리세나!’ 하하하.” 실라 여사는 “”증조부도 처음 1~2년은 낯선 언어와 문화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영사전 작업을 시작했다고 들었다”며 “덕분에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한 외할아버지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물론, 그 딸인 내 어머니까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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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3
  • [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현장] 전주·군산에 학교 세워… 아들 셋 조선 땅에 묻고도 "나는 행복합니다"
    [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현장] 전주·군산에 학교 세워… 아들 셋 조선 땅에 묻고도 "나는 행복합니다" [1] 윌리엄 전킨과 유니온신학교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와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는 “누가 먼저 조선 땅에 발을 디딜까 다투지 말자”고 의기투합해 팔짱을 끼고 함께 제물포항에 발을 디뎠다. 내년은 이들로부터 시작된 한국 선교 140년. 고국에서의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은자의 나라’ 조선에 도착한 초기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워 선진 지식을 가르친 교사이자, 서구 의술로 병을 고친 인술의 실천자였고, 조선인의 마음속에 독립의식을 심어준 스승이었다. 본지는 한국교회미래재단(이사장 소강석 새에덴교회담임목사) 탐방단과 함께 지난달 27일부터 6일간 140년 전 시작된 선교 역사의 흔적을 따라 미국 동부 지역을 순례했다. 1908년 2월 윌리엄 전킨(1865~1908) 선교사가 선교지 전주에서 풍토병으로 별세할 때 남긴 말을 딸 메리는 이렇게 전했다. 지난달 31일(현지 시각)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전킨 선교사의 모교인 유니온 장로교 신학교. 선선한 바람 아래 햇볕은 따뜻하고, 단풍물이 듬뿍 든 나무들 사이 건물이나 집 앞에는 알록달록한 핼러윈 장식물들이 놓여 있었다. 붉은 벽돌 건물 신학교 도서관 깊숙한 곳에 사료관이 있다. 사서는 레이놀즈(1867~1951) 선교사가 번역한 성서와 당시 선교사들의 서신이 담긴 영인본 책자 등 가지런히 놓인 자료들 사이에서, 전킨의 죽음을 전한 딸의 편지글이 담긴 팸플릿을 들어 보여줬다. 판사의 손자, 목사의 아들, 훤칠한 키에 맑은 테너로 성가를 부르면 홀리듯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전킨. 그는 1892년 11월 조선에 도착해 1893년 전주, 1896년 4월부터는 군산을 중심으로 조선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1894년 11월 큰아들 조지, 1899년 1월엔 넷째 아들 시드니가 풍토병으로 사망했고, 1903년 4월엔 다섯째 아들 프랜시스가 생후 20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 아들을 조선에서 모두 풍토병으로 잃어 조선 땅에 묻어야 했던 것이다. 참척(慘慽)의 통한을 가슴에 품고도 전킨 부부 선교사는 1903년 남학생들을 위한 영명학교(현 군산 제일고)를, 1904년 군산 여학교를 세웠다. 콜레라 등 전염병이 돌면 몸을 던져 환자를 돌봤고, 거리에 넘쳐나는 고아들을 거둬 먹이고 길렀다. 본인도 원체 병약한 체질이라, 남장로교 선교본부가 그의 건강을 걱정해 군산을 떠나 전주 시내 반경 6마일 안에서만 사역하도록 명령했다. 딸은 “그때 군산의 성도들이 아버지가 떠나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서고, 서울과 미국으로 전보를 보내 군산에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할 만큼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고 썼다. 전주에서 눈을 감을 때 전킨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참 좋군요. 저는 갑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그를 기억하기 위해 전주여학교는 전킨(한국명 전위렴)을 기념한다는 의미로 이름이 ‘기전(紀全)중·여고’가 됐다. 전킨 별세 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그의 이름을 새긴 직경 90㎝의 대형 종을 만들어 태평양 건너 그가 담임하던 전주 서문교회에 보냈다. 서울을 중심으로 연희전문학교와 배재학당 등을 세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직후 호남과 충청에서 활동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다. 전킨은 군산에서 시작해 호남 지역에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워 부모 잃은 아이들과 아픈 사람들을 돌보며 미국 선교 역사에서 ‘7인의 선구자(frontier)’로 불린 남장로교 선교사 일곱 명 중 한 사람이었다. 남장로교의 본산 유니온 장로교 신학교 도서관에는 한국 선교사들의 자료도 풍부하게 소장돼 있다. 1891년 10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들어온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신학생 대상의 해외 선교 지원자 모집 집회에서 조선 선교를 독려하는 연설을 했다. 막 밴더빌트대를 졸업하고 에머리대에 진학한 윤치호(1865~1945)도 함께였다. 이들이 환등기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한 미지의 선교지 조선의 모습이 미국의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이들 중에 유니온신학교의 레이놀즈와 캐머런 존슨, 매코믹신학교의 루이스 테이트가 있었다. 레이놀즈는 전킨의 친구였다. 곧 이들은 남장로교 해외선교실행위원회에 자신들을 조선으로 파송해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이들은 북장로교와 감리교가 기반을 다진 평양과 서울, 호주 장로교가 맡은 영남이 아닌 충청 이남과 호남 지방으로 왔다. 유니온신학교를 거쳐 버지니아의대에서 공부한 클레멘트 오언(1867~1909)은 1898년 목포에 도착해 목포와 광주에 진료소를 열고 한센인들을 포함해 환자를 돌봤다. 1909년 오언이 급성폐렴으로 사망한 뒤엔 로버트 윌슨(1880~1963)과 윌리 포사이드(1873~1918) 등의 의료 선교사들이 이어받았다. 조선인들도 외면한 한센인을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모습에 감동해 기독교인이 된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 최흥종(1880~1966)은 훗날 한센병 환자들을 도운 여수 애양원을 세운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했고, 광복 후 혼란기엔 여순 반란사건 당시 아들을 죽인 범인을 양아들로 거뒀으나 6·25 때 끝내 순교한 손양원(1902~1950) 목사가 일했던 곳이다. 유진 벨(1868~1925) 선교사 가문이 4대까지 선교사명을 이어간 곳도 호남 지역이고, 유진 벨의 진외증손인 인요한(미국명 존 린튼) 의원이 ‘순천 사람’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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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2
  • 현실을 뛰어 넘는 신앙과 신학
    ▲ 송훈 교수는 미국내에서 공산주의 논란이 벌어진 상황과 관련해 미국교회의 대응을 발제했다. ▲ 김동석 원장은 송훈 교수의 발제에 대해 대부분 동의했고, 발제에 대해 추가적인 연구가 진행되기를 희망했다. ▲ 조점숙 박사는 이날 토론회의 사회를 담당했다. 송훈 박사(명지대학교 겸임교수)는 아시아와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불길이 들불 번지듯이 퍼져나간 1920년대에 미국도 그러했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이웃국 공산주의국의 영향을 주고 받는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았지만 특이하게 미국은 자생적으로 보이는 공산주의사상의 현상이 보였고, 당시 미국교회와 국가, 정치계, 사회는 반공에 투철해 공산주의의 물결은 물리쳤지만 미국교회에서는 오히려 기독교보수복음주의적 경향이 퇴조하는 부작용도 있었다는 내용을 밝혔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은 지난 11월 7일 서현교회당에서 제 308회 월례발표회에 송훈 명지대학교 겸임교수를 발제자로 초청해 '미국의 공산주의 운동과 기독교의 대응'을 주제로 토론했고, 김동석 박사(믿힘연구원)를 논찬자로 초청해 대안을 도출하려 노력했다. ▲ 송훈 박사는 미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제 1, 2차 세계대전과 경제 대공황을 거치며,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미국에 확산되기 시작했다면서 미국 산업화의 상징인 디트로이트 등 공업 도시들의 노조를 중심으로 공산주의운동지의 메카로 자리잡았던 상황임을 설명했다. 미국의 공산주의운동은 결국에는 애국법과 같은 다양한 법안의 발효와 냉전시기 미국의 국긱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시민들의 인식이 확산되는 과정에 그 수명을 다 했고, 반공주의 또한 베트남전의 종전 및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중요하게 인식되면서 미국 정치사회계에서 자취를 감췄음을 밝혔다. 미국 공산주의에 대한 논쟁은 소련 공산당 등과의 연계에 의한 코민테른적 영향의 발생인지 아니면 자생적인 것인지, 미국인들의 삶 또는 역사적 진보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미국의 국익에 해를 끼쳤는지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유럽에서의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 등 새로운 경제체제에 대한 논의가 불타오르는 반면 미국에서는 세계 그 어느 나라도 꿈꿀 수 없었던 놀라운 산업의 성장이 이뤄졌다고 한다. 헨리 포드(Henry Ford)는 1895년에 네 대에 불과했던 자동차를 1917년 경 5백만대를 만들어내는 등 미국 경제는 수많은 거대기업이 등장하는 등 1930년 경에는 전 세계 총생산의 34.6%를 담당했을 정도로 경제강국으로 도약했던 상황임을 설명했다. 미국의 산업발전시기 전세계인들에게는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었기에 이민자의 천국으로 불릴 정도의 수많은 이민자가 뉴욕의 항구로 입국했지만 그 거대자본의 현실은 수 많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졌던 신기루였음을 알게되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열악한 노동현장과 부의 지나친 편중현상은 자본주의 미국에 또다른 대안이 필요하다는 대중적 인식이 고개를 들고, 미국 사회당(Socialist Party of America)의 설립과 이후 진행단 선거들에서 예상 외 성과를 이뤘고, 여성운동가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얻는 등, 미국이라는 토양은 공산주의운동이 시작되기 아주 적절하게 변모했다고 한다. 러시아의 왕정이 무너지고 공산혁명이 시작되면서 세계 각지의 사회주의자들은 이 혁명의 깃발 아래 동참했지만 자본주의의 선도국인 미국에서 드러내놓고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여전히 따랐다고 한다. 미국 법무부는 미국 내 공산당의 창립 다음해인 1920년부터 대대적 이민자 단속을 해 6천 명에 달하는 불온한 외국인을 추방했고, 일명 고산당과 급진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적색공포가 본격화되기 시작 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당시 전세계적 대공황 속에서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고, 1920년 미국 공산당(Communist Party USA)가 공식적으로 출범,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연대(Popular Front)를 결성해 노동운동의 선봉에 섰다고 한다. 이 연대 속에는 미국의 급진적 민주주의 당원들도 참여하며 정치사회적 영향력도 확대했는데 미국의 좌파 정치인과 문학인, 산별노조연합을 통해 대중적 인기를 얻는 등 1930~40년 중반 경 당원의 숫자가 8만에 달할 정도의 급격한 성장을 달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1939년 독일 히들러와 소련 스탈린이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으면서 파시즘에 대항한다는 인민연대의 고리가 약화(공산당의 가장 큰 친구가 파시즘인데 파시즘으로부터 배신 당함) 되어서 다수가 공산당을 떠난 결과를 맞았다고 설명했다. 미국 공산주의가 유럽과 다른 점은 이민자와 흑인 등 차별받는 계층이 대거 투신했다는 점이고, 발생에 있어 내재적 동기를 가졌고, 노동권과 여성참정권, 흑인 인권 같은 미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공헌한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인식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형제단(Africa Blood Brotherhood, ABB)가 가장 미국 공산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공산당으로서의 활동을 통해 백인과 흑인이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이념적 목표를 갖고있다는 경험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tional Associac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 1909년 설립)는 인권과 시민권을 확장하고 차별을 없애고 흑인 등 유색인종의 복지와 교육 등을 실천하고자하는 단체로서 시민단체간의 연대를 추구해왔지만 흑인 공산주의자(Black Bolshevisem)라며 흑인들에 대한 이념적 탄압과 오해를 받게 되었기에 공산주의 이력이 있는 지도부 인사들을 배척하고, 운동의 노선을 반공자유주의로 전환하면서 공산주의적 주장은 거부하면서도 비공산주의적 진보적 주장과 운동에는 협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고 한다. 송 박사는 미국이 반공활동이 메카시즘을 시초로 보기도 하지만 이미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라면서 이 시기 급진적 인사들에 대한 감시가 이미 합동법률조사위원회가 실시했고, 그로 인해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적 공포가 시작된 후 국내에 애국주의와 반공주의가 휩쓸게되는 계기였다고 설명했다. 미국적 상황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은 정부 외에도 민간과 종교 등 다양한 주체들이 실천했고, 헐리우드 등 문화계와 공직사회 등 모든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조셉 메카시 상원의원은 상원 상임 조사 분과위원회 의장이 해외 방송국과 국방부 등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고, 대상자에 대한 공격과 모욕주기는 수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고, 연방정부의 항구 노동자는 웨이터였던 로렌스 파커를 포함해 3800명이 실직하기도 했다는 설명이다. 이런 메카시즘의 공공영역에서의 위력은 대법원과 판사들이 눈을 감음으로서 갖게 된 것이며, 때로는 반공주의 노조가 경쟁관계의 좌파 노조를 분쇄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고, 때로는 증거가 조작되기도 했지만 큰 틀에서 미국인들은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을 위험하게 한다는 믿음을 갖고, 메카시즘이 견고하게 구축되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다. 미국 기독교교회 상당수는 공산주의에 대해 철저한 반공의 입장을 취한 편이었다고 평가했다. 미국 가톨릭은 개신교 제국인 미국에서 가톨릭의 신학과 신앙체계를 미국화하려 하는 큰 과제를 갖고있었고, 반공의 열풍은 미국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충성을 입증할 계기가 되었고,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은 염려의 시대에 대항하는 가톨릭교회의 생존과 연관되어 있던 상황임을 설명했다. 이들은 위기의 극봉 방법을 안정적인 가정과 공동체의 연대라고 믿었고, 공산주의가 그 기반을 약화시키는 존재이기에 반공을 통해 종교적 신념을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30년대 교황 파이우스 11세는 공산주의를 무신론으로 교서에서 규정하는 정도였지만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빈곤에 대한 적극적 대처를 주문하면서도 이 노력들이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다름을 드러내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미국 개신교회는 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애국주의적 정서가 강하게 조성되었고, 특히나 소련의 부상과 한국전쟁은 그간 기독교가 충돌하고 있던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증오와 대응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전미복음주의협회(1942년 창립)는 미국 복음주의의 주요한 목소리로 빠르게 자리 잡았고, 강력하게 반공주의적 입장을 옹호했으며, 공산주의는 무신론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기반을 가졌기 때문에 기독교신학과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고 한다. 빌리 그레이엄 같이 복음주의협회는 공산주의가 신에 대한 부정과 종교적 자유를 억압할 것으로 봤고, 미합중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지지했고, 반공의 시대에 아이젠하워와 같은 기독교가치를 국가 결속을 위한 이념으로 받아들였던 정치인과 연대해 적극적 반공주의운동을 기울였다고 한다. 복음주의협회는 기관지를 통해 공산주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념적 갈등에 관한 기사들을 주로 실었다고 한다. 미국 NCC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의와 같은 공산주의 이념이 제기한 사회적 비판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등 신학적 관심사는 가난과 억압받는 자들을 돌보라는 개념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체계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고, 사회정의에 대해 집중하는 행태는 비평가들로 부터 공산주의적 이상에 동정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들만의 원치과 믿음에 대한 헌신을 지속적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공산주의를 기독교와 협치할 수 없는 이념이라고 규정했고, 참 기독교인은 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등 공산주의에 대항하면서도 교회가 자본주의시스템의 문제점 또한 성찰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앞서 서술한 미국 종교우파들이 정치, 문화, 행정적 측면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지만 알스트롬은 저서 「미국기독교사」에 이 시대를 '국민적인 신뢰, 애국적인 이상주의, 도덕적 전통주의가 동요되던 시기'였다고 평가 했지만 청교도의 유산 위에 세워진 개신교 제국 미국이 마지막 숨을 쉬던 시기로 묘사했는데 이 때 미국은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로마에서는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 바티간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주도한 시기였다고 송 교수는 설명했다. 게다가 1960년대 대법원에스는 스코프스 재판(1925년 미국 내에서 금지된 진화론교육 관련)이 진행 되는 등 다양한 미국을 상징하던 '관습'이 철폐되는 판결이 잇달아 벌어지는 등 대법원의 판결과 진보주의의 영향, 에큐메니컬 운동의 국제적 연대 가운데 전통적 개신교회를 지향했던 새로운 세력이 구축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는 종교우파들이 보기에는 전통적 윤리 관념이 무너지던 시기였지만 행태적으로는 에너하임의 'Big A 경기장' 대형집회, 제리 폴웰 목사가 보수적인 기독교연합을 조직,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선거에서의 지지, 여성평등권에 대한 ERA수정안에 대한 공격, 공화당과 연합해 윤리적 가치 변호 등 큰 활동을 실시했지만 송 교수는 미국 기독교에 대해 좋은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송훈 교수는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가 연합한 종교우파운동의 영향에 대해 데니얼 K 월리엄스는 투쟁적인 종교교우파 운동의 세기는 종말했다며 이로 인해 젊은 복음주의 성도들이 등을 돌렸고, 주류 미국인들에게도 큰 호응이 없다고 평가했음을 밝혔다. 몰리 위덴은 권위의 상실은 반지성주의에 기반한 고립적 사고 때문이라고 성찰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고통받는 자를 보살피는 기관을 설립하며, 지적인 호기심을 포용해주는 '복음주의적 상상'을 제안했다고 한다. 송훈 교수는 21세기에도 이 종교우파운동이 새로운 전환시기를 맞아야한다며 복음주의학자들을 중심으로 비판적인 성찰을 흘러나오면서 동성애와 낙태, 반공주의에 대한 집착보다는 다양한 제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목소리를 높여야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그런 제안들은 극단적 갈등을 겪는 미국사회에서 큰 힘을 받지 못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그런 제 문제들은 2024년 미국 대선에서 등장해 떠들썩해보이지만 이미 오랫동안 제시되었던 것들이 다시 충돌하는 것 뿐으로 평가했다. 송훈 교수는 2024년 미국 대선은 미국을 넘어 한국의 복음주의교회가 우리 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기회로 삼아야한다고 제안했다. ▲ 김동석 박사(믿힘연구원 원장)는 송훈 교수의 논문에 대해 논찬하면서 주제 발제자는 한국인들이 많이 알지 못한 미국 내 공산주의 움직임과 이를 대응한 정부와 민간, 교회의 모습을 알려줌으로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미국에서 발생한 공산주의적 움직임은 발제문에서 모두 산화해버린 것처럼 기술되었지만 만약 히틀러를 반대하다가 희생 당한 본 훼퍼 목사가 죽지 않고 오랬동안 생존해 영향을 미쳤다면 아마도 지금의 우리 목회자들은 공산주의적인 목회를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들 정도로 대단한 주제였기에 한국의 교회들은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주 발제자의 논문작성에서 기술적으로 한국어문법을 정확히 사용하고, 글의 전개가 주제지향적인데 연대기적인 흐름이어서 약간의 혼돈을 초래 할 것이 우려되는 정도가 눈에 띄며 전반적으로 훌륭한 연구와 발표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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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9
  • 노벨상으로 하나님 구원 더 멀어져"…한강 '목사 삼촌' 편지
    노벨상으로 하나님 구원 더 멀어져"…한강 '목사 삼촌' 편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삼촌인 한충원 목사가 조카에게 장문의 공개편지를 남겼다. 대전의 한 교회 담임목사로 있는 한충원 목사는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에게 보내는 삼촌의 편지’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 한 목사는 “사랑하는 조카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면서도 “노벨상 수상으로 인해 오히려 형님 집안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더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조카의 작품에 대한 평가로 한국 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형님 집안과 아예 단절된 상태에서 조카의 연락처를 전혀 몰라 불가피하게 공개편지를 보내게 됐다”며 “조카와 나의 단절도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미워하고 배척하신 형님에게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목회자의 사명감으로 이 편지를 공개한다”며 한강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의견을 늘어놨다. 한 목사는 “『채식주의자』에 대한 외설성, 청소년 유해성 논란과 관련해 형부·처제의 관계 및 장면 묘사는 충분히 비판받을 만하다”며 “D H 로런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그런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묘사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절제력과 분별력이 약한 청소년들에게 읽혀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에게도 추천하기가 두려운 작품으로 여겨진다”고 강조했다. 한 목사는 한강의 다른 소설 『소년이 온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등과 관련해 “제주 4·3사건과 6·25 한국전쟁은 이념 대립의 비극적 산물이고, 5·18은 독재정권 재탄생에 반대하다가 확대된 비극적 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건을 한쪽의 관점만으로 평하는 듯한 시각을 작품에서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는 문학 작가도 이념이나 지역 갈등을 부추겨 정치 이익을 얻으려는 정치인의 세몰이에 영합하는 듯한 작품을 쓰지 말고 공평한 자세로 써야 한다”며 “과거의 상처를 헤집지 말고 양쪽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카는 마치 대한민국이 정의롭지 못해 살 만한 나라가 아닌 것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작품을 몇 편 쓴 것으로 알고 있다”고도 했다. 끝으로 한 목사는 “내가 지금까지 조카에게 한 말들이 조카의 마음을 아프게 찌를 것을 생각하니 나도 이 편지를 쓰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며 “‘빛을 찾고 싶다’는 조카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위대한 작가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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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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