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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천주교 행사 조직위 이사를 맡은 이유는…
스님이 천주교 행사 조직위 이사를 맡은 이유는… “종교 간의 화합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지요.” 15일 경기 남양주 성관사(대한불교조계종)에서 만난 주지 성진 스님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조직위원회(위원장 정순택 대주교)’ 이사를 맡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창설한 이 대회는 교황도 참석하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가톨릭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국제 행사. 한국 천주교는 대회 준비를 위해 지난달 중순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에서 조직위원회 창립식을 열고 이사진을 선임했다. 성진 스님은 현재 선임된 이사 중 유일한 비 가톨릭계다. 성진 스님은 “그동안 신부, 목사, 교무(원불교) 등으로 구성된 만남중창단 활동을 통해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것을 좋게 본 것 같다”라며 “종교와 세대를 뛰어넘는 온 국민의 축제로 만들고 싶다는 취지에 공감해 참여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은 외국처럼 큰 사회 문제로 비화 되지는 않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더 종교적인 이유로 인한 갈등과 마찰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때 공항, 기차역 같은 공공장소에 설치된 트리를 잘 보면 십자가가 없어요. 대신 별이 달렸지요. 공공기관이 왜 특정 종교를 홍보하느냐는 항의가 심하거든요. 이슬람 사원 건립을 놓고 마찰을 벌이는 곳도 있고요. 지금부터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점점 더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진 스님은 “사회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되면 안 되지 않겠느냐”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인들부터 벽을 허무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의 하나로 성진 스님 등 만남중창단은 26~27일 미국 뉴욕 UN 본부 처치센터(Chuch Center for the United Nations)에서 열리는 제5차 국제평화회의(2024 ICCGC-CoNGO)에서 평화와 종교 간의 화합을 노래한다. 또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는 버스킹 공연을, 뉴저지 사찰과 한인 성당에서는 청년들과 토크 콘서트도 갖는다. 성진 스님은 “종교 간 화합의 첫걸음은 목사·신부·교무·스님 등 각 종교인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라며 “4대 종교인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제가 타 종교 행사에 참여해 돕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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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뒷마당에 온 걸 환영해"…美교회가 땅 내놓는 속사정
"신의 뒷마당에 온 걸 환영해"…美교회가 땅 내놓는 속사정 최근 미국에서 교회 등이 시설 부지를 저소득층 주택 건설에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와 대조적인 종교단체들의 이같은 움직임을 외신들은 '이그비(YIGBY·Yes, In God's Backyard)'라고 부르고 있다. "신의 뒷마당에 오는 걸 환영한다"는 의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미국 온라인 매체 복스에 따르면 이그비 현상은 미국의 저소득층 주택 부족과 교회 공동화 현상이 맞물려 나왔다. 지난 10년간 미국 집값이 42% 오르면서 저소득층의 내 집 마련은 '그림의 떡'이 됐다. 수요는 늘고 있지만,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은 700만호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 내 종교 단체들은 신자 수가 줄고 있는 상황이다. 미 공공 종교연구소에 따르면 1999년 당시 미국인의 70%는 예배 등 종교 활동을 했으나 2020년 이 비율이 47%로 줄었다. 여기에 코로나 19의 여파로 신도 상당수가 온라인 예배를 택하면서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 결과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미국인 비율은 31%에서 24%로 줄었다. 교회 입장에선 대규모 시설을 유지할 필요가 줄었단 얘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교회의 65%는 코로나 이후 헌금이 줄어든 반면, 시설과 주차장을 유지·관리하는 비용은 늘고 있다고 복스가 전했다. 때문에 미국에서 종교시설 3분의 1이 향후 몇 년 안에 문을 닫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복스는 "10만곳이 넘는 교회·유대교 회당·모스크가 문 닫는 것"이라고 전했다. 교단 한 곳, 워싱턴 DC 절반 크기 부지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만 해도 일부 교회는 부동산을 수백만 달러에 매각해 이득을 봤다. 하지만 현재 대다수 종교단체는 매수자를 찾지 못해 '급매' 간판을 내거는 처지다. 이에 종교단체들은 비영리 단체, 지자체 등과 협력해 활용도 낮은 부지에 저소득층 주택을 짓는 프로젝트에 뛰어들고 있다. 샌디에이고 흑인 교회인 베델 AME의 하비 본 수석 목사는 재향군인·고령자를 위한 주택 건설에 교회 부지를 제공하기로 하고 지난해 기공식을 했다. 교인 650만명을 거느린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교회(COGIC)'의 경우, 보유 부지 면적만 2만1000에이커(약 84㎢)로 워싱턴 DC의 절반에 달한다. COGIC 측은 성명에서 "저소득층 주택 건설은 교단 사명의 핵심 부분이다"고 밝혔다. 농구선수 출신의 사업가인 매직 존슨, 영화배우 덴젤 워싱턴 등 유명 교인들이 프로젝트에 수백만 달러를 보탰다고 이코노미스트가 전했다. 이전 2000만원 VIP루트 나왔다…"대선 전, 넘자" 美국경 몰린 중국인 지역 사회 차원에서도 주택·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 단체와 윈-윈(win-win)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에 미국 각지에서 이그비 현상과 관련한 법안이 최근 발의됐거나 검토 중이다. 복스에 따르면 지난 3월 주택·도시 문제 위원회 위원장인 셰로드 브라운 상원의원(민주·오하이오)은 의회에 이그비 법안을 제출했다. 부지에 저소득층 주택을 짓는 종교 단체에 보상금을 주며 독려하는 내용이 골자다. 브라운 의원은 "미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저렴한 집을 구하는 건 너무 어렵다"면서 "법안을 통해 교회·사원·유대교 회당 등 종교 단체 부지에 저소득층 주택을 세워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는 (종교적인) 신앙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캘리포니아·애틀랜타·샌디에이고 등에서 비슷한 법안이 통과했고, 메릴랜드·뉴욕·버지니아도 관련 법안을 검토 중이라고 외신들이 전했다. [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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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CK 시국회의' 구성 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종생 목사, 이하 NCCK) 실행위원회는 산하의 프로그램위원회인 '정의평화위원회'와 '화해통일위원회'가 'NCCK 시국회의' 구성 건의 안을 지난 7월 25일 정기실행위원회에 상정했으며, 표결로 가결됬다. 발족 기자회견과 시국토론회, 시국기도회 등의 활동계획이 공개되었으며, 동 안건에 대해 원안 대로 가결하자는 측과 프로그램위원회의 설치 목적이 존재하므로 위원회 차원에서 노력하면 된다는 의견, 위원회를 넘어 NCCK 전체의 활동으로 하기는 여러 이유로 부담이 있다는 의견, 현재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준비로 여유가 없다는 등 다양한 논의가 장시간 진행되었지만 표결 결과 시국회를 구성키로 했다. 한편 실행위원회는 지난 회의에서 의결정족수가 부족해 다루지 못했던 헌장세칙 개정안을 가결했고, 추가 경정 예산안과 교회협인권센터(이사장 이승렬 목사)가 요청한 명칭변경을 위한 대화위원회 구성의 건 등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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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연구 기틀 개척 공로
▲ 민경배 박사는 이날 토론회에 참여해 교회사학 연구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사)국제독립교회연합회(총회장 정인찬 목사)와 웨이크사이버신학원은 제 3회 웨이크사이버신학포럼을 지난 5월 20일 CTS아트홀에서 '한국교회사에서 바라보는 역사신학자 민경배 박사'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민경배 박사는 1972년 한국기독교회사를 발간함으로서 한국교회사의 연구와 교육분야의 체제와 틀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이날 한국의 교회사 연구에 권위자로 평가 받고 있는 이상규 박사(전 고신대학교 부총장)와 박명수 박사(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등이 발제자로 초청되어 민경배 박사의 생애와 학문, 민족의 이해, 내연과 외연으로 구분한 교회사 서술구도 등을 거론했고, 대체로 한국교회사의 기초부터 성숙단계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기여를 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 정인찬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총회장은 토론회 주최자로서 이날 교회를 위한 좋은 대안이 되기를 기대했다. ▲ 정인찬 박사(국제독립교회연합회 총회장)는 동 교단과 웨이크사이버신학원이 민경배 박사에 대한 토론회를 진행하게 됨은 한국교회에 크게 도움이 될만한 일이라면서 이 자리에서 논의된 내용들이 복음전파에 획기적 기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좌로부터 박명수 박사, 민경배 박사, 류금주 박사, 이상규 박사. ▲ 이상규 박사는 생애와 학문의 개괄 발제를 담당했다. ▲ 이상규 박사는 '민경배 교수의 생애와 학문'을 주제로 발제했다. 이 박사는 민경배 박사는 스승인 백낙준 박사의 계보를 잇는 제 2세 학자라고 평가하고, 한국교회사 학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라고 정의했다. 그가 한국에서 교회사연구를 개척했고, 오늘날 교회사학의 발전에 초석을 놓은 학자라면서 한국의 신학도와 목회자 중 민 박사의 책을 한 권이라고 접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는 1934년 6월 22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읍내리 212번지에서 출생했고, 그의 아호인 '솔래'는 송천리의 솔래(松川)에서 취한 것으로 유추했다. 민 박사는 해방 후 월남해 서울에 정착해 1952년 3월 중앙고등학교를 졸업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20기로 입대해 종군했지만 부상으로 22개월 후 명예 제대했다고 설명했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수학하며 1956년 3월 졸업 후 동 대학원에 진학해 1958년 3월 석사학위를 취득, 스코틀랜드 에버딘대학교 신학부에서 수학하며 마가렛 크리스티나 상을 수상하는 등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동 대학원에 진학 1962년 5월 졸업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귀국한 민 박사는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해 신학대학원 과정에서 수학해 1965년 3월 졸업했고, 1967년 11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이상규 박사는 설명했다. 민 박사는 목사안수 후 이미 교수가 되었지만 영국 런던대학교 신학부로 유학해 1969년 8월 졸업했는데 이 때 로버트 토마스 목사(Rev. Robert Jermain Thoma)를 연구해 조명(민 박사는 이 연구를 통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와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던 토마스 목사가 웨일즈 출신이며, 에딘버러대학교 뉴칼리지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순수한 선교의 열정으로 인한 순교였다는 점을 밝힘)했고, 귀국 후 연세대학교의 교수직을 감당하던 중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에서 1984년 3월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민 교수가 1958년 3월 연세대학교에서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대학원 졸업과 동시 불과 24세의 나이로 부산 분교의 전임강사로 임용된 것이라고 밝혔다. 민 박사는 1958년~1999년 8월까지 41년간 교수직을 감당했고, 연세춘추 편집 및 주간, 교목실장, 기독교문화연구소장, 신학대학장 등 보직을 맡았다고 밝혔다. 1984년에 4년간 교무처장, 1988년 4년간 및 1994년 2년간 연합신학대학원장, 1999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정년으로 은퇴하며 명예교수로 추대, 2002년 3월 서울장신대학교 제 2대 총장으로 4년 후 2006년 퇴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 초빙되었고,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원장과 명예원장, 고문 등을 감당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노력하는 중이라고 평가했다. 이상규 박사는 「한국기독교회사」 및 「한국민족교회 형성사론」, 「교회와 민족」 등 50여 권의 저서, 「에큐메닉스」 등 7권의 역서, 1975년 3월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이 발간하는 「신학논단」에 '루터의 내적 발전과 그 신학적 계보'를 발표 한 이래 17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민경배 박사의 학문적 발자취를 설명했다. 민 박사는 백낙준 박사와 더불어 1966년에 '한국교회사학회'를 조직해 한국에서 가장 오랜 신학회로서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고, 1993년에는 연세교회사학회를 조직해 이 모체를 통해 1997년 6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을 거쳐 명예 원장 혹은 고문으로 지속적인 후학 양성에 주력 중이라고 밝혔다. 학회 활동 외에도 서울YMCA연맹 이사 혹은 부이사장으로 활동, 기독교백주년기념사업회 혹은 순교자기념사업회 등에 관여하거나 학술적 자문 활동, 해외 강연에서의 강좌, 국제학술회 참여 등의 다양한 활동을 수행함으로서 교회의 교사(doctor ecclesiae)로서 일생을 살았다고 평가했다. 이 박사는 민 박사의 교회사연구에 대해 한국교회사 분야를 넘어서는 영향력도 있었지만 특히 한국교회사의 전 영역의 다양한 주제를 연구 및 개척했고, 국내외 각종 도서관이나 역사관, 고문서관를 섭렵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의 저술목록은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 선교, 예전, 인물, 기구, 교파, 민족 혹은 독립운동, 외교와 국제관계, 역사인식과 방법론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거나 개척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연구되지 못했던 여러 분야를 선구적으로 연구했고, 한국교회의 기원부터 해방 이후 교회 현실의 문제까지 연구와 재 해석, 사실규명, 사실의 의미 석명 등을 진행했는데 예를 들면 민경배 박사가 연구했던 '로버트 토마스: 한국 초기 선교사의 한 유형과 동서 교섭의 문제' 등이 그러하다고 밝혔다. 한국 기독교의 시원을 서구형 기독교와 미국형의 교파형 선교로 설명하거나 역사환경과 신앙행태의 구조적 차이를 석명하는 역사지리학, 한국교회 찬송가사, 기독교 신앙과 민족문제에 대한 접근 등의 연구방법론은 모두 민경배 박사가 개척한 분야라고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 저 「교회와 민족」에 수록된 '한국 근대 문화와 기독교의 형태 및 그 영향범위'를 이 박사는 살피면서 기독교 접촉의 단계를 넘은 수용 및 토착화의 과정을 연구한 선구적 연구형태였고, 여기서 서북형(黃平道, 체제에서 소외된 서북지방 특유의 종교적 심정)과 기청형(畿淸, 京忠道, 유교 양반의 지식인 계층의 존왕적 충성)이라는 두가지 신앙 형태 혹은 수용 배경을 제시하고, 이것을 민족운동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했으며, 이런 구분은 이미 송창근과 김린서 등에서 보이지만 민 박사는 이를 실증적으로 체계적으로 도식화했다는 공로를 이 박사는 설명하면서 이런 분석의 틀 자체가 선구적 시론이었고, 후학들의 발전적 연구의 토대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민 박사의 저술 「한국기독교회사」는 한국교회 역사 최초의 교본적 통사였으며, 여러 신학교육기관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는데 1968년 출간해, 1972년 증보판, 1982년 개정판, 1993년 증보판, 2007년 순한글판으로 발간되는 등 결국 690쪽의 대작으로 발전되었다고 밝혔다. 이전에도 이런 류의 연구를 백낙준, 김양선, 정인과, 장정심, 변종호 등이 진행했지만 한국기독교회사의 체계적 통사로서는 볼 수 없었고, 민경배 교수의 것은 근대 이전의 기독교의 접촉부터 한국전쟁과 1960년대까지의 한국교회사에 대한 체계적 최초의 통사였다고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가 민족교회 또는 민족교회론을 주창함으로서 당대 주류였던 선교확장사에 대한 반대급부가 되어 논란이 되었고, 민족이라는 말에도 어감상 오해를 받았던 부분들이 있었다고 이상규 박사는 밝히고, 민 박사는 한국교회를 '민족교회'로, 한국교회사를 '민족교회형성사'로 인식함으로서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주체적으로 기술했다고 평가했다. 민 박사 이전의 기존 한국교회사의 연구는 '선교사적' 연구로서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가 주체가 되고, 파송국의 자료를 의존한 역사기술이었지만 민 박사는 선교사 파송국 교회의 연장이 아닌 우리가 주체가 되어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민족교회사'로서 인식했고, 이는 새로운 연구접근방식이고 독창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민 박사의 '민족', '민족교회', '민족교회 형성론'은 배타적 민족주의나 문화민족주의, 혈통에 근거한 개념이 아니라 언어나 역사, 문화,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민족공동체로서의 교회이며, 역사와 고난을 함께 공유한 교회라는 점에서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민 박사는 각기 다른 선교부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어도 교파 중심의 교회가 아닌 민족공동체의 하나의 연합된 교회를 민족교회로 파악하고 있고, 탈 서양 선교사를 지향하되 친일로의 경도가 아니며, 친 동향을 지향하되 반 선교사로 경도되지 않는 성격이라고 이상규 박사는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의 교회관은 '신도들의 세계적인 공동체'라는 개념을 상정하고, 기독교회사는 그리스도라는 뚜렸한 역사상의 인물과 교회라는 신도들의 세계적인 공동체, 사(史)라는 현저한 개념들을 다루고 있으며,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도, 완전할 수도 없다는 명제 속에 어느 한 측에서 반대측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무리하며, 완전할 수가 없을 수 밖에 없는 특정 논리를 들이대며 교회분열을 일삼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고 분석하고, 민 박사는 순결과 연합이라는 두 축의 선택상황이라면 연합에 더욱 의미를 둔 것이라고 이 박사는 밝혔다. 한국교회사를 다루며 '외연과 내연'이라는 신앙현상학을 개발해 역사연구의 틀을 제시한 것이 민경배 박사의 가장 특별한 공로라면서 그가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기간 동안 순수한 신앙의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민족운동과 도덕운동, 사회변혁운동으로 나타나 한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는 역사의 틀이라고 이 박사는 정의했다. 이 연구 틀은 한국 뿐 아니라 모든 나라와 시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원리라고 했다. 그의 저서 「민족과 교회(1981년)」 등에 게재된 논문들에 '내연과 외연'이라는 상관구조를 해명하ㅁ녀서 1903~1907년 한국교회 부흥은 신앙의 내연 구도였고, 1919년 이래 민족독립운동으로 외연 되었으며, 또 다시 김익두나 이용도의 신앙부흥운동을 통해 내연화하고, 1935년 일제의 가혹한 군국주의적 전시체제 하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됨에 따라 마지막 저항으로 외연화 되는 구조인데 결과적으로 신앙운동이 민족운동의 동력이 되는 입체적인 해석방법이라고 이 박사는 일례를 들었다. 민경배 박사의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내연과 외연의 현상학은 기독교인의 현존과 존재 양식, 사회 참여 양식에 대한 역사적 실례를 제시하고, 즉 그리스도인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신앙고백적 삶을 추구하면 결과적으로 사회변혁적 역할도 감당하게된다는 연구의 흐름이라고 이 박사는 설명했댜. 이 외연과 내연의 연구방법론은 현재도 민 박사의 제자들과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에서 지속적으로 사용 및 적용하고 있는 방식으로 알려졌다. 이상규 박사는 논문의 말미에 "우리가 배워하 할 것은 그의 저술이나 학문적 결실만은 아닐 것이다..., 학문에 대한 열정, 진리에 대한 확신, 후학들에 대한 애정,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사랑"을 주장했으며, 실제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학술활동이 아닌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성도들이 모여 성경이 시키는 교제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지하고있다. ▲ 박명수 박사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발제를 담당했다. ▲ 박명수 박사는 '민경배 교수의 한국교회사학에 나타난 "민족" 이해'라는 제목의 발제를 담당했다. 박 박사는 민족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선 단어라고 전제하고, 민족 또는 민족주의는 한국적 상황에서 외세나 제국주의에 대칭되는 차원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공산좌경세력들이 미국을 향해 제국의 프레임으로 보고, 미국에서 온 서양 기독교 세력도 적대하려는 즉, 북한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미국을 중심한 서구문화의 전달자로서 한국 문명화에 앞장서면서 조국의 근대화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겼던 것이라고 박 박사는 평가했다. 부정적 측면으로서 좌측의 민족주의세력이 볼 때 한국교회는 민족주의에 대한 가장 큰 도전세력인 미국의 친미집단이자 반민족주의집단이라는 프레임이 형성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박 박사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원래는 개신교의 핵심 단어였다면서 기독교는 천주교와 달리 민족을 강조했는데 루터교가 독일민족주의와 손을 잡았고,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와 손을 잡는 한편 성경을 강조하느 개신교의 특징상 각국의 자국어성경을 사랑해서 개신교가 들어간 지역마다 민족의식이 함양되었다고 반박했다. 또한 민족은 한국적 상황에서도 우파의 단골개념으로서 빈부와 계급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개념으로서 서구제국주의에 맞서 국민을 단결시키는 용어라고 정의하고, 공산주의는 원래 민족을 부루주아의 용어로 이해하고, 무산의 노동자계급들이 주도하는 계급혁명의 완성을 진정한 해방이라고 주장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좌익은 계급이라는 단어보다는 민족이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계급혁명을 진행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차제에 우리는 한국교회와 민족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박 박사는 민경배 박사의 저작들에 나타난 민족 개념은 현재 일부가 통용하는 반제국주의적 이념 중심의 민족주의가 아닌 서구 기독교와 힘을 합해 민족을 부강케 만드는 현실적 개념으로서의 열린 민족주의였다고 분석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를 정리하는 차워에서 초기 한국교회사가 시도되었으며,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보고서를 중심으로 선교 역사를 정리했는데 이 같은 입장에서 초기 한국개신교사를 총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백락준박사였고, 그는 교회사는 근본적으로 선교사라는 입장에서 한국개신교사를 정리했다고 박 박사는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사를 선교사가 아닌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서술하려는 최초의 학자이며, 복음을 전해준 자의 자료 뿐 아니라 복음을 받은 자의 자료도 분석 정리했다고 박 박사는 설명했다.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을 논할 때 선교사들이 한국 민족교회의 주체가 되기는 힘들다는 한계가 있고, 그들이 한국 민족의 고통을 이해하더라도 우리의 정서를 대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박 박사의 평가다. 그렇다고 민 박가 선교사들을 배타적으로 평가한 것은 아니며,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 못하더라도 한국인의 편이지 일본제국주의의 편은 아니며, 이런 측면에서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은 "탈서양종교사(脫西洋宗敎史)하되 친일로 경도(傾倒)되지 않고, 친동양(親東洋)하되 반선교사로 기울지 않는, 강력한 탈권(脫圈) 에너지가 참된 의미의 '조선 민족의 교회'를 형성 해 나가는 저력"을 근본으로 삼고 있음을 밝혔다.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이 마치 기존의 선교사관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의 주된 비판의 대상은 소위 진보신학의 역사이해에 집중되어 있다는 평가를 했다. 민 박사의 저서 「교회와 민족(1982)」이 출판된 때 그 민족교회론이 활발히 전개되던 때는 한국 신학계에서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이 강하게 대두되던 때였고,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은 그러한 주장들에 의구심을 들어냈다고 박 박사는 밝혔다. 한국교회사를 보는 시각 중 일부가 민중사적으로 보려는 것은 조선 말의 권력 체제에서 소외된 농민층의 저항이던 동학혁명의 계승운동으로 간주하려하고, 이는 한국기독교의 사명과 역사를 민중의 저항의 한계에서만 가치를 인정하려할 때 민중의 저항력 결속의 한 에너지에 기독교가 동원되었다는 식의 주객 전도의 왜곡이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측면이라고 제시했다. 민경배 박사의 민족은 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민족공동체이지 어떤 특정 계급을 배제하려나 지칭하려는 계급공동체가 아니라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민 박사는 한국적 신학으로 한국교회사를 바라보려는 시각들에 지나치게 보수적인 시각을 갖은 나머지 한국교회사가 선교사들에게 굴종된 역사이므로 무가치하고, 새롭게 한국인의 신학을 만들어야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초기 한국교회사는 무의한 잘못된 역사로 보여질 것을 우려하는 측면도 언급되었다. 박 박사는 민경배 박사에게 민족교회는 선교사와 대칭 개념이 아니며, 그는 교회의 역사성과 보편성을 믿기에 교회론을 강조하는 이유도 되는데 그에게 교회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성례전에 참여하는 보편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의 민족교회론은 보편교회와 대칭되는 개념을 갖고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편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어떻게 한국교회가 주체적으로 소화했는가를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개신교는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미국 개신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가 제국주의적 선교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러한 고종은 이러한 당시 개신교의 선교사들을 등에 업고 조선 민족을 위협하는 세력들로부터 보호받으려고 했기에 한국 기독교를 서구 제국주의와 동일선상에 둠은 몰 이해한 일이라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박 박사는 진보주의적 교회사가들 상당수는 선교사를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교회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제국의 침략을 발견하려는 경향을 보였지만 사실 당시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아닌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침략에서 조선을 지켜줄 세력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에 대해 민경배 교수는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가 기여했다는 입장인데 민족주의라는 서구적 개념은 국민 각자가 주인 대접을 받는 민주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개신교가 조선에 등장하면서부터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에 거대한 에너지로 봤다고 박 박사는 평가했다. 조선의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방법은 스스로 전도하고, 자립하며, 통치하는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사용했고, 이것은 책임적 시민을 양성함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종교적인 것 외에도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교육과 경제 독립을 위한 실업교육에 앞섰는데 본래 자립적인 서북사람들은 기독교정신으로 무장해 민족산업을 형성함에 앞장 섰고, 이런 배경으로 근대적 의미의 시민의식을 진 민족운동을 벌일 수 있는 집단이 바로 개신교였고, 독노회를 1907년에 총회를 1912년에 조직함으로서 전국조직망을 갖춘 상태에서 3.1운동을 맞이해 전국적인 독립운동까지 기여했던 애국의식, 책임의식 등의 발로였다고 보는 것이 민경배 박사의 지론이었다고 박 박사는 평가하고, 민경배 박사의 민족교회는 체험적 신앙을 내연으로 해서 한국교회의 반경을 외연으로 확대해가는 복음주의적 교회임을 언급했다. ▲ 류금주 박사는 민경배 박사에게 교육받으며 습득한 교회사학 연구의 방법론을 설명했다. ▲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는 민경배 박사의 직계 제자로서 그에게서 수학했던 역사연구방법론인 '민경배의 한국교회사 서울의 구도: 신앙 내연(內燃)-외연(外延)'을 발제했다. 민경배 박사의 교회사를 보는 시각에서 내연(燃)은 불탄다는 것이고, 외연(延)은 이어지진다는 뜻으로서 이는 곧 신앙이 안에서 불타면 그 에너지가 반드시 바깥으로 나오기 마련이라는 구도라고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는 1934년 생으로서 당시에는 일제 치하로 나라가 없던 시절이었고, 출생된 해의 한국교회는 선교 50주년이었으며, 한국전쟁 때는 공산정권의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월남했고, 수도 서울에 정착해 교회와 조국의 근대화와 발전상을 모두 경험한 교회사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모두 경험한 교회사 박물관 급의 유능한 교회사학자라는 설명을 했다. 류 박사는 민경배 박사가 한국교회사학을 연구해 온 것은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로 개화기부터 근세, 현대까지 한국의 모든 역사와 문화, 학문에 영향을 미친 것은 기독교였음을 체험했고, 한국교회가 잘 됨으로서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 전세계에 밝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한국교회사를 연구함에 있어 복음과 교회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되었던 것이 큰 동기였다는 방향으로 발제를 이어갔다. 민 박사의 교회사에 대한 사상은 연세대학교에서 평생을 교회사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게 했고, 한국교회사학연구원(초대원장 민경배, 이사장 박옥선)을 지난 1997년 6월 창립해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교회사학을 연구하고, 신앙과 교회사를 기반한 교제를 진행해오기도 했으며, 동 연구원은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동북아 3국의 교회사가들을 모아 '동북아시독교사학협의회'를 구성해 10년간 교류해오는 등 사명을 감당했다고 류 박사는 회고했다. 민경배 박사는 11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역사방법론을 지난 2018년 약 1년간 연구발표했다면서 동 방법론은 정량론, 내연외연과 신앙현상학, 신앙지리학, 실체론, 그림처럼 아름답다, 질문-에듀스, 전역사체계화, 입체론, 유기역사론, 역사-시기 완충론, 역사-등거리론 등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류 박사는 실체론에 대해 사크라멘토 곧 성례는 예수그리스도의 역사 통치의 역사내 지점으로서 역사는 허상이 아닌 예수께서 실재 임하셔서 다스린다는 실체를 말함이라고 설명했다. 역사-등거리론은 역사는 하나님의 경륜의 집행 장소로서 각 시대와 각 존재에 독자적 사명을 분여하심으로서 역사를 경륜해가시는 것이며, 사명 받은 존재는 자신의 영역에서 주어진 사명과 기업, 자산과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다는 개념임을 설명했다. 한국교회사를 정리함에 백낙준 박사는 선교사관, 주재용 박사는 민중사관, 민경배 박사는 민족사관이라고 구분하고, 선교사관과 민중사관은 선교의 입장 또는 민중의 입장으로서 사관을 정해놓고 고찰하는 연역적 측면이 있고, 민경배 박사는 연구해보니 신앙과 함께 민족이 각 시대의 실체로 부각되었다는(1880~1960년대 한정) 귀납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류 박사는 분석했다. 정확히는 민경배 박사의 민족사관은 민족교회사관으로서 독자적인 것이 아닌 교회와의 관계에서 고찰되는 것이며, 그의 민족교회사관을 1960년까지 한정하는 이유는 그 '민족'이라는 말이 (특정 시대부터) 기독교회와 무관하게 사용되고, 용법 또한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교회사연구방법론에 수학적 단어인 '함수'라는 개념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류 박사는 이 역학 함수관계를 교회를 중심으로 4방향에서 선교사와 신앙, 일본, 민족, 초월적, 서양적, 동양적, 역사적 요소가 상반되게 위치하는 방식임을 설명했다. 즉 신앙은 초월적 차원에서 이해되고, 민족은 역사적 차원에서 이해, 친선교사는 반일을 전제하고, 친일을 포함한 동양적 기독교는 반선교사적 경향으로서 이를 요약하면 신앙과 민족이 상반되고, 선교사와 일본이 상반되는 방식으로 시간 내에서 교회와 신앙, 세상은 영향을 주고 받은 방식이라고 류 박사는 요약했다. 그 상호작용은 늘 교회와 민족은 한국사에서 초월적 신앙 차원에서도 묘하게 긍정적 교섭이 확인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내연과 외연의 상관관계에 있어 신앙이 안에서 불타오르면 자동적으로 바깥으로 영향이 이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신앙이 먼저 내면에서 불타오른다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은 신앙의 영역이었지만 시기적으로 을사늑약의 주권상실 시기였고, 신앙 자체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 번지는데 이 때 한국교회가 3.1운동을 주도하게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원점, 하나님께 대한 충성 그 자체는 역학상 결과적으로 일제의 국체에 대한 민족의 저항 에너지와 동일시되는 그런 관계라는 설명이다. 신앙의 현상학은 안에서 불타오른 신앙이 외연으로 번질 때 각자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현상화하는 것으로서 같은 신앙 에너지가 신앙운동자체로 발산도 하지만 때로는 도덕 운동, 민족 운동, 사회 변혁력으로 작동하는 것인데 故 주기철 목사는 독립운동을 외치던 사람은 아니었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함으로서 일본 제국의 핵심인 천황 숭배에 저항하고, 일본 정부의 국체에 정면 도전하는 '반일 민족주의자'로서 현상화한 그러한 관계라고 류 박사는 밝혔다. 민경배 박사의 역사관은 나무와 열매 중 나무가 우선하고, 신앙이 선행해야 실천이 이뤄지거나 안에서 신앙이 불타올라야 저절로 외부로 들어나거나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그 가지인 성도들이 자연히 열매를 맺는 내연과 외연의 구도, 직접성, 자동성 등은 지극히 성경적인 역사관이라고 류 박사는 밝혔다. 류금주 박사는 내연과 무관한 민족운동은 한국 교회사의 주류에서 사라졌고, 민족에 대한 주목이 1960년대까지로 한정한다고 해도 민경배 박사의 내연과 외연, 신앙의 현상학 등 다양한 교회사연구의 구도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여전히 적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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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 워싱턴DC서 창립 총회
▲참석자들이 창립대회 직후 예배실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창립대회 직후 행사장 밖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 워싱턴DC서 창립 총회 40여명 참석…공동 발기인에 20개 교단 소속 120명 참여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모임인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이하. 기평넷, Korean Ecumenical Peace Network)가 5월22일 워싱턴 디씨 소재 연합감리교 예배실에서 창립되었다. 이날 창립예배와 총회에는40여명이 참여했으며 공동 발기인에는20개 교단 소속120명이 참여했다. 북미 한인 기독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초대회장 김정호 목사(UMC)가 환영사를 하고 있다. 환영사에서 김정호 목사(UMC)는"남북 관계가 극단적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의 시작이 참 귀하다."고 밝히고"우리가 그동안 평화에 많이 목말랐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조국 한반도 평화의 그날이 오면 오늘의 이 모임이 작은 디딤돌이 되었다는 겨자씨 만한 기록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창립을 환영했다. 예배는 김대호 목사(PCUSA), 손태환 목사(PCUSA), 정영민 목사(RCA), 조동호 박사(퀸즈대) 등 연합 찬양팀의 인도로 힘차게 시작되었다. 이어 조원태 목사(PCUSA)의 사회와 김기리 신부(성공회) 박상희 목사(기장)의 축도로 이어졌고, 김정호 목사(UMC)가"다시 또 우물파는 사람들" (창세기26:12-35)을 주제로 설교했다. 이어서 발제 순서에서는 김충성 목사(제자회)가'북미 에큐메니칼 평화운동의 역사'에 대하여, 김진양 목사(UMC)는'북미 기독교 평화네트워크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김충성 목사는60년대 창립된 ‘북미기독학자회’와70년대 창립된 ‘미주 목요기도회’가 한국의 민주화, 인권, 평화통일 운동과 연대하여 기도하고 행동했던 역사를 소개했다. 김진양 목사는"북미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삼았으며 평화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밝히고"분단79주년을 맞이하는 조국이 미, 중의 패권경쟁과 핵무기 및 군비경쟁, 군사훈련 등으로 인해 대결과 갈등이 더욱 심화된 이 시기에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와 연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어서 진행된 총회에서는 정관과 창립선언문을 통과시켰고 초대 회장에 김정호 목사(UMC), 초대 사무총장에 조원태 목사(PCUSA)를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창립 발기인120명의 이름으로 작성된 창립 선언문에서는"그동안 기독교인들로서 정의와 평화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사명을 우리가 잘 감당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다짐한다"고 밝혔다. "하나, 우리는 북과 남 정부가 이전의 평화통일 정책으로 돌아가 대화와 협력에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 우리는 미국과 기타 강대국이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조성하는 대화와 정책을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 우리는 교단의 벽을 넘어 평화를 위한 연대와 협력을 이어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기평넷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미에서 기도운동을 펼쳐 나갈 것이며, 다양한 교단과 학계 그리고 단체들과 연대하여 평화를 위해 애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더불어 기평넷은 공동 발기인으로 참여한120명을 평화용사300명으로 확대할 것이며, 제2차 총회는 내년4월에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열기로 결정하였다. ▲초대사무총장 조원태 목사(PUCSA)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참여자들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참여자들이 연방하원 Bill Foster 의원 사무실에 찾아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대화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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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Focus] 휴스턴 대형 '레이크우드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
▲사진 왼쪽부터 트로이 피너 휴스턴 경찰서장, 조엘 오스틴 레이크우드 교회 목사, 존 휘트미어 시장, 사무엘 페나 소방서장이 11일 오전 레이크우드 교회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 후 기자회견에 참여하고 있다. [Religion Focus]휴스턴 대형 '레이크우드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 ‘달갑지 않았던 목사’ 아들에서 인기 설교자로…총격 사건으로 새 ‘스포트라이트’ 메가와트 미소 등 기독교 브랜드化…십자가·예수상 등 전통적 종교 상징 일체 없는 지구본 앞에서 설교 비평가들, “솜사탕만 있을 뿐, 고기는 없어‘ 혹평도 휴스턴, 텍사스(김정태 기자)-조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는 미국의 종교에서 가장 친숙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일요일 오전(11일 현지시간) 36세의 여성이 총기를 난사해 5살 소년과 50대 남성에 중상을 입힌 끝에 비번 경찰근무 경비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 한 휴스턴 대형교회(Lakwwood Church)를 이끌고 있는 목사는 메가와트 미소와 웨이브진 머리, 인기 있는 기독교 브랜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60세의 그는 이전 농구 경기장에서 매주 약 45,000명의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데, 텔레비전 설교를 통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오스틴은 아버지로부터 소명을 물려받아 신도들의 규모를 거의 5배나 늘렸다. 그의 저서 "Your Best Life Now: 7 Steps to Living Your Full Potential(당신의 최고의 삶 지금: 당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7가지 단계)"는 거의 300만부가 팔렸다. 닐슨 미디어 리서치에 따르면, 2000년대 중반에 오스틴은 미국의 어떤 설교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청했으며 전체 가구의 95%에 달했다. 수년간 그의 봉사는 백인, 흑인, 히스패닉을 거의 동등하게 혼합시켜 왔다. 이는 전국 대부분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다양성이었다. "웃는 설교자"라는 별명을 얻은 오스틴은 2004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여유로운 설교 스타일은 격렬한 설교보다 기분 좋은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다는 비판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느긋한 설교 스타일은 또한 불타는 설교보다 기분 좋은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어 비판을 받았습니다. 오스틴은 소셜미디어 플랫폼 X에서 자신의 1천만 명의 팔로워들에게 자신의 교회 공동체가 "황폐해졌다"고 했다 오스틴은 “이러한 어둠에 맞서 우리는 믿음을 굳게 잡고 악이 승리하지 못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며 “하나님께서는 가장 어두운 시기를 통해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함께 이 비극을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고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굳건히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요일 총격 사건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 오스틴은 자신이 설교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이렇게 큰 무리를 인도하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스틴은 1999년 아버지 존 오스틴(John Osteen) 목사가 돌아가시기 전 일요일까지 설교한 적이 없었고, 그런 소망도 없었다고 말했다. 존 오스틴은 1959년 버려진 사료 상점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기독교 레이크우드 교회( Christian Lakewood Church)를 설립했다. 오스틴은 2004년 AP 통신에 그의 아버지의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뒤에 있는 것을 선호했다고 말했다. 그는 1982년 오클라호마주 털사에 있는 오랄 로버츠 대학(Oral Roberts University in Tulsa, Okla)에서 공부를 마친 후 텔레비전 제작자로 아버지의 참모진에 합류했다. 아버지 오스틴 목사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설교자의 아들은 마지 못해 강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아버지는 병원 침대에서 전화로 아들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오스틴은 2004년 “간호사들은 그가 그렇게 행복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존 오스틴은 5일 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그가 설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그냥 속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비평가들은 Osteen to task for downplaying the sinful nature of humanity and the need for repentance (오스틴이 인류의 죄악된 본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경시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오스틴의 어머니인 도디 오스틴(Dodie Osteen)은 2005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We don’t preach the gospel sad, we preach it glad.(우리는 복음을 슬프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전한다)"고 말했다. 댈러스에 본부를 둔 종교감시단체 트리니티(Trinity) 회장 올레 앤서니는 2004년 AP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To me, it’s cotton-candy theology, There’s no meat. They just make everybody feel good. (나에게 그것은 솜사탕 신학이다. 고기는 없다. 그들은 단지 모든 사람을 기분 좋게 해줄 뿐)"이라고 했다. 오스틴은 휴스턴 로켓츠(Houston Rockets)의 이전 홈구장을 교회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들은 1990년대에 두 번의 NBA 타이틀을 획득했고, WNBA의 휴스턴 코메츠(Houston Comets)는 4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곳은 오스틴이 미래의 신부인 빅토리아(Victoria)와 함께 휴스턴 로켓츠 농구 경기를 보러 나갔던 첫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이전 경기장을 교회로 바꾸는 데는 15개월이 걸렸고 완성하는 데 약 7,500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2005년 개장 당시에는 두 개의 폭포, 세 개의 거대한 TV 화면, 록 콘서트에 버금가는 조명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12열의 풍부한 보라색 좌석이 있는 2개의 합창단 로프트가 폭포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살아있는 나뭇잎으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십자가, 신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기타 전통적인 종교적 상징은 없었다. 오스틴은 2005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그런 상징을 한 번도 표시한 적이 없으며, 단순히 전통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오스틴은 천천히 회전하는 커다란 황금색 지구본 앞에서 설교한다. 교실과 함께 예배당, 세례 장소, 청년들을 위한 모임 공간, 교회의 텔레비전 방송 활동을 위한 전체 층이 추가되었다. 오스틴은 2004년 AP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한테는 이곳이 좋은 레스토랑인 것 같다. 좋은 음식이 있으면 사람들이 올 것“이라며 “그래서 우리는 서비스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을 고양시켜야 한다. 그들은 '‘You know what, I feel better today(오늘 기분이 좋아졌어요)'라고 말하며 떠나야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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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0주년을 하나님께 감사
- ▲ 장만희 한국구세군군영 사령관이 설교를 담당했다. ▲ 제리 필레이 세계교회협의회(WCC) 총무 ▲ 유인촌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김종생 NCCK 총무가 감사 말씀과 광고를 담당했다. ▲ 제리 필레이 WCC 총무가 성찬식에 참여했다. ▲ 김종생 NCCK 총무가 성찬식에 참여했다. ▲ 새로운 100년을 향한 몸기도를 진행하는 모습. ▲ 100인 찬양단의 특송 모습. ▲ 이날 김은섭 목사, 박경조 주교, 김영주 전 NCCK총무 등 주요인사들이 참석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 윤창섭 목사, 총무 김종생 목사, 이하 NCCK)는 지난 1924년 9월 24일 창립된 것을 기념해 'NCCK100주년 에큐메니칼 감사예배'를 지난 9월 22일 서울에 소재한 연동교회당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제리 필레이 총무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매튜스 죠지 추나카라 총무,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유인촌 장관 및 이를 축하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모여든 세계교회지도자들, 국내 교회지도자들 등이 모인 가운데 개최하고, 앞으로도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감사예배는 김영걸 대한예수교장로회 부총회장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회장 윤창섭 목사의 축도, 구세군한국군국 장만희 사령관의 설교 등으로 진행되었다. 장만희 사령관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100년 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라는 명칭으로 모였고, 지금까지 서로를 이해하며 연합하는 정신을 실천해왔고,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며 정의와 생명, 평화를 이 땅에 있어지기 위한 여정을 걸어왔다면서 9개 교단이 모였기에 서로간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으나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한 협력의 정신을 실천하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세계교회와의 끈끈한 연대는 사회정치적인 어려움이 닥칠 때에도 복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왔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었음을 강조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창조세계가 신음하고 있으며, 약육강식의 불의가 호령하고 있다고 토로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권눙과 은총을 입어 이웃들의 상처를 싸매어주는 노력을 NCCK와 한국은 물롤 세계의 교회와 성도들과 함께 수행하자고 강조했다. 제리 필레이 세계교회협의회(WCC) 총무는 올해는 NCCK 100주년이면서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80년, 휴전협정 71년이 되는 중요한 해로서 분단과 전쟁, 독재, 국내외 정세이 긴장 등이 공존해있는 상황이라고 평가하고, 그럼에도 NCCK는 오랜 동안 회원교단과 세계 에큐메니칼 공동체의 동료들과 함께 부정의에 맞선 용감한 시간을 보내온 것에 감사를 표했다. 창조세계를 돌보고, 인권을 지키려는 저항을 지속해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에 영감을 줬다고 분석했다. 우리 모두는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한의 주도적 역할에 헌신해야하며, 이를 위해 도잔소의 정신과 유산을 다시금 발휘하자고 강조했다. 유인촌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NCCK는 한국교회 최초의 연합기구로서 창립되어 100주년을 맞은 것을 축하하고, 지금부터 100년 전의 우리 민족은 어두움에 고통받고있었지만 장로교와 감리교 등 여러 교파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모여 이 사회에 빛과 소망을 주기 위해 모였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협력은 한국 기독교 뿐 아니라 종교계에 훌륭한 모범이 되고있다며, 앞으로도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매튜스 죠지 추나카라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총무, 니콜라스 그리스 메소게아와 라브레오티키 대주교는 바르톨로메오스 세계 총대주교를 대신해 축사했고, 입법부를 대신해 우원식 대한민국 국회의장은 서면 축사를 담당했다. NCCK는 이날 지난 역사를 통털어 직간접적인 인연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100인 합창단을 구성했고, '모든 아픔이 나의 통증이 되어'라는 제목의 찬양을 작곡해 특별찬양 순서를 진행했다. 동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한 마음으로 성찬식에 참예했고, '새로운 100년을 향한 한 몸기도'를 이경호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와 이은영 한국YMCA연합회 제2부회장, 최경아 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 등을 순서자로 모든 참석자들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늘어선 가운데 진행하는 특별함도 연출되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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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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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0주년을 하나님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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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백 주년에도 남북통일과 평화
- ▲ NCCK 회장 윤창섭 목사 ▲ NCCK 총무 김종생 목사 ▲ NCCK 100주년 특별사업위원회 위원장 김학중 목사 ▲ WCC 제리 필레이 총무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신승민 목사 ▲ 독일복음선교연대 데틀레프 크노헤 의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윤창섭 회장, 총무 김종생, 이하 NCCK)가 지난 1924년 9월 24일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라는 명칭으로 출범되어 올해 9월 24일에 창립 1백주년을 맞아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하던 중 지난 20~21일간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등 전세계의 에큐메니칼 동역자들을 초청해 국제컨퍼런스를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강성영 총장, 전철 원장)과 라마다동대문호텔에서 그 첫번 행사로서 개최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00주년 국제컨퍼런스'의 참석자들은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 일본제국에게 국권을 빼앗긴 조선의 암울한 상황에 미국과 호주, 영국 등 서방으로부터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고, 다양한 교파가 들어왔지만 한 마음로 연합해 조선땅의 복음과 독립을 추구해 성공했지만 지금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한으로 분단된 아픔을 통일과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입을 모았다. 김종생 NCCK 총무는 올해가 NCCK의 100주년이자 한국교회선교 140주년을 맞는 중요한 해에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동료들이 서울에서 한자리에 모인 것에 감사하다면서 군사독재 시절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감히 언급할 수 없었던 시기였음에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해 교회와 시민사회가 통일과 평화를 논하도록 물고를 텃던 과거를 회상했다. 이 때 세계교회는 도잔소(1984년)와 스위스 글리온(1986년)에서의 노력으로 남북한의 교회가 마주 앉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점에 감사를 표하고, 한국의 교회들은 평화통일에 대한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오늘의 1백 주년을 맞게 되었음을 설명했다. 그러나 현재 전 세계는 전쟁중이고,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의 위협은 날로 증가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에큐메니칼 동료들과 함께 신앙과 사랑, 협력으로 평화와 통일이 도래하는데 더욱 노력하자고 환영사를 밝혔다. 김학중 NCCK 100주년기념특별사업위원회 위원장은 인류 역사 수 천년 간 경쟁과 협동이 늘 있어왔고, 이를 통한 진보와 발전이 있었다면서 인간의 이기심으로 파국이 온다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협동과 공생을 외쳐왔는데 NCCK의 1백 주년도 그러한 역사였다고 강조했다. NCCK의 이 컨퍼런스에서는 그저 기념하는 마음을 넘어서 우리의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자고 개회사를 통해 촉구했다. 제리 필레이 WCC 총무는 1924년 설립된 NCCK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국가적 차원에서 처음으로 구현한 조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면서 이 역사는 1948년 이후 WCC로 대표되는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전에 모범으로 평가했다. 백년 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 있었지만 2차 대전 후 독립을 얻은 즉시 한국전쟁이 발생되었고, 1953년에 정전협정을 맺었지만 7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갈등이 지속되는 중이며, NCCK는 이러한 재난과 격변의 시기에도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평화, 사회 정의를 추구함으로서 WCC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줬고, 민주화와 인권, 억압과 불의에 맞서 전세계 그리스도인들과 연대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즉,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는 중요한 일을 '도잔소 프로세스'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함께 해왔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반도는 물론 전세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강자에게 억눌리는 중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NCCK와 WCC 및 세계 에큐메니칼 진영과 함께 하겠다고 'NCCK 100년-도잔소 프로세스 40주년'이라는 제목의 주제 강연을 통해 밝혔다. 매튜스 죠지 추나카라 박사(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무는 '동아시아, 정의로운 평화를 향한 에큐메니칼 순례의 여정'이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NCCK의 평화와 통일, 생명의 가치를 세우기위한 다양한 협력을 했다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한국, 미국, 일본, 북한, 러시아, 중국 등의 지리정치학적 역학관계를 설명하면서 그간 미국의 강력한 국력으로 인해 유지되었던 질서가 이제는 중국 등이 부상함으로서 질서가 혼돈을 맞았다는 평가와 더불어 이에 그리스도인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신승민 원장(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과 데틀레프 크노헤 의장(독일복음선교연대) 등은 '한반도 평화를 향한 민과 민의 연대'라는 제목의 패널토론 발제를 통해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성이 교회와 개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있는 현실을 설명하고, 수 십년간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함으로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면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협력을 촉구했다. ▲NCCK 100주년 에큐메니칼 감사예배는 오는 9월 22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연동교회당에서 개최한다. ▲NCCK 100주년 기념대회는 오는 9월 23일 오후 5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다큐멘터리 영상을 두개로 CBS에게 의뢰해 제작했으며, 제 1부 '다가올 역사'를 오는 9월 24일에 제 2부 '기억될 미래'를 오는 9월 25일 각각 11시 경 CBS방송을 통해 방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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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백 주년에도 남북통일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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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하심 깨닫고 전하기로
- ▲ 류금주 원장(사진 중앙)이 수련회 참석자들과 후원자 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 이하 한교사)은 제 2024년 여름수련회를 대덕한빛교회(김은섭 목사 시무) 수양관인 '해울동산'에서 지난 8월 16~17일간 갖고, 하나님은 한국교회와 한국인들의 미래를 예비하실 뿐 아니라, 창조주이시므로 역사와 문화, 경제, 정치 등 다양한 분야를 통해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치시기 때문에 본 회의 회원들은 한국교회사가들로서 그 내용과 방향, 사명감 등을 발견해 실천하고, 성도들과 한국교회에 전하는 일을 감당해야한다는 의견을 나눴다. ▲김은섭 박사는 대덕한빛교회 담임목사이자 한교사 대표고문으로서 첫 강연을 담당했다. 김은섭 박사는 한교사를 통해 한국 그리스도교에 교회사를 연구하는 시초가 놓여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현재 임상목회자로서 하나님께서 구 한말에 그리스도교를 한국에 보내주셨고, 당시 예수를 믿은 신앙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기도 했지만 성경말씀에 따라 한국을 개화했고, 독립운동에 매진하면서도 한국인들에게 희망과 미래를 알려줌으로서 사회적 및 신앙적 구심점을 구성했던 것을 본받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고 성경과 학문연마, 말씀의 실천에 매진해야함을 강조했다. ▲민경배 명예원장은 한국인들이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3년 정전협정과 1952년 한국교회가 분열 되는 등 한국전쟁은 민족과 교회의 분열을 촉발시킨 면이 있다면서 그리스도인 끼리 빨갱이로 호칭하며 탄압하던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등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때 '눈을 들어 하늘 보라(515장 찬송가)'는 찬송을 외치면서 신앙적 승화시키는 시절이었음을 밝혔다. 천주교가 국내에 전래되어 영동지역에 퍼지자 1758년 국조보감에 산골까지 기독교가 들어왔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전국 방방곡곡에 영향을 미친 전국구 조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벌어진 후 1930년부터 1945년까지 15년간 신문에는 매일 같이 한국인들이 굶어죽은 소식이 나왔을 정도로 비참한 나라였다면서 민 박사의 출신년도인 1931년은 노구교사건으로 만주사면, 중일전쟁 등이 발발했는데 당시 한국인들은 전량상태(양식이 전혀 없음)였기에 국민들은 패배주의와 폐허주의, 허무주의에 빠졌지만 한국교회는 온 국민에게 힘을 주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찬송가 '눈을 들어 산을 보라(515장), '아침 해가 돋을 때(552장)', '주여 나의 병든 몸을(471장)', '아침 해가 돋을 때(225장)' 등을 작곡해 보급함으로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천국으로 향하는 여정으로 승화시키며 희망을 줬다고 밝혔다. 민 박사는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실제의 피사체를 해석해서 아름다운 부분만을 강조함으로서 실제의 모습보다 아름다워지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교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교회사가들이 과거의 한국교회역사를 연구해 현재 시대에 내놓을 때 신앙적으로 사회적으로 교훈적인 요소를 더욱 부각시킬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밝은 사회가 됨은 물론 바람직한 신앙의 모범도 제시할 수 있기 마련이기에 우리들이 이러한 일에 최선을 다 하자고 촉구했다. 한국교회사학자 중 시니어그룹인 민경배 박사, 이만열 박사, 윤경로 박사 등의 연구자로서의 공로가 매우 컸지만 이제는 후학들에게 자리를 넘겨줘야하는 시기에 왔기에 후배 사학자들이 더욱 분발해 복음전파와 신앙증진에 노력해주길 당부했고,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함께 노력하고, 우의를 다지자고 제안했다. ▲류금주 박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경영'을 주제로 강의했다. 류 박사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볼 때 가장 큰 주제는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한 경영을 주목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볼 때 시제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나눠서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이 과거시제로 구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람의 경우 본인의 출생시를 전혀 인지를 못하며, 오직 부모 등 주변인들이 알려준 정보를 믿어야하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뜻의 '만유'에 해당하기에 누구도 자신의 과거를 모르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알 수 있음을 창세기 1장 1절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세계(천사의 나라)를 창조하셨는데 사람은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사후에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것들이 궁금한데 이는 철학의 3대질문과도 겹치는 부분으로서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대답을 주지 못했던 것이 인류사라고 설명했다. 위의 3대 질문은 오직 성경에만 명확히 나왔으며, 사람이 사후에 영과 혼, 육이 나뉘는 것처럼 보이지만 특정한 때가 되면 몸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막살면 안되고, 오직 성경말씀과 신앙 안에 살아야하며, 그렇지 못하고 사후에 뒤늦게 천국을 발견하더라도 기회는 없기에 우리들은 부활함이라는 최종목표를 추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역사세계(아담의 나라)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종말의 때가 정해져있다는 것이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을 통털어 제시된 사실이며, 이 때 하나님의 자녀는 천사보다도 우월한 존재로서 그 순위가 사람 밑에 천사, 동식물, 마귀 등의 순서였지만 아담이 죄를 범하므로 마귀의 밑에 처하게된 세상이라고 설명했다. 메시야의 나라를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후에 반드시 부활하기 때문에 우리의 최종 목표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며, 그 때는 우리 각자가 왕노릇 하는 때가 온다고 설명했다. 다만 고린도전서 15장 40절 이하에 부활의 모습들이 영광스러운 모습,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뉜다는 점이 제시되어 있다며, 우리 한교사의 회원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경영을 염두하고, 성경과 세상, 교회를 연구해 연구결과물들을 생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개회예배는 김은섭 박사의 강연과 여선암 국장의 사회, 한정열 목사의 기도로 진행되었다. 둘 째 특강은 민경배 박사의 강연과 정용 박사의 인도, 유정우 박사의 기도로 진행되었다. 셋째 특강은 류금주 박사의 강연과 정용 박사의 인도, 조점숙 박사의 기도로 진행되었다. 이윤희 목사는 여정 중 식사기도를 조점숙 박사는 레크리에이션 진행 등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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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하심 깨닫고 전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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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천주교 행사 조직위 이사를 맡은 이유는…
- 스님이 천주교 행사 조직위 이사를 맡은 이유는… “종교 간의 화합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지요.” 15일 경기 남양주 성관사(대한불교조계종)에서 만난 주지 성진 스님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조직위원회(위원장 정순택 대주교)’ 이사를 맡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창설한 이 대회는 교황도 참석하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가톨릭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국제 행사. 한국 천주교는 대회 준비를 위해 지난달 중순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에서 조직위원회 창립식을 열고 이사진을 선임했다. 성진 스님은 현재 선임된 이사 중 유일한 비 가톨릭계다. 성진 스님은 “그동안 신부, 목사, 교무(원불교) 등으로 구성된 만남중창단 활동을 통해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것을 좋게 본 것 같다”라며 “종교와 세대를 뛰어넘는 온 국민의 축제로 만들고 싶다는 취지에 공감해 참여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은 외국처럼 큰 사회 문제로 비화 되지는 않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더 종교적인 이유로 인한 갈등과 마찰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때 공항, 기차역 같은 공공장소에 설치된 트리를 잘 보면 십자가가 없어요. 대신 별이 달렸지요. 공공기관이 왜 특정 종교를 홍보하느냐는 항의가 심하거든요. 이슬람 사원 건립을 놓고 마찰을 벌이는 곳도 있고요. 지금부터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점점 더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진 스님은 “사회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되면 안 되지 않겠느냐”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인들부터 벽을 허무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의 하나로 성진 스님 등 만남중창단은 26~27일 미국 뉴욕 UN 본부 처치센터(Chuch Center for the United Nations)에서 열리는 제5차 국제평화회의(2024 ICCGC-CoNGO)에서 평화와 종교 간의 화합을 노래한다. 또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는 버스킹 공연을, 뉴저지 사찰과 한인 성당에서는 청년들과 토크 콘서트도 갖는다. 성진 스님은 “종교 간 화합의 첫걸음은 목사·신부·교무·스님 등 각 종교인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라며 “4대 종교인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제가 타 종교 행사에 참여해 돕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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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뒷마당에 온 걸 환영해"…美교회가 땅 내놓는 속사정
- "신의 뒷마당에 온 걸 환영해"…美교회가 땅 내놓는 속사정 최근 미국에서 교회 등이 시설 부지를 저소득층 주택 건설에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와 대조적인 종교단체들의 이같은 움직임을 외신들은 '이그비(YIGBY·Yes, In God's Backyard)'라고 부르고 있다. "신의 뒷마당에 오는 걸 환영한다"는 의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미국 온라인 매체 복스에 따르면 이그비 현상은 미국의 저소득층 주택 부족과 교회 공동화 현상이 맞물려 나왔다. 지난 10년간 미국 집값이 42% 오르면서 저소득층의 내 집 마련은 '그림의 떡'이 됐다. 수요는 늘고 있지만,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은 700만호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 내 종교 단체들은 신자 수가 줄고 있는 상황이다. 미 공공 종교연구소에 따르면 1999년 당시 미국인의 70%는 예배 등 종교 활동을 했으나 2020년 이 비율이 47%로 줄었다. 여기에 코로나 19의 여파로 신도 상당수가 온라인 예배를 택하면서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 결과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미국인 비율은 31%에서 24%로 줄었다. 교회 입장에선 대규모 시설을 유지할 필요가 줄었단 얘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교회의 65%는 코로나 이후 헌금이 줄어든 반면, 시설과 주차장을 유지·관리하는 비용은 늘고 있다고 복스가 전했다. 때문에 미국에서 종교시설 3분의 1이 향후 몇 년 안에 문을 닫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복스는 "10만곳이 넘는 교회·유대교 회당·모스크가 문 닫는 것"이라고 전했다. 교단 한 곳, 워싱턴 DC 절반 크기 부지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만 해도 일부 교회는 부동산을 수백만 달러에 매각해 이득을 봤다. 하지만 현재 대다수 종교단체는 매수자를 찾지 못해 '급매' 간판을 내거는 처지다. 이에 종교단체들은 비영리 단체, 지자체 등과 협력해 활용도 낮은 부지에 저소득층 주택을 짓는 프로젝트에 뛰어들고 있다. 샌디에이고 흑인 교회인 베델 AME의 하비 본 수석 목사는 재향군인·고령자를 위한 주택 건설에 교회 부지를 제공하기로 하고 지난해 기공식을 했다. 교인 650만명을 거느린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교회(COGIC)'의 경우, 보유 부지 면적만 2만1000에이커(약 84㎢)로 워싱턴 DC의 절반에 달한다. COGIC 측은 성명에서 "저소득층 주택 건설은 교단 사명의 핵심 부분이다"고 밝혔다. 농구선수 출신의 사업가인 매직 존슨, 영화배우 덴젤 워싱턴 등 유명 교인들이 프로젝트에 수백만 달러를 보탰다고 이코노미스트가 전했다. 이전 2000만원 VIP루트 나왔다…"대선 전, 넘자" 美국경 몰린 중국인 지역 사회 차원에서도 주택·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 단체와 윈-윈(win-win)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에 미국 각지에서 이그비 현상과 관련한 법안이 최근 발의됐거나 검토 중이다. 복스에 따르면 지난 3월 주택·도시 문제 위원회 위원장인 셰로드 브라운 상원의원(민주·오하이오)은 의회에 이그비 법안을 제출했다. 부지에 저소득층 주택을 짓는 종교 단체에 보상금을 주며 독려하는 내용이 골자다. 브라운 의원은 "미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저렴한 집을 구하는 건 너무 어렵다"면서 "법안을 통해 교회·사원·유대교 회당 등 종교 단체 부지에 저소득층 주택을 세워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는 (종교적인) 신앙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캘리포니아·애틀랜타·샌디에이고 등에서 비슷한 법안이 통과했고, 메릴랜드·뉴욕·버지니아도 관련 법안을 검토 중이라고 외신들이 전했다. [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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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뒷마당에 온 걸 환영해"…美교회가 땅 내놓는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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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CK 시국회의' 구성 한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종생 목사, 이하 NCCK) 실행위원회는 산하의 프로그램위원회인 '정의평화위원회'와 '화해통일위원회'가 'NCCK 시국회의' 구성 건의 안을 지난 7월 25일 정기실행위원회에 상정했으며, 표결로 가결됬다. 발족 기자회견과 시국토론회, 시국기도회 등의 활동계획이 공개되었으며, 동 안건에 대해 원안 대로 가결하자는 측과 프로그램위원회의 설치 목적이 존재하므로 위원회 차원에서 노력하면 된다는 의견, 위원회를 넘어 NCCK 전체의 활동으로 하기는 여러 이유로 부담이 있다는 의견, 현재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준비로 여유가 없다는 등 다양한 논의가 장시간 진행되었지만 표결 결과 시국회를 구성키로 했다. 한편 실행위원회는 지난 회의에서 의결정족수가 부족해 다루지 못했던 헌장세칙 개정안을 가결했고, 추가 경정 예산안과 교회협인권센터(이사장 이승렬 목사)가 요청한 명칭변경을 위한 대화위원회 구성의 건 등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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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가 성숙해진 과정 다뤄
- ▲ 주재용 박사는 평생 동안 교회를 위한 학문활동을 했다. 주재용 박사(전 한신대학교 총장)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돌아가신 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과 이후 등장한 속사도 및 교부들이 차례로 등장해 종교개혁 전까지 약 5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이합 집산하던 모습과 사상, 교리, 교의 등이 변천해온 모습을 단 한권의 책에 정리해 최근 발행했다. '교부 문헌으로 쓴 초대 그리스도교 사상사(도서출판 동연)'를 저술한 주재용 박사는 예수님의 사후 초기 그리스도교의 모습과 상황에서 시작해 콘스탄틴 황제로 인해 국교가 된 이래 이단 종교 등 많은 도전자에게 대항하며 교회 내 교리와 교의, 질서, 신앙과 삶의 방식을 세워온 속사도들과 교부들의 신학과 사상을 정리해 수록했으며, 특히 2세기의 클레멘트부터 4세기의 어거스틴까지의 각 교부들의 신학적인 주장과 당대 사회적 분위기 등을 중점적으로 비교했다. 주 박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적 삶이라면서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신앙생활의 질서를 위해 매우 기본적 '신앙의 규범'을 제정했고, 구원의 메시지를 갖고 이교 문화권에 진출하면서 이교 철학과 종교와 주우하는데 이 때 상대방의 교설과는 다른 것을 보여야했고,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근본적 사상을 구체적 언어로 표현하는데 이것이 '교의'라고 정의했다. 2세기 초부터 그리스도교회는 안으로는 많은 오해와 이설을 극복해야 했고, 밖으로는 이교와의 접촉으로 인해 개종해오는 초신자들을 지도할 지침을 마련해야했는데 이 때 지도한 사람들이 2세기의 교부들이었고, 그들로 인해 '진리의 표준', '신앙의 규범' 등의 만들어져 이후에 '신앙 형식', '신조'로 발전되는데 니케아신조나 사도신경 등이 그 상황의 산물이라고 밝혔다. 사도신경만 해도 첫 구절에 이원론적 두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거부하는 '방어적 교의'가 담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교의가 교회에 의해 '교회법'으로 받아들여져 교의가 법이 되는 상황이 왔으며, 교의를 받아들임은 교회법을 받아들인다는 결론인데 이러한 교의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자 중세 사회는 교회법을 시민법 혹은 국가법으로 받아들이면서 교회법이 전 사회를 지배하는 위치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즉, 교의를 파괴하는 자는 교회법을 어겨서 이단자를 넘어 범죄자가 되는 등식이어서 이러한 교의에 대한 계몽운동이 저항하고 투쟁하기도 했다고 한다. 교의는 교회 삶의 현실적 표현이 아닌 교회삶을 억압하는 교권의 도구가 되어버렸다고 주 박사는 분석하고, 그리스도교의 교의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교의와 교리를 구분하는 일은 간단하지도 않으며, 소모적인 행위라면서 시대에 따라 다양한 학자들이 교리와 교의를 동의어로 보기도 하고, 아니라고 보기도 했으며, 역할의 관점에서 해당 집단의 공식적 신념에 적용된다는 입장과 교회의 삶의 현실을 분명히 체계화해 교설에 적용해 신자의 규범이 된다는 등 다양한 사례를 설명했다. 또한 정당성에 대해서 교회의 합법적 권의로 인정된 것만이 교의가 된다거나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근본적 그리스도교 사상의 구체적 표현이 교회에 의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진 신앙진술이라는 표현, 또는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고 교회가 반포했거나 교황이 직권으로 결정했던지 교회에 위해 정의된 진리라는 주장들이 제시되지만 계몽주의자들에게 교의가 해체된 이래 교의사는 끝났다고 보는 등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이 책에 구체적으로 논증되어 있으며, 협의적으로 교부시대 것을 넘어서 종교개혁 이후의 교리의 발전과 교회 회의나 교황에 의해 반포되지 않은 신앙의 형식 등도 지속적으로 교의사로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영어권 학자들의 최신 주장들도 보인다. 중세기에는 교리사 연구가 불가능했다고 하는데 이는 교리 불변성의 주장 때문이었지만 16세기에 종교개혁은 교리사 길을 열린 셈이라고 한다. 루터는 교리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한 공의회나 교황이 포고했다고 해서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고 한다. 교리사의 저술은 계몽주의시대에 비로서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과거의 신조적 진술에 대해 그 기원과 발전, 세대에서 타당성이 검증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교의나 교리사에 대한 입장이 상이 하지만 주 박사는 교리는 절대적이며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규범적이며, 성서에 대한 교회의 시대적 공식적 진술이라고 설명하고, 교리사의 연속성은 인정해야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성령의 역사를 믿어야 하지만 교리 자체가 절대 무엇인가를 표시하는 반면 역사는 상대적이고 변화적, 해석적인 특징이 있음을 주지했다. 교리사의 발전은 새로운 시대와 상황에서 물려받은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면서 교리사의 과제는 교리의 형성동기를 확인, 서술, 전승된 교리 전통을 통해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고찰하는, 즉 폐기할 것이 아닌 재 해석 해야 할 필요성을 주 박사는 강조했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시대가 지나고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된다고 서술되어있는데 즉, 유대교나 이교도와의 갈등을 극복하고, 해소 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고, 그리스교도교의 선교활동의 결과로 이교도가 개종해 들어올 때 이들에게 신앙의 긍정적 요소를 강조할 필요성, 신흥종교로서서 열광과 환상이 잦아들며 조직체로서와 교회의 통일을 이루거나 생활을 안내할 규율 등이 필요했는데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의 은사를 지닌 사람들"을 통해 확이할 수 있음을 이 책은 설명했다. 1세기 말부터 일어난 이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이 때의 '사도 교부'는 신약성경 시대를 바로 계승한 속사도시대의 그리스도교의 저술가들이라고 정의하고, 2세기의 클레멘트부터 교부 중 가장 영향력이 컸다는 4세기의 어거스틴까지 다뤘고, 어거스틴은 별도로 장을 분리해서 자세히 다뤘다. 사도 교부들의 글들은 서신 형식일 뿐 아니라 원 사도들과 사상이 맥을 같이 하며, 사도 시대와 고 가톨릭 시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함을 설명함으로서 이 책이 다루려는 내용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로마의 클레멘트(A.D 30~101)를 첫 사도로 다뤘는데 88~97년 경 로마의 감독(베드로 이후 세 번째 로마의 감독)으로 재직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고린도교회에 '클레멘트 제 1서신'을 보냈는데 개인자격이 아닌 로마교회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문서였다고 밝혔다. 클레멘트는 분열을 가져오는 악덕에 대항해 구약성서가 보여주는 것은 복종과 친절, 겸손과 스토아철학 등 조화의 이론을 제시했고, 애녹의 순종이나 노아의 충성, 아브라함의 말씀에 복종을 언급하며 일치의 덕목을 권고하는 지극히 교회를 위한 공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설명을 했다. 터튤리안과 키프리안 등 2~3세기의 신학자들이 서방신학의 기초를 놓았으며, 이후에는 그리스도교가 콘스탄틴 황제 가 로마제국의 통치자가 된 324년 이후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며 교회의 중심이 동방으로 옮겨셔 초대교회의 신학적 논쟁은 주로 동방교회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주된 신학적 논쟁인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구원론 등을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디옥학파, 카파도기아 신학다들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동방지역에 속했다고 설명했다. 영지주의의 도전이나 마리시온의 개혁, 몬타니즘의 반동, 아폴리나리우스논쟁, 네스토리우스논쟁 등이 모두 동방교회에서 일어났고, 이를 해결하기위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공의회 등이 모두 이 지역과 연관 깊다는 것이다. 또한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교회의 신학적 결정권까지 행사했고, 황제의 결정에 따라 교회의 상황이 달라지는 상황이었던 반면 서방교회의 감독들인 비교적 독립적이어서 정치적인 영향이 적었지만 신학적 논쟁의 관점에서 지적 고립의 원인이기도 했다는 설명이다. 서방에서도 일부 갈등과 지배권의 다툼이 생기기도 하는 등 계속된 신학적 논쟁으로 교회는 혼란에 빠지고 보편적 교회의 평화를 위협했다고 한다. 교회의 궁극적 안정은 확고한 교리적 토대와 정치권력과의 적극적 관계, 국가교회적 새로운 질서 등이 필요하다는 그런 임무를 4세기~5세기의 서방교회신학자들인 암브로스와 제롬, 어거스틴 등이 지적 및 정치적으로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어거스틴(354년~430년)이 초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부라는 평가와 서방신학의 특유한 성격을 결정적으로 확립했고, 그의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로마교회와의 싸움 도구로 수용되었다는 의의를 설명했으며, 실제로 이 책의 결론부에서 따로 구분해 자세히 다루고, 의의를 설명했다. 어거스틴의 저작 중 고백록과 하나님의 도성,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서 주석에 관한 저술들, 마니교도들을 반대한 저술들, 도나투스주의자들을 반대한 저술들 등과 죄론, 은총론, 예정론 등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있다. 주재용 박사는 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 전신)을 거쳐 캐나다 맥길대학교 교회사 전공으로 Ph.D.학위를 수여받고, 한신대학교에서 37년간 교수직을 감당하고, 한신대학교 제 12대 학장, 초대 총장으로 재직했다고 한다. 이 책은 1399페이지에 달하는 규모이며, 초기교회의 교부들의 신학에 대해 저자가 평생의 노력이 담겼다고 알려졌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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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CK 시국회의' 구성 한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종생 목사, 이하 NCCK) 실행위원회는 산하의 프로그램위원회인 '정의평화위원회'와 '화해통일위원회'가 'NCCK 시국회의' 구성 건의 안을 지난 7월 25일 정기실행위원회에 상정했으며, 표결로 가결됬다. 발족 기자회견과 시국토론회, 시국기도회 등의 활동계획이 공개되었으며, 동 안건에 대해 원안 대로 가결하자는 측과 프로그램위원회의 설치 목적이 존재하므로 위원회 차원에서 노력하면 된다는 의견, 위원회를 넘어 NCCK 전체의 활동으로 하기는 여러 이유로 부담이 있다는 의견, 현재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준비로 여유가 없다는 등 다양한 논의가 장시간 진행되었지만 표결 결과 시국회를 구성키로 했다. 한편 실행위원회는 지난 회의에서 의결정족수가 부족해 다루지 못했던 헌장세칙 개정안을 가결했고, 추가 경정 예산안과 교회협인권센터(이사장 이승렬 목사)가 요청한 명칭변경을 위한 대화위원회 구성의 건 등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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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침례교는 항일운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
- ▲ 오지원 겸임교수는 한국침례교가 일제시절 항일운동과 신앙운동을 벌였다고 밝혔다. ▲ 김동석 박사는 논찬을 담당했다. ▲ 류금주 박사는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침례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1905년부터 항거했으며, 그 수위는 교단의 폐쇄, 산하 각종 학교의 폐쇄되는 정도로 강력했다고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명예원장 민경배)이 개최한 학술모임에서 제시되었다. 오지원 침신대학교 겸임교수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이 초청해 개최한 월례발표회에서 '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라는 제목으로 지난 7월 11일 발제했다. 류금주 원장은 동 발표회에서 사회를 담당했다. ▲ 오지원 겸임교수는 한국침례교는 일제의 식민통치 시절 항일 활동을 활발히 벌였지만 그간 연구가 없었던 관계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면서 사실 한국침례교는 당시 교단 폐쇄, 산하의 학교를 폐쇄하는 정도로 애국, 애족과 더불어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바 있다고 밝혔다. 오 교수는 2015년 개최한 기독교한국침례회 105차 정기총회에서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교단이 폐쇄된 1944년 5월 10일을 교단의 기념일로 재정했던 바 있으며, 사단법인 침례교역사신학회가 필자에게 관련 연구를 의뢰함으로서 연구가 실시되어 『신사참배 거부로 수난당한 침례교 대표 32인(누가출판사, 오지원 저)』이라는 서적을 집필했고, 동 책자의 내용과 연관된 내용을 이날 월례발표회에서 발제했다. 침례교는 교단적으로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정교분리적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일제에 저항하게 되었다고 경과를 설명했다. 침례교는 을사늑약(1905년 11월 17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서울지역 연합 위국 기도회(이토 히로부미의 서울에 도착한 1905년 11월 9일 이튿날부터)'를 서울 내 장로교와 침례교, 감리교를 주축으로 개최한 것이 최초 항일운동의 시작이라고 밝혔다. 동 기도회는 당시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19일자에 보도되었으며, 학이 깊은 물가에서 울면 소리가 하늘까지 들린다는 '성문우천(聲聞于天)'이라고 표현되었고, 이날 위국기도문도 자세히 보도 되었다고 설명했다. 기도문의 내용은 대한의 위기 극복의 비결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이라며 하나님께 바로 서는 지도자의 모습을 강조하고, 난국의 원인은 일본보다는 국민과 기독교인 전체 공동체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의 이 보도는 그 동안 당시 침례교의 지도자였던 펜윅 선교사(Rev. Malcom C. Fenwick)사 및 대한기독교회 사역자들이 당시에 비정치화와 비민족화의 신앙으로 철저해 대부흥운동을 배격하고 을사늑약과 국권침탈, 3.1운동 등 거국적 활동을 안 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오히려 항일운동과 애국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들어낸 역사적 증거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침례교인들도 국가적 위기를 외면하지 않았고, 침례교인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량 내에서 최선을 다 한 항일운동이었으며, 침례교 뿐 아니라 서울지역의 장로교와 감리교 등 타 교파와 연합함으로서 당시 교단간 갈등요인인 선교지분할정책의 문제를 극복한 좋은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펜윅 선교사는 1906년에 일제의 내정 간섭으로 점차 힘을 잃어가는 대한제국을 바라보며 조선에 대한 애국적 내용을 담은 '내 나라 대한(My country Tai Han)'이라는 노래를 발표하는 등 침례교 항일운동사상의 토대를 이미 가지고 있었고, 침례교인들은 초교파적 위국기도회에 참여해 침례교항일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는 평가를 오 교수는 했다. '내 나라 대한'이라는 노래는 애국가적인 성격을 지녔어도 내용상 통상적인 민족주의 등이 아닌 철저한 기독교적인 교리와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는데 1절은 열성조가 낳고 돌아가신 한국의 유구한 역사, 2절에는 한국의 지리적 아름다움, 3절은 을사늑약 등 국가적 위기 극복을 위해 하나님과 예수님, 성경을 쫏음, 4절 회개와 죄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나라를 세우자는, 5절에서는 한국의 만세와 나라를 다시 세울 것 등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침례교는 1918년 일제에게 포교계 제출을 거부하고 교단과 교회를 폐쇄했는데 이는 일제가 1915년 8월 '포교규칙'과 '개정사립학교규칙'을 제정해 조선통치에 특별히 방해가 되는 한국기독교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침례교는 이에 대해 신앙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오 교수는 설명했다. 당시 한국침례교는 제 1대 감목인 펜윅 선교사가 2대 감목을 이종덕 목사로 지명했지만 교단 내 일부는 신명균 목사가 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 어긋나 교단이 분열 되는 등 주도권 다툼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제의 이와 같은 탄압에 대응하기에는 더욱 어려운 분위기였다. 특히 학당의 폐쇄는 학생들의 학습권이 훼손된다는 반대와 교회의 폐쇄를 불러올 포교계 제출은 그저 일제 정부의 단순한 법적 절차일 뿐이라는 반발 등으로 더욱 어려웠지만 침례교는 학당을 폐쇄했고, 일제로 부터 교회 폐쇄령(1918년)을 받게되었다고 한다. 한국침례교의 저항은 이종덕 당시 감목의 투옥을 불러들였으나 1918년 풀려난 이 감목은 원산을 떠나 간도의 종성동에서 신자들을 재 규합해 신앙을 돈독히 했으며, 일제의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뀐 1920년 침례교는 다시 교회 문을 열 수 있었다고 한다. 펜윅은 1926년 제 21차 대화회(총회)에서 학교교육 금지령을 내렸는데 아 갑작스러운 결정에 대해 일부에서는 근본주의신앙이기 때문에 세속교육에 심한 거부감이 있었다고 혹평하기도 했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이 벌어지는 스콥사건이 벌어지는 중이었으며, 일제는 신사참배를 중심으로 공교육을 점령해 한국에 천황주의적 역사관을 심음으로서 민족의식을 퇴색하게하고, 창조론 중심의 기독교사학 또한 악영향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에 의한 것이었다고 오 교수는 해석했으며, 따라서 학교교육금지로 교단 인재양성에 장애를 줬다는 식의 평가보다는 일제에 항거한 이 행위는 마땅했다고 재 평가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한국침례교는 신사참배를 배격한 이유는 당시 식민정부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조선인들을 동원하기 위한 작전이었기 때문이며, 김영관 당시 침례교 감목은 1935년 10월 5일자 달편지를 통해 전국 교회의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불복할 것을 당부했고, 1938년 총독부가 동아기독대에 참배할 것을 요구하자 또 다시 불응할 것을 당부, 1939년 긴급 임원회에서 김영관 감목이 교단 산하에 신사참배를 거부를 당부함은 일제와의 마찰을 불러들인다는 교단 내 일부의 반발에 갑론 을박이 벌어지자 감목직을 사임했으며, 1939년 제 5대 감목인 이종근 목사도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에 굴하지 않기로 결의해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벌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중 1940년 일제는 동아기독교회 원산총부에 교규 제출을 요구했고, 일제가 이를 검토하던 중 우태호 전도사(미남침례회 해외선교회 일본국 한국선교사)가 입국해있던 중 교단 임원들과 원만하지 못한 관계에 놓였으며, 동아기독교회 실태를 파악해 일본 헌병대에 불순한 단체로 고발, 논란이 된 부분은 '복음찬미'에 "대왕님 예수 씨 보혈"의 용어, "주의 재림"의 내용 등이 천황에 대한 모독과 국체명징(國體明徵)에 벗어난다는 트집이었다고 한다. 이로서 원산총부는 압수수색을 당해 신약젼서와 복음찬미, 교단 서류들을 몰수당하고, 이종근 감독(총회장)과 전치규, 김영관 목사 및 총 32인의 교단지도자들을 체포해 수 개월간 모진 고문과 옥고를 줬으며, 일제는 '재림신앙(말세론)'을 빌미로 9인을 예심에 회부했는데 유대민족의 재건이라는 민족주의적 측면을 가장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오 교수는 해석했다. 1944년 5월 10일 함흥재판소는 일련의 내용들을 이유로 동아기독교회 교단 해체령을 공포하는 등 한국침례교는 신앙과 민족, 국가를 위한 항일운동을 지속하며 어려움을 당했다고 밝혔다. 오 교수는 동 주제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면서 선행연구가 없어서 어려움이 많았으며, 교단이 폐쇄되는 바람에 교단자료가 소실되어서 오히려 일제 기록물을 상당수 참고할 수 밖에 없었던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에 대한 연구가 향후 더욱 많이 진행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 김동석 박사(믿힘연구원 원장, 한국교회사학연구원 부원장)는 주제 발제에 대한 논찬을 담당했다. 한국침례교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감명받았다며, 위국기도회를 침례교가 장로교와 감리교 등과 공동으로 진행했다는 것은 위기의 시대에 민족의 비극을 외면치 않고 참여한 애국운동이었다고 평가했다. 펜윅의 애국은 민족주의적 애국보다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애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국가와 민족의 위기 시절 항일운동을 전개함은 매우 위험한 일 이었다면서도 한국침례교가 몇몇의 시기마다 적극적으로 기독교신앙에 입각한 애국적 항일운동을 펼쳤으며, 암흑기를 거친 교단이 오늘날에도 한국교회에서 중요한 교단으로 활동함에 감사를 표했다. 논문에서는 소극적 저항으로 보이는데 '항일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과 침례교의 항일운동사의 선행연구가 없는 이유에 대해 질문했다. 오지원 교수는 항일운동의 활동은 기독교인들로서 기도교신앙에 충실하다는 것 자체가 일제의 의도에 반하는 것으로서 항일운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고, 교단폐쇄 시기에 일제가 대부분의 자료를 소각했기에 남은 자료가 많지 않았기에 총독부의 자료를 참고한 일이 많았으며, 본인의 학교에서 한국교회사 전공으로서 1호 박사에 해당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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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일반(해외,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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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침례교는 항일운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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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하심 찾으려 노력하자
- ▲ 사회는 고사무엘 목사가 담당했다. ▲ 설교는 정용 목사가 담당했으며, 달란트의 비유를 제시했다. ▲ 축도는 민경배 명예원장이 담당했다. ▲ 류금주 원장은 광고순서를 통해 감사를 표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 이하 한교사)은 제 304회 월례세미나와 예배를 서현교회당에서 지난 7월 11일 개최했다. 예배는 고사무엘 목사의 인도, 민경배 명예원장의 축도, 정용 목사의 설교 등으로 진행되었다. 정용 목사는 마태복음 25장 25~30절 말씀을 기초해 '한국교회사학연구원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담당했다. 정 목사는 본문 내 달란트 비유 중 주인에게 5 달란트, 2 달란트를 위임받은 종은 이윤을 남겼지만 1 달란트를 받은 종은 아무것도 안하고 핑계를 대는 상황을 설명했다. 5 달란트, 2 달란트의 종과 1 달란트의 종이 얻는 보람이라면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악한 종으로 지목된 1 달란트의 종은 주인을 평생 섬겼으되 그 종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무작정 섬긴 경우인데 한교사의 회원들도 교회사학을 연구하며 충성하는 사람들로서 말씀을 쫒고, 교회사를 연구하는 복음의 사역을 진행하면서 진정으로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 목사는 신학생 시절 목회자가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면서도 이해도 안되었는데 임상목회자가 되고 나니 교회 현장에서 복음을 따르기 보다는 명예나 경제 등 부차적인 것들을 더욱 추구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토로했다. 한교사에는 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고, 교회사와 학문을 위해 투쟁해 온 학문의 거목 민경배 박사 같은 분이 있다며, 그와 동행하는 회원들로서는 그의 하나님을 향한 성실함을 본받아 후학들이 자신을 가다듬음으로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그런 발자취를 남기자고 강조했다. 주인은 1 달란트의 종의 달란트를 충성된 종들에게 옮기는 것을 경험하는데 여기 모인 한교사의 회원들도 각자의 영역에서 현재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와 축복을 사용해 최선의 충성, 봉사를 하는 삶을 살자고 요청했다. 류금주 원장은 광고를 통해 참석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올해 여러 차례 큰 행사들이 있다며, 많은 회원들의 참여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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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하심 찾으려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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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황제가 인정한 조선 선교
- ▲ 이용호 감독은 기독교대한감리회의 한국선교 140주년을 축하하고, 향후 선교를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 태동화 선교국 총무는 현재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선교사 2,400여명은 세계 80개국에서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 유은식 목사는 고종 황제의 선교윤허는 조선의 부국강병의 방법으로서 황제가 주도한 결정이었음을 밝혔다. 기독교대한감리교회(감독회장 이철 목사, 이하 기감)는 2024년 7월 2일은 미국 감리교회의 매클래이선교사가 1884년 7월 2일 고종황제로부터 학교설립이나 병원설립 등 조선의 선교를 윤허받은지 140년 째 되는 날이라며 '고종황제 선교 윤허 140주년 기념대회'를 중앙교회(이형노 담임목사 시무, 기감)당에서 개최했다. 유은식 목사(제물포문화아카이브 & 역사와뉴미디어선교연구소 대표)는 수십년간 동 주제에 대한 연구를 해온 학자요, 금번 행사를 준비한 입장에서 고종 황제가 감리교측에 선교를 윤허한 것에 대한 의미를 설명했다. 유 목사는 140년 전의 선교윤허는 당시 조선이 주변 열강들에게 무너질 위기감이 팽배했던 시기로서 국왕에 취임하면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하던 중 미국 감리교의 매클래이 선교사를 만나 병원과 학교의 설립을 제안받았지만 실제로는 국왕이 주도적인 결정에 의한 윤허였다는 의미가 크며, 시기적으로 1884년 9월 20일 입국한 장로교의 알렌 선교사보다 빨랐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고종 황제는 윤치호의 일기에 따르면 1884년 7월 2일 미국인의 병원과 학교설립, 전신부서 설립 등을 허락하셨다는 내용이 있다면서 이에 앞서 당시의 조선은 1800년대 후 약 60년간 세도정치와 탐관오리의 부패로 인해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으며, 1875년에는 일본과 운양호사건(1875년)`으로 인해 강제개항을 하고, 일본에 수신사(1875년)를 보내는 등 굴욕을 겪던 중이었는데 1차 수신사, 2차 수신사를 보냈던 고종은 김기수(1차 단장)와 김홍집(2차 단장)가 서구문명을 수용하고, 미국의 수호조약 등을 이끌어내야한다는 보고를 청취한 결과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통리기무아문(전권을 지닌 행정부)을 설치하고, 개방을 추진했다고 주최측은 밝혔다. 고종 황제는 보빙사절단(정사 민영익(閔泳翊), 부사 홍영식(洪英植), 종사관 서광범(徐光範), 그리고 수행원 유길준(兪吉濬)과 변수(邊燧), 고영철(高永喆), 무관 최경석(崔景錫) · 현흥택(玄興澤) 등이 임명)을 미국에 파송했고, 미국에서 사절단을 만나 조선의 사정을 청취한 가우처 목사(교육학박사)는 재한 선교사인 매클래이 선교사에게 조선에 입국해 학교와 병원 설립 가능성을 타진해보라고 촉구, 1884년 6월 24일에 입국 후 30일에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제안서를 제출함으로서 7월 2일 국왕의 윤허를 받았다고 한다. 기감은 고종의 결단으로 미국 감리교의 선교를 허락함으로 인해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해 병원과 학교를 설립, 인재 양성과 민족지도자를 배출함으로서 조선의 개화와 독립, 발전을 이룸으로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방방 곡곡에 세워지고, 2024년 현재 미래의 140년 그리스도교 선교를 준비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고종황제 선교 윤허 140주년 기념대회는 가우처기념교회인 중앙교회에서 열렸으며, 수백명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역사 프레젠테이션, 예배, 음악회 등으로 진행되었다. 1부 사진전시회 및 역사 프레젠테이션은 홍석민 목사(선교국 국내선교부장)의 인도, 이용원 감독 등 주요인사들의 테이프 절단식, 유은식 목사(제물포문화아카이브 대표)의 사진 및 역사설명 등으로 진행되었다. 2부 기념예배는 홍석민 목사의 사회와 이용원 감독(선교국위원장, 서울연회)의 설교, 태동화 목사(선교국 총무)의 환영사, 유은식 목사의 선교윤허 동영상 설명, 채성기 감독의 축사, 신경하 감독의 축도 등으로 진행되었다. 오르간은 허성윤 권사(중앙교회), 감사기도에 오수철 장로(남선교회 전국연합회장), 이정숙 장로(여선교회 전국연합회장), 강동화 권사(청장년회 전국연합회장), 서종순 장로(교회학교 전국연합회장), 조금석 장로(장로회 서울연회연합회장) 등이 감당했고, 성경봉독은 박찬수 감리사(종로지방회), 특별찬양 크로체(소프라노 지희경, 테너 문제성, 반주 이웅희) 등이 담당했다. 이용원 감독은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라는 제하의 설교를 통해 선교의 시작을 성경에서 살피면 안디옥교회였던 것이 알 수 있다며 한국교회의 출발에 대해 대부분이 1885년 부활절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로 입국하면서라고 기념하지만 한국선교의 출발점은 고종 황제가 미국 감리교의 매클래이 선교사에게 1884년 7월 2일 병원과 학교를 설립을 허락받은 일 부터라고 밝히고, 혹자는 거기에 선교라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선교의 물결이 들어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감독은 고종의 선교 윤허시기 한국의 사회는 주변 열강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던 희망이 없던 시기였지만 기독교가 전래돼면서 희망의 불빛이 보인 것이며, 한국선교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이고, 안디옥교회가 이름 없이 선교거점이 되었다면 지금의 한국교회 한국감리교가 같은 역할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들어 앞으로도 선교에 노력하자고 촉구했다. 태동화 목사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장기간 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지만 짧은 기간의 사역에도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줬다면서 현재 교단에는 2,400여 명의 선교사가 전세계 80개국에서 선교를 담당하는 축복을 하나님께 받았다면서 고종 황제의 윤허 140주년을 통해 계속 복음사역을 감당하자고 밝혔다. 고종 황제는 조선의 부국강병을 최선을 다해 노력한 한 국왕이었다면서 그 방향에 미국 감리회의 매클래이 선교사와의 만남으로 시너지가 형성되어 봉사 했듯이, 한국 감리교는 다시 세상을 향한 빛이되고, 소망이 되려는 복음적인 노력을 감 당하자고 강조했다. 3부 감사찬양제는 쉐퍼즈콰이어(단장 김학중 목사, 전 경기연회 감독)이 담당했으며, 동 찬양대는 기감 소속 목회자들로 구성되어 지난 2011년부터 활동해왔다고 한다. 레파토리는 쉐퍼즈 합창(쉐퍼즈 송, 여리고성의 전투, 기드온의 300용사 등), 쉐퍼즈 앙상블(담대하라), 서진성 생명의 양식, 나승준 세상을 사는 지혜 등 11곡이 연주되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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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황제가 인정한 조선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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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회운동 온라인 보존
- ▲ 김신약 목사(NCCK1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 연구원)이 NCCK아카이브 사용법을 시연했다. ▲ 김학중 목사(NCCK1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 위원장)는 1백주년을 기념함 보다는 반성과 미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한규무 박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사진 왼쪽)은 김종생 NCCK총무(사진 오른쪽)에게 감사패를 수여받았다. 이순자 박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실장, 사진 가운데)가 동행했다. 1924년 9월 24일 설립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종생, 이하 NCCK)'가 오는 9월 24일이면 설립 100주년을 맞게된다. NCCK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국인들과 함께 해오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온 성도들의 삶은 물론 실천적인 부분에서 한국 개신교는 선교와 교육, 문화, 구제, 의료, 민주화, 인권, 통일,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사회에 기여했던 모습들을 담은 다양한 자료들을 데이터화시켜 온라인 아카이브에 저장해 모든 사람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한민국(대통령 윤석열) 문화관광부의 후원으로 진행했던 온라인 아카이브에 수록된 자료는 총 24,798건(문서는 23,398건 및 사진그림류는 1,400건)이 수록되어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온라인 아카이브'는 지난 6월 27일 NCCK가 연세대학교 백양누리 더라운지에서 오픈 기념식을 갖음으로서 공식적으로 온라인에서 공개되었다. NCCK는 수년 전 동 사업을 준비하기 전 에큐메니칼사역(교회연합)을 진행해오면서 축적된 수 많은 자료들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한규무 박사)에 제공해 분류 가공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며, 이후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 등 분위기에 힘입어 더욱 사업의 방향이 확대되었고, 이후에 설립된 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및 IT기술을 제공한 아카이브랩 등의 관련기관들과의 협조체제를 가져오는 등 전체적으로는 2019년부터 약 6년간 준비를 해왔다고 한다. 김학중 목사(NCCK1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 위원장)는 한국교회가 이 땅에 함께 지낸 역사가 매우 길며, 신앙은 물론 한국인들을 위한 많은 기여를 했지만 아직도 세상과의 소통은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번 아카이브 개소식을 갖음으로 기독교인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나눔과 소통을 할 수 있는 계기가 열렸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1932년 NCCK는 사회신조를 발표하면서 사회의 약자들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일을 각오했던 일도 있다면서 NCCK의 백주년을 맞는 지금 미래를 위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의 아카이브가 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특히 현장의 이야기를 듣자면 한국교회가 성찰이 없이는 새 백년을 맞기 어렵다는 판단이라면서 뼈아픈 반성을 기반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백주년 선언을 준비중이기에 한국교회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봉사를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김종생 NCCK 총무는 아카이브를 사용해 1972년 전국신자운동을 검색해보니 NCCK가 지난 25회 총회에서 적극 노력해야한다는 결의를 했던 것을 불과 5분만에 확인할 수 있었다며, 이처럼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함에 큰 도움을 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와 아카이브랩, 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등에게 감사하며, 이에 대한 감사패 시상을 할 예정임을 밝혔다. 안교성 목사(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는 NCCK 아카이브는 한국교회의 지난 1백년간의 사역을 모두에게 알리는데 좋은 도구가 될 것이며, 이제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원활한 활용과 유지보수의 방향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야 한다고 평가하는 발제를 담당했다. 김신약 목사(NCCK1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 연구원)는 컴퓨터를 사용해 아카이브의 사용을 설명하는 시연회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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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회운동 온라인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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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 주년 행사 및 사업 11월까지 계속
- ▲ 김종생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사진 오른쪽)가 창립 100주년 사업을 설명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가 1924년 9월 24일 한국에서 출범한지 올해로 1백주년을 맞이하며, 이를 위한 각종 기념예배와 기념행사, 문화사업, 컨퍼런스 등이 6월부터 11월 기념대회까지 매월 진행된다고 한다. NCCK는 1백주년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에 앞서 연세대학교 백양누리에서 지난 6월 27일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김종생 총무는 NCCK 백주년 사업을 위해 수년 전부터 준비하는 중이며, 일부는 진행중인 사업도 있다면서 6월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온라인 아카이브'개설을 하고, 7월은 100주년 축하 인터뷰 영상 공개, 8월은 100주년 기념 기독교 사회선언 정책 협의회 개최, 9월 20~22일은 국제컨퍼런스, 22일은 기념예배, 24일은 기념일 행사 및 CBS에 의뢰해서 제작중인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다큐멘터리' 방영, 10월은 말 경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와 22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00년사'의 출판 및 기념회, 11월 18일은 기념대회와 100주년 기념 기독교 사회선언 발표 등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김 총무는 지난 NCCK는 세계교회의 선교와 일치운동의 역사적 흐름 가운데 창립된 한국교회 최초이 에큐메니칼협의체라고 소개하고, 지난 100년의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와 기독교단체, 세계교회와 연대해 에큐메니칼 운동을 펼치면서 노동과 여성, 아동, 장애인, 도시빈민, 산업화, 민주화, 인권, 통일, 평화, 생태 등에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사회운동을 주도 또는 참여했다고 밝혔다. NCCK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 이 땅에 사랑과 정의를 기초한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뤄지도록 노력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있다고 김 총무는 밝히고, 그간 가난한 자와 억울한 자, 눌린 자, 소외 당하는 자 등을 보호하고, 대변하는 역할을 해왔으며, 이를 기념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한해를 보내겠다고 밝혔다. 사회를 향한 선교를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하는 NCCK는 지난 1백년간의 여정을 담은 각종 자료들을 기독교의 사회운동사 차원에서 정리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온라인 아카이브'에 디지털 형태로 수록했는데 이를 지난 6월 27일 대중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100주년 기념 국제 컨퍼런스'는 오는 9월 20~22일간 한신대학교와 라마다 바이 윈덤 서울 동대문에서 연속해 진행하며, 여기에는 세계교회협의회 총무를 비롯해 아시아기독교협의회나 북미 지역 주요 교단, 독일 개신교협의회 등 주요 파트너들 200여명이 참석하는 규모로 진행할 예정이다. '100주년 기념예배'는 오는 9월 22일 오후 4시 경 연동교회당(종로 5가)에서 개최하며 예배의 기획 준비는 최진봉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실천신학)가 담당하고, 국제컨퍼런스에 참여한 인원들이 참석하며, 100주년을 기리는 의미로 모집한 '100인 합창단'이 합창곡을 담당한다고 한다. 동 합창단은 그동안 NCCK와 함께 해온 운동의 동지와 회원교단, 시민사회계열단체 관련자 등으로 구성한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는 NCCK의 유관기관이자 언론사인 기독교방송(CBS)에 제작을 의뢰했으며, 지난 1백년의 역사를 반추하고,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의 현실 등을 담을 예정며, 오는 9월 24일 무렵 송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100주년 기념 축하 인터뷰'는 NCCK 총무와 회장, 회원교단 회장과 총무, 각 위원회 위원장, 관련자, 직원, 현장 관련자 등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영상을 담아 10분 이내의 영상클립을 약 30건을 제작해 홈페이지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전 3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00년사'의 출판기념식은 오는 10월 22일 오후 2시 정동제일교회당에서 개최하며, 2019년부터 출판중인 '한국교회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전 20권)'은 올해 내 완간된다고 한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는 15명의 집필진이 노력 중이며, 1권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권 해방부터 민주화 및 산업화, 3권 민주화 이행기부터 현재까지를 다룬다고 한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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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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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 주년 행사 및 사업 11월까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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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율법과 의는 모두 예수의 관점으로
- ▲ 유선화 작가는 「로마서, 오직 믿음으로 이르는 하나님의 의(길과 생명 출판)」을 출간했다. 유선화 작가는 「로마서, 오직 믿음으로 이르는 하나님의 의(길과 생명 출판)」를 출간함으로서 죄를 지어 죽을 수 밖에 없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았으며, 복음으로 거듭 난 이후로는 과거의 죄의식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과 동행해야한다는 내용을 최근 밝혔다. 지난 해 「요한계시록,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길과 생명 출판)」를 출간한 유선화 작가는 이에 대한 이해를 미지의 세계처럼 여겨온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실한 잣대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아왔으며, 연달아 로마서를 출간해 이방인들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자녀라는 점을 분석해냈다. 요한계시록을 다룰 때 기독교계의 연구자들이 오역을 우려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유 작가는 계시록의 모든 장과 절을 표시하고, 성경의 원문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해석함으로서 모든 구절을 해설했기에 신뢰성있는 방식의 해설이 가능했는데 이번 로마서를 쓰면서도 같은 방식으로 모든 구절과 성경이 최초에 작성되었을 때 사용한 원어를 대조함으로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신뢰성을 가져도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로마서는 한 마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라고 단언하고, 이번 저작의 모든 글쓰기를 예수님과 복음에 중점을 두고 풀어갔다. 로마서는 의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성경이라고 밝힌 저자는 율법과 하나님의 의,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동일하게 이르는 믿음의 의, 아담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두 결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의 죄와 율법과 육신의 문제,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는 방ㅂ버,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의 섭리와 비밀 등을 말씀하고있으며, 여기서 바울 사도는 구약의 말씀으로 그 비밀을 어떻게 논리정연히 다루고 있고, 우리가 믿고 따라야하는 방향은 무엇인지를 기술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저자는 특별히 로마서는 죄와 율법, 의를 주제로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루게되었다며,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발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일방적 주권을 통한 선택적 예정은 이스라엘 사람들 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예정 및 이에 따른 믿음의 선택으로 인한 구원을 설명했다. 죄에 대해서 로마서 7장은 속 사람이 아닌 육신에게서 발생하는 점이 구별해 죄은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아야하며, 8장에는 거룩하게된 의로운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이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으로 살아야 함을 조명했다. 저자는 로마서가 율법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주목하고, 그 역할과 성도에 대한 적용점을 설명했다. 바울 당시에는 할레를 비롯한 율법적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함는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이 의롭게한다는 점을 가르쳐야했을 것이라면서 로마서의 가치가 어떻게 출발하는지를 설명했고, 이는 율법과 믿음에 대한 로마서의 이해인데 이 부분도 조명했다고 한다.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복음의 능력이 되게 하는 것이고, 칭의라기 보다는 오직 믿음으로서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신학적 관점상 '칭의'라는 것보다 저자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들음으로서 믿음이 생기고 구원 받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즉 피조물의 관점에서 살펴본 부분들은 관심을 갖게 하는 요소다. 그리스도와 연합된자로서 죄와 율법, 육신에 관한 내용도 다뤘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났고, 새로운 피조물임에도 지속적인 죄의 발생으로 인한 고민을 하기도 하지만 로마서 7장에는 '내 속에 거하는 죄'라 하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 조차 여전히 죄인이라는 의식에 사로잡혀서 살기도 하지만 저자는 죄를 보는 관점을 달리해야한다는 주장이 수록되어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인데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새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인데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기라(로마서 6장 11절), 지체를 몸의 사욕인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서 육신으로는 죄를 섬기는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과 삶에 적용할 방법이 동 저서에 자세히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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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율법과 의는 모두 예수의 관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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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연구 기틀 개척 공로
- ▲ 민경배 박사는 이날 토론회에 참여해 교회사학 연구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사)국제독립교회연합회(총회장 정인찬 목사)와 웨이크사이버신학원은 제 3회 웨이크사이버신학포럼을 지난 5월 20일 CTS아트홀에서 '한국교회사에서 바라보는 역사신학자 민경배 박사'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민경배 박사는 1972년 한국기독교회사를 발간함으로서 한국교회사의 연구와 교육분야의 체제와 틀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이날 한국의 교회사 연구에 권위자로 평가 받고 있는 이상규 박사(전 고신대학교 부총장)와 박명수 박사(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등이 발제자로 초청되어 민경배 박사의 생애와 학문, 민족의 이해, 내연과 외연으로 구분한 교회사 서술구도 등을 거론했고, 대체로 한국교회사의 기초부터 성숙단계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기여를 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 정인찬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총회장은 토론회 주최자로서 이날 교회를 위한 좋은 대안이 되기를 기대했다. ▲ 정인찬 박사(국제독립교회연합회 총회장)는 동 교단과 웨이크사이버신학원이 민경배 박사에 대한 토론회를 진행하게 됨은 한국교회에 크게 도움이 될만한 일이라면서 이 자리에서 논의된 내용들이 복음전파에 획기적 기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좌로부터 박명수 박사, 민경배 박사, 류금주 박사, 이상규 박사. ▲ 이상규 박사는 생애와 학문의 개괄 발제를 담당했다. ▲ 이상규 박사는 '민경배 교수의 생애와 학문'을 주제로 발제했다. 이 박사는 민경배 박사는 스승인 백낙준 박사의 계보를 잇는 제 2세 학자라고 평가하고, 한국교회사 학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라고 정의했다. 그가 한국에서 교회사연구를 개척했고, 오늘날 교회사학의 발전에 초석을 놓은 학자라면서 한국의 신학도와 목회자 중 민 박사의 책을 한 권이라고 접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는 1934년 6월 22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읍내리 212번지에서 출생했고, 그의 아호인 '솔래'는 송천리의 솔래(松川)에서 취한 것으로 유추했다. 민 박사는 해방 후 월남해 서울에 정착해 1952년 3월 중앙고등학교를 졸업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20기로 입대해 종군했지만 부상으로 22개월 후 명예 제대했다고 설명했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수학하며 1956년 3월 졸업 후 동 대학원에 진학해 1958년 3월 석사학위를 취득, 스코틀랜드 에버딘대학교 신학부에서 수학하며 마가렛 크리스티나 상을 수상하는 등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동 대학원에 진학 1962년 5월 졸업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귀국한 민 박사는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해 신학대학원 과정에서 수학해 1965년 3월 졸업했고, 1967년 11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이상규 박사는 설명했다. 민 박사는 목사안수 후 이미 교수가 되었지만 영국 런던대학교 신학부로 유학해 1969년 8월 졸업했는데 이 때 로버트 토마스 목사(Rev. Robert Jermain Thoma)를 연구해 조명(민 박사는 이 연구를 통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와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던 토마스 목사가 웨일즈 출신이며, 에딘버러대학교 뉴칼리지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순수한 선교의 열정으로 인한 순교였다는 점을 밝힘)했고, 귀국 후 연세대학교의 교수직을 감당하던 중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에서 1984년 3월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민 교수가 1958년 3월 연세대학교에서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대학원 졸업과 동시 불과 24세의 나이로 부산 분교의 전임강사로 임용된 것이라고 밝혔다. 민 박사는 1958년~1999년 8월까지 41년간 교수직을 감당했고, 연세춘추 편집 및 주간, 교목실장, 기독교문화연구소장, 신학대학장 등 보직을 맡았다고 밝혔다. 1984년에 4년간 교무처장, 1988년 4년간 및 1994년 2년간 연합신학대학원장, 1999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정년으로 은퇴하며 명예교수로 추대, 2002년 3월 서울장신대학교 제 2대 총장으로 4년 후 2006년 퇴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 초빙되었고,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원장과 명예원장, 고문 등을 감당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노력하는 중이라고 평가했다. 이상규 박사는 「한국기독교회사」 및 「한국민족교회 형성사론」, 「교회와 민족」 등 50여 권의 저서, 「에큐메닉스」 등 7권의 역서, 1975년 3월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이 발간하는 「신학논단」에 '루터의 내적 발전과 그 신학적 계보'를 발표 한 이래 17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민경배 박사의 학문적 발자취를 설명했다. 민 박사는 백낙준 박사와 더불어 1966년에 '한국교회사학회'를 조직해 한국에서 가장 오랜 신학회로서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고, 1993년에는 연세교회사학회를 조직해 이 모체를 통해 1997년 6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을 거쳐 명예 원장 혹은 고문으로 지속적인 후학 양성에 주력 중이라고 밝혔다. 학회 활동 외에도 서울YMCA연맹 이사 혹은 부이사장으로 활동, 기독교백주년기념사업회 혹은 순교자기념사업회 등에 관여하거나 학술적 자문 활동, 해외 강연에서의 강좌, 국제학술회 참여 등의 다양한 활동을 수행함으로서 교회의 교사(doctor ecclesiae)로서 일생을 살았다고 평가했다. 이 박사는 민 박사의 교회사연구에 대해 한국교회사 분야를 넘어서는 영향력도 있었지만 특히 한국교회사의 전 영역의 다양한 주제를 연구 및 개척했고, 국내외 각종 도서관이나 역사관, 고문서관를 섭렵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의 저술목록은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 선교, 예전, 인물, 기구, 교파, 민족 혹은 독립운동, 외교와 국제관계, 역사인식과 방법론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거나 개척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연구되지 못했던 여러 분야를 선구적으로 연구했고, 한국교회의 기원부터 해방 이후 교회 현실의 문제까지 연구와 재 해석, 사실규명, 사실의 의미 석명 등을 진행했는데 예를 들면 민경배 박사가 연구했던 '로버트 토마스: 한국 초기 선교사의 한 유형과 동서 교섭의 문제' 등이 그러하다고 밝혔다. 한국 기독교의 시원을 서구형 기독교와 미국형의 교파형 선교로 설명하거나 역사환경과 신앙행태의 구조적 차이를 석명하는 역사지리학, 한국교회 찬송가사, 기독교 신앙과 민족문제에 대한 접근 등의 연구방법론은 모두 민경배 박사가 개척한 분야라고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 저 「교회와 민족」에 수록된 '한국 근대 문화와 기독교의 형태 및 그 영향범위'를 이 박사는 살피면서 기독교 접촉의 단계를 넘은 수용 및 토착화의 과정을 연구한 선구적 연구형태였고, 여기서 서북형(黃平道, 체제에서 소외된 서북지방 특유의 종교적 심정)과 기청형(畿淸, 京忠道, 유교 양반의 지식인 계층의 존왕적 충성)이라는 두가지 신앙 형태 혹은 수용 배경을 제시하고, 이것을 민족운동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했으며, 이런 구분은 이미 송창근과 김린서 등에서 보이지만 민 박사는 이를 실증적으로 체계적으로 도식화했다는 공로를 이 박사는 설명하면서 이런 분석의 틀 자체가 선구적 시론이었고, 후학들의 발전적 연구의 토대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민 박사의 저술 「한국기독교회사」는 한국교회 역사 최초의 교본적 통사였으며, 여러 신학교육기관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는데 1968년 출간해, 1972년 증보판, 1982년 개정판, 1993년 증보판, 2007년 순한글판으로 발간되는 등 결국 690쪽의 대작으로 발전되었다고 밝혔다. 이전에도 이런 류의 연구를 백낙준, 김양선, 정인과, 장정심, 변종호 등이 진행했지만 한국기독교회사의 체계적 통사로서는 볼 수 없었고, 민경배 교수의 것은 근대 이전의 기독교의 접촉부터 한국전쟁과 1960년대까지의 한국교회사에 대한 체계적 최초의 통사였다고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가 민족교회 또는 민족교회론을 주창함으로서 당대 주류였던 선교확장사에 대한 반대급부가 되어 논란이 되었고, 민족이라는 말에도 어감상 오해를 받았던 부분들이 있었다고 이상규 박사는 밝히고, 민 박사는 한국교회를 '민족교회'로, 한국교회사를 '민족교회형성사'로 인식함으로서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주체적으로 기술했다고 평가했다. 민 박사 이전의 기존 한국교회사의 연구는 '선교사적' 연구로서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가 주체가 되고, 파송국의 자료를 의존한 역사기술이었지만 민 박사는 선교사 파송국 교회의 연장이 아닌 우리가 주체가 되어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민족교회사'로서 인식했고, 이는 새로운 연구접근방식이고 독창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민 박사의 '민족', '민족교회', '민족교회 형성론'은 배타적 민족주의나 문화민족주의, 혈통에 근거한 개념이 아니라 언어나 역사, 문화,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민족공동체로서의 교회이며, 역사와 고난을 함께 공유한 교회라는 점에서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민 박사는 각기 다른 선교부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어도 교파 중심의 교회가 아닌 민족공동체의 하나의 연합된 교회를 민족교회로 파악하고 있고, 탈 서양 선교사를 지향하되 친일로의 경도가 아니며, 친 동향을 지향하되 반 선교사로 경도되지 않는 성격이라고 이상규 박사는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의 교회관은 '신도들의 세계적인 공동체'라는 개념을 상정하고, 기독교회사는 그리스도라는 뚜렸한 역사상의 인물과 교회라는 신도들의 세계적인 공동체, 사(史)라는 현저한 개념들을 다루고 있으며,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도, 완전할 수도 없다는 명제 속에 어느 한 측에서 반대측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무리하며, 완전할 수가 없을 수 밖에 없는 특정 논리를 들이대며 교회분열을 일삼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고 분석하고, 민 박사는 순결과 연합이라는 두 축의 선택상황이라면 연합에 더욱 의미를 둔 것이라고 이 박사는 밝혔다. 한국교회사를 다루며 '외연과 내연'이라는 신앙현상학을 개발해 역사연구의 틀을 제시한 것이 민경배 박사의 가장 특별한 공로라면서 그가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기간 동안 순수한 신앙의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민족운동과 도덕운동, 사회변혁운동으로 나타나 한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는 역사의 틀이라고 이 박사는 정의했다. 이 연구 틀은 한국 뿐 아니라 모든 나라와 시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원리라고 했다. 그의 저서 「민족과 교회(1981년)」 등에 게재된 논문들에 '내연과 외연'이라는 상관구조를 해명하ㅁ녀서 1903~1907년 한국교회 부흥은 신앙의 내연 구도였고, 1919년 이래 민족독립운동으로 외연 되었으며, 또 다시 김익두나 이용도의 신앙부흥운동을 통해 내연화하고, 1935년 일제의 가혹한 군국주의적 전시체제 하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됨에 따라 마지막 저항으로 외연화 되는 구조인데 결과적으로 신앙운동이 민족운동의 동력이 되는 입체적인 해석방법이라고 이 박사는 일례를 들었다. 민경배 박사의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내연과 외연의 현상학은 기독교인의 현존과 존재 양식, 사회 참여 양식에 대한 역사적 실례를 제시하고, 즉 그리스도인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신앙고백적 삶을 추구하면 결과적으로 사회변혁적 역할도 감당하게된다는 연구의 흐름이라고 이 박사는 설명했댜. 이 외연과 내연의 연구방법론은 현재도 민 박사의 제자들과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에서 지속적으로 사용 및 적용하고 있는 방식으로 알려졌다. 이상규 박사는 논문의 말미에 "우리가 배워하 할 것은 그의 저술이나 학문적 결실만은 아닐 것이다..., 학문에 대한 열정, 진리에 대한 확신, 후학들에 대한 애정,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사랑"을 주장했으며, 실제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학술활동이 아닌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성도들이 모여 성경이 시키는 교제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지하고있다. ▲ 박명수 박사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발제를 담당했다. ▲ 박명수 박사는 '민경배 교수의 한국교회사학에 나타난 "민족" 이해'라는 제목의 발제를 담당했다. 박 박사는 민족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선 단어라고 전제하고, 민족 또는 민족주의는 한국적 상황에서 외세나 제국주의에 대칭되는 차원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공산좌경세력들이 미국을 향해 제국의 프레임으로 보고, 미국에서 온 서양 기독교 세력도 적대하려는 즉, 북한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미국을 중심한 서구문화의 전달자로서 한국 문명화에 앞장서면서 조국의 근대화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겼던 것이라고 박 박사는 평가했다. 부정적 측면으로서 좌측의 민족주의세력이 볼 때 한국교회는 민족주의에 대한 가장 큰 도전세력인 미국의 친미집단이자 반민족주의집단이라는 프레임이 형성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박 박사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원래는 개신교의 핵심 단어였다면서 기독교는 천주교와 달리 민족을 강조했는데 루터교가 독일민족주의와 손을 잡았고,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와 손을 잡는 한편 성경을 강조하느 개신교의 특징상 각국의 자국어성경을 사랑해서 개신교가 들어간 지역마다 민족의식이 함양되었다고 반박했다. 또한 민족은 한국적 상황에서도 우파의 단골개념으로서 빈부와 계급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개념으로서 서구제국주의에 맞서 국민을 단결시키는 용어라고 정의하고, 공산주의는 원래 민족을 부루주아의 용어로 이해하고, 무산의 노동자계급들이 주도하는 계급혁명의 완성을 진정한 해방이라고 주장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좌익은 계급이라는 단어보다는 민족이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계급혁명을 진행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차제에 우리는 한국교회와 민족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박 박사는 민경배 박사의 저작들에 나타난 민족 개념은 현재 일부가 통용하는 반제국주의적 이념 중심의 민족주의가 아닌 서구 기독교와 힘을 합해 민족을 부강케 만드는 현실적 개념으로서의 열린 민족주의였다고 분석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를 정리하는 차워에서 초기 한국교회사가 시도되었으며,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보고서를 중심으로 선교 역사를 정리했는데 이 같은 입장에서 초기 한국개신교사를 총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백락준박사였고, 그는 교회사는 근본적으로 선교사라는 입장에서 한국개신교사를 정리했다고 박 박사는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사를 선교사가 아닌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서술하려는 최초의 학자이며, 복음을 전해준 자의 자료 뿐 아니라 복음을 받은 자의 자료도 분석 정리했다고 박 박사는 설명했다.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을 논할 때 선교사들이 한국 민족교회의 주체가 되기는 힘들다는 한계가 있고, 그들이 한국 민족의 고통을 이해하더라도 우리의 정서를 대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박 박사의 평가다. 그렇다고 민 박가 선교사들을 배타적으로 평가한 것은 아니며,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 못하더라도 한국인의 편이지 일본제국주의의 편은 아니며, 이런 측면에서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은 "탈서양종교사(脫西洋宗敎史)하되 친일로 경도(傾倒)되지 않고, 친동양(親東洋)하되 반선교사로 기울지 않는, 강력한 탈권(脫圈) 에너지가 참된 의미의 '조선 민족의 교회'를 형성 해 나가는 저력"을 근본으로 삼고 있음을 밝혔다.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이 마치 기존의 선교사관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의 주된 비판의 대상은 소위 진보신학의 역사이해에 집중되어 있다는 평가를 했다. 민 박사의 저서 「교회와 민족(1982)」이 출판된 때 그 민족교회론이 활발히 전개되던 때는 한국 신학계에서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이 강하게 대두되던 때였고,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은 그러한 주장들에 의구심을 들어냈다고 박 박사는 밝혔다. 한국교회사를 보는 시각 중 일부가 민중사적으로 보려는 것은 조선 말의 권력 체제에서 소외된 농민층의 저항이던 동학혁명의 계승운동으로 간주하려하고, 이는 한국기독교의 사명과 역사를 민중의 저항의 한계에서만 가치를 인정하려할 때 민중의 저항력 결속의 한 에너지에 기독교가 동원되었다는 식의 주객 전도의 왜곡이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측면이라고 제시했다. 민경배 박사의 민족은 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민족공동체이지 어떤 특정 계급을 배제하려나 지칭하려는 계급공동체가 아니라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민 박사는 한국적 신학으로 한국교회사를 바라보려는 시각들에 지나치게 보수적인 시각을 갖은 나머지 한국교회사가 선교사들에게 굴종된 역사이므로 무가치하고, 새롭게 한국인의 신학을 만들어야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초기 한국교회사는 무의한 잘못된 역사로 보여질 것을 우려하는 측면도 언급되었다. 박 박사는 민경배 박사에게 민족교회는 선교사와 대칭 개념이 아니며, 그는 교회의 역사성과 보편성을 믿기에 교회론을 강조하는 이유도 되는데 그에게 교회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성례전에 참여하는 보편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의 민족교회론은 보편교회와 대칭되는 개념을 갖고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편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어떻게 한국교회가 주체적으로 소화했는가를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개신교는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미국 개신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가 제국주의적 선교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러한 고종은 이러한 당시 개신교의 선교사들을 등에 업고 조선 민족을 위협하는 세력들로부터 보호받으려고 했기에 한국 기독교를 서구 제국주의와 동일선상에 둠은 몰 이해한 일이라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박 박사는 진보주의적 교회사가들 상당수는 선교사를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교회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제국의 침략을 발견하려는 경향을 보였지만 사실 당시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아닌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침략에서 조선을 지켜줄 세력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에 대해 민경배 교수는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가 기여했다는 입장인데 민족주의라는 서구적 개념은 국민 각자가 주인 대접을 받는 민주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개신교가 조선에 등장하면서부터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에 거대한 에너지로 봤다고 박 박사는 평가했다. 조선의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방법은 스스로 전도하고, 자립하며, 통치하는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사용했고, 이것은 책임적 시민을 양성함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종교적인 것 외에도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교육과 경제 독립을 위한 실업교육에 앞섰는데 본래 자립적인 서북사람들은 기독교정신으로 무장해 민족산업을 형성함에 앞장 섰고, 이런 배경으로 근대적 의미의 시민의식을 진 민족운동을 벌일 수 있는 집단이 바로 개신교였고, 독노회를 1907년에 총회를 1912년에 조직함으로서 전국조직망을 갖춘 상태에서 3.1운동을 맞이해 전국적인 독립운동까지 기여했던 애국의식, 책임의식 등의 발로였다고 보는 것이 민경배 박사의 지론이었다고 박 박사는 평가하고, 민경배 박사의 민족교회는 체험적 신앙을 내연으로 해서 한국교회의 반경을 외연으로 확대해가는 복음주의적 교회임을 언급했다. ▲ 류금주 박사는 민경배 박사에게 교육받으며 습득한 교회사학 연구의 방법론을 설명했다. ▲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는 민경배 박사의 직계 제자로서 그에게서 수학했던 역사연구방법론인 '민경배의 한국교회사 서울의 구도: 신앙 내연(內燃)-외연(外延)'을 발제했다. 민경배 박사의 교회사를 보는 시각에서 내연(燃)은 불탄다는 것이고, 외연(延)은 이어지진다는 뜻으로서 이는 곧 신앙이 안에서 불타면 그 에너지가 반드시 바깥으로 나오기 마련이라는 구도라고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는 1934년 생으로서 당시에는 일제 치하로 나라가 없던 시절이었고, 출생된 해의 한국교회는 선교 50주년이었으며, 한국전쟁 때는 공산정권의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월남했고, 수도 서울에 정착해 교회와 조국의 근대화와 발전상을 모두 경험한 교회사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모두 경험한 교회사 박물관 급의 유능한 교회사학자라는 설명을 했다. 류 박사는 민경배 박사가 한국교회사학을 연구해 온 것은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로 개화기부터 근세, 현대까지 한국의 모든 역사와 문화, 학문에 영향을 미친 것은 기독교였음을 체험했고, 한국교회가 잘 됨으로서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 전세계에 밝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한국교회사를 연구함에 있어 복음과 교회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되었던 것이 큰 동기였다는 방향으로 발제를 이어갔다. 민 박사의 교회사에 대한 사상은 연세대학교에서 평생을 교회사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게 했고, 한국교회사학연구원(초대원장 민경배, 이사장 박옥선)을 지난 1997년 6월 창립해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교회사학을 연구하고, 신앙과 교회사를 기반한 교제를 진행해오기도 했으며, 동 연구원은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동북아 3국의 교회사가들을 모아 '동북아시독교사학협의회'를 구성해 10년간 교류해오는 등 사명을 감당했다고 류 박사는 회고했다. 민경배 박사는 11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역사방법론을 지난 2018년 약 1년간 연구발표했다면서 동 방법론은 정량론, 내연외연과 신앙현상학, 신앙지리학, 실체론, 그림처럼 아름답다, 질문-에듀스, 전역사체계화, 입체론, 유기역사론, 역사-시기 완충론, 역사-등거리론 등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류 박사는 실체론에 대해 사크라멘토 곧 성례는 예수그리스도의 역사 통치의 역사내 지점으로서 역사는 허상이 아닌 예수께서 실재 임하셔서 다스린다는 실체를 말함이라고 설명했다. 역사-등거리론은 역사는 하나님의 경륜의 집행 장소로서 각 시대와 각 존재에 독자적 사명을 분여하심으로서 역사를 경륜해가시는 것이며, 사명 받은 존재는 자신의 영역에서 주어진 사명과 기업, 자산과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다는 개념임을 설명했다. 한국교회사를 정리함에 백낙준 박사는 선교사관, 주재용 박사는 민중사관, 민경배 박사는 민족사관이라고 구분하고, 선교사관과 민중사관은 선교의 입장 또는 민중의 입장으로서 사관을 정해놓고 고찰하는 연역적 측면이 있고, 민경배 박사는 연구해보니 신앙과 함께 민족이 각 시대의 실체로 부각되었다는(1880~1960년대 한정) 귀납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류 박사는 분석했다. 정확히는 민경배 박사의 민족사관은 민족교회사관으로서 독자적인 것이 아닌 교회와의 관계에서 고찰되는 것이며, 그의 민족교회사관을 1960년까지 한정하는 이유는 그 '민족'이라는 말이 (특정 시대부터) 기독교회와 무관하게 사용되고, 용법 또한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교회사연구방법론에 수학적 단어인 '함수'라는 개념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류 박사는 이 역학 함수관계를 교회를 중심으로 4방향에서 선교사와 신앙, 일본, 민족, 초월적, 서양적, 동양적, 역사적 요소가 상반되게 위치하는 방식임을 설명했다. 즉 신앙은 초월적 차원에서 이해되고, 민족은 역사적 차원에서 이해, 친선교사는 반일을 전제하고, 친일을 포함한 동양적 기독교는 반선교사적 경향으로서 이를 요약하면 신앙과 민족이 상반되고, 선교사와 일본이 상반되는 방식으로 시간 내에서 교회와 신앙, 세상은 영향을 주고 받은 방식이라고 류 박사는 요약했다. 그 상호작용은 늘 교회와 민족은 한국사에서 초월적 신앙 차원에서도 묘하게 긍정적 교섭이 확인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내연과 외연의 상관관계에 있어 신앙이 안에서 불타오르면 자동적으로 바깥으로 영향이 이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신앙이 먼저 내면에서 불타오른다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은 신앙의 영역이었지만 시기적으로 을사늑약의 주권상실 시기였고, 신앙 자체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 번지는데 이 때 한국교회가 3.1운동을 주도하게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원점, 하나님께 대한 충성 그 자체는 역학상 결과적으로 일제의 국체에 대한 민족의 저항 에너지와 동일시되는 그런 관계라는 설명이다. 신앙의 현상학은 안에서 불타오른 신앙이 외연으로 번질 때 각자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현상화하는 것으로서 같은 신앙 에너지가 신앙운동자체로 발산도 하지만 때로는 도덕 운동, 민족 운동, 사회 변혁력으로 작동하는 것인데 故 주기철 목사는 독립운동을 외치던 사람은 아니었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함으로서 일본 제국의 핵심인 천황 숭배에 저항하고, 일본 정부의 국체에 정면 도전하는 '반일 민족주의자'로서 현상화한 그러한 관계라고 류 박사는 밝혔다. 민경배 박사의 역사관은 나무와 열매 중 나무가 우선하고, 신앙이 선행해야 실천이 이뤄지거나 안에서 신앙이 불타올라야 저절로 외부로 들어나거나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그 가지인 성도들이 자연히 열매를 맺는 내연과 외연의 구도, 직접성, 자동성 등은 지극히 성경적인 역사관이라고 류 박사는 밝혔다. 류금주 박사는 내연과 무관한 민족운동은 한국 교회사의 주류에서 사라졌고, 민족에 대한 주목이 1960년대까지로 한정한다고 해도 민경배 박사의 내연과 외연, 신앙의 현상학 등 다양한 교회사연구의 구도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여전히 적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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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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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연구 기틀 개척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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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韓·日·中 및 전 세계의 핵심
- ▲ 민경배 박사가 발제를 담당했다. ▲ 직전원장 권평 박사가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이하 한교사)은 민경배 박사(연세대 명예교수)를 초청해 '한일관계사 서론'의 강연을 맡겼고, 민 박사는 향후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아시아국가와 전 세계의 모든 역사와 정치, 문화 등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경배 박사는 지난 6월 6일 진행된 한교사 월례발표회에서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했던 1900년대 일본에서는 군벌세력과 문벌세력이 주도권을 다투던 시기 였다면서 이 때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 군대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더니 가능성이 보인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일본을 근대화시킨 세력은 군벌과 문벌이었으며, 전자는 야마가다 아리또모가 대표적 인물이었고, 후자는 이토 히로부미가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밝혔다. 민 박사는 이토는 조선을 다스릴 총독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인물로서 조선을 합병하는 것을 반대했던 인물이며, 최대한의 자치권을 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을 수 차례 가연한 바 있으며, 이날은 이토가 조선의 이현 왕세자를 모셔다가 좋은 왕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좋은 학교를 다니도록 주선한 인물이었지만 안중근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민 박사는 일본인 주류의 뿌리가 한국민족 출신자가 상당히 많았다는 설명을 했다. 일본의 50대 천황 '간부덴노(황무천황)'의 모친이 백제 공주였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뉴스위크 2002년 3월 18일자의 보도를 제시하고, 백제 공주의 피가 천황가에 있다는 것은 한국인으로 볼 수도 있다는 평가를 했다. 임진왜란(1592년 발발)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 뿐 아니라 한중일 3국의 관계를 재 정립한 측면도 있다고 밝혔다. 전란 당시 일본은 한국인 약 10만명을 데려갔는데 이들은 유능하거나 인물이 출중한 여성 등 당대 제일의 엘리트들이었는데 만약 무능했다면 잡아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후손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일으킨 사람들이었다고 밝혔다. 일본 구주 후꾸오까의 사쯔마와 조슈의 출신자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주동했는데 야마가다 아리또모와 총리를 거친 이토 히로부미와 사또 에이사쿠 및 아베신조와 기시 노브스께 등이 모두 사쯔마파라고 설명했다. 아베 신조의 경우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본인이 한국계임을 고백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국력이 증대되자 2차 대전을 일으켰는데 이 때 전후에 활약한 사람이 일본 외무상인 도고 시게나리가 있었고, 이 또한 사쯔마 출신자였다는 점을 들어 한국교회사와 한국 그리스도교를 연구함에 있어 한국적 상황도 중요하지만 일본이나 중국 등의 주변국에 얽힌 이야기들도 동등하게 다뤄야 입체적인 연구가 되고, 인류사회와 그리스도교를 위한 기여자가 되는 방식의 자세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제 치하 시절 성탄절을 맞으면 성탄절 전야에 교회마다 성극을 공연했는데 대부분은 아기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아닌 출애굽 이야기를 다뤘다고 한다. 당시 모든 교회가 모세의 홍해 건넘을 다룬 것은 표면적으로는 신앙의 이야기 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민족해방을 염원한 애국적인 사건들이었다고 분석했다. 김장호 씨가 1918년 자유주의신학적으로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은 사실은 갈대밭을 건넌 것이라고 한 것을 두고 민 박사는 민족 반역적인 발언이라고 평가하고,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그를 즉각적으로 처단했다고 밝혔다. 윌리암 커가 김장호의 배경이었다고 민 박사는 설명했는데 북장로교는 그를 즉각 잘라냈지만 이후 일본정부가 채용해 경성제국대에서 성경을 가르치도록 배려했다고 밝혔다. 커는 이후 한국 동란 시절 맥아더 밑에 들어가 한국군종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게 되는데 그의 인생을 볼 때 비판받을 일도 있지만 그리스도교를 위해 기여한 일들도 많기에 역사연구자는 역사를 접할 때 단편적이거나 표면적인 것만 보지 말고 좀 더 다양하고, 입체적인 내용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조선에서 한일간에 정미조약이 비준 될 때인 1907년은 왕은 그대로 두되 모든 행정은 일본인이 주도하는 이른바 나라가 망한 시기였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전국적 조직인 교단을 확립했는데 독노회 문서의 첫장은 "천하 만국에 복음을 전한다"라고 언급되어 있다며, 처참하게 나라가 망한 순간에도 한국교회는 세계만국기를 걸었고, 세계복음을 언급하는 현실을 초월하는 정신세계, 신앙세계를 가졌었다고 설명했다. 맥아더 장군이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 미드웨이호에서 항복조인식을 할 때 전 일본국민들에게 했던 연설은 "오늘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신학적이다"라고 밝혔고, 파레드 자카리는 8개의 박사학위 소지자였는데 "앞으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이다"라고 했고, 일본 최고의 직장으로 일컬어져 수재가 모이는 산께이신문의 신입사원들이 전세계를 유랑하고 써낸 보고서에 역시 "앞으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이라는 내용으로 논문집을 만들고, 시바 료따로(일본 최고의 문학가, 사상가)는 "세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유와 인권, 정의의 개념은 기독교에만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증거를 민경배 박사는 제시하고, 한교사 안에서 만나는 모든 회원들은 이 같은 학술적인 생각은 갖되, 우선은 서로간의 교통과 친교에 매진해 상호간에 협력과 도움을 주는 관계를 지속하자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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