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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장례식 26일 엄수…23일부터 조문 시작
교황 장례식 26일 엄수…23일부터 조문 시작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 미사가 26일 오전 10시(한국시간 오후 5시)에 거행된다고 22일 교황청이 발표했다. 미사 집전은 추기경단을 대표하는 조반니 바티스타 레 수석 추기경이 한다. 장례미사에는 전 세계의 총대주교, 추기경, 대주교, 주교 등은 물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해외 주요 정상도 참석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장례 미사에 이용훈 주교, 염수정 추기경, 임민균 신부가 참가한다고 22일 발표했다. 현재 바티칸 내 교황의 거처인 산타 마르타의 집 경당(예배당)에 있는 교황의 시신은 23일 오전 9시(한국시간 오후 4시)에 성베드로 대성전으로 운구될 예정이다. 이날부터 일반 대중 등 외부인의 조문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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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쉬어라" 경고 안 들었다... '마지막' 직감한 교황의 선택
"두 달 쉬어라" 경고 안 들었다... '마지막' 직감한 교황의 선택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88)이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마지막을 더욱 열심히 산 것으로 보인다고 교황청 소식통이 밝혔다. AFP통신에 따르면 익명을 요구한 교황청 소식통은 “교황은 군중과 만나며 끝까지 가길 원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소식통은 교황이 “백성의 교황이었다”며 “그는 세상과 단절된 채 병원에서 죽지 않았다. 그는 돌아와 축복하고 부활절을 맞이할 시간이 있었다. 우리 모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폐렴으로 5주간 입원한 후 지난달 3월 23일 퇴원했다. 2주 만에 공식 석상에 복귀한 교황은 퇴원 한 달 만에 끝내 서거했다. 담당 의사들은 퇴원하는 교황에게 ‘두 달 정도 회복기가 필요하다’고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의 치료를 맡은 세르지오 알피에리 박사에 따르면 의료진은 치료 당시 교황의 폐렴 증세가 악화돼 사망까지도 고려했다고 한다. 바티칸 고위 관계자였던 교황의 측근 미하엘 체르니 추기경은 “교황에게 완전한 휴식은 치유가 아니었다. 교황은 회복과 주교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이달 10일 영국의 찰스 3세 국왕을 만나며 건강이 회복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교황청 내부에서는 이때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의 기력이 쇠약해지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교황은 서거 전 즉흥적으로 미사 등 공식 석상에 나타나는 것은 물론 수감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로마의 교도소로 외출하기도 했다. 바티칸 소식통은 교황이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를 이해한다며 “교황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중요한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교황은 서거 전날인 20일에도 JD 밴스 미국 부통령을 면담하고 부활절을 맞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자들을 만나며 바쁜 일정을 보냈다. 부활절 미사를 직접 집전하지는 못했지만 미사 말미에 특별 강복을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깜짝 등장했다. AFP는 이때 교황의 모습이 지쳐 보였다고 했다. 그 후 교황은 하얀 교황 전용차에 앉아 “교황 프란치스코”를 연호하는 함성 속에 광장을 한 바퀴 돌았다. AFP는 교황이 힘없이 손을 들어 흔들고, 가끔 멈춰 서서 아기들을 축복하면서 “12년 재위의 마지막 장을 썼다”고 전했고, 텔레그래프는 “교황이 마지막 24시간 동안 의사들에게 저항한 방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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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12일째 입원에…후계 구도에 쏠리는 눈
프란치스코 교황, 12일째 입원에…후계 구도에 쏠리는 눈 교황 사임 또는 선종 시 차기 교황 선출추기경 138명 중 3분의 2 찬성 얻어야 프란치스코 교황이 25일(현지 시각) 기준, 12일째 입원 중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주일간 지속된 기관지염이 악화해 지난 14일부터 폐렴으로 이탈리아 로마의 아고스티노 제멜리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양쪽 폐에는 모두 폐렴이 생겼고, 혈소판 감소에 이은 신부전증을 앓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2일 밤부터는 천식성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는 등 병세가 위중하다. 올해 89세로 고령이라는 점도 회복을 더디게 한다. 이에 로마 가톨릭교회 내부에선 조심스럽게 후계 구도를 짜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차기 교황은 현 교황의 사임 또는 선종을 요인으로 바뀐다.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13년, 고령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임했다. 교황이 선종한 경우라면 선종일로부터 15~20일 이내에 추기경단의 수장인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이 전 세계 추기경을 로마로 소집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후임자를 선출하는 이른바 ‘콘클라베(conclave)’를 연다. 콘클라베의 사전적 의미는 ‘열쇠로 잠근다’는 뜻으로 ‘외부와 차단된 교황 선거 장소’를 뜻한다. 실제로 교황의 선종이나 사임으로 교황이 공석이 되면 길게는 20일까지 전 세계 추기경이 로마에 도착하기를 기다린 다음 ‘교황 선거 봉쇄 회합’이 시작된다. 현재 추기경은 253명으로, 80세 이상은 선거인단이 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올해 기준 138명의 추기경만이 교황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추기경들의 회합 장소는 바티칸 시스티나 소성당이며, 선거인 추기경들의 숙소는 인근 성녀 마르타의 집으로 제한된다. 이 장소는 선출된 교황이 공식 발표될 때까지 폐쇄되며 모든 선거인 추기경은 비밀 유지 서약을 하고 비밀 투표로 투표해야 한다. 새 교황을 선출하려면 선거인단 3분의 2(92명)의 찬성이 필요하다. 이에 추기경들은 3분의 2가 찬성하는 교황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투표한다. 투표가 끝날 때마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볼 수 있는 굴뚝에서 연기가 나온다. 선거인단 3분의 2를 얻어 새 교황이 선출됐다면 흰 연기가 올라온다. 단, 선거인단 3분의 2를 얻지 못한 채로 투표가 끝나면 검은색 연기가 올라온다. 이후 선출된 이에게 교황직을 수락할지 묻고, 수락한다면 교황으로 불리고 싶은 이름을 묻는 절차가 뒤따른다. 이후 새로 선출된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코니로 향한다. 선임 추기경이 라틴어로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우리에게 교황이 있다)’이라고 선언하면 교황 선출 절차가 마무리된다. ◇ 가톨릭교회 내 보수·진보 추기경 6명이 교황 후보 현재 유력한 교황 후보자는 6명 정도다. 영국 일단 더타임스, 텔레그래프 등은 프리돌린 암봉고 베순구 추기경(65),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70),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76), 피터 에르도 추기경(72),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67), 게르하르트 뮬러 추기경(78)을 후보로 꼽았다. 더타임스는 2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임하거나 선종하면 가톨릭교회 내 보수 진영에서 후임 교황을 내려는 움직임이 생길 수 있다고 봤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애자를 포용할 만큼 진보적인 인물로 이에 반대하는 보수 진영에서 차기 교황을 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보수적으로 꼽히는 추기경은 버크 추기경과 뮬러 추기경이다. 2010년 추기경이 된 버크 추기경은 미국 출신으로 전통적인 라틴식 미사를 지지하는 보수적 인물이다. 버크 추기경은 지금까지 교회법, 신학관 등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판했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버크 추기경의 교황청 숙소와 연금 혜택을 박탈하기도 했다. 뮬러 추기경 역시 보수적인 인물로 전임 베네딕토 16세의 측근이다. 뮬러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정책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반된다는 내용을 담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7년 뮬러 추기경을 신앙교리부 장관직에서 해임했다. 유럽 주교협의회 의장을 지낸 에르도 추기경 역시 보수적인 인물로 꼽힌다. 에르도 추기경은 이혼하고 재혼한 가톨릭 신도가 성찬을 받는 것을 허용하는 것에 반대하기도 했다. 반대로 차기 교황 후보 중 진보 성향 인물도 있다. 파롤린 추기경은 가톨릭교회 이인자인 교황청 국무원장으로 이탈리아 출신이다. 파롤린 추기경은 10년 이상 프란치스코 교황과 긴밀하게 일했고 2014년 추기경직에 올랐다. 필리핀 출신으로 ‘아시아의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불리는 타글레 추기경도 진보 성향이다. 2012년 추기경이 된 타글레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동성애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베순구 추기경은 아프리카 가톨릭교회에서 목소리를 내는 인물로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주교회의 심포지엄 회장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9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한편, 파롤린 추기경은 전날부터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의 쾌유를 기원하는 철야 기도회를 이끌고 있다. 이날 기도회에는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수천 명의 신자가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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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 염원이 하늘에 닿아 기적 일어나길”…바티칸은 지금 기도로 가득하다
“세계인 염원이 하늘에 닿아 기적 일어나길”…바티칸은 지금 기도로 가득하다 교황 위독 소식에 신자 몰리는 바티칸 르포 프란치스코 교황이 11일째 입원 중인 아고스티노 제멜리 대학병원은 로마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보는 ‘몬테 마리오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24일 오전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 근처에서 차를 타고 제멜리 병원을 향했다. 복잡한 로마 시내를 벗어나, 꼬불꼬불한 언덕 길을 10분 넘게 한참을 올라가서야 병원에 도착했다. 이 병원 본관 앞에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석상 앞엔 벌써부터 전 세계에서 몰려든 기자 수십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교황 위독’ 소식에 이곳으로 쏠린 세계인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피격당해 이곳에 실려온 것을 시작으로 2005년 선종하기까지 이 병원에 10번이나 입원하며 깊은 인연을 맺었다. 석상 주변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복을 기원하는 초와 편지, 꽃들이 쌓여 있었다. 유모차에 아이를 데리고 와 석상 앞에 초를 올린 안나 로사(36) 씨는 “교황님이 이렇게 오래 입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교황은 2021년 7월 이 병원에서 결장 협착증 수술을 받고 11일간 입원했었다. 교황의 병실은 이 병원 특별 병동의 10층에 있다. 한 이탈리아 여성은 기자들을 붙잡고 건물 10층을 가르키며 “교황님의 병실 창문이 어느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석상 인근에서 기도를 하던 인도인 신자 아니타(40)씨는 “교황님은 항상 우리 같은 소수자를 먼저 생각하는 분이셨다”며 “내 기도가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해 일부러 찾아왔다”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후 백인 남성 위주의 가톨릭 교회를 여성과 성소수자, 유색인종에 더 열린 교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올해 89세인 교황은 현재 양쪽 폐에 모두 폐렴이 생긴 상황에서 혈소판 감소에 이은 가벼운 신부전증마저 겪고 있다. 의료진은 폐의 감염이 패혈증으로, 이어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이어지는 사태를 막으려 노력 중이다. 이탈리아 매체들은 “의료진이 강력한 항생제 치료와 함께 수혈도 했다”며 “교황의 병세가 악화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교황은 스스로 호흡이 가능하지만, 코를 통한 호스로 산소를 계속 주입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교황청은 이날 “교황은 여전히 위독한 상태지만 다소 호전되고 있고, 오후에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본당 신부에게 전화도 걸었다”고 발표했다. 병원 의료진은 21일 밤 브리핑을 마지막으로 교황의 건강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이후 교황청을 통해서만 하루에 한두번 짤막한 발표가 나오고 있다. 교황청은 22일 저녁엔 “교황은 여전히 깨어있고, 안락의자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고 했고, 23일 아침엔 “교황은 평화로운(peaceful) 밤을 보냈다”고 했다. 이어서 24일 아침 “교황은 간 밤에 잘 잤고, 휴식(rest)을 취하고 있다. 치료가 계속되고 있다”라고 전했다. 공개된 정보가 극히 적다보니, 교황의 상태에 대한 관측은 엇갈리고 있다. 이탈리아 일간 코리엘레델라세라는 이날 “교황의 감염 확산(패혈증)의 우려가 여전하다. 의료진의 진단은 기밀 취급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로이터와 안사 통신 등은 “교황의 의식은 또렷하고, 병실 내에서 일어나 걷기도 했다.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고, 통증도 없다”고 전했다. 이날 병원 내에 교황의 회복을 기원하는 성체조배(聖體朝拜)와 특별미사가 열렸다. 제멜리 병원 원목인 눈치오 코라오 신부는 이 자리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 모든 희망에 대한 희망인 ‘스페스 콘트라 스펨(Spes contra spem·희망이 없어 보이는 최악의 상황에도 희망을 놓지 않음)’을 간구한다”고 했다. 미사가 끝난 뒤에도 남아 연신 기도를 올리던 조반니(55)씨는 “교황이 반드시 회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전쟁과 극단적 정치로 점점 거칠어지는 세상에서 우리에겐 아직 그 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날 밤 바티칸의 성베드로 광장에서는 비가 내린 후 쌀쌀한 날씨에도 바티칸의 2인자인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바티칸 국무장관)의 집전으로 교황의 회복을 기원하는 대규모 묵주 기도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로마에 있는 약 20명의 추기경들이 모두 집결했고, 로마 교구는 물론 이탈리아와 유럽,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가톨릭 신자 수천명이 참석했다. 올해 대희년을 맞이해 바티칸 순례를 왔다는 스페인인 루이스(45)씨는 “여기 모인 세계인들의 간절한 기도가 모여 기적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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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복음화운동본부 제 52회 정기총회
▲ 대표총재 피종진 목사가 설교를 담당했다. ▲ 대표회장 김재홍 목사가 사회를 담당했다. ▲ 신임대표회장 김태곤 목사가 임명장을 수여 받고, 한국복음화운동본부를 위해 노력을 다짐했다. ▲ 신임 대표회장 김태곤 목사가 대표총재 피종진 목사에게서 깃발을 수여받았다. 사단법인 한국복음화운동본부(대표회장 김재홍 목사, 대표총재 피종진 목사)가 2025년 신년하례식 감사예배와 제 52회 정기총회를 지난 1월 9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개최하고, 김태곤 목사를 신임 대표회장으로 선출했다. 김태곤 대표회장(목사, 창조교회)는 한국복음화운동본부에서 중책을 맡은 것은 부족한 사람이라도 주님께서 들어쓰시는 것이 감사하며, 맡겨진 사명의 달성을 위해 순수복음전파를 위해 설립된 단체의 중책인 만큼 복음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동 협회의 선배들이 쌓아온 성과를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제 1부 신년하례식 감사예배를 진행했다. 김재홍 대표회장이 사회를 담당하고, 피종진 대표총재가 '위대한 전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피종진 대표회장은 한국복음화운동본부의 태생은 과거에 한국장로교회가 분열되던 시기에 한경직 목사 등 여러 목회자들이 싸움이 없이 순수하게 복음을 전할 단체를 조직하자고 해서 조직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1977년에 창립된 후 11년만에 한국교회100주년을 기념하는 집회를 개최하는 등 한국기독교에 기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밝혔다. 동 단체에 대해 모인 회원 각자가 각 교단장의 반열에 오르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며, 창립된 지 51년 된 한국복음화운동본부는 한경직 목사의 뒤를 이어 그 복음화의 정신을 살려갈 것이기에 여러분들의 기도와 참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피 목사는 출애굽기 13장 21~22절의 내용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며 홍해바닷가를 건너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질서를 지켜서 행동했다는 것이라면서 동 운동본부도 각각 회원마다 맡은 역할을 질서있게 담당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대표기도는 김봉숙 여성대표회장, 성경봉독은 문수일 다음세대회장, 특송은 김향두 목사와 도깊은 목사, 장희연 교수 등이 담당, 헌금송은 김광숙 교수의 워십과 박태상 찬양사역자가 담당, 헌금기도는 이향원 운영부총재가 담당했다. 특별기도순서는 위대한약속교회 윤재민 목사, 웃음눈물선교회 이웃음 목사, 평내순복음교회 박영수 목사, 그리스도회 증경총회장 최훈 목사, 미스바금식기도원장 서순란 목사, 주님의교회 임수연 목사 등이 담당했다. 2부 순서로 제 52회 정기총회는 여성총재 오영자 목사의 성총회를 위한 기도로 시작되었고, 대표총재 피종진 목사가 신임임원들을 임명했다. 제 52회 총회의 임원은 대표총재 피종진 목사, 총재 김원춘 목사와 새롭게 선출된 대표회장 김태곤 목사가 임명 되어 취임했다. 해외총재 김향도 목사, 여성총재 김봉숙 목사, 서울지역여성총재 임은선 목사, 여성대표회장 이향원 목사, 사무총장 김경택 목사, 회계 김현종 목사, 서기 오용도 목사, 부흥사연수원장 이재섭 목사 등도 임명했다. 제 3부 감사의 시간은 이재섭 목사(사무총장)이 진행했으며, 축시 낭독에 이수 교수, 축가시간은 바순 연주에 박보라 교수, 유수연 찬양선교사가 담당했다. 축사는 성신교회 전용만 목사, 격려사는 아세아중앙교회 김우경 목사, 개혁총회장 남보석 목사, 권면 일산능력교회 조영성 목사, 원주충만교회 한요한 목사, 축도 총재 김원춘 목사 등이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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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따라 교회가 이 땅의 희망 돼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따라 교회가 이 땅의 희망 돼야” 교회 연합기관·교단 성탄 메시지 이영훈 기하성 대표총회장 “존중과 사랑으로 손맞잡자” 한국교회 주요 연합기관과 교단들이 성탄 메시지를 통해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회개와 성찰을 촉구하고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교회가 이 땅에 희망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대표회장 김종혁 목사)은 “세계 각국에서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국내에선 12·3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안 결의가 있었다”면서 “정당들이 대립과 분열을 멈추고 불안 상황을 속히 수습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교회를 향해 “모두가 정치적 문제에 집중할 때 생업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과 병실과 거리에서 외로움에 울고 있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자”면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군인과 경찰을 격려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자”고 제안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총무 김종생 목사)는 "국회의 신속한 대응으로 다행스럽게 계엄령은 해제됐고,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리게 됐다"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정치적 혼란의 한복판에 개입하시어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전했다. 각 교단 총회장도 한국교회 성도들이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고 각자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시대적 역할을 감당해 달라고 주문했다. 김종혁 예장합동 총회장은 "소외된 이웃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며 "우리가 받은 사랑을 나누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영걸 예장통합 총회장은 "전쟁뿐 아니라 지진, 홍수, 가뭄 등 여러 가지 자연재해로 가족과 재산, 일터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이들에게도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함께하시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이어 "비상계엄 선포 사태가 사회적 혼란을 가져왔지만 갈등과 불신이 치유되고, 참된 정의와 평화가 임하기를 함께 기도하자"고 권면했다. 이영훈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대표총회장은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정치가 위기상황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했는지 참회하며 깊은 반성과 기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정치권은 사회적 안정과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한국교회 성도들은 존중과 사랑으로 손을 맞잡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김정석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이규환(예장백석) 박상규(한국기독교장로회) 류승동(기독교대한성결교회) 이욥(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등이 '성탄의 기쁨과 희망, 위로와 소망'을 주제로 메시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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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장례식 26일 엄수…23일부터 조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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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장례식 26일 엄수…23일부터 조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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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쉬어라" 경고 안 들었다... '마지막' 직감한 교황의 선택
- "두 달 쉬어라" 경고 안 들었다... '마지막' 직감한 교황의 선택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88)이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마지막을 더욱 열심히 산 것으로 보인다고 교황청 소식통이 밝혔다. AFP통신에 따르면 익명을 요구한 교황청 소식통은 “교황은 군중과 만나며 끝까지 가길 원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소식통은 교황이 “백성의 교황이었다”며 “그는 세상과 단절된 채 병원에서 죽지 않았다. 그는 돌아와 축복하고 부활절을 맞이할 시간이 있었다. 우리 모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폐렴으로 5주간 입원한 후 지난달 3월 23일 퇴원했다. 2주 만에 공식 석상에 복귀한 교황은 퇴원 한 달 만에 끝내 서거했다. 담당 의사들은 퇴원하는 교황에게 ‘두 달 정도 회복기가 필요하다’고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의 치료를 맡은 세르지오 알피에리 박사에 따르면 의료진은 치료 당시 교황의 폐렴 증세가 악화돼 사망까지도 고려했다고 한다. 바티칸 고위 관계자였던 교황의 측근 미하엘 체르니 추기경은 “교황에게 완전한 휴식은 치유가 아니었다. 교황은 회복과 주교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이달 10일 영국의 찰스 3세 국왕을 만나며 건강이 회복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교황청 내부에서는 이때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의 기력이 쇠약해지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교황은 서거 전 즉흥적으로 미사 등 공식 석상에 나타나는 것은 물론 수감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로마의 교도소로 외출하기도 했다. 바티칸 소식통은 교황이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를 이해한다며 “교황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중요한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교황은 서거 전날인 20일에도 JD 밴스 미국 부통령을 면담하고 부활절을 맞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자들을 만나며 바쁜 일정을 보냈다. 부활절 미사를 직접 집전하지는 못했지만 미사 말미에 특별 강복을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깜짝 등장했다. AFP는 이때 교황의 모습이 지쳐 보였다고 했다. 그 후 교황은 하얀 교황 전용차에 앉아 “교황 프란치스코”를 연호하는 함성 속에 광장을 한 바퀴 돌았다. AFP는 교황이 힘없이 손을 들어 흔들고, 가끔 멈춰 서서 아기들을 축복하면서 “12년 재위의 마지막 장을 썼다”고 전했고, 텔레그래프는 “교황이 마지막 24시간 동안 의사들에게 저항한 방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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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쉬어라" 경고 안 들었다... '마지막' 직감한 교황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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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은 그리스도교로 인함
- ▲ 류금주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한국 기독교 선교의 최대 열매'라는 제목의 주 발제를 담당했다. ▲ 유정우 박사는 논찬을 담당했다. ▲ 조점숙 박사는 발제회의 세미나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법인이사장 민경배 박사, 원장 류금주 박사, 이하 한교사)은 지난 3월 6일 제 312회 월례발제회를 서현교회당에서 진행했고, 주 발제를 담당한 류금주 원장은 올해부터 오는 2028년까지의 중장기 세미나 주제를 확정했고, 그 첫째로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사로 시작해 내년부터 성경의 역사관, 시대별 한국 교회사, 한국 현대사와 기독교 등을 오는 2028년까지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류금주 박사는 이날 발표회에서 '대한민국 건국-한국 기독교 선교의 최대 열매'라는 제목의 발제문을 통해 1900년도 일본제국은 조선의 주권을 빼았았으며, 주한 해외선교사들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후 독립과 대한민국의 건국이 1948년 이뤄졌기에 이는 하나님이 세계선교를 위해 한국에 큰 선물을 주신 것이며, 당연히 한교사의 모든 연구는 그 관점에서 이뤄져야 함을 강조했다. 류 박사는 한교사가 올해 2025년부터 2028년까지 세미나 및 연구주제가 결정되었다면서 2025년에는 대한민국 건국사, 2026년은 성경의 역사관, 2027년은 시대별 한국 교회사, 2028년은 한국 현대사와 기독교 등에 집중해 연구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연구방향을 정한 이유로는 1) 교회사는 신학의 한 분야로서 모든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해야하며, 2) 동 연구소의 현 이사장인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사학 연구분야의 대 석학이며, 현 한국교회사학계에서 가르치는 교수들 중 대부분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로서 그와 함께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동 연구원의 정통성과 적통성을 상징하는 것이며, 3) 현재 각 종합대학이나 신학대학 등의 신학교육현장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교수들이 점차 줄어드는 것이 현실인데 이 때 적통성을 갖고 연구한 동 연구소의 제자 등 구성원들이 긍지로소 연구하고, 후대에 계승한다는 것 등과 연관된다고 류 박사는 설명했다. 류 박사는 건국 전후사인지 해방 전후사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1945년 8월 15일이 해방일인지 광복일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면서 1945년 8월 15일에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건국했음을 밝혔다. 양동안 교수는 1945년 8월 15일부터 1949년 말까지를 해방전후사라고 부르는 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라고 표현했고, 대한민국의 건국과 의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건국 전후사'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했는데 역사적 중요성의 면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이 해방보다는 크기 때문이며, 해방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한 절차로서 건국이 미진했다면 해방의 가치도 낮아지는 등식으로 보았다고 류 박사는 설명했다. 양동일은 1945년 8월 15일이 해방일인지 광복일인지를 가름하려면 1) 광복이라는 용어의 역사, 2) 1920년대부터 사용한 '광복', 3)광복은 독립인지, 4) 해방이라는 용어의 역사적 의미, 5) 45년 8월 15일은 해방이라는 인식의 보편화, 6) 광복절에 관한 언론의 오보, 7) 독립을 뜻한 '광복'이 해방의 의미로 외곡 등의 여부를 따졌다고 한다. 양동일은 1949년 8월 15일의 기념식 명칭은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이었는데 이승만 정부가 명칭을 이처럼 정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이승만 행정부 국무회의는 49년 5월 24일 국경일에 대해 3월 1일은 삼일절, 7월 17일은 헌법공포기념일, 8월 15일은 독립기념일, 10월 3일은 개천절로 정하기로 하고, 국회에 회부했지만 국회는 이를 통과시키지 않았으나, 행정부는 48년 8월 15일을 기념함에 법 초안대로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으로 거행했으며, 국회는 9월 21일에야 국경일법을 통과시켜주면서 헌법공포기념을을 제헌절로,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수정했다는 것이 류 박사의 설명이다. 이승만 정부는 광복은 곧 독립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정계의 상식이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수용했는데 제 2회 광복절 기념식은 정부가 피난해 온 대구에서 개최되었으며, 행정부는 '제 2회 광복절 기념식'으로 명기했고, 대통령의 기념사도 '금년 8.15 경축일은 민국독립 제 2회 기념일'이라고 분명히 밝혔으나 대구매일은 광복절 기념식을 보도하며서 사이드 기사에서는 '해방 5주년 광복 2주년'으로 보도하면서도 메인 기사는 '제 5회 광복절'이라고 보도했다는 류 박사의 평가다. 류 박사는 후 행정부는 1954년 8.15 기념식 때부터 신문보도의 횟수 계산을 추종해 광복절기념식의 횟수를 계산함에 45년을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고, 이런 이유로 48년 독립을 기념해 제정된 광복절은 45년 해방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둔갑했다고 강조했다. 즉, 48년을 기준으로 해야하지만 45년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설명이다. 이후 학술계나 교과서 등에서 정확한 의미를 살려 45년 8.15해방으로 말하는 경향이 강했고, 5공화국 정권 1982년 문교부는 향후 교과서에 45년 8.15을 기술할 때 '광복'으로 기술하도록 지시했던 상황이고, 45년 8.15 해방이 광복절로 둔갑하자 원래 광복절로 제정되었던 48년 8.15는 '정부수립기념일'로 격하된 것으로 양동안의 연구를 발췌해 설명하면서 류 박사는 전적으로 동의함을 밝혔다. 민경배 박사의 「한국기독교회사」는 이 시기에 대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해방된 교회-', '해방! 1945년 8월 15일은 현대 한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날이었다'라고 기록했다면서 1945년 8월 15일은 여타 학술적인 논저와 교과서 등과 맥을 같이해 1945년 8.15해방으로 불리고 있는 실정이며, 정국의 지식인으로서 목회자로서 동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당대를 기록한 저술 속에서 1945년 8월 15일을 해방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류 박사는 강조했다. 김양선 숭실대학교 교수는 「한국기독교 해방 십년사」의 서문에 일정-해방-미군정(과도정부)-대한민국 등으로 역사의 마디를 구분했다고 한다. 김인서 목사는 「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이라는 저서의 7장에 건국약사를 다루면서 1945년 8.15해방과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을 분명히 구분했는데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사는 이승만을 빼고는 쓸 수가 없다고 봤음을 류 박사는 설명했다. 김인서가 정리한 약사는 1) 8.15 해방, 2) 이 박사 33년 만의 귀국, 3) 신탁통치 반대, 4) 건국 도상의 최대 난관, 5)건국 외교의 대성공, 6) 건국의 총선거, 7) 대한민국의 성립, 8) 자주독립을 열방에 공포했다고 열거했는데 주목되는 것은 8.15 해방과 건국 총선거, 대한민국 성립을 구분했다는 부분이다. 언더우드 2세는 「한국의 비극과 믿음」이라는 책을 통해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의 종식과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구분했으며, 1948년 유엔위원회가 사천년 역사상 처음 열린 총선을 감독했으며, 한국의 미군 군정은 한국정부의 탄생과 함께 끝났다는 기술이 있다고 류 박사는 설명했다. 류 박사는 운동권교사단체원 일부가 학생을 가르치면서 미국이 점령군으로 왔고, 식민지처럼 되었다는 주장을 펼치지만 이미 이 때 1차로 온 미군은 1949년 6월 완전히 떠난 것이었고, 6.25로 인해 다시 들어온 셈이라고 강조했다. 류금주 박사는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이래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국인들에게 베풀은 선물이고, 특히 그리스도교 대표국가인 미국의 신앙과 민주주의 등에 영향을 받아 아시아권에 대한민국이 세워진 세계선교의 전초기지로서 한국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해야하며, 이 때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은 그리스도교 5대 신학분야(조직신학, 성경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현대신학) 중 하나인 역사신학 연구 해야 하며, 정통성 및 적통성의 책임감을 갖고 연구사역을 진행해 한국교회와 손잡고 복음화를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신학적으로 접근함에 있어 한국교회사를 연구할 때 현재 일부의 경우 한국사를 전공한 이들이 한국교회사 관계의 논문을 쓰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가져야한다고 류금주 박사는 강조하며서 이는 민경배 박사의 평소 가르침이었음을 밝혔다. 민경배 박사는 한교사 뉴스레타 창간호에 교회는 다만 역사적 실체가 아니고, 신앙과 경건 그리소 섭리의 거대한 구도로 유기회돤 조직이기에 연구자의 돈독한 신앙이 요구되고, 신학적 소양과 깊이가 병행한 해석이 동반되야한다고 강조하면서 한교사가 태동된 동기를 설명했다는 점을 류 박사는 강조했다. 민경배 박사의 「역사와 신앙」에서 세상의 모든 역사는 주권자인 하나님이시라고 전제하고, 창조와 통치, 섭리, 보존 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지 그 보좌에서 결정되지 않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이 하나님의 역사 주권은 한 개인과 역사 경영이나 마찬가지로 작동하고, 개인 영혼의 길을 예정하실 뿐 아니라 전체를 섭리한다는 주장을 류 박사는 제시하고, 즉, 성경역사 전체가 구원사이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제인데 그 구원사와 이야기들이 현재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세계교회, 세속에까지 미친 영향과 구원을 향한 방향까지 연구해 한국교회가 나누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류 박사는 대한민국의 건국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경영에 있어 필수적인 섭리라면서 역사의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역사의 연호를 주전(B.C.), 주후(A.D.)로 나뉘는데 주후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Anno domini)라고 전세계가 사용하고있는 상황이며, 만국 공용의 역사 연호 체계에 대한민국이 건국하면서 편입되어진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성경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로 구분되어지며, 대한민국의 현 시대는 신약시대로 구분하고, 예수의 7대 사역(탄생, 고난, 죽음, 부활, 승천, 재림, 천년왕국) 중 바로 승천의 시대요 오순절의 시대, 교회의 시대라고 류 박사는 설명했다. 류 박사는 대한민국은 2천 년 교회 역사 중 시기는 현대교회사시기이고, 지역으로는 환태평양 시대로서 특히 현대교회사의 중심 국가인 미국의 선교사가 복음을 전해준 것이 바로 환태평양 시대의 두 주축국가로서 자리한 것임을 설명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한국 기독교선교의 최대 열매라고 류 박사는 강조했는데 대부분의 선교 역사는 일개 지역에 선교가 이뤄지면 개종자가 한명 또는 수천, 수만명의 개인들에게 전달되었을 뿐인데 대한민국에서처럼 국가로 건국된 경우는 한국만이 유일하며, 특히 한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해중 미국은 현대교회사의 출발점에서 신생한 나라이며, 그 출발은 신앙의 자유라는 의미가 함유되었던 것이 한국에서 신앙과 자유, 세계문명의 실체인 기독교서양문명을 모두 갖고왔다는 특별함을 보유했다고 한다. 류 박사는 구한말의 조선이 쇄국정책을 썻지만 문호를 개방할 수 밖에는 없었던 상황에서 친중 근대화와 친일 근대화, 친소 근대화, 친미 근대화라는 여러 갈래의 길 앞에서 친미기독교적인 서도서기(西道西器, 종교와 문화 모두 서구의 것)를 택해서 현재 전세계에서 주류문명계열에 속한 국가가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중요한 선물을 받은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아시아와 전세계를 향해 주님의 복음아래 할 일이 많다면서 이 일에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은 향후 4년간 최선의 사역을 진행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했다. ▲ 유정우 박사(증경원장)은 논찬을 담당했으며, 발제에 대해 정확하고 조리 있는 논지의 전개가 인상적이라며, 류금주 박사의 발제는 교회사학자로서 한국 현대사를 구속사관(救贖史觀)으로 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반 역사는 8.15 사건을 민족사 이해의 입장에서 일제의 속박 아래 고통받던 우리 민족이 타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난 해방사건으로 볼 수 있으며, 세계사적 사건으로 동 사건을 보면 일본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힘에 의한 잘못된 역사의 방향이 바로 잡힌 사건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유 박사는 설명했다. 그러나 세속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으로서 연결시킬 때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기 마련이며, 이러한 기독교 역사의식으로 8.15사건을 보면 우리 민족의 해방사건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사건이라고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인이시며, 참 역사의 이해는 기독교 신학에서만 가능하다면서 하나님의 계시는 절대 가공적(架空的)인 것이 아닌 역사의 지평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이어야만하고, 시간과 공간의 관계성이 없는 계시는 없기에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강조했다. 한교사는 올해 대한민국 건국사를 다룰 예정이고, 향후 4년간 중장기 세미나 주제를 제시했다며, 류금주 원장은 동 연구원의 사명을 잘 이해하고, 시대에 맞는 연구를 진행하게됨을 기쁘다고 밝혔다. 한교사의 회원들은 한국교회사학연구 분야의 태두(泰斗)요, 한교사 창시자요 설립자인 민경배 박사와 더불어 교회사학연구를 하도록 받은 사명에 대한 책임감과 대한민국 건국사의 연구에 대한 세속사의 신학화(神學化)라는 과제를 받은자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유 박사도 류금주 박사처럼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인 것은 확실하다며, 헌법이 있고 정부조직이 있기 전에는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함을 전제하고, 이를 부정하는 세력은 반 대한민국 세력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 민경배 박사(이사장, 명예원장)은 류 박사의 발제는 세계적 수준의 발제였기에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연구자들은 대한민국의 해방과 독립, 건국을 정확히 정립할 필요가 있고, 교회사학은 연구함에 있어서 한국교회사학계에스는 선교사관과 민족사관, 실증사관 등이 존재하고 있지만 믿는 자들은 신학사에 초점을 맞춰서 진행할 때 바르고 균형 있는 결과물이 나옴으로서 앞으로도 한국교회가 세계적인 장점을 갖고, 세계적인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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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은 그리스도교로 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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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신앙
- ▲ 한정열 목사는 설교를 담당했다. ▲ 원장 류금주 목사는 광고를 통해 감사를 표했다. ▲ 이사장 민경배 목사는 축도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이사장 민경배 박사, 원장 류금주 박사, 이하 하교사)은 제 312회 월례발표회를 지난 3월 6일 서현교회당에서 개최했다. 개회예배의 사회는 조점숙 목사, 설교는 한정열 목사, 축도는 민경배 목사, 광고는 류금주 목사가 담당했다. 한정열 목사는 '주님이 성산에 오르는 자'라는 제목의 설교를 마태복음 4장 23~5장 4절의 말씀에 근거해서 진행했다. 한 목사는 산상수훈의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등장하며,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제시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입증하기 위해 저술되었기에 약 60%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었다고 분석했다.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을 구주로서 믿게 된 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순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역사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랬동안 예수를 쫒았지만 아주 이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체험을 한 이후에 제자로서 온전한 신앙을 가졌고, 사역을 위한 사명감을 갖게되었던 사항을 설명하고, 구약성경의 다윗의 경우도 절박한 상황 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고, 기도의 응답은 물론 큰 복까지 받았음을 제시했다. 야곱의 경우도 자아가 철저히 깨어진 이후에야 하나님께 매달려 복을 얻었던 것을 기억하고, 한교사의 모든 회원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절박하고, 겸손하며, 애통한 마음으로 엎드리는 자가 된다면 분명한 복과 능력을 부여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 길은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로서 끝까지 겸허함을 가져야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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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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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겸손'·'순종'은 인류의 구원으로 연결
- ▲ 고사무엘 박사는 모세의 리더십 연구에 대한 발제를 담당했다. ▲ 정용 교수는 동 논문에 대한 논찬을 담당하면서 새로운 방식의 연구라는 평가를 했다. ▲ 조점숙 박사는 이날 사회를 담당했다. 고사무엘 박사는 최근 온석대학원대학교에서 성경신학분야의 박사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지난 2월 6일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이하 한교사, 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가 서현교회당에서 주최한 31회 월례발제회에서 「모세의 리더십 연구: 겸손과 순종의 신학적 패러다임」이라는 제목을 발제했고, 정용 박사(백석대학교 외래교수, 동 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동 발제에 대한 논찬을 담당했다. ▲ 고사무엘 박사는 이날 성경책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있던 이스라엘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순종과 겸손의 리더십을 발휘해 완수했으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시대에 전 인류를 구원할 것고 약속한 것을 개인으로부터 시작해 가족과 부족, 민족, 전 인류로 확장되어진 구원사역이었다고 강조했다. 고 박사는 모세의 리더십에 나타난 신학적 패러다임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백성을 향한 겸손이라는 것이 큰 테마였다고 평가했다.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절대적 순종, 소명의 인식과 헌신, 지속적 기도와 교제, 위기 상황에서 전적 신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함 등이라고 설명했다. 수평적 차원에서 모세가 백성을 향한 겸손의 리더십이을 발휘했다며, 겸손의 리더십의 특징이로서 공동체의 필요에 민감함, 권위의 분배와 위임을 통한 참여적 리더십, 백성을 향한 중보기도와 희생적 봉사, 갈등의 화해자적 역할 등이었다고 정의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벗어난 출애굽 사건의 구속사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육체적 및 영적으로 해방시키셨는데 이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성취, 시내산 언약을 통한 새 언약 관계의 수립으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즉 출애굽의 구속사적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기초한 구원의 시작이요,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적 구원의 실현,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는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구원의 패려다임으로 고 박사는 분석했다. 출애굽 후 시내산 언약을 통해 언약공동체가 구체화 되었으며, 모세가 여기에서 보여준 중보자 및 지도자적으로 보여준 리더십 모델은 하나님의 위임에 기초해 섬김의 자세로 공동체의 영적성장을 추구하기에 이 모든 것은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 시대의 교회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신학적 패러다임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모세의 소명 및 정체성의 형성은 출애굽기 3~4장의 사건들을 거론했는데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름은 하나님의 자기계시 속에 모세를 통해 공동체적 구원을 위한 소명과 사명을 나타내고, 모세와 이스라엘인들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으로 이어진 언약의 연속선상의 구속사적인 표현, 계시록적 측면의 하나님의 계시의지 및 구속론적 측면에서 중보자적 리더십을 통한 공동체적 구원의 원리, 예배론 적으로 거룩성의 개념과 예배공간의 성화원리를 제시함으로서 현대 교회의 리더십과 예배, 공동체적 구원의 이해 등에 근본적으로 신학적 패러다임을 제공한 것으로 밝혔다. 출애굽기 3장의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응답을 모세가 함은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광야생활을 통한 성숙한 자기 이해, 소명에 중대성에 대한 통찰 등을 반영한 것으로서 영적 차원에서는 전적인 의존, 심리적 차원에서는 중대성에 대한 통찰, 리더십적 차원에서 겸손한 리더십 모델을 제시한 것으서 현대 교회 리더십 형성에 주요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외에도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질문하고, 공동체의 불신에 대한 우려, 자신의 언어적 분족함,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하며 소명을 거부한 내용들을 거론하고 이런 예들은 리더십의 궁극적 근거를 제시했거나 권위의 위임 또는 주권을 상징하거나 아론과의 협력으로 보완적 리더십을 제시하는 등의 사항과 연관된다고 밝혔다. 하나님의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 임마누엘의 약속은 언약신학적 맥락의 구속사적 의미가 있고,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한 임마누엘의 실현은 물론 성령의 항구적 임재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는 그의 자존성 및 영원성, 지속적 현존성을 보증하고 야웨의 절대적 주권을 선언 하는 등 모에게 위임된 권위의 부여, 리더십의 정체성 확립 등과 관련있음을 밝혔다. 지팡이의 변화나 나병치유, 물의 변화 등은 이집트 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우월함을 선포한 것이며, 점진성을 지닌 경향은 개인적 차원에서 우주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임을 강조했다. 모세의 리더십 형성은 발단단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준비과정으로서 가장 주목할 것은 모세가 애굽에서의 성장기 40년, 미디안광야에서의 40년으로 구분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필요한 핵심적 자질을 갖춘 기간이었다면서 애굽 왕자로서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광야의 양치기로서 보낸 시간들은 이스라엘인들을 이끄는 목자적 리더십의 기초가되고,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경험은 소명의식과 신학적 이해를 형성하는 등 인격 형성의 변화가 이뤄진 것으로 평가했다. 구체적으로 모세는 애굽 왕국에서 고등교육을 수학했고, 히브리인으로서 애굽과 미디안의 문화를 아우르는 문화적 이해력을 습득함으로서 히브리인과 애굽인 사잉의 중재능력을 개발하는 등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준비되어지는 시기였다고 제시했다. 모세는 열가지 재앙의 상황을 통해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발현되었고,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이 모세를 통해 들어남으로서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확고해진 계기였다고 분석했다. 고사무엘 박사는 대략 모세 리더십의 실제는 겸손과 순종이 도드라지지만 양자는 별개가 아닌 통합적인 특질을 지녔고, 그의 사역기간 내내 감지될 수 있음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겸손의 측면에서 모세에 대해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니이다"라며 자기 실존의 한계를 정직히 인정했으며, 그 겸손이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인정하며 높이려는 적극적 태도로 발전함으로서 개인적 차원을 넘어 공동체를 위한 헌신으로 표현되는 등의 현상이 감지되었다고 밝혔다. 모세가 애굽의 파라오적 리더십이나 히브리 문화의 교차점을 제대로 이해했지만 고대 시대에 겸손의 리더십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였다는 것은 권위주의적이고 권력적인 고대문화의 리더십의 경향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실제적으로는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면서도 온유함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는 등 자기 인식에서 시작된 겸손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고, 다이 공동체를 위한 실천적 섬김으로서 0선순환적인 구조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모세가 70인 장로를 세워 권력을 분산하거나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는 중보기도의 자세, 공동체를 위해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을 견디는 모습 등은 현대의 리더십에서 말하는 '변혁적 갈등관리'의 본보기였다고 강조했다. 순종의 측면서 모세는 호렙산에서의 소명은 한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대함에 친구처럼 대하는 친밀성은 지도자로서 사역이 단지 의무감을 아니었으며, 책임을 짐에 대해 개인을 넘어 공동체적인 지평을 가진 것은 공동체의 구원과 성장을 꾀하는 모습으로서 단회적이 아닌 꾸준한 실천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오늘날 교회의 리더십을 향한 모세의 리더십이 갖는 함의는 영성과 실천의 균형으로서 오늘날 교회들이 영적 깊이와 사역의 효율성을 택일하려다보니 갖는 어려움에 대한 힌트이며, 현대교회의 조직구조와 의사결정과정에서의 팀사역을 위한 평신도 리더십 확보에 지침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갈등관리와 화해의 리더십은 하나님 중심적 해결 방식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본받아야 함과 세대 계승적 리더십은 교회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발전에 기여할 것이며, 문화 변혁적 리더십은 현대 교회의 소통과 영향력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 정용 박사(백석대학교 외래교수, 동 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논찬을 통해 고 박사의 글은 성경에 나타난 모세의 리더십을 분석해 현대 교회에 교훈을 주려는 새로운 시도를 벌였다고 평가했다. 내용적으론느 모세의 생애와 사역을 연구함으로서 신학적 기반으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출애굽 사건을 다뤘고,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핵심적 전환으로 해석, 언약 공동체의 형성과 리더십의 연관성을 설명함으로서 모세의 중보자적인 역할을 신학적의미로서 부여했다고 설명했다. 출애굽기 3~4장을 중심으로 모세의 소명과 정체성 형성과정을 깊게 분석하며 현대적인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의미있는 시도라고 강조했다. 고 박사의 논문은 신학적 깊이와 실천적 적용의 균형을 추구하려는 접근방시을 높게 샀다면서 모세의 리더십을 학술적으로는 신학적이고 역사적으로 분석해냈고, 실천적으로는 현대적 함의를 교회에 제공함으로서 많은 신앙적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정용 박사는 전망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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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12일째 입원에…후계 구도에 쏠리는 눈
- 프란치스코 교황, 12일째 입원에…후계 구도에 쏠리는 눈 교황 사임 또는 선종 시 차기 교황 선출추기경 138명 중 3분의 2 찬성 얻어야 프란치스코 교황이 25일(현지 시각) 기준, 12일째 입원 중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주일간 지속된 기관지염이 악화해 지난 14일부터 폐렴으로 이탈리아 로마의 아고스티노 제멜리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양쪽 폐에는 모두 폐렴이 생겼고, 혈소판 감소에 이은 신부전증을 앓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2일 밤부터는 천식성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는 등 병세가 위중하다. 올해 89세로 고령이라는 점도 회복을 더디게 한다. 이에 로마 가톨릭교회 내부에선 조심스럽게 후계 구도를 짜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차기 교황은 현 교황의 사임 또는 선종을 요인으로 바뀐다.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13년, 고령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임했다. 교황이 선종한 경우라면 선종일로부터 15~20일 이내에 추기경단의 수장인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이 전 세계 추기경을 로마로 소집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후임자를 선출하는 이른바 ‘콘클라베(conclave)’를 연다. 콘클라베의 사전적 의미는 ‘열쇠로 잠근다’는 뜻으로 ‘외부와 차단된 교황 선거 장소’를 뜻한다. 실제로 교황의 선종이나 사임으로 교황이 공석이 되면 길게는 20일까지 전 세계 추기경이 로마에 도착하기를 기다린 다음 ‘교황 선거 봉쇄 회합’이 시작된다. 현재 추기경은 253명으로, 80세 이상은 선거인단이 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올해 기준 138명의 추기경만이 교황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추기경들의 회합 장소는 바티칸 시스티나 소성당이며, 선거인 추기경들의 숙소는 인근 성녀 마르타의 집으로 제한된다. 이 장소는 선출된 교황이 공식 발표될 때까지 폐쇄되며 모든 선거인 추기경은 비밀 유지 서약을 하고 비밀 투표로 투표해야 한다. 새 교황을 선출하려면 선거인단 3분의 2(92명)의 찬성이 필요하다. 이에 추기경들은 3분의 2가 찬성하는 교황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투표한다. 투표가 끝날 때마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볼 수 있는 굴뚝에서 연기가 나온다. 선거인단 3분의 2를 얻어 새 교황이 선출됐다면 흰 연기가 올라온다. 단, 선거인단 3분의 2를 얻지 못한 채로 투표가 끝나면 검은색 연기가 올라온다. 이후 선출된 이에게 교황직을 수락할지 묻고, 수락한다면 교황으로 불리고 싶은 이름을 묻는 절차가 뒤따른다. 이후 새로 선출된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코니로 향한다. 선임 추기경이 라틴어로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우리에게 교황이 있다)’이라고 선언하면 교황 선출 절차가 마무리된다. ◇ 가톨릭교회 내 보수·진보 추기경 6명이 교황 후보 현재 유력한 교황 후보자는 6명 정도다. 영국 일단 더타임스, 텔레그래프 등은 프리돌린 암봉고 베순구 추기경(65),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70),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76), 피터 에르도 추기경(72),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67), 게르하르트 뮬러 추기경(78)을 후보로 꼽았다. 더타임스는 2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임하거나 선종하면 가톨릭교회 내 보수 진영에서 후임 교황을 내려는 움직임이 생길 수 있다고 봤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애자를 포용할 만큼 진보적인 인물로 이에 반대하는 보수 진영에서 차기 교황을 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보수적으로 꼽히는 추기경은 버크 추기경과 뮬러 추기경이다. 2010년 추기경이 된 버크 추기경은 미국 출신으로 전통적인 라틴식 미사를 지지하는 보수적 인물이다. 버크 추기경은 지금까지 교회법, 신학관 등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판했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버크 추기경의 교황청 숙소와 연금 혜택을 박탈하기도 했다. 뮬러 추기경 역시 보수적인 인물로 전임 베네딕토 16세의 측근이다. 뮬러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정책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반된다는 내용을 담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7년 뮬러 추기경을 신앙교리부 장관직에서 해임했다. 유럽 주교협의회 의장을 지낸 에르도 추기경 역시 보수적인 인물로 꼽힌다. 에르도 추기경은 이혼하고 재혼한 가톨릭 신도가 성찬을 받는 것을 허용하는 것에 반대하기도 했다. 반대로 차기 교황 후보 중 진보 성향 인물도 있다. 파롤린 추기경은 가톨릭교회 이인자인 교황청 국무원장으로 이탈리아 출신이다. 파롤린 추기경은 10년 이상 프란치스코 교황과 긴밀하게 일했고 2014년 추기경직에 올랐다. 필리핀 출신으로 ‘아시아의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불리는 타글레 추기경도 진보 성향이다. 2012년 추기경이 된 타글레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동성애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베순구 추기경은 아프리카 가톨릭교회에서 목소리를 내는 인물로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주교회의 심포지엄 회장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9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한편, 파롤린 추기경은 전날부터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의 쾌유를 기원하는 철야 기도회를 이끌고 있다. 이날 기도회에는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수천 명의 신자가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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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회운동 온라인 보존
- ▲ 김신약 목사(NCCK1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 연구원)이 NCCK아카이브 사용법을 시연했다. ▲ 김학중 목사(NCCK1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 위원장)는 1백주년을 기념함 보다는 반성과 미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한규무 박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사진 왼쪽)은 김종생 NCCK총무(사진 오른쪽)에게 감사패를 수여받았다. 이순자 박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실장, 사진 가운데)가 동행했다. 1924년 9월 24일 설립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종생, 이하 NCCK)'가 오는 9월 24일이면 설립 100주년을 맞게된다. NCCK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국인들과 함께 해오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온 성도들의 삶은 물론 실천적인 부분에서 한국 개신교는 선교와 교육, 문화, 구제, 의료, 민주화, 인권, 통일,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사회에 기여했던 모습들을 담은 다양한 자료들을 데이터화시켜 온라인 아카이브에 저장해 모든 사람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한민국(대통령 윤석열) 문화관광부의 후원으로 진행했던 온라인 아카이브에 수록된 자료는 총 24,798건(문서는 23,398건 및 사진그림류는 1,400건)이 수록되어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온라인 아카이브'는 지난 6월 27일 NCCK가 연세대학교 백양누리 더라운지에서 오픈 기념식을 갖음으로서 공식적으로 온라인에서 공개되었다. NCCK는 수년 전 동 사업을 준비하기 전 에큐메니칼사역(교회연합)을 진행해오면서 축적된 수 많은 자료들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한규무 박사)에 제공해 분류 가공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며, 이후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 등 분위기에 힘입어 더욱 사업의 방향이 확대되었고, 이후에 설립된 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및 IT기술을 제공한 아카이브랩 등의 관련기관들과의 협조체제를 가져오는 등 전체적으로는 2019년부터 약 6년간 준비를 해왔다고 한다. 김학중 목사(NCCK1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 위원장)는 한국교회가 이 땅에 함께 지낸 역사가 매우 길며, 신앙은 물론 한국인들을 위한 많은 기여를 했지만 아직도 세상과의 소통은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번 아카이브 개소식을 갖음으로 기독교인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나눔과 소통을 할 수 있는 계기가 열렸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1932년 NCCK는 사회신조를 발표하면서 사회의 약자들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일을 각오했던 일도 있다면서 NCCK의 백주년을 맞는 지금 미래를 위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의 아카이브가 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특히 현장의 이야기를 듣자면 한국교회가 성찰이 없이는 새 백년을 맞기 어렵다는 판단이라면서 뼈아픈 반성을 기반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백주년 선언을 준비중이기에 한국교회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봉사를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김종생 NCCK 총무는 아카이브를 사용해 1972년 전국신자운동을 검색해보니 NCCK가 지난 25회 총회에서 적극 노력해야한다는 결의를 했던 것을 불과 5분만에 확인할 수 있었다며, 이처럼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함에 큰 도움을 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와 아카이브랩, 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등에게 감사하며, 이에 대한 감사패 시상을 할 예정임을 밝혔다. 안교성 목사(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는 NCCK 아카이브는 한국교회의 지난 1백년간의 사역을 모두에게 알리는데 좋은 도구가 될 것이며, 이제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원활한 활용과 유지보수의 방향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야 한다고 평가하는 발제를 담당했다. 김신약 목사(NCCK1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 연구원)는 컴퓨터를 사용해 아카이브의 사용을 설명하는 시연회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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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회운동 온라인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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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 주년 행사 및 사업 11월까지 계속
- ▲ 김종생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사진 오른쪽)가 창립 100주년 사업을 설명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가 1924년 9월 24일 한국에서 출범한지 올해로 1백주년을 맞이하며, 이를 위한 각종 기념예배와 기념행사, 문화사업, 컨퍼런스 등이 6월부터 11월 기념대회까지 매월 진행된다고 한다. NCCK는 1백주년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에 앞서 연세대학교 백양누리에서 지난 6월 27일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김종생 총무는 NCCK 백주년 사업을 위해 수년 전부터 준비하는 중이며, 일부는 진행중인 사업도 있다면서 6월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온라인 아카이브'개설을 하고, 7월은 100주년 축하 인터뷰 영상 공개, 8월은 100주년 기념 기독교 사회선언 정책 협의회 개최, 9월 20~22일은 국제컨퍼런스, 22일은 기념예배, 24일은 기념일 행사 및 CBS에 의뢰해서 제작중인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다큐멘터리' 방영, 10월은 말 경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와 22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00년사'의 출판 및 기념회, 11월 18일은 기념대회와 100주년 기념 기독교 사회선언 발표 등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김 총무는 지난 NCCK는 세계교회의 선교와 일치운동의 역사적 흐름 가운데 창립된 한국교회 최초이 에큐메니칼협의체라고 소개하고, 지난 100년의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와 기독교단체, 세계교회와 연대해 에큐메니칼 운동을 펼치면서 노동과 여성, 아동, 장애인, 도시빈민, 산업화, 민주화, 인권, 통일, 평화, 생태 등에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사회운동을 주도 또는 참여했다고 밝혔다. NCCK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 이 땅에 사랑과 정의를 기초한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뤄지도록 노력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있다고 김 총무는 밝히고, 그간 가난한 자와 억울한 자, 눌린 자, 소외 당하는 자 등을 보호하고, 대변하는 역할을 해왔으며, 이를 기념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한해를 보내겠다고 밝혔다. 사회를 향한 선교를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하는 NCCK는 지난 1백년간의 여정을 담은 각종 자료들을 기독교의 사회운동사 차원에서 정리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온라인 아카이브'에 디지털 형태로 수록했는데 이를 지난 6월 27일 대중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100주년 기념 국제 컨퍼런스'는 오는 9월 20~22일간 한신대학교와 라마다 바이 윈덤 서울 동대문에서 연속해 진행하며, 여기에는 세계교회협의회 총무를 비롯해 아시아기독교협의회나 북미 지역 주요 교단, 독일 개신교협의회 등 주요 파트너들 200여명이 참석하는 규모로 진행할 예정이다. '100주년 기념예배'는 오는 9월 22일 오후 4시 경 연동교회당(종로 5가)에서 개최하며 예배의 기획 준비는 최진봉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실천신학)가 담당하고, 국제컨퍼런스에 참여한 인원들이 참석하며, 100주년을 기리는 의미로 모집한 '100인 합창단'이 합창곡을 담당한다고 한다. 동 합창단은 그동안 NCCK와 함께 해온 운동의 동지와 회원교단, 시민사회계열단체 관련자 등으로 구성한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는 NCCK의 유관기관이자 언론사인 기독교방송(CBS)에 제작을 의뢰했으며, 지난 1백년의 역사를 반추하고,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의 현실 등을 담을 예정며, 오는 9월 24일 무렵 송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100주년 기념 축하 인터뷰'는 NCCK 총무와 회장, 회원교단 회장과 총무, 각 위원회 위원장, 관련자, 직원, 현장 관련자 등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영상을 담아 10분 이내의 영상클립을 약 30건을 제작해 홈페이지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전 3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00년사'의 출판기념식은 오는 10월 22일 오후 2시 정동제일교회당에서 개최하며, 2019년부터 출판중인 '한국교회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전 20권)'은 올해 내 완간된다고 한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는 15명의 집필진이 노력 중이며, 1권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권 해방부터 민주화 및 산업화, 3권 민주화 이행기부터 현재까지를 다룬다고 한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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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 주년 행사 및 사업 11월까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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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율법과 의는 모두 예수의 관점으로
- ▲ 유선화 작가는 「로마서, 오직 믿음으로 이르는 하나님의 의(길과 생명 출판)」을 출간했다. 유선화 작가는 「로마서, 오직 믿음으로 이르는 하나님의 의(길과 생명 출판)」를 출간함으로서 죄를 지어 죽을 수 밖에 없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았으며, 복음으로 거듭 난 이후로는 과거의 죄의식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과 동행해야한다는 내용을 최근 밝혔다. 지난 해 「요한계시록,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길과 생명 출판)」를 출간한 유선화 작가는 이에 대한 이해를 미지의 세계처럼 여겨온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실한 잣대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아왔으며, 연달아 로마서를 출간해 이방인들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자녀라는 점을 분석해냈다. 요한계시록을 다룰 때 기독교계의 연구자들이 오역을 우려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유 작가는 계시록의 모든 장과 절을 표시하고, 성경의 원문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해석함으로서 모든 구절을 해설했기에 신뢰성있는 방식의 해설이 가능했는데 이번 로마서를 쓰면서도 같은 방식으로 모든 구절과 성경이 최초에 작성되었을 때 사용한 원어를 대조함으로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신뢰성을 가져도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로마서는 한 마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라고 단언하고, 이번 저작의 모든 글쓰기를 예수님과 복음에 중점을 두고 풀어갔다. 로마서는 의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성경이라고 밝힌 저자는 율법과 하나님의 의,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동일하게 이르는 믿음의 의, 아담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두 결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의 죄와 율법과 육신의 문제,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는 방ㅂ버,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의 섭리와 비밀 등을 말씀하고있으며, 여기서 바울 사도는 구약의 말씀으로 그 비밀을 어떻게 논리정연히 다루고 있고, 우리가 믿고 따라야하는 방향은 무엇인지를 기술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저자는 특별히 로마서는 죄와 율법, 의를 주제로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루게되었다며,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발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일방적 주권을 통한 선택적 예정은 이스라엘 사람들 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예정 및 이에 따른 믿음의 선택으로 인한 구원을 설명했다. 죄에 대해서 로마서 7장은 속 사람이 아닌 육신에게서 발생하는 점이 구별해 죄은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아야하며, 8장에는 거룩하게된 의로운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이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으로 살아야 함을 조명했다. 저자는 로마서가 율법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주목하고, 그 역할과 성도에 대한 적용점을 설명했다. 바울 당시에는 할레를 비롯한 율법적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함는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이 의롭게한다는 점을 가르쳐야했을 것이라면서 로마서의 가치가 어떻게 출발하는지를 설명했고, 이는 율법과 믿음에 대한 로마서의 이해인데 이 부분도 조명했다고 한다.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복음의 능력이 되게 하는 것이고, 칭의라기 보다는 오직 믿음으로서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신학적 관점상 '칭의'라는 것보다 저자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들음으로서 믿음이 생기고 구원 받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즉 피조물의 관점에서 살펴본 부분들은 관심을 갖게 하는 요소다. 그리스도와 연합된자로서 죄와 율법, 육신에 관한 내용도 다뤘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났고, 새로운 피조물임에도 지속적인 죄의 발생으로 인한 고민을 하기도 하지만 로마서 7장에는 '내 속에 거하는 죄'라 하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 조차 여전히 죄인이라는 의식에 사로잡혀서 살기도 하지만 저자는 죄를 보는 관점을 달리해야한다는 주장이 수록되어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인데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새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인데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기라(로마서 6장 11절), 지체를 몸의 사욕인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서 육신으로는 죄를 섬기는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과 삶에 적용할 방법이 동 저서에 자세히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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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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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율법과 의는 모두 예수의 관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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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연구 기틀 개척 공로
- ▲ 민경배 박사는 이날 토론회에 참여해 교회사학 연구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사)국제독립교회연합회(총회장 정인찬 목사)와 웨이크사이버신학원은 제 3회 웨이크사이버신학포럼을 지난 5월 20일 CTS아트홀에서 '한국교회사에서 바라보는 역사신학자 민경배 박사'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민경배 박사는 1972년 한국기독교회사를 발간함으로서 한국교회사의 연구와 교육분야의 체제와 틀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이날 한국의 교회사 연구에 권위자로 평가 받고 있는 이상규 박사(전 고신대학교 부총장)와 박명수 박사(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등이 발제자로 초청되어 민경배 박사의 생애와 학문, 민족의 이해, 내연과 외연으로 구분한 교회사 서술구도 등을 거론했고, 대체로 한국교회사의 기초부터 성숙단계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기여를 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 정인찬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총회장은 토론회 주최자로서 이날 교회를 위한 좋은 대안이 되기를 기대했다. ▲ 정인찬 박사(국제독립교회연합회 총회장)는 동 교단과 웨이크사이버신학원이 민경배 박사에 대한 토론회를 진행하게 됨은 한국교회에 크게 도움이 될만한 일이라면서 이 자리에서 논의된 내용들이 복음전파에 획기적 기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좌로부터 박명수 박사, 민경배 박사, 류금주 박사, 이상규 박사. ▲ 이상규 박사는 생애와 학문의 개괄 발제를 담당했다. ▲ 이상규 박사는 '민경배 교수의 생애와 학문'을 주제로 발제했다. 이 박사는 민경배 박사는 스승인 백낙준 박사의 계보를 잇는 제 2세 학자라고 평가하고, 한국교회사 학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라고 정의했다. 그가 한국에서 교회사연구를 개척했고, 오늘날 교회사학의 발전에 초석을 놓은 학자라면서 한국의 신학도와 목회자 중 민 박사의 책을 한 권이라고 접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는 1934년 6월 22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읍내리 212번지에서 출생했고, 그의 아호인 '솔래'는 송천리의 솔래(松川)에서 취한 것으로 유추했다. 민 박사는 해방 후 월남해 서울에 정착해 1952년 3월 중앙고등학교를 졸업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20기로 입대해 종군했지만 부상으로 22개월 후 명예 제대했다고 설명했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수학하며 1956년 3월 졸업 후 동 대학원에 진학해 1958년 3월 석사학위를 취득, 스코틀랜드 에버딘대학교 신학부에서 수학하며 마가렛 크리스티나 상을 수상하는 등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동 대학원에 진학 1962년 5월 졸업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귀국한 민 박사는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해 신학대학원 과정에서 수학해 1965년 3월 졸업했고, 1967년 11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이상규 박사는 설명했다. 민 박사는 목사안수 후 이미 교수가 되었지만 영국 런던대학교 신학부로 유학해 1969년 8월 졸업했는데 이 때 로버트 토마스 목사(Rev. Robert Jermain Thoma)를 연구해 조명(민 박사는 이 연구를 통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와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던 토마스 목사가 웨일즈 출신이며, 에딘버러대학교 뉴칼리지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순수한 선교의 열정으로 인한 순교였다는 점을 밝힘)했고, 귀국 후 연세대학교의 교수직을 감당하던 중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에서 1984년 3월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민 교수가 1958년 3월 연세대학교에서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대학원 졸업과 동시 불과 24세의 나이로 부산 분교의 전임강사로 임용된 것이라고 밝혔다. 민 박사는 1958년~1999년 8월까지 41년간 교수직을 감당했고, 연세춘추 편집 및 주간, 교목실장, 기독교문화연구소장, 신학대학장 등 보직을 맡았다고 밝혔다. 1984년에 4년간 교무처장, 1988년 4년간 및 1994년 2년간 연합신학대학원장, 1999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정년으로 은퇴하며 명예교수로 추대, 2002년 3월 서울장신대학교 제 2대 총장으로 4년 후 2006년 퇴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 초빙되었고,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원장과 명예원장, 고문 등을 감당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노력하는 중이라고 평가했다. 이상규 박사는 「한국기독교회사」 및 「한국민족교회 형성사론」, 「교회와 민족」 등 50여 권의 저서, 「에큐메닉스」 등 7권의 역서, 1975년 3월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이 발간하는 「신학논단」에 '루터의 내적 발전과 그 신학적 계보'를 발표 한 이래 17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민경배 박사의 학문적 발자취를 설명했다. 민 박사는 백낙준 박사와 더불어 1966년에 '한국교회사학회'를 조직해 한국에서 가장 오랜 신학회로서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고, 1993년에는 연세교회사학회를 조직해 이 모체를 통해 1997년 6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을 거쳐 명예 원장 혹은 고문으로 지속적인 후학 양성에 주력 중이라고 밝혔다. 학회 활동 외에도 서울YMCA연맹 이사 혹은 부이사장으로 활동, 기독교백주년기념사업회 혹은 순교자기념사업회 등에 관여하거나 학술적 자문 활동, 해외 강연에서의 강좌, 국제학술회 참여 등의 다양한 활동을 수행함으로서 교회의 교사(doctor ecclesiae)로서 일생을 살았다고 평가했다. 이 박사는 민 박사의 교회사연구에 대해 한국교회사 분야를 넘어서는 영향력도 있었지만 특히 한국교회사의 전 영역의 다양한 주제를 연구 및 개척했고, 국내외 각종 도서관이나 역사관, 고문서관를 섭렵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의 저술목록은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 선교, 예전, 인물, 기구, 교파, 민족 혹은 독립운동, 외교와 국제관계, 역사인식과 방법론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거나 개척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연구되지 못했던 여러 분야를 선구적으로 연구했고, 한국교회의 기원부터 해방 이후 교회 현실의 문제까지 연구와 재 해석, 사실규명, 사실의 의미 석명 등을 진행했는데 예를 들면 민경배 박사가 연구했던 '로버트 토마스: 한국 초기 선교사의 한 유형과 동서 교섭의 문제' 등이 그러하다고 밝혔다. 한국 기독교의 시원을 서구형 기독교와 미국형의 교파형 선교로 설명하거나 역사환경과 신앙행태의 구조적 차이를 석명하는 역사지리학, 한국교회 찬송가사, 기독교 신앙과 민족문제에 대한 접근 등의 연구방법론은 모두 민경배 박사가 개척한 분야라고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 저 「교회와 민족」에 수록된 '한국 근대 문화와 기독교의 형태 및 그 영향범위'를 이 박사는 살피면서 기독교 접촉의 단계를 넘은 수용 및 토착화의 과정을 연구한 선구적 연구형태였고, 여기서 서북형(黃平道, 체제에서 소외된 서북지방 특유의 종교적 심정)과 기청형(畿淸, 京忠道, 유교 양반의 지식인 계층의 존왕적 충성)이라는 두가지 신앙 형태 혹은 수용 배경을 제시하고, 이것을 민족운동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했으며, 이런 구분은 이미 송창근과 김린서 등에서 보이지만 민 박사는 이를 실증적으로 체계적으로 도식화했다는 공로를 이 박사는 설명하면서 이런 분석의 틀 자체가 선구적 시론이었고, 후학들의 발전적 연구의 토대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민 박사의 저술 「한국기독교회사」는 한국교회 역사 최초의 교본적 통사였으며, 여러 신학교육기관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는데 1968년 출간해, 1972년 증보판, 1982년 개정판, 1993년 증보판, 2007년 순한글판으로 발간되는 등 결국 690쪽의 대작으로 발전되었다고 밝혔다. 이전에도 이런 류의 연구를 백낙준, 김양선, 정인과, 장정심, 변종호 등이 진행했지만 한국기독교회사의 체계적 통사로서는 볼 수 없었고, 민경배 교수의 것은 근대 이전의 기독교의 접촉부터 한국전쟁과 1960년대까지의 한국교회사에 대한 체계적 최초의 통사였다고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가 민족교회 또는 민족교회론을 주창함으로서 당대 주류였던 선교확장사에 대한 반대급부가 되어 논란이 되었고, 민족이라는 말에도 어감상 오해를 받았던 부분들이 있었다고 이상규 박사는 밝히고, 민 박사는 한국교회를 '민족교회'로, 한국교회사를 '민족교회형성사'로 인식함으로서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주체적으로 기술했다고 평가했다. 민 박사 이전의 기존 한국교회사의 연구는 '선교사적' 연구로서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가 주체가 되고, 파송국의 자료를 의존한 역사기술이었지만 민 박사는 선교사 파송국 교회의 연장이 아닌 우리가 주체가 되어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민족교회사'로서 인식했고, 이는 새로운 연구접근방식이고 독창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민 박사의 '민족', '민족교회', '민족교회 형성론'은 배타적 민족주의나 문화민족주의, 혈통에 근거한 개념이 아니라 언어나 역사, 문화,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민족공동체로서의 교회이며, 역사와 고난을 함께 공유한 교회라는 점에서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민 박사는 각기 다른 선교부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어도 교파 중심의 교회가 아닌 민족공동체의 하나의 연합된 교회를 민족교회로 파악하고 있고, 탈 서양 선교사를 지향하되 친일로의 경도가 아니며, 친 동향을 지향하되 반 선교사로 경도되지 않는 성격이라고 이상규 박사는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의 교회관은 '신도들의 세계적인 공동체'라는 개념을 상정하고, 기독교회사는 그리스도라는 뚜렸한 역사상의 인물과 교회라는 신도들의 세계적인 공동체, 사(史)라는 현저한 개념들을 다루고 있으며,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도, 완전할 수도 없다는 명제 속에 어느 한 측에서 반대측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무리하며, 완전할 수가 없을 수 밖에 없는 특정 논리를 들이대며 교회분열을 일삼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고 분석하고, 민 박사는 순결과 연합이라는 두 축의 선택상황이라면 연합에 더욱 의미를 둔 것이라고 이 박사는 밝혔다. 한국교회사를 다루며 '외연과 내연'이라는 신앙현상학을 개발해 역사연구의 틀을 제시한 것이 민경배 박사의 가장 특별한 공로라면서 그가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기간 동안 순수한 신앙의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민족운동과 도덕운동, 사회변혁운동으로 나타나 한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는 역사의 틀이라고 이 박사는 정의했다. 이 연구 틀은 한국 뿐 아니라 모든 나라와 시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원리라고 했다. 그의 저서 「민족과 교회(1981년)」 등에 게재된 논문들에 '내연과 외연'이라는 상관구조를 해명하ㅁ녀서 1903~1907년 한국교회 부흥은 신앙의 내연 구도였고, 1919년 이래 민족독립운동으로 외연 되었으며, 또 다시 김익두나 이용도의 신앙부흥운동을 통해 내연화하고, 1935년 일제의 가혹한 군국주의적 전시체제 하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됨에 따라 마지막 저항으로 외연화 되는 구조인데 결과적으로 신앙운동이 민족운동의 동력이 되는 입체적인 해석방법이라고 이 박사는 일례를 들었다. 민경배 박사의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내연과 외연의 현상학은 기독교인의 현존과 존재 양식, 사회 참여 양식에 대한 역사적 실례를 제시하고, 즉 그리스도인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신앙고백적 삶을 추구하면 결과적으로 사회변혁적 역할도 감당하게된다는 연구의 흐름이라고 이 박사는 설명했댜. 이 외연과 내연의 연구방법론은 현재도 민 박사의 제자들과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에서 지속적으로 사용 및 적용하고 있는 방식으로 알려졌다. 이상규 박사는 논문의 말미에 "우리가 배워하 할 것은 그의 저술이나 학문적 결실만은 아닐 것이다..., 학문에 대한 열정, 진리에 대한 확신, 후학들에 대한 애정,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사랑"을 주장했으며, 실제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학술활동이 아닌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성도들이 모여 성경이 시키는 교제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지하고있다. ▲ 박명수 박사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발제를 담당했다. ▲ 박명수 박사는 '민경배 교수의 한국교회사학에 나타난 "민족" 이해'라는 제목의 발제를 담당했다. 박 박사는 민족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선 단어라고 전제하고, 민족 또는 민족주의는 한국적 상황에서 외세나 제국주의에 대칭되는 차원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공산좌경세력들이 미국을 향해 제국의 프레임으로 보고, 미국에서 온 서양 기독교 세력도 적대하려는 즉, 북한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미국을 중심한 서구문화의 전달자로서 한국 문명화에 앞장서면서 조국의 근대화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겼던 것이라고 박 박사는 평가했다. 부정적 측면으로서 좌측의 민족주의세력이 볼 때 한국교회는 민족주의에 대한 가장 큰 도전세력인 미국의 친미집단이자 반민족주의집단이라는 프레임이 형성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박 박사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원래는 개신교의 핵심 단어였다면서 기독교는 천주교와 달리 민족을 강조했는데 루터교가 독일민족주의와 손을 잡았고,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와 손을 잡는 한편 성경을 강조하느 개신교의 특징상 각국의 자국어성경을 사랑해서 개신교가 들어간 지역마다 민족의식이 함양되었다고 반박했다. 또한 민족은 한국적 상황에서도 우파의 단골개념으로서 빈부와 계급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개념으로서 서구제국주의에 맞서 국민을 단결시키는 용어라고 정의하고, 공산주의는 원래 민족을 부루주아의 용어로 이해하고, 무산의 노동자계급들이 주도하는 계급혁명의 완성을 진정한 해방이라고 주장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좌익은 계급이라는 단어보다는 민족이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계급혁명을 진행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차제에 우리는 한국교회와 민족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박 박사는 민경배 박사의 저작들에 나타난 민족 개념은 현재 일부가 통용하는 반제국주의적 이념 중심의 민족주의가 아닌 서구 기독교와 힘을 합해 민족을 부강케 만드는 현실적 개념으로서의 열린 민족주의였다고 분석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를 정리하는 차워에서 초기 한국교회사가 시도되었으며,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보고서를 중심으로 선교 역사를 정리했는데 이 같은 입장에서 초기 한국개신교사를 총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백락준박사였고, 그는 교회사는 근본적으로 선교사라는 입장에서 한국개신교사를 정리했다고 박 박사는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사를 선교사가 아닌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서술하려는 최초의 학자이며, 복음을 전해준 자의 자료 뿐 아니라 복음을 받은 자의 자료도 분석 정리했다고 박 박사는 설명했다.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을 논할 때 선교사들이 한국 민족교회의 주체가 되기는 힘들다는 한계가 있고, 그들이 한국 민족의 고통을 이해하더라도 우리의 정서를 대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박 박사의 평가다. 그렇다고 민 박가 선교사들을 배타적으로 평가한 것은 아니며,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 못하더라도 한국인의 편이지 일본제국주의의 편은 아니며, 이런 측면에서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은 "탈서양종교사(脫西洋宗敎史)하되 친일로 경도(傾倒)되지 않고, 친동양(親東洋)하되 반선교사로 기울지 않는, 강력한 탈권(脫圈) 에너지가 참된 의미의 '조선 민족의 교회'를 형성 해 나가는 저력"을 근본으로 삼고 있음을 밝혔다.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이 마치 기존의 선교사관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의 주된 비판의 대상은 소위 진보신학의 역사이해에 집중되어 있다는 평가를 했다. 민 박사의 저서 「교회와 민족(1982)」이 출판된 때 그 민족교회론이 활발히 전개되던 때는 한국 신학계에서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이 강하게 대두되던 때였고,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은 그러한 주장들에 의구심을 들어냈다고 박 박사는 밝혔다. 한국교회사를 보는 시각 중 일부가 민중사적으로 보려는 것은 조선 말의 권력 체제에서 소외된 농민층의 저항이던 동학혁명의 계승운동으로 간주하려하고, 이는 한국기독교의 사명과 역사를 민중의 저항의 한계에서만 가치를 인정하려할 때 민중의 저항력 결속의 한 에너지에 기독교가 동원되었다는 식의 주객 전도의 왜곡이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측면이라고 제시했다. 민경배 박사의 민족은 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민족공동체이지 어떤 특정 계급을 배제하려나 지칭하려는 계급공동체가 아니라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민 박사는 한국적 신학으로 한국교회사를 바라보려는 시각들에 지나치게 보수적인 시각을 갖은 나머지 한국교회사가 선교사들에게 굴종된 역사이므로 무가치하고, 새롭게 한국인의 신학을 만들어야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초기 한국교회사는 무의한 잘못된 역사로 보여질 것을 우려하는 측면도 언급되었다. 박 박사는 민경배 박사에게 민족교회는 선교사와 대칭 개념이 아니며, 그는 교회의 역사성과 보편성을 믿기에 교회론을 강조하는 이유도 되는데 그에게 교회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성례전에 참여하는 보편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의 민족교회론은 보편교회와 대칭되는 개념을 갖고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편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어떻게 한국교회가 주체적으로 소화했는가를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개신교는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미국 개신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가 제국주의적 선교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러한 고종은 이러한 당시 개신교의 선교사들을 등에 업고 조선 민족을 위협하는 세력들로부터 보호받으려고 했기에 한국 기독교를 서구 제국주의와 동일선상에 둠은 몰 이해한 일이라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박 박사는 진보주의적 교회사가들 상당수는 선교사를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교회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제국의 침략을 발견하려는 경향을 보였지만 사실 당시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아닌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침략에서 조선을 지켜줄 세력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에 대해 민경배 교수는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가 기여했다는 입장인데 민족주의라는 서구적 개념은 국민 각자가 주인 대접을 받는 민주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개신교가 조선에 등장하면서부터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에 거대한 에너지로 봤다고 박 박사는 평가했다. 조선의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방법은 스스로 전도하고, 자립하며, 통치하는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사용했고, 이것은 책임적 시민을 양성함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종교적인 것 외에도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교육과 경제 독립을 위한 실업교육에 앞섰는데 본래 자립적인 서북사람들은 기독교정신으로 무장해 민족산업을 형성함에 앞장 섰고, 이런 배경으로 근대적 의미의 시민의식을 진 민족운동을 벌일 수 있는 집단이 바로 개신교였고, 독노회를 1907년에 총회를 1912년에 조직함으로서 전국조직망을 갖춘 상태에서 3.1운동을 맞이해 전국적인 독립운동까지 기여했던 애국의식, 책임의식 등의 발로였다고 보는 것이 민경배 박사의 지론이었다고 박 박사는 평가하고, 민경배 박사의 민족교회는 체험적 신앙을 내연으로 해서 한국교회의 반경을 외연으로 확대해가는 복음주의적 교회임을 언급했다. ▲ 류금주 박사는 민경배 박사에게 교육받으며 습득한 교회사학 연구의 방법론을 설명했다. ▲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는 민경배 박사의 직계 제자로서 그에게서 수학했던 역사연구방법론인 '민경배의 한국교회사 서울의 구도: 신앙 내연(內燃)-외연(外延)'을 발제했다. 민경배 박사의 교회사를 보는 시각에서 내연(燃)은 불탄다는 것이고, 외연(延)은 이어지진다는 뜻으로서 이는 곧 신앙이 안에서 불타면 그 에너지가 반드시 바깥으로 나오기 마련이라는 구도라고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는 1934년 생으로서 당시에는 일제 치하로 나라가 없던 시절이었고, 출생된 해의 한국교회는 선교 50주년이었으며, 한국전쟁 때는 공산정권의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월남했고, 수도 서울에 정착해 교회와 조국의 근대화와 발전상을 모두 경험한 교회사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모두 경험한 교회사 박물관 급의 유능한 교회사학자라는 설명을 했다. 류 박사는 민경배 박사가 한국교회사학을 연구해 온 것은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로 개화기부터 근세, 현대까지 한국의 모든 역사와 문화, 학문에 영향을 미친 것은 기독교였음을 체험했고, 한국교회가 잘 됨으로서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 전세계에 밝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한국교회사를 연구함에 있어 복음과 교회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되었던 것이 큰 동기였다는 방향으로 발제를 이어갔다. 민 박사의 교회사에 대한 사상은 연세대학교에서 평생을 교회사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게 했고, 한국교회사학연구원(초대원장 민경배, 이사장 박옥선)을 지난 1997년 6월 창립해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교회사학을 연구하고, 신앙과 교회사를 기반한 교제를 진행해오기도 했으며, 동 연구원은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동북아 3국의 교회사가들을 모아 '동북아시독교사학협의회'를 구성해 10년간 교류해오는 등 사명을 감당했다고 류 박사는 회고했다. 민경배 박사는 11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역사방법론을 지난 2018년 약 1년간 연구발표했다면서 동 방법론은 정량론, 내연외연과 신앙현상학, 신앙지리학, 실체론, 그림처럼 아름답다, 질문-에듀스, 전역사체계화, 입체론, 유기역사론, 역사-시기 완충론, 역사-등거리론 등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류 박사는 실체론에 대해 사크라멘토 곧 성례는 예수그리스도의 역사 통치의 역사내 지점으로서 역사는 허상이 아닌 예수께서 실재 임하셔서 다스린다는 실체를 말함이라고 설명했다. 역사-등거리론은 역사는 하나님의 경륜의 집행 장소로서 각 시대와 각 존재에 독자적 사명을 분여하심으로서 역사를 경륜해가시는 것이며, 사명 받은 존재는 자신의 영역에서 주어진 사명과 기업, 자산과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다는 개념임을 설명했다. 한국교회사를 정리함에 백낙준 박사는 선교사관, 주재용 박사는 민중사관, 민경배 박사는 민족사관이라고 구분하고, 선교사관과 민중사관은 선교의 입장 또는 민중의 입장으로서 사관을 정해놓고 고찰하는 연역적 측면이 있고, 민경배 박사는 연구해보니 신앙과 함께 민족이 각 시대의 실체로 부각되었다는(1880~1960년대 한정) 귀납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류 박사는 분석했다. 정확히는 민경배 박사의 민족사관은 민족교회사관으로서 독자적인 것이 아닌 교회와의 관계에서 고찰되는 것이며, 그의 민족교회사관을 1960년까지 한정하는 이유는 그 '민족'이라는 말이 (특정 시대부터) 기독교회와 무관하게 사용되고, 용법 또한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교회사연구방법론에 수학적 단어인 '함수'라는 개념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류 박사는 이 역학 함수관계를 교회를 중심으로 4방향에서 선교사와 신앙, 일본, 민족, 초월적, 서양적, 동양적, 역사적 요소가 상반되게 위치하는 방식임을 설명했다. 즉 신앙은 초월적 차원에서 이해되고, 민족은 역사적 차원에서 이해, 친선교사는 반일을 전제하고, 친일을 포함한 동양적 기독교는 반선교사적 경향으로서 이를 요약하면 신앙과 민족이 상반되고, 선교사와 일본이 상반되는 방식으로 시간 내에서 교회와 신앙, 세상은 영향을 주고 받은 방식이라고 류 박사는 요약했다. 그 상호작용은 늘 교회와 민족은 한국사에서 초월적 신앙 차원에서도 묘하게 긍정적 교섭이 확인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내연과 외연의 상관관계에 있어 신앙이 안에서 불타오르면 자동적으로 바깥으로 영향이 이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신앙이 먼저 내면에서 불타오른다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은 신앙의 영역이었지만 시기적으로 을사늑약의 주권상실 시기였고, 신앙 자체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 번지는데 이 때 한국교회가 3.1운동을 주도하게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원점, 하나님께 대한 충성 그 자체는 역학상 결과적으로 일제의 국체에 대한 민족의 저항 에너지와 동일시되는 그런 관계라는 설명이다. 신앙의 현상학은 안에서 불타오른 신앙이 외연으로 번질 때 각자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현상화하는 것으로서 같은 신앙 에너지가 신앙운동자체로 발산도 하지만 때로는 도덕 운동, 민족 운동, 사회 변혁력으로 작동하는 것인데 故 주기철 목사는 독립운동을 외치던 사람은 아니었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함으로서 일본 제국의 핵심인 천황 숭배에 저항하고, 일본 정부의 국체에 정면 도전하는 '반일 민족주의자'로서 현상화한 그러한 관계라고 류 박사는 밝혔다. 민경배 박사의 역사관은 나무와 열매 중 나무가 우선하고, 신앙이 선행해야 실천이 이뤄지거나 안에서 신앙이 불타올라야 저절로 외부로 들어나거나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그 가지인 성도들이 자연히 열매를 맺는 내연과 외연의 구도, 직접성, 자동성 등은 지극히 성경적인 역사관이라고 류 박사는 밝혔다. 류금주 박사는 내연과 무관한 민족운동은 한국 교회사의 주류에서 사라졌고, 민족에 대한 주목이 1960년대까지로 한정한다고 해도 민경배 박사의 내연과 외연, 신앙의 현상학 등 다양한 교회사연구의 구도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여전히 적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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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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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연구 기틀 개척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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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韓·日·中 및 전 세계의 핵심
- ▲ 민경배 박사가 발제를 담당했다. ▲ 직전원장 권평 박사가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이하 한교사)은 민경배 박사(연세대 명예교수)를 초청해 '한일관계사 서론'의 강연을 맡겼고, 민 박사는 향후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아시아국가와 전 세계의 모든 역사와 정치, 문화 등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경배 박사는 지난 6월 6일 진행된 한교사 월례발표회에서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했던 1900년대 일본에서는 군벌세력과 문벌세력이 주도권을 다투던 시기 였다면서 이 때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 군대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더니 가능성이 보인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일본을 근대화시킨 세력은 군벌과 문벌이었으며, 전자는 야마가다 아리또모가 대표적 인물이었고, 후자는 이토 히로부미가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밝혔다. 민 박사는 이토는 조선을 다스릴 총독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인물로서 조선을 합병하는 것을 반대했던 인물이며, 최대한의 자치권을 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을 수 차례 가연한 바 있으며, 이날은 이토가 조선의 이현 왕세자를 모셔다가 좋은 왕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좋은 학교를 다니도록 주선한 인물이었지만 안중근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민 박사는 일본인 주류의 뿌리가 한국민족 출신자가 상당히 많았다는 설명을 했다. 일본의 50대 천황 '간부덴노(황무천황)'의 모친이 백제 공주였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뉴스위크 2002년 3월 18일자의 보도를 제시하고, 백제 공주의 피가 천황가에 있다는 것은 한국인으로 볼 수도 있다는 평가를 했다. 임진왜란(1592년 발발)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 뿐 아니라 한중일 3국의 관계를 재 정립한 측면도 있다고 밝혔다. 전란 당시 일본은 한국인 약 10만명을 데려갔는데 이들은 유능하거나 인물이 출중한 여성 등 당대 제일의 엘리트들이었는데 만약 무능했다면 잡아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후손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일으킨 사람들이었다고 밝혔다. 일본 구주 후꾸오까의 사쯔마와 조슈의 출신자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주동했는데 야마가다 아리또모와 총리를 거친 이토 히로부미와 사또 에이사쿠 및 아베신조와 기시 노브스께 등이 모두 사쯔마파라고 설명했다. 아베 신조의 경우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본인이 한국계임을 고백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국력이 증대되자 2차 대전을 일으켰는데 이 때 전후에 활약한 사람이 일본 외무상인 도고 시게나리가 있었고, 이 또한 사쯔마 출신자였다는 점을 들어 한국교회사와 한국 그리스도교를 연구함에 있어 한국적 상황도 중요하지만 일본이나 중국 등의 주변국에 얽힌 이야기들도 동등하게 다뤄야 입체적인 연구가 되고, 인류사회와 그리스도교를 위한 기여자가 되는 방식의 자세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제 치하 시절 성탄절을 맞으면 성탄절 전야에 교회마다 성극을 공연했는데 대부분은 아기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아닌 출애굽 이야기를 다뤘다고 한다. 당시 모든 교회가 모세의 홍해 건넘을 다룬 것은 표면적으로는 신앙의 이야기 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민족해방을 염원한 애국적인 사건들이었다고 분석했다. 김장호 씨가 1918년 자유주의신학적으로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은 사실은 갈대밭을 건넌 것이라고 한 것을 두고 민 박사는 민족 반역적인 발언이라고 평가하고,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그를 즉각적으로 처단했다고 밝혔다. 윌리암 커가 김장호의 배경이었다고 민 박사는 설명했는데 북장로교는 그를 즉각 잘라냈지만 이후 일본정부가 채용해 경성제국대에서 성경을 가르치도록 배려했다고 밝혔다. 커는 이후 한국 동란 시절 맥아더 밑에 들어가 한국군종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게 되는데 그의 인생을 볼 때 비판받을 일도 있지만 그리스도교를 위해 기여한 일들도 많기에 역사연구자는 역사를 접할 때 단편적이거나 표면적인 것만 보지 말고 좀 더 다양하고, 입체적인 내용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조선에서 한일간에 정미조약이 비준 될 때인 1907년은 왕은 그대로 두되 모든 행정은 일본인이 주도하는 이른바 나라가 망한 시기였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전국적 조직인 교단을 확립했는데 독노회 문서의 첫장은 "천하 만국에 복음을 전한다"라고 언급되어 있다며, 처참하게 나라가 망한 순간에도 한국교회는 세계만국기를 걸었고, 세계복음을 언급하는 현실을 초월하는 정신세계, 신앙세계를 가졌었다고 설명했다. 맥아더 장군이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 미드웨이호에서 항복조인식을 할 때 전 일본국민들에게 했던 연설은 "오늘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신학적이다"라고 밝혔고, 파레드 자카리는 8개의 박사학위 소지자였는데 "앞으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이다"라고 했고, 일본 최고의 직장으로 일컬어져 수재가 모이는 산께이신문의 신입사원들이 전세계를 유랑하고 써낸 보고서에 역시 "앞으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이라는 내용으로 논문집을 만들고, 시바 료따로(일본 최고의 문학가, 사상가)는 "세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유와 인권, 정의의 개념은 기독교에만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증거를 민경배 박사는 제시하고, 한교사 안에서 만나는 모든 회원들은 이 같은 학술적인 생각은 갖되, 우선은 서로간의 교통과 친교에 매진해 상호간에 협력과 도움을 주는 관계를 지속하자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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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韓·日·中 및 전 세계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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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학과 복음 위한 27년
- ▲ 류금주 원장이 설교를 담당했다. ▲ 김동석 부원장이 사회를 담당했다. ▲ 민경배 명예원장이 축도를 담당했다. ▲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창립 27주년을 기념해 학술지인 '교회사학'을출간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 이하 한교사)이 지난 6월 6일 창립 27주년을 기념하는 예배를 가졌으며, 설립 이래로 매월 빠지지 않고 진행했던 월례학술발표회를 303회로 진행하기도 했다. 창립기념예배는 부원장 김동석 목사의 인도로 진행되었다. 류금주 목사(원장)는 이날 '뜻을 반납하러 오신 예수'라는 제목의 설교를 마태복음 26장 42~46절 말씀을 근거로 진행해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셨던 창세기 시절에 첫 사람인 아담과 그의 처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원죄가 들어왔지만 예수로 인해 그 죄가 사해짐을 받았기에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내용으로 순서를 담당했다. 류 목사는 오늘 말씀의 성경본문에는 십자가 처형을 앞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죽음 이후의 상황을 고통스러워한 나머지 이를 회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이후 하나님이 뜻대로 해달라는 요청을 하던 때라고 설명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살 던 때 하와에게 접근한 마귀 루시엘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한다고 설명했다. 사실 루시엘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좌를 탐냈던 일로 인해 심판을 받았던 즉,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을 뜻을 세웠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루시엘 자신이 심판받았던 똑같은 상황에 사람을 끌어들여 빠뜨리려는 시도이며, 두가지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 처럼 되려 했다는 것으로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이전에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만 있었지만 이후에는 모든 사람 각자가 뜻을 세우고, 죽음에 이르게 된 상황에 처한 것이라는 설명을 류 목사는 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뜻을 하나님께 반납한다는 것은 즉, 예수가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뜻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수님은 사람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뜻을 반납하는 것이 그의 공생애의 요약인데 이 본문이전에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한 것은 완전한 사람으로서 사망 후 음부에서 마귀에게 희롱당하는 것이 싫었을 것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류 목사는 피흘림은 두가지로 볼 수 있다며, 외적으로는 십자가에서 피흘렸고, 내적으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은 상황으로 볼 때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께서 어떤 이유가 되었던 십자가를 지시지 않는다면 구세주로서 오신다고 오랬동안 예언되었던 것들이 이뤄지지 않게 됨으로 모두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류 목사는 밝혔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아담으로 인해 생긴 뜻(사람의)을 하나님께 반납하신 것인데 이것은 고통과 희생을 수반한다고 설명했다. 그 고통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공동체의 모두는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하며, 우리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27주년을 맞이하며 향후 그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류금주 목사는 강조했다. 개회예배는 민경배 목사의 축도, 정용 목사의 기도, 박수현 전도사의 반주 등으로 진행되었다. '교회사학' 제 18권 제 1호에는 '20세기 초의 글로벌 정치상황과 한반도의 기독교 경험(김동석)'과 '기독교는 한국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가(류금주)', '일제하 한국 기독교회와 공산주의 관계사(민경배)', '곽안련 선교사 생애 연구(정용)', '서북계와 기청계(조점숙)', '20대 청년 만우 송찬근의 삶과 사상(주재용)', '칼 귀츨라프 선교활동지에 대한 고찰(최태성)', '나와 민경배 박사님(박정규)', '청암 박정규 박사의 정류 이상근 학술상 수상 기념문집에 대한 서평(이상웅)' 등의 연구논문과 에세이 등이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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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학과 복음 위한 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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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 워싱턴DC서 창립 총회
- ▲참석자들이 창립대회 직후 예배실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창립대회 직후 행사장 밖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 워싱턴DC서 창립 총회 40여명 참석…공동 발기인에 20개 교단 소속 120명 참여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모임인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이하. 기평넷, Korean Ecumenical Peace Network)가 5월22일 워싱턴 디씨 소재 연합감리교 예배실에서 창립되었다. 이날 창립예배와 총회에는40여명이 참여했으며 공동 발기인에는20개 교단 소속120명이 참여했다. 북미 한인 기독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초대회장 김정호 목사(UMC)가 환영사를 하고 있다. 환영사에서 김정호 목사(UMC)는"남북 관계가 극단적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의 시작이 참 귀하다."고 밝히고"우리가 그동안 평화에 많이 목말랐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조국 한반도 평화의 그날이 오면 오늘의 이 모임이 작은 디딤돌이 되었다는 겨자씨 만한 기록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창립을 환영했다. 예배는 김대호 목사(PCUSA), 손태환 목사(PCUSA), 정영민 목사(RCA), 조동호 박사(퀸즈대) 등 연합 찬양팀의 인도로 힘차게 시작되었다. 이어 조원태 목사(PCUSA)의 사회와 김기리 신부(성공회) 박상희 목사(기장)의 축도로 이어졌고, 김정호 목사(UMC)가"다시 또 우물파는 사람들" (창세기26:12-35)을 주제로 설교했다. 이어서 발제 순서에서는 김충성 목사(제자회)가'북미 에큐메니칼 평화운동의 역사'에 대하여, 김진양 목사(UMC)는'북미 기독교 평화네트워크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김충성 목사는60년대 창립된 ‘북미기독학자회’와70년대 창립된 ‘미주 목요기도회’가 한국의 민주화, 인권, 평화통일 운동과 연대하여 기도하고 행동했던 역사를 소개했다. 김진양 목사는"북미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삼았으며 평화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밝히고"분단79주년을 맞이하는 조국이 미, 중의 패권경쟁과 핵무기 및 군비경쟁, 군사훈련 등으로 인해 대결과 갈등이 더욱 심화된 이 시기에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와 연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어서 진행된 총회에서는 정관과 창립선언문을 통과시켰고 초대 회장에 김정호 목사(UMC), 초대 사무총장에 조원태 목사(PCUSA)를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창립 발기인120명의 이름으로 작성된 창립 선언문에서는"그동안 기독교인들로서 정의와 평화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사명을 우리가 잘 감당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다짐한다"고 밝혔다. "하나, 우리는 북과 남 정부가 이전의 평화통일 정책으로 돌아가 대화와 협력에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 우리는 미국과 기타 강대국이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조성하는 대화와 정책을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 우리는 교단의 벽을 넘어 평화를 위한 연대와 협력을 이어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기평넷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미에서 기도운동을 펼쳐 나갈 것이며, 다양한 교단과 학계 그리고 단체들과 연대하여 평화를 위해 애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더불어 기평넷은 공동 발기인으로 참여한120명을 평화용사300명으로 확대할 것이며, 제2차 총회는 내년4월에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열기로 결정하였다. ▲초대사무총장 조원태 목사(PUCSA)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참여자들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참여자들이 연방하원 Bill Foster 의원 사무실에 찾아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대화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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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 워싱턴DC서 창립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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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발전은 내한 선교사들의 공로
- ▲ 정용 박사는 발제를 담당했다. ▲ 고사무엘 목사는 토론을 담당했다. ▲ 송훈 박사는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 이하 한교사)은 제 302회 정기 월례발제회에 정용 박사(백석대학교 외래교수)를 초청해 발제를 맡김으로서 구한말 내한한 외국선교사들이 복음전파를 위해 한글을 익히고 사용하면서 한글문법을 확립하고, 외국어 성경책을 국문으로 번역, 한글사전의 출판, 한국 내 한글사용의 문화 정립하는 등 공로가 큼을 아는 기회로 삼았다. 사회는 송훈 박사, 발제는 정용 박사, 논찬은 고사무엘 목사 등이 순서를 담당했다. ▲ 정용 박사는 개화기 당시 한국어의연구는 뜻밖에도 한반도의 밖에서 이뤄졌다면서 연구자는 중국과 일본에 외교 또는 선교의 목적으로 체류하는 자들이 인근 국가였던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되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던 한문에 비해 언문 또는 반절로 격하되 한자의 보조수단 정도로 쓰이다가 1882년 로스-서상윤이 한글성서를 번역해서 기사회생했고, 1886년 헐버트의 한글 자강활동으로 대중화가 되었다고 밝혔다. 조선에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글은 비천해 아녀자나 쓰는 '암말' 취급을 받던 시기에 서양인들은 한국인들과 의사소통을 위한 연구에 공으 들였고,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워나가며 한국문법과 한국사전으로 정리했는데 정작 조선인 한국어선생들은 문법이나 영어의 체계를 몰랐던 편이었다고 설명했다. 대부분 내한 서양선교사들은 한국의 계몽과 근대화 과정에 헌신했고, 선교를 위해 한국어를 익힘에 최선을 다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속했던 문화에서 생산된 문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함으로서 한글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고 정 박사는 분석했다. 정 박사는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한글을 연구하는 학회의 많은 학자들이 구 한말의 주한외국인 선교사들의 공로를 논문에 단지 몇 줄에 불과하게 기술함으로서 인정하는 편인데 초기 한국 기독교가 한글문화에 끼친 지대한 역할에 비하면 너무나 저평가 된 것이라며, 노고에 걸맞는 평가를 학계로부터 받아야한다고 강조했다. 개항 전후의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의 국민들이 신분계층에 따른 교육기회가 제한되었던 틀을 깨고, 교육의 대상을 크게 확장하기 위해 미션스쿨을 세웠지만 필요경비를 학습자가 부담하는 형태였기에 여전히 극빈층은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권서인이나 전도부인들이 쪽 복음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한글을 먼저 깨우친 선교사가 편찬한 '초학언문'을 활용해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한글의 우수성을 먼저 알아본 선교사들이 큰 기여를 한 셈이라고 강조했다. 한글은 그 체계가 하늘과 구름, 바람, 사람과 같은 두, 세 음절의 단어어로 구성되고, 열 다섯개의 자음문자와 모음문자들을 가진 것으로 인식했고, 1833년 7월 1일 발행된 Chinese Repository에 한글의 영어식 발음법이 세계 최초로 수록, 1932년 7월 25일 충청도 장고도와 도대도에 머물었던 찰스 구즐라프(Charles Gutzlaff)는 그해 11월 발행된 Chinese Repository에 조선어로는 발표 했고, 이 자료는 1833년 로버트 모리슨에 의해 한글의 영어식 발음법이 완성 되는 등 성과가 있었다고 정 박사는 밝혔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익히거나 연구함에 따라 성과물들이 발견된다고 정 박사는 설명했다고 밝혔는데 로우니는 1866년 '한국어에 관한 소견'이라는 논고를 집필, 존 로스는 매킨타이어와 함께 1877년 '한국어 입문' 출간 해 차후 '조선어 법'으로 수정 보완 출판되어 이후에 내한 하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등 주한 서양선교사들의 연구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로스는 1877년 한국어회화교재인 'Corean Primer'를 출간, 리델 신부는 1880년 '한불 자전', 1881년 '한국어 문법'을 출간, 달레 선교사는 1874년 '조선교회사' 서론에 조선어를 소개 했고, 언더우드 목사는 1890년 '한영문법', 1890녀 '한영자전'을 출판, 게일 선교사는 '텬로역정', '한영자전'을 이창직과 함께 번역, 스왈론은 1892~1898년 간 '한국학 휘보 Korean Repository'에 한국어교수법과 관련한 기고문을 게재, 베어드 선교사는 1893년 출간했던 '천로지귀'의 개역 수정판을 출간하거나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50가지 도움들'이라는 책의 서술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주한 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전략은 언더우드의 '영한문법'에서 살피면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고,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50가지 도움들'에는 한국어를 귀로 들으면 입으로 재현하거나 한국인들의 생활에 동화될 것, 학습한 것을 밖에서 사용할 것 등의 실천적인 내용들로 가득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50가지 도움들'은 한국어 학습에 쉽게 입문하도록 도왔고, 여러 어휘를 쉽게 익히도록 구성, 다양한 상황에 응용하고, 학습자의 주도적 문법체계를 돕는 등의 특징이 있어 초기 개신교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서로는 오랫 동안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베어드는 외국인들이 한국어발음을 규격화하려고 했으며, 출신지에 따른 발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어의 로마자화'표기법을 강조했다고도 한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동료였던 언더우드나 게일 선교사처럼 성경번역이나 문서사역은 안했지만 엄청난 분량의 서신을 남겼다고 한다. '마포삼열 자료집'에는 한국에 거주하며 한국인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며 선교했던 경험들이 기록되어있기에 이를 주목해야한다고 정 박사는 강조했다. 한국어를 익힘에 오랜 기간이 사용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한국 장로회 선교회 규칙과 내규' 1901년판을 보면 신임 선교사들이 3년간 매년 시험을 치뤄야하며, 시험위원회는 시험 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어학공부를 위한 지도를 해야하며, 새 선교사 어학교사는 위원회의 승인을 받을 것, 위원회는 시험 결과는 매년 본부에 보고할 것, 신임선교사는 5년간 공부할 것 등으 규정했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한다. 마포삼열 선교사 서신을 통해 대부분의 수업에 토착어를 사용할 것, 선교사 출신 교사들에게 빠른 시일 내에 한국어를 익히게 할 것, 수업이 토착적으로 이뤄지는 규칙을 정할 것 등을 주장했다는 등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한다. 정용 박사는 언어는 해당 문화를 발전 시키는 원동력이자 외부에 알리는 수단이기에 자체적으로 문화이며, 인류 사회 문화의 핵심이 되는 '말'과 '문자'로 표현할 만큼 중요함을 강조하고, 한글이 문자학적으로 세계 각 문자들 가운데 매우 독특하고 우수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글은 2007년 UN 산하 세계지식재산기구 43차 총회에서 183개국 만장일치로 '국제특허 협력조약(PCT) 국제 공개어'로 채택되었다며, 우리는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야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다만 주한 선교사들의 한글에 대한 큰 공로는 그들의 교육행위 자체가 모두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 평가절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로는 한글교육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 논문을 연구하는 내내 한국어를 연구하는 전문학자들은 한글 발전에 기독교가 기여했던 것을 인정을 하긴 하지만 그들의 논문에 단지 몇 줄에 한정한 분량이며, 그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느낀다며, 이제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한국어 발전에 그리스도교가 기여했던 부분들을 적극 연구해 세상에 제시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 고사무엘 목사(전문연구원)는 논찬을 담당했다. 고 목사는 정용 박사가 제시한 조선 선교과정에서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익히며 선교에 활용했고, 한국어의 기틀을 다짐과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부분들을 대다수 동의했다. 세계에는 많은 국가와 민족, 부족이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말이 존재하지만 이들 중 고유한 각자의 글자를 갖는 경우는 별로 없으며, 대부분 타 문화권의 글자를 차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에서는 고유의 말과 글자로 종교행위는 물론 학문활동까지 이뤄진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상당수의 문화권에서 영문 알파벳을 차용해서 각 민족의 언어를 표기하지만 정확한 발음을 표기함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한글만은 표음문자이고, 한글이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세계 어떤 언어이든지 발음으로서 표현하는 우수성을 갖고있다고 밝혔다. 한국어와 한글의 우수성이라는 장점을 이제는 한국이 세계선교의 중심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구가 될 것이라면서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의 노력과 성과를 내던 모습을 본받아 세계 선교중심 국가가 되도록 노력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자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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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발전은 내한 선교사들의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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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평판 위한 협력
- ▲ 김동석 목사(믿힘연구원 원장)는 그리스도인은 사역을 위해 협력해야함을 강조했다. ▲ 민경배 명예원장은 한국교회사 연구와 협력에 최선을 다 해줄 것을 강조했다. ▲ 류금주 원장은 한교사 27주년의 시작을 회상하며, 협조를 부탁했다. ▲ 조점숙 목사는 1부 예배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 이하 한교사)은 제 302회 월례발표회와 예배를 지난 5월 9일 서현교회당(이상화 목사 시무)에서 개최했으며, 김동석 목사(믿힘연구원 원장)가 '좋은 평판'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담당했다. ▲ 김동석 목사는 사도행전 11장 23~26절 말씀을 기초로 '좋은 평판'이라는 설교를 담당했다. 김 목사는 바울과 바나바가 활동하던 시기의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함으로서 교회가 성장하던 상황에 대한 설명을 했다. 성경 본문은 회당에서 유대인 외에도 비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예수를 믿게되는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는 당대에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안디옥교회에는 유월절이 지난 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남았는데 이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하면서 재정적인 문제가 발생했고, 바나바가 밭을 팔아 교회에 헌금하는 등 헌신이 있었으며, 교회의 양적 성장으로 인해 동역자가 필요해진 바나바는 바울을 초청해 더욱 교회가 부흥 하는 등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평판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설명했다. 그 평판은 사람들로부터 멸시 또는 칭찬 받는 두가지 의미였겠지만 5천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해 현재 시각으로 봐도 대형교회의 범주에 드는 것이기에 평판이 좋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한국교회도 조선의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줬고, 그리스도인들은 근세로부터 현재 까지 많은 역할을 해서 현재 한국인구의 20%에 달하는 사람들이 성도에 해당하는 이 때 안디옥에서 처럼 우리도 평판을 만들어감에 고민해야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안디옥에서 비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해 교세가 크게 증가했던 사실이 있으며, 이 상황을 바나바는 독점하지 않고 바울을 동역자로 초청해 협력했고, 결과적으로 바울이 현재의 그리스도교에서 기초척인 것들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한교사도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단체로서 예수님의 이끄심을 기반으로 노력함으로 민경배 명예원장의 평판에 힘을 얻어 발전을 지속하는 중이지만 후배 학자들로서는 그 평판의 유지와 발전, 계승을 수행해야하는 과제가 있기에 이제는 중간 세대가 차세대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직접적인 인재영입에 힘 쓰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자고 촉구했다. ▲ 민경배 명예원장은 이날 모임이 한교사 창립 27주년을 겸해 모인 것을 축하하며, 기념 케익을 절단했다. 민 명예원장은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이 시작하기 전에는 이와 같은 단체가 한국교회에 없었다면서 교회사를 연구하는 단체와 사람들로서 나름 복음적인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성공에 이름을 축하했다. 한교사는 모임의 목적이 학술보다는 연구자요 성도로서 서로 친교를 우선하고, 교육과 학술을 위한 노력도 겸하는 것이므로 앞으로도 지금까지 했던 것 처럼 협력하자고 촉구하고, 회원 확장을 위해 노력하기를 당부했다. 1부 예배의 사회와 기도는 조점숙 목사, 광고는 류금주 원장, 축도는 민경배 목사 등이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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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평판 위한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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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 강조
- ▲ 왼쪽부터 순교자의소리가 5월 7일 발간한 「최초의 한국어 성서와 한국 개신교의 기원」, 지난 2022년 10월 발간한 「21세기 존로스 독자판 누가복음전서」. ▲ 저자 최성일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 왼쪽 부터 현숙 폴리 대표, 최성일 교수, 에릭 폴리 CEO. 순교자의소리(이하 VOM, 에릭 폴리 CEO, 현숙 폴리 대표)는 전 세계의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물질적으로 신앙적으로 돕는 전문적인 선교단체로 인정받고 있는데 「최초의 한국어 성서와 한국 개신교의 기원(최성일 교수 저)」을 출간해 귀추를 주목받고있다. 「최초의 한국어 성서와 한국 개신교의 기원」을 출간한 순교자의소리는 지난 5월 7일 정릉의 사무처에서 저자 최성일 한신대학교 신학과 명예교수와 함께 기자회견을 가졌다. 주최측은 한국 최초의 상주 개신교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1885년 4월 5일 입국) 등 이 국내에 입국하기도 전에 존로스 선교사(주로 중국 체류)가 1882년 '누가복음전서'라는 최초의 한국 쪽복음을 번역해 국내로 반입시킴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교사의 내한보다 먼저 준비시켰던 상황을 설명하고, 말씀이 현재 한국교회의 교세정체를 극복하는 방법임을 강조했다. ▲ 에릭 폴리 목사(VOM CEO)는 순교자의소리 설립 초창기에 신앙에 관련한 대부분의 문서를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사용하고자 노력하던 중 이었을 때였는데 한국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초청해 대접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들은 한국교회의 역사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오직 미국교회의 발전 근황과 교회당 건축, 교회 성장 등에만 치중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회상했다. 폴리 목사는 당시 너무 놀랐고,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는 초기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느꼈으며, 20년 이상 해당분야를 연구한 결과 이제는 잊혀진 한국교회 초기의 역사로 돌아가 연구해야한다는 점을 확신했다고 밝혔다. 에릭 폴리 목사는 초기 한국교회의 주한외국인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은 두가지로 생각된다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등의 계열 선교사들이 조선인을 선교하는 방식은 대부분 선교사들이 조선에 세운 병원이나 학교 또는 그들의 선진화된 주거모습을 보여주는 등 기독교인이 된다면 종교적인 어떤 혜택이 주어질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방식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존로스 선교사의 경우 성경책을 나눠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는 방식의 선교전략이었다고 밝혔다. 존 로스 선교사가 나눠주는 성경책은 엘리트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내용이었고, 번역자들은 소위 전문적인 위원회도 아니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도 아니었지만 그 번역 과정 중에 종사자들이 회심해 그리스도인이 되어 큰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설명이다. 존 로스의 성경들이 있은 후 한국 땅에 본격적으로 주한선교사들이 발을 들이게 되었으며, 성공적인 한국선교가 이뤄졌는데 이는 존로스 번역성경 1만 5천권이 사전에 배포된 때문이며, 존 로스는 선교에는 성경말씀이 먼저 들어가야한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폴리 목사는 설명했다. 위에 언급한 두 선교당사자들은 교류는 했지만 정책을 단일화 한 일은 없지만 적어도 1930년대까지의 조선 선교계는 존로스의 방식이 주효했다고 강조했다. 에릭 폴리 목사는 한국교회는 1989년 이래로 교인 감소가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증가세는 없었는데 더해 코로나펜데믹을 거치면서 30%의 교회가 없어지는 등 극심한 혼란을 겪는 중이지만 존 로스 선교사의 방식대로 말씀과 성경책을 중시하고, 앞세우는 신앙전통을 세워야 극복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존 로스의 방식에서의 선교는 삶의 조건이 유려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우선해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이것은 현재 북한 지하교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통해 증명된다고 강조했다. 북한 지하교회가 현재 한국교회보다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다면서 남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교회가 평안하기 위해 교회 우호적인 정치인들을 선출하자는 주장도 상당수가 하고있지만 VOM의 사역 결과 그런 인과관계는 없다면서 존 로스가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만이 교회의 평안과 복음의 전파를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에릭 폴리 목사는 영어로 작성된 최성일 교수의 논문만을 과거에 접하고,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 어렵게 접촉해 한국문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했고, 최 교수의 은퇴 후 수개월간 국문으로 번역해 오늘날 한국어판이 번역 출간되었다고 한다. ▲ 최성일 교수는 본인과 존 로스의 만남은 '섭리적 사건'이었다고 전제하고,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으로서 교회성장에 관심이 많았기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학교에서 실천신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취득 후, 지도교수의 거부로 윗 단계로 진학 못하던 중 우연히 만난 교수님이 에버딘으로 초청했고, 그 교수님이 요구한 한국교회사 약사 리포트르 작성하니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스 선교사를 연구할 것을 추천받아 선교신학분야로서 오늘의 연구성과를 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섭리적 사건이라고 회상했다. 존 로스 선교사가 1882년 누가복음 쪽복음부터 시작해 1887년 신약전서를 완본으로 엮었는데 그의 저작들로 인해 조선 말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이미 어느 정도 틀이 만들어져있기에 조선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 일에 주력할 수 있도록 역할을 했던 측면이 있다면서 선교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명확하지만 그 말씀이 번역되었다고 해서 다 된 것은 아니며, 그 성경책으로 인해 회심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 핵심인데 존 로스의 시대에는 그 역할을 했지만 오늘 날에도 지속 될지는 고민을 개인적으로 해왔다고 최 교수는 심정을 밝혔다. 에릭 폴리 CEO가 늘 존 로스가 교회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고, 그대로 활동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선교열정은 한국교회에서 지속 될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은 늘 마음에 새기고 외워야 하는 것인데 요즘에 선교자들은 선교도구로서 성경책을 대하는 점 걱정되기에 이 책이 출간됨으로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선교의 본질이지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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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