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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들, 특정 후보 지지 표명 자제해라”…지침 내린 개신교 연합
    “교회들, 특정 후보 지지 표명 자제해라”…지침 내린 개신교 연합 “기독교 모든 교단과 단체는 특정 후보 지지 표명을 자제하기 바랍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대표회장당은 22일 개별 교단과 단체, 교회를 향해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편향을 빚을 수 있는 언사를 피해달라고 호소했다. 한교총은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와 공동 대표회장 김영걸, 이욥, 박병선 목사의 이름으로 “이번 선거 과정에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언사는 이미 정치적 편향으로 교회의 덕을 훼손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며 “정치적 성향과 지지 후보가 다르다고 교회 안에서 서로 적대시하는 것은 복음적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은 개인 혹은 유사 단체의 이름으로 교회의 대표인양 호도하는 것을 중단하시고, 실정법 위반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해달라”고 밝혔다. 한교총은 “선거 운동 막바지에 접어든 지금, 이번 선거가 공정하고 질서 있게 진행되도록 행동하자”며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모든 국민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큰 책임과 권한을 갖게 되는 지도자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모든 국민의 생명을 존귀히 여기며,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후보가 당선되도록 기도하자”고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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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2
  • 교황 레오 14세 공식 즉위 "평화가 지배하는 세상 만들자"
    교황 레오 14세 공식 즉위 "평화가 지배하는 세상 만들자" “세상엔 너무나 많은 불화가 있습니다. 평화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듭시다.” 사상 첫 미국인 교황인 267대 교황 레오 14세의 즉위 미사가 18일 오전 10시(현지 시각)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됐다. 전 세계 180여 나라에서 대표단이 참석했고, 20만 신자가 운집했다. 레오 14세는 이날 오전 9시경 흰색 무개차(無蓋車) ‘포프모빌(Popemobile)’을 타고 광장에 나섰다. 지난달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도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즐겨 탔던 이동 수단이다. 레오 14세도 전임 교황의 이런 친근한 행보를 이어받은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암살 시도가 있었던 1981년 이래 주로 쓰이던 방탄차를 ‘통조림 같다’며 거부했었다. 포프모빌을 탄 레오 14세는 즉위 미사를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몰려든 신도들에게 직접 인사를 했다. 광장 밖으로 빠져나가 바티칸으로 뻗어 있는 콘칠리아치오네 대로를 따라 늘어선 군중과도 인사를 나눴다. 갓난아이를 들어 올려 보이는 부모 앞에서 멈춰서서는 아이를 건네받고 직접 축복을 했다. 미사는 성 베드로 대성전 내 베드로 사도(초대 교황)의 무덤에 바치는 기도로 시작됐다. 약 200명의 추기경들이 일제히 늘어서 흰색 교황의 관과 제의를 걸치고 목장(牧杖, 고위 성직자의 지팡이)을 든 레오 14세 교황을 맞이했다. 새 목장엔 예수가 못 박힌 모습의 철 십자가가 달렸다. 무덤 앞에 선 그는 관을 벗고, 동방 가톨릭 총대주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 분향과 기도를 했다. 레오 14세는 곧이어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다’는 가사로 유명한 ‘왕의 찬가(Laudes Regiae)’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미사가 열리는 대성당 앞 야외 제단을 향했다. 교황을 상징하는 팔리움(제의 위에 걸치는 띠)과 복음서, ‘어부의 반지(교황의 인장)’를 든 이들이 앞장을 섰다. 양털로 만든 흰색 띠 팔리움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로서 교황의 직무를, 복음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교황의 사명을, 어부의 반지는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이어받았음을 상징한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새 팔리움과 어부의 반지 전달이다. 레오 14세는 이날 선 채로 마리오 제나리 추기경(이탈리아)이 전하는 팔리움을 받아 걸쳤다. 팔리움을 앉아서 받은 전임 교황들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이어서 루이스 타글레 추기경(필리핀)이 레오 14세의 오른쪽 손 약지에 어부의 반지를 끼웠다. 반지 또한 전임 교황과 달리 서서 받았다. 즉위식에 쓰인 반지는 교황 클레멘스 4세(1265~1268년 재위)가 쓰던 것으로, 제작 시점은 1200년대 즈음이라고 추정된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자 레오 14세는 가볍게 눈물을 훔치곤 하늘을 바라봤다. 그는 마지막으로 복음서를 건네받아 축복하며 교황직의 공식 시작을 선언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NwUKo24yzAA?si=9JKWzfJihkq9bilM"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 교황은 이어진 강론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과 이름을 이어받은 레오 13세(1878~1903년 재위)의 뜻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 그는 “우리는 증오·폭력·편견·차이에 대한 두려움 등 너무나 많은 불화, 또 지구 자원을 착취하고 가난한 이를 소외시키는 경제 논리로 인한 많은 상처를 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지배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말고,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 평화가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걸어가자“고 했다. 그는 미사 말미에 별도로 “전쟁으로 고통받는 무고하고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말자. 협상자들이 나서서 평화를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와 미얀마를 지목해 언급하기도 했다. 레오 14세는 진전이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알려졌는데, 이날도 전쟁의 종식을 바란다는 뜻을 확실히 했다. 그는 기대를 모았던 16일 러시아·우크라이나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직후 “바티칸을 협상 장소로 제안한다”고 하면서, 종전 협상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었다. 레오 14세의 즉위 미사에선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 때와 달라진 모습도 보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사 전 성 베드로 광장 안만 돌며 인사했지만, 레오 14세는 광장 밖까지 나가 신도들을 만났다. 또 금색 십자가가 달렸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목장과 달리 레오 14세는 철로 만든 십자가를 택했다. 전임자는 성 베드로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과 달리 레오 14세는 서서 기도를 했다. 흰색 바탕에 붉은색 십자가가 새겨졌던 팔리움은 이번엔 검은색 십자가의 더 단순한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미사는 라틴어로 진행됐다. 다만 성경 말씀은 스페인어와 영어로, 복음서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읽었다.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은 저마다 출신국 국기를 흔들며 새 교황의 즉위를 축하했다. 교황 모국인 미국 국기가 가장 많았고,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국기도 눈에 띄었다. 사상 첫 남미 출신 교황이었던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 때는 출신국인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남미 국가들의 국기가 많았다. 이날 행사에는 J D 밴스 미 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 등이 참석했다. 교황은 미사 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의 상징인 붉은색 어깨 망토(모체타)를 걸치고 각국 대표단과 인사를 나눴다. 모체타를 아예 걸치지 않으려 했던 전임 교황과 달리, 레오 14세는 공식 석상에선 전통 예복을 착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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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9
  • 프란치스코와 달랐다…새 교황, 한달 뒤 '사도궁' 아파트 입주
    프란치스코와 달랐다…새 교황, 한달 뒤 '사도궁' 아파트 입주 제267대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4세가 약 한 달 뒤 바티칸 사도궁의 교황 아파트에 입주할 것으로 보인다고 이탈리아 일간 코리에레델라세라가 1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현재 사도궁 내 교황 아파트에서는 욕실 리모델링과 벽면 곰팡이 제거 작업이 진행 중이다. 공사 진행 상황을 고려할 때 입주는 한 달 후쯤으로 예상된다. 레오 14세는 지난 8일 즉위한 이후부터 행보 하나하나가 관심을 받고 있다. 프란치스코 전 교황의 소박함과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의 보수 노선 사이에서 어떤 방향성을 보일지에 이목이 집중됐다. 그중에서도 새 교황이 전통적인 교황 아파트를 선택할지, 아니면 프란치스코처럼 산타 마르타의 집에 머물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새 교황의 성향을 가늠할 지표로 여겨졌다. 2013년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도궁 교황 아파트 대신 사제 기숙사인 산타 마르타의 집을 거처로 삼았다. 성 베드로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화려한 전용 공간을 마다한 이유에 대해 프란치스코 전 교황은 "갔을 때 '(여기 살면) 안 돼'라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고 말했다. [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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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6
  • 첫 미사 집전한 레오 14세 "교회가 세상의 어둠 밝혀야"
    첫 미사 집전한 레오 14세 "교회가 세상의 어둠 밝혀야" 제267대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4세가 9일 첫 미사에서 교회가 세상의 어둠을 밝히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레오 14세는 이날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서 추기경들이 참석한 가운데 첫 미사를 집전했다. 영어로 강론을 시작한 레오 14세는 중간에 이탈리아어로 “교회가 이 세상의 어두운 밤을 밝힐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미국 시카고 태생이지만 중남미 지역에서 활동하고 페루 시민권도 가진 그는 영어 외에도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에 능통하다고 알려졌다. 새 교황은 자신이 교회의 ‘충실한 관리자’가 될 것이며, 교회는 웅장한 건물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거룩함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레오 14세는 예수를 광신도로 치부했던 부자들은 물론, 예수를 정직한 사람으로 여겼던 보통 사람들이나 예수의 제자들마저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실망하고 등을 돌린 일이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다면서 대중 매체, 대중문화, 정부 엘리트, 학계, 실리콘밸리 등이 저마다 기독교 신앙을 “어리석고, 연약하고, 지성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해 “기술, 돈, 성공, 권력, 쾌락과 같은 다른 방어물들을 선호하는 환경”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어 “이런 환경에서는 복음을 전파하고 그 진리의 증인이 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의 선교 활동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레오 14세가 적대적 환경에서 프란치스코 전임 교황과의 밀접한 연속성을 유지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레오 14세의 즉위 미사는 오는 18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다. 첫 일반 알현은 21일로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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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0
  • 122년만에 다시 등장한 '레오'…전임 교황 13명 모두 개혁가였다
    122년만에 다시 등장한 '레오'…전임 교황 13명 모두 개혁가였다 122년 만에 다시 ‘레오(Leo)’라는 이름을 선택한 교황이 탄생했다. 교황청은 8일(현지시간) 제 267대 교황에 오른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69) 추기경이 ‘레오 14세’라는 교황명을 택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CNN은 “1903년 선종한 레오 13세 이후 122년만”이라고 전했다. 레오 13세는 1878~1903년 재위했다. 25년에 걸친 그의 재위 기간은 교황 역사상 네 번째로 길다. 그는 1891년 발표한 회칙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새로운 사태들에 대하여)'으로 가톨릭의 사회교리를 본격적으로 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산업혁명이 노동자들의 삶에 끼친 폐해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었다. 첫 번째 레오 교황(레오 1세)은 5세기에 재위한 ‘대(大) 레오’로, 훈족의 왕 아틸라를 설득해 로마 침공을 막아낸 인물로 기록돼 있다. 르네상스 시기의 대화가 라파엘로는 이 장면을 1514년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이란 제목의 작품에 담았고, 현재 바티칸 사도궁에 전시 중이다.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를 위해 시스티나 성당으로 향하는 통로 구간에 있다. 이 회화 속에서 무장하지 않은 교황 레오 1세는 성베드로와 성바오로의 가호 아래 침공을 멈추도록 아틸라를 설득한다. 가톨릭은 이를 ‘비폭력적 합의의 상징’으로 기린다. 라틴어로 ‘사자’…힘과 용기 상징 역대 교황 이름으로 레오는 요한, 그레고리오, 베네딕토에 이어 클레멘스와 함께 공동 4위에 올랐다. 가톨릭에서 라틴어로 ‘사자’를 의미하는 레오는 힘과 용기를 상징한다. 워싱턴포스트는 “레오 13세를 포함해 '레오'라는 이름을 쓴 전임 교황 13명은 개혁가들이었다”고 짚었다. 전통적으로 교황들은 자신이 쓸 이름을 고를 때 똑같은 이름을 썼던 전임자들의 사목 방향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아왔다. 마테오 브루니 바티칸 대변인은 이날 콘클라베 종료 후 브리핑에서 “레오라는 이름은 레룸 노바룸에서 시작된 현대 사회 교리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라며 “인공지능(AI) 시대를 살아가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노동자들에 대한 교황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술의 급격한 변화라는 점에서 19세기와 오늘날은 연결돼 있다”고도 말했다. 인권·노동 문제를 중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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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0
  • 사상 첫 미국인 교황 레오 14세
    사상 첫 미국인 교황 레오 14세 가톨릭 2000년 역사상 최초로 미국 출신의 교황이 탄생했다. 8일(현지시간) 로마 교황청은 제267대 교황으로 미국의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69) 추기경이 선출됐다고 밝혔다. 교황 즉위명은 ‘레오 14세(Leo XIV)’다. 라틴어로 ‘사자’를 뜻하는 레오는 강인함과 용기, 리더십을 상징한다. 이날 레오 14세는 첫 강복 메시지에서 평화를 빌었다. 선출 직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의 ‘강복의 발코니’로 나와 이탈리아어로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La pace sia con tutti voi)”이라고 말했다. 9일 첫 미사에선 “가톨릭교회가 이 세상의 어두운 밤을 밝히는 등대가 되도록 기도하자”는 메시지를 내놨다. 진보적인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의 측근이었지만, 레오 14세는 신학적으로는 중도 성향이다. 이 때문에 교회 내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인물로 평가된다. 실제로 그는 교회의 분열에 대해 “그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우리 주교들은 특히 통합을 향한 움직임을 강화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향해야 한다”고 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가난한 이들과 이민자들을 포용하는 모습이 선대 프란치스코 교황과 닮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레오 14세는 지난해 10월 바티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주교는 자신만의 왕국에 머무는 작은 왕자여선 안 된다”며 “사람들에게 다가가 함께 걷고, 고난을 나눠야 한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은 “레오 14세는 발언이 온화한 인물이며 성직자로 일하던 기간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왔다”고 전했다. ABC방송은 “매우 현실적이고, 친절하지만 내성적인 사람”이란 주위 평가를 전했다. 페루서 20년간 빈민 돌봐…“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 미국인이면서도 페루 빈민가 등 변방에서 사목한 그의 발자취가 교황 선출의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초강대국인 미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세속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가톨릭 전반엔 미국인 출신 교황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바티칸 소식통을 인용해 “레오 14세는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이라고 짚었다. 레오 14세는 1955년 9월 14일 미국 시카고에서 나고 자랐다. 프랑스·이탈리아계 미국인인 아버지 루이스와 스페인계인 어머니 밀드리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에서 복무했고, 그 후 교육자로 일하면서 가톨릭 교리교사도 맡을 만큼 독실했다. 어머니는 도서관 사서였으며, 교황의 두 이모가 수녀였다고 시카고선타임스는 전했다. 교황에겐 친형제가 두 명 있다. 미 언론은 “그는 음악과 독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고 전했다. 그는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를 앞두고 이탈리아 공영방송 라이와의 인터뷰에서 “조부모님은 모두 이민자였고, 나는 가톨릭 가풍이 짙은 가정에서 자랐다”며 “부모님 모두 교구 일에 많이 관여하셨다”고 소개했다. 가족 배경 덕에 영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 등 5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레오 14세는 시카고 가톨릭신학연합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또 신학과 별개로 펜실베이니아주 빌라노바대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시카고선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한때 시카고의 멘델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수학을 가르친 적도 있다고 한다. 27세 때 로마로 유학을 떠난 그는 교황청립 안젤리쿰대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인 그는 1982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미국 국적이지만 20년간 페루에서 사목하면서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2015년엔 페루 시민권도 땄다. 2015~2023년에는 치클라요 교구장을 지냈다. 2020년부터는 페루 카야오 지역도 같이 맡았는데,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치클라요에서 약 700㎞ 떨어진 이곳을 직접 운전해 오가며 수시로 신자들을 살폈다고 치클라요 교구는 전했다. 식량과 모포 등을 실은 흰색 픽업트럭을 몰고 안데스산맥 오지의 마을들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AFP통신은 “온화한 말투의 미국인이 페루에서 수십년간 빈민들을 돌봤다”고 했다. 페루 출신의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알렉산더 램 수사는 레오 14세가 가난한 이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사회정의 구현과 환경 보호에 앞장서 현지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페루의 (다른) 주교들조차 그를 성인이라고, 북쪽의 성인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과거 인터뷰에 따르면 레오 14세는 테니스를 즐기며 페루에 있는 동안 현지 축구팀을 응원하기도 했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팀인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오랜 팬이다. 레오 14세는 2023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교황청 주교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교황청 주교부는 신임 주교 선발을 관리·감독하는 조직으로, 교황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조직이다. 그는 특히 주교 후보자 명단을 결정하는 투표단에 여성 3명을 처음 포함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조치를 주도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와 관련, 레오 14세는 과거 인터뷰에서 “다양한 상황에서 그분들(여성)의 시각이 우리를 풍성하게 해줬다”고 말했다. 대체로 온건한 인터뷰 발언과는 달리 과거 소셜미디어(SNS)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소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가 추기경 시절 이용한 X(옛 트위터) 계정을 보면 트럼프 정부의 이민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공유한 흔적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월에는 JD 밴스 부통령을 비판하는 가톨릭 매체의 기사를 공유하기도 했다. 해당 기사의 제목은 “JD 밴스가 틀렸다. 예수는 타인에 대한 사랑에 등급을 매기라고 하지 않았다”였다. 2017년엔 당시 대권에 도전하던 트럼프에 대해 한 추기경이 기고한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을 공유했는데, 이 역시 트럼프의 반 이민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레오 14세는 한국과의 인연도 있다. 2002~2010년 등 4차례 방한했다. 방문 목적은 수도회 총장으로서 회의를 주관하고, 한국의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회원들에게 더 복음적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국내에서 레오 14세를 직접 만났던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한국 지부 이기훈 신부는 “옆집 아저씨같이 소탈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이 신부에 따르면 레오 14세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총장 자격으로 2010년 9월 한국을 찾았을 당시, 서울 강남 봉은사를 방문해 스님들과 함께 차담회를 가질 때도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오는 2027년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청년대회(WYD)에 참석하기 위해 레오 14세가 다시 방한할 가능성이 크다. [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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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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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죄와 율법과 의는 모두 예수의 관점으로
    ▲ 유선화 작가는 「로마서, 오직 믿음으로 이르는 하나님의 의(길과 생명 출판)」을 출간했다. 유선화 작가는 「로마서, 오직 믿음으로 이르는 하나님의 의(길과 생명 출판)」를 출간함으로서 죄를 지어 죽을 수 밖에 없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았으며, 복음으로 거듭 난 이후로는 과거의 죄의식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과 동행해야한다는 내용을 최근 밝혔다. 지난 해 「요한계시록,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길과 생명 출판)」를 출간한 유선화 작가는 이에 대한 이해를 미지의 세계처럼 여겨온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실한 잣대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아왔으며, 연달아 로마서를 출간해 이방인들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자녀라는 점을 분석해냈다. 요한계시록을 다룰 때 기독교계의 연구자들이 오역을 우려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유 작가는 계시록의 모든 장과 절을 표시하고, 성경의 원문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해석함으로서 모든 구절을 해설했기에 신뢰성있는 방식의 해설이 가능했는데 이번 로마서를 쓰면서도 같은 방식으로 모든 구절과 성경이 최초에 작성되었을 때 사용한 원어를 대조함으로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신뢰성을 가져도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로마서는 한 마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라고 단언하고, 이번 저작의 모든 글쓰기를 예수님과 복음에 중점을 두고 풀어갔다. 로마서는 의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성경이라고 밝힌 저자는 율법과 하나님의 의,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동일하게 이르는 믿음의 의, 아담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두 결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의 죄와 율법과 육신의 문제,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는 방ㅂ버,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의 섭리와 비밀 등을 말씀하고있으며, 여기서 바울 사도는 구약의 말씀으로 그 비밀을 어떻게 논리정연히 다루고 있고, 우리가 믿고 따라야하는 방향은 무엇인지를 기술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저자는 특별히 로마서는 죄와 율법, 의를 주제로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루게되었다며,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발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일방적 주권을 통한 선택적 예정은 이스라엘 사람들 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예정 및 이에 따른 믿음의 선택으로 인한 구원을 설명했다. 죄에 대해서 로마서 7장은 속 사람이 아닌 육신에게서 발생하는 점이 구별해 죄은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아야하며, 8장에는 거룩하게된 의로운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이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으로 살아야 함을 조명했다. 저자는 로마서가 율법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주목하고, 그 역할과 성도에 대한 적용점을 설명했다. 바울 당시에는 할레를 비롯한 율법적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함는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이 의롭게한다는 점을 가르쳐야했을 것이라면서 로마서의 가치가 어떻게 출발하는지를 설명했고, 이는 율법과 믿음에 대한 로마서의 이해인데 이 부분도 조명했다고 한다.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복음의 능력이 되게 하는 것이고, 칭의라기 보다는 오직 믿음으로서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신학적 관점상 '칭의'라는 것보다 저자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들음으로서 믿음이 생기고 구원 받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즉 피조물의 관점에서 살펴본 부분들은 관심을 갖게 하는 요소다. 그리스도와 연합된자로서 죄와 율법, 육신에 관한 내용도 다뤘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났고, 새로운 피조물임에도 지속적인 죄의 발생으로 인한 고민을 하기도 하지만 로마서 7장에는 '내 속에 거하는 죄'라 하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 조차 여전히 죄인이라는 의식에 사로잡혀서 살기도 하지만 저자는 죄를 보는 관점을 달리해야한다는 주장이 수록되어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인데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새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인데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기라(로마서 6장 11절), 지체를 몸의 사욕인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서 육신으로는 죄를 섬기는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과 삶에 적용할 방법이 동 저서에 자세히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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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한국교회사 연구 기틀 개척 공로
    ▲ 민경배 박사는 이날 토론회에 참여해 교회사학 연구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사)국제독립교회연합회(총회장 정인찬 목사)와 웨이크사이버신학원은 제 3회 웨이크사이버신학포럼을 지난 5월 20일 CTS아트홀에서 '한국교회사에서 바라보는 역사신학자 민경배 박사'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민경배 박사는 1972년 한국기독교회사를 발간함으로서 한국교회사의 연구와 교육분야의 체제와 틀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이날 한국의 교회사 연구에 권위자로 평가 받고 있는 이상규 박사(전 고신대학교 부총장)와 박명수 박사(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등이 발제자로 초청되어 민경배 박사의 생애와 학문, 민족의 이해, 내연과 외연으로 구분한 교회사 서술구도 등을 거론했고, 대체로 한국교회사의 기초부터 성숙단계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기여를 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 정인찬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총회장은 토론회 주최자로서 이날 교회를 위한 좋은 대안이 되기를 기대했다. ▲ 정인찬 박사(국제독립교회연합회 총회장)는 동 교단과 웨이크사이버신학원이 민경배 박사에 대한 토론회를 진행하게 됨은 한국교회에 크게 도움이 될만한 일이라면서 이 자리에서 논의된 내용들이 복음전파에 획기적 기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좌로부터 박명수 박사, 민경배 박사, 류금주 박사, 이상규 박사. ▲ 이상규 박사는 생애와 학문의 개괄 발제를 담당했다. ▲ 이상규 박사는 '민경배 교수의 생애와 학문'을 주제로 발제했다. 이 박사는 민경배 박사는 스승인 백낙준 박사의 계보를 잇는 제 2세 학자라고 평가하고, 한국교회사 학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라고 정의했다. 그가 한국에서 교회사연구를 개척했고, 오늘날 교회사학의 발전에 초석을 놓은 학자라면서 한국의 신학도와 목회자 중 민 박사의 책을 한 권이라고 접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는 1934년 6월 22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읍내리 212번지에서 출생했고, 그의 아호인 '솔래'는 송천리의 솔래(松川)에서 취한 것으로 유추했다. 민 박사는 해방 후 월남해 서울에 정착해 1952년 3월 중앙고등학교를 졸업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20기로 입대해 종군했지만 부상으로 22개월 후 명예 제대했다고 설명했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수학하며 1956년 3월 졸업 후 동 대학원에 진학해 1958년 3월 석사학위를 취득, 스코틀랜드 에버딘대학교 신학부에서 수학하며 마가렛 크리스티나 상을 수상하는 등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동 대학원에 진학 1962년 5월 졸업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귀국한 민 박사는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해 신학대학원 과정에서 수학해 1965년 3월 졸업했고, 1967년 11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이상규 박사는 설명했다. 민 박사는 목사안수 후 이미 교수가 되었지만 영국 런던대학교 신학부로 유학해 1969년 8월 졸업했는데 이 때 로버트 토마스 목사(Rev. Robert Jermain Thoma)를 연구해 조명(민 박사는 이 연구를 통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와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던 토마스 목사가 웨일즈 출신이며, 에딘버러대학교 뉴칼리지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순수한 선교의 열정으로 인한 순교였다는 점을 밝힘)했고, 귀국 후 연세대학교의 교수직을 감당하던 중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에서 1984년 3월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민 교수가 1958년 3월 연세대학교에서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대학원 졸업과 동시 불과 24세의 나이로 부산 분교의 전임강사로 임용된 것이라고 밝혔다. 민 박사는 1958년~1999년 8월까지 41년간 교수직을 감당했고, 연세춘추 편집 및 주간, 교목실장, 기독교문화연구소장, 신학대학장 등 보직을 맡았다고 밝혔다. 1984년에 4년간 교무처장, 1988년 4년간 및 1994년 2년간 연합신학대학원장, 1999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정년으로 은퇴하며 명예교수로 추대, 2002년 3월 서울장신대학교 제 2대 총장으로 4년 후 2006년 퇴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 초빙되었고,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원장과 명예원장, 고문 등을 감당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노력하는 중이라고 평가했다. 이상규 박사는 「한국기독교회사」 및 「한국민족교회 형성사론」, 「교회와 민족」 등 50여 권의 저서, 「에큐메닉스」 등 7권의 역서, 1975년 3월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이 발간하는 「신학논단」에 '루터의 내적 발전과 그 신학적 계보'를 발표 한 이래 17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민경배 박사의 학문적 발자취를 설명했다. 민 박사는 백낙준 박사와 더불어 1966년에 '한국교회사학회'를 조직해 한국에서 가장 오랜 신학회로서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고, 1993년에는 연세교회사학회를 조직해 이 모체를 통해 1997년 6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을 거쳐 명예 원장 혹은 고문으로 지속적인 후학 양성에 주력 중이라고 밝혔다. 학회 활동 외에도 서울YMCA연맹 이사 혹은 부이사장으로 활동, 기독교백주년기념사업회 혹은 순교자기념사업회 등에 관여하거나 학술적 자문 활동, 해외 강연에서의 강좌, 국제학술회 참여 등의 다양한 활동을 수행함으로서 교회의 교사(doctor ecclesiae)로서 일생을 살았다고 평가했다. 이 박사는 민 박사의 교회사연구에 대해 한국교회사 분야를 넘어서는 영향력도 있었지만 특히 한국교회사의 전 영역의 다양한 주제를 연구 및 개척했고, 국내외 각종 도서관이나 역사관, 고문서관를 섭렵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의 저술목록은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 선교, 예전, 인물, 기구, 교파, 민족 혹은 독립운동, 외교와 국제관계, 역사인식과 방법론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거나 개척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연구되지 못했던 여러 분야를 선구적으로 연구했고, 한국교회의 기원부터 해방 이후 교회 현실의 문제까지 연구와 재 해석, 사실규명, 사실의 의미 석명 등을 진행했는데 예를 들면 민경배 박사가 연구했던 '로버트 토마스: 한국 초기 선교사의 한 유형과 동서 교섭의 문제' 등이 그러하다고 밝혔다. 한국 기독교의 시원을 서구형 기독교와 미국형의 교파형 선교로 설명하거나 역사환경과 신앙행태의 구조적 차이를 석명하는 역사지리학, 한국교회 찬송가사, 기독교 신앙과 민족문제에 대한 접근 등의 연구방법론은 모두 민경배 박사가 개척한 분야라고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 저 「교회와 민족」에 수록된 '한국 근대 문화와 기독교의 형태 및 그 영향범위'를 이 박사는 살피면서 기독교 접촉의 단계를 넘은 수용 및 토착화의 과정을 연구한 선구적 연구형태였고, 여기서 서북형(黃平道, 체제에서 소외된 서북지방 특유의 종교적 심정)과 기청형(畿淸, 京忠道, 유교 양반의 지식인 계층의 존왕적 충성)이라는 두가지 신앙 형태 혹은 수용 배경을 제시하고, 이것을 민족운동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했으며, 이런 구분은 이미 송창근과 김린서 등에서 보이지만 민 박사는 이를 실증적으로 체계적으로 도식화했다는 공로를 이 박사는 설명하면서 이런 분석의 틀 자체가 선구적 시론이었고, 후학들의 발전적 연구의 토대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민 박사의 저술 「한국기독교회사」는 한국교회 역사 최초의 교본적 통사였으며, 여러 신학교육기관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는데 1968년 출간해, 1972년 증보판, 1982년 개정판, 1993년 증보판, 2007년 순한글판으로 발간되는 등 결국 690쪽의 대작으로 발전되었다고 밝혔다. 이전에도 이런 류의 연구를 백낙준, 김양선, 정인과, 장정심, 변종호 등이 진행했지만 한국기독교회사의 체계적 통사로서는 볼 수 없었고, 민경배 교수의 것은 근대 이전의 기독교의 접촉부터 한국전쟁과 1960년대까지의 한국교회사에 대한 체계적 최초의 통사였다고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가 민족교회 또는 민족교회론을 주창함으로서 당대 주류였던 선교확장사에 대한 반대급부가 되어 논란이 되었고, 민족이라는 말에도 어감상 오해를 받았던 부분들이 있었다고 이상규 박사는 밝히고, 민 박사는 한국교회를 '민족교회'로, 한국교회사를 '민족교회형성사'로 인식함으로서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주체적으로 기술했다고 평가했다. 민 박사 이전의 기존 한국교회사의 연구는 '선교사적' 연구로서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가 주체가 되고, 파송국의 자료를 의존한 역사기술이었지만 민 박사는 선교사 파송국 교회의 연장이 아닌 우리가 주체가 되어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민족교회사'로서 인식했고, 이는 새로운 연구접근방식이고 독창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민 박사의 '민족', '민족교회', '민족교회 형성론'은 배타적 민족주의나 문화민족주의, 혈통에 근거한 개념이 아니라 언어나 역사, 문화,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민족공동체로서의 교회이며, 역사와 고난을 함께 공유한 교회라는 점에서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민 박사는 각기 다른 선교부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어도 교파 중심의 교회가 아닌 민족공동체의 하나의 연합된 교회를 민족교회로 파악하고 있고, 탈 서양 선교사를 지향하되 친일로의 경도가 아니며, 친 동향을 지향하되 반 선교사로 경도되지 않는 성격이라고 이상규 박사는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의 교회관은 '신도들의 세계적인 공동체'라는 개념을 상정하고, 기독교회사는 그리스도라는 뚜렸한 역사상의 인물과 교회라는 신도들의 세계적인 공동체, 사(史)라는 현저한 개념들을 다루고 있으며,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도, 완전할 수도 없다는 명제 속에 어느 한 측에서 반대측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무리하며, 완전할 수가 없을 수 밖에 없는 특정 논리를 들이대며 교회분열을 일삼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고 분석하고, 민 박사는 순결과 연합이라는 두 축의 선택상황이라면 연합에 더욱 의미를 둔 것이라고 이 박사는 밝혔다. 한국교회사를 다루며 '외연과 내연'이라는 신앙현상학을 개발해 역사연구의 틀을 제시한 것이 민경배 박사의 가장 특별한 공로라면서 그가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기간 동안 순수한 신앙의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민족운동과 도덕운동, 사회변혁운동으로 나타나 한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는 역사의 틀이라고 이 박사는 정의했다. 이 연구 틀은 한국 뿐 아니라 모든 나라와 시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원리라고 했다. 그의 저서 「민족과 교회(1981년)」 등에 게재된 논문들에 '내연과 외연'이라는 상관구조를 해명하ㅁ녀서 1903~1907년 한국교회 부흥은 신앙의 내연 구도였고, 1919년 이래 민족독립운동으로 외연 되었으며, 또 다시 김익두나 이용도의 신앙부흥운동을 통해 내연화하고, 1935년 일제의 가혹한 군국주의적 전시체제 하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됨에 따라 마지막 저항으로 외연화 되는 구조인데 결과적으로 신앙운동이 민족운동의 동력이 되는 입체적인 해석방법이라고 이 박사는 일례를 들었다. 민경배 박사의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내연과 외연의 현상학은 기독교인의 현존과 존재 양식, 사회 참여 양식에 대한 역사적 실례를 제시하고, 즉 그리스도인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신앙고백적 삶을 추구하면 결과적으로 사회변혁적 역할도 감당하게된다는 연구의 흐름이라고 이 박사는 설명했댜. 이 외연과 내연의 연구방법론은 현재도 민 박사의 제자들과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에서 지속적으로 사용 및 적용하고 있는 방식으로 알려졌다. 이상규 박사는 논문의 말미에 "우리가 배워하 할 것은 그의 저술이나 학문적 결실만은 아닐 것이다..., 학문에 대한 열정, 진리에 대한 확신, 후학들에 대한 애정,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사랑"을 주장했으며, 실제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학술활동이 아닌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성도들이 모여 성경이 시키는 교제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지하고있다. ▲ 박명수 박사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발제를 담당했다. ▲ 박명수 박사는 '민경배 교수의 한국교회사학에 나타난 "민족" 이해'라는 제목의 발제를 담당했다. 박 박사는 민족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선 단어라고 전제하고, 민족 또는 민족주의는 한국적 상황에서 외세나 제국주의에 대칭되는 차원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공산좌경세력들이 미국을 향해 제국의 프레임으로 보고, 미국에서 온 서양 기독교 세력도 적대하려는 즉, 북한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미국을 중심한 서구문화의 전달자로서 한국 문명화에 앞장서면서 조국의 근대화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겼던 것이라고 박 박사는 평가했다. 부정적 측면으로서 좌측의 민족주의세력이 볼 때 한국교회는 민족주의에 대한 가장 큰 도전세력인 미국의 친미집단이자 반민족주의집단이라는 프레임이 형성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박 박사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원래는 개신교의 핵심 단어였다면서 기독교는 천주교와 달리 민족을 강조했는데 루터교가 독일민족주의와 손을 잡았고,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와 손을 잡는 한편 성경을 강조하느 개신교의 특징상 각국의 자국어성경을 사랑해서 개신교가 들어간 지역마다 민족의식이 함양되었다고 반박했다. 또한 민족은 한국적 상황에서도 우파의 단골개념으로서 빈부와 계급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개념으로서 서구제국주의에 맞서 국민을 단결시키는 용어라고 정의하고, 공산주의는 원래 민족을 부루주아의 용어로 이해하고, 무산의 노동자계급들이 주도하는 계급혁명의 완성을 진정한 해방이라고 주장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좌익은 계급이라는 단어보다는 민족이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계급혁명을 진행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차제에 우리는 한국교회와 민족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박 박사는 민경배 박사의 저작들에 나타난 민족 개념은 현재 일부가 통용하는 반제국주의적 이념 중심의 민족주의가 아닌 서구 기독교와 힘을 합해 민족을 부강케 만드는 현실적 개념으로서의 열린 민족주의였다고 분석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를 정리하는 차워에서 초기 한국교회사가 시도되었으며,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보고서를 중심으로 선교 역사를 정리했는데 이 같은 입장에서 초기 한국개신교사를 총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백락준박사였고, 그는 교회사는 근본적으로 선교사라는 입장에서 한국개신교사를 정리했다고 박 박사는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사를 선교사가 아닌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서술하려는 최초의 학자이며, 복음을 전해준 자의 자료 뿐 아니라 복음을 받은 자의 자료도 분석 정리했다고 박 박사는 설명했다.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을 논할 때 선교사들이 한국 민족교회의 주체가 되기는 힘들다는 한계가 있고, 그들이 한국 민족의 고통을 이해하더라도 우리의 정서를 대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박 박사의 평가다. 그렇다고 민 박가 선교사들을 배타적으로 평가한 것은 아니며,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 못하더라도 한국인의 편이지 일본제국주의의 편은 아니며, 이런 측면에서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은 "탈서양종교사(脫西洋宗敎史)하되 친일로 경도(傾倒)되지 않고, 친동양(親東洋)하되 반선교사로 기울지 않는, 강력한 탈권(脫圈) 에너지가 참된 의미의 '조선 민족의 교회'를 형성 해 나가는 저력"을 근본으로 삼고 있음을 밝혔다.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이 마치 기존의 선교사관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의 주된 비판의 대상은 소위 진보신학의 역사이해에 집중되어 있다는 평가를 했다. 민 박사의 저서 「교회와 민족(1982)」이 출판된 때 그 민족교회론이 활발히 전개되던 때는 한국 신학계에서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이 강하게 대두되던 때였고,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은 그러한 주장들에 의구심을 들어냈다고 박 박사는 밝혔다. 한국교회사를 보는 시각 중 일부가 민중사적으로 보려는 것은 조선 말의 권력 체제에서 소외된 농민층의 저항이던 동학혁명의 계승운동으로 간주하려하고, 이는 한국기독교의 사명과 역사를 민중의 저항의 한계에서만 가치를 인정하려할 때 민중의 저항력 결속의 한 에너지에 기독교가 동원되었다는 식의 주객 전도의 왜곡이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측면이라고 제시했다. 민경배 박사의 민족은 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민족공동체이지 어떤 특정 계급을 배제하려나 지칭하려는 계급공동체가 아니라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민 박사는 한국적 신학으로 한국교회사를 바라보려는 시각들에 지나치게 보수적인 시각을 갖은 나머지 한국교회사가 선교사들에게 굴종된 역사이므로 무가치하고, 새롭게 한국인의 신학을 만들어야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초기 한국교회사는 무의한 잘못된 역사로 보여질 것을 우려하는 측면도 언급되었다. 박 박사는 민경배 박사에게 민족교회는 선교사와 대칭 개념이 아니며, 그는 교회의 역사성과 보편성을 믿기에 교회론을 강조하는 이유도 되는데 그에게 교회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성례전에 참여하는 보편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의 민족교회론은 보편교회와 대칭되는 개념을 갖고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편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어떻게 한국교회가 주체적으로 소화했는가를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개신교는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미국 개신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가 제국주의적 선교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러한 고종은 이러한 당시 개신교의 선교사들을 등에 업고 조선 민족을 위협하는 세력들로부터 보호받으려고 했기에 한국 기독교를 서구 제국주의와 동일선상에 둠은 몰 이해한 일이라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박 박사는 진보주의적 교회사가들 상당수는 선교사를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교회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제국의 침략을 발견하려는 경향을 보였지만 사실 당시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아닌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침략에서 조선을 지켜줄 세력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에 대해 민경배 교수는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가 기여했다는 입장인데 민족주의라는 서구적 개념은 국민 각자가 주인 대접을 받는 민주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개신교가 조선에 등장하면서부터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에 거대한 에너지로 봤다고 박 박사는 평가했다. 조선의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방법은 스스로 전도하고, 자립하며, 통치하는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사용했고, 이것은 책임적 시민을 양성함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종교적인 것 외에도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교육과 경제 독립을 위한 실업교육에 앞섰는데 본래 자립적인 서북사람들은 기독교정신으로 무장해 민족산업을 형성함에 앞장 섰고, 이런 배경으로 근대적 의미의 시민의식을 진 민족운동을 벌일 수 있는 집단이 바로 개신교였고, 독노회를 1907년에 총회를 1912년에 조직함으로서 전국조직망을 갖춘 상태에서 3.1운동을 맞이해 전국적인 독립운동까지 기여했던 애국의식, 책임의식 등의 발로였다고 보는 것이 민경배 박사의 지론이었다고 박 박사는 평가하고, 민경배 박사의 민족교회는 체험적 신앙을 내연으로 해서 한국교회의 반경을 외연으로 확대해가는 복음주의적 교회임을 언급했다. ▲ 류금주 박사는 민경배 박사에게 교육받으며 습득한 교회사학 연구의 방법론을 설명했다. ▲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는 민경배 박사의 직계 제자로서 그에게서 수학했던 역사연구방법론인 '민경배의 한국교회사 서울의 구도: 신앙 내연(內燃)-외연(外延)'을 발제했다. 민경배 박사의 교회사를 보는 시각에서 내연(燃)은 불탄다는 것이고, 외연(延)은 이어지진다는 뜻으로서 이는 곧 신앙이 안에서 불타면 그 에너지가 반드시 바깥으로 나오기 마련이라는 구도라고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는 1934년 생으로서 당시에는 일제 치하로 나라가 없던 시절이었고, 출생된 해의 한국교회는 선교 50주년이었으며, 한국전쟁 때는 공산정권의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월남했고, 수도 서울에 정착해 교회와 조국의 근대화와 발전상을 모두 경험한 교회사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모두 경험한 교회사 박물관 급의 유능한 교회사학자라는 설명을 했다. 류 박사는 민경배 박사가 한국교회사학을 연구해 온 것은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로 개화기부터 근세, 현대까지 한국의 모든 역사와 문화, 학문에 영향을 미친 것은 기독교였음을 체험했고, 한국교회가 잘 됨으로서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 전세계에 밝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한국교회사를 연구함에 있어 복음과 교회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되었던 것이 큰 동기였다는 방향으로 발제를 이어갔다. 민 박사의 교회사에 대한 사상은 연세대학교에서 평생을 교회사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게 했고, 한국교회사학연구원(초대원장 민경배, 이사장 박옥선)을 지난 1997년 6월 창립해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교회사학을 연구하고, 신앙과 교회사를 기반한 교제를 진행해오기도 했으며, 동 연구원은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동북아 3국의 교회사가들을 모아 '동북아시독교사학협의회'를 구성해 10년간 교류해오는 등 사명을 감당했다고 류 박사는 회고했다. 민경배 박사는 11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역사방법론을 지난 2018년 약 1년간 연구발표했다면서 동 방법론은 정량론, 내연외연과 신앙현상학, 신앙지리학, 실체론, 그림처럼 아름답다, 질문-에듀스, 전역사체계화, 입체론, 유기역사론, 역사-시기 완충론, 역사-등거리론 등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류 박사는 실체론에 대해 사크라멘토 곧 성례는 예수그리스도의 역사 통치의 역사내 지점으로서 역사는 허상이 아닌 예수께서 실재 임하셔서 다스린다는 실체를 말함이라고 설명했다. 역사-등거리론은 역사는 하나님의 경륜의 집행 장소로서 각 시대와 각 존재에 독자적 사명을 분여하심으로서 역사를 경륜해가시는 것이며, 사명 받은 존재는 자신의 영역에서 주어진 사명과 기업, 자산과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다는 개념임을 설명했다. 한국교회사를 정리함에 백낙준 박사는 선교사관, 주재용 박사는 민중사관, 민경배 박사는 민족사관이라고 구분하고, 선교사관과 민중사관은 선교의 입장 또는 민중의 입장으로서 사관을 정해놓고 고찰하는 연역적 측면이 있고, 민경배 박사는 연구해보니 신앙과 함께 민족이 각 시대의 실체로 부각되었다는(1880~1960년대 한정) 귀납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류 박사는 분석했다. 정확히는 민경배 박사의 민족사관은 민족교회사관으로서 독자적인 것이 아닌 교회와의 관계에서 고찰되는 것이며, 그의 민족교회사관을 1960년까지 한정하는 이유는 그 '민족'이라는 말이 (특정 시대부터) 기독교회와 무관하게 사용되고, 용법 또한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교회사연구방법론에 수학적 단어인 '함수'라는 개념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류 박사는 이 역학 함수관계를 교회를 중심으로 4방향에서 선교사와 신앙, 일본, 민족, 초월적, 서양적, 동양적, 역사적 요소가 상반되게 위치하는 방식임을 설명했다. 즉 신앙은 초월적 차원에서 이해되고, 민족은 역사적 차원에서 이해, 친선교사는 반일을 전제하고, 친일을 포함한 동양적 기독교는 반선교사적 경향으로서 이를 요약하면 신앙과 민족이 상반되고, 선교사와 일본이 상반되는 방식으로 시간 내에서 교회와 신앙, 세상은 영향을 주고 받은 방식이라고 류 박사는 요약했다. 그 상호작용은 늘 교회와 민족은 한국사에서 초월적 신앙 차원에서도 묘하게 긍정적 교섭이 확인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내연과 외연의 상관관계에 있어 신앙이 안에서 불타오르면 자동적으로 바깥으로 영향이 이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신앙이 먼저 내면에서 불타오른다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은 신앙의 영역이었지만 시기적으로 을사늑약의 주권상실 시기였고, 신앙 자체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 번지는데 이 때 한국교회가 3.1운동을 주도하게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원점, 하나님께 대한 충성 그 자체는 역학상 결과적으로 일제의 국체에 대한 민족의 저항 에너지와 동일시되는 그런 관계라는 설명이다. 신앙의 현상학은 안에서 불타오른 신앙이 외연으로 번질 때 각자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현상화하는 것으로서 같은 신앙 에너지가 신앙운동자체로 발산도 하지만 때로는 도덕 운동, 민족 운동, 사회 변혁력으로 작동하는 것인데 故 주기철 목사는 독립운동을 외치던 사람은 아니었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함으로서 일본 제국의 핵심인 천황 숭배에 저항하고, 일본 정부의 국체에 정면 도전하는 '반일 민족주의자'로서 현상화한 그러한 관계라고 류 박사는 밝혔다. 민경배 박사의 역사관은 나무와 열매 중 나무가 우선하고, 신앙이 선행해야 실천이 이뤄지거나 안에서 신앙이 불타올라야 저절로 외부로 들어나거나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그 가지인 성도들이 자연히 열매를 맺는 내연과 외연의 구도, 직접성, 자동성 등은 지극히 성경적인 역사관이라고 류 박사는 밝혔다. 류금주 박사는 내연과 무관한 민족운동은 한국 교회사의 주류에서 사라졌고, 민족에 대한 주목이 1960년대까지로 한정한다고 해도 민경배 박사의 내연과 외연, 신앙의 현상학 등 다양한 교회사연구의 구도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여전히 적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2024-06-24
  • 그리스도교는 韓·日·中 및 전 세계의 핵심
    ▲ 민경배 박사가 발제를 담당했다. ▲ 직전원장 권평 박사가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이하 한교사)은 민경배 박사(연세대 명예교수)를 초청해 '한일관계사 서론'의 강연을 맡겼고, 민 박사는 향후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아시아국가와 전 세계의 모든 역사와 정치, 문화 등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경배 박사는 지난 6월 6일 진행된 한교사 월례발표회에서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했던 1900년대 일본에서는 군벌세력과 문벌세력이 주도권을 다투던 시기 였다면서 이 때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 군대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더니 가능성이 보인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일본을 근대화시킨 세력은 군벌과 문벌이었으며, 전자는 야마가다 아리또모가 대표적 인물이었고, 후자는 이토 히로부미가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밝혔다. 민 박사는 이토는 조선을 다스릴 총독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인물로서 조선을 합병하는 것을 반대했던 인물이며, 최대한의 자치권을 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을 수 차례 가연한 바 있으며, 이날은 이토가 조선의 이현 왕세자를 모셔다가 좋은 왕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좋은 학교를 다니도록 주선한 인물이었지만 안중근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민 박사는 일본인 주류의 뿌리가 한국민족 출신자가 상당히 많았다는 설명을 했다. 일본의 50대 천황 '간부덴노(황무천황)'의 모친이 백제 공주였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뉴스위크 2002년 3월 18일자의 보도를 제시하고, 백제 공주의 피가 천황가에 있다는 것은 한국인으로 볼 수도 있다는 평가를 했다. 임진왜란(1592년 발발)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 뿐 아니라 한중일 3국의 관계를 재 정립한 측면도 있다고 밝혔다. 전란 당시 일본은 한국인 약 10만명을 데려갔는데 이들은 유능하거나 인물이 출중한 여성 등 당대 제일의 엘리트들이었는데 만약 무능했다면 잡아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후손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일으킨 사람들이었다고 밝혔다. 일본 구주 후꾸오까의 사쯔마와 조슈의 출신자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주동했는데 야마가다 아리또모와 총리를 거친 이토 히로부미와 사또 에이사쿠 및 아베신조와 기시 노브스께 등이 모두 사쯔마파라고 설명했다. 아베 신조의 경우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본인이 한국계임을 고백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국력이 증대되자 2차 대전을 일으켰는데 이 때 전후에 활약한 사람이 일본 외무상인 도고 시게나리가 있었고, 이 또한 사쯔마 출신자였다는 점을 들어 한국교회사와 한국 그리스도교를 연구함에 있어 한국적 상황도 중요하지만 일본이나 중국 등의 주변국에 얽힌 이야기들도 동등하게 다뤄야 입체적인 연구가 되고, 인류사회와 그리스도교를 위한 기여자가 되는 방식의 자세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제 치하 시절 성탄절을 맞으면 성탄절 전야에 교회마다 성극을 공연했는데 대부분은 아기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아닌 출애굽 이야기를 다뤘다고 한다. 당시 모든 교회가 모세의 홍해 건넘을 다룬 것은 표면적으로는 신앙의 이야기 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민족해방을 염원한 애국적인 사건들이었다고 분석했다. 김장호 씨가 1918년 자유주의신학적으로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은 사실은 갈대밭을 건넌 것이라고 한 것을 두고 민 박사는 민족 반역적인 발언이라고 평가하고,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그를 즉각적으로 처단했다고 밝혔다. 윌리암 커가 김장호의 배경이었다고 민 박사는 설명했는데 북장로교는 그를 즉각 잘라냈지만 이후 일본정부가 채용해 경성제국대에서 성경을 가르치도록 배려했다고 밝혔다. 커는 이후 한국 동란 시절 맥아더 밑에 들어가 한국군종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게 되는데 그의 인생을 볼 때 비판받을 일도 있지만 그리스도교를 위해 기여한 일들도 많기에 역사연구자는 역사를 접할 때 단편적이거나 표면적인 것만 보지 말고 좀 더 다양하고, 입체적인 내용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조선에서 한일간에 정미조약이 비준 될 때인 1907년은 왕은 그대로 두되 모든 행정은 일본인이 주도하는 이른바 나라가 망한 시기였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전국적 조직인 교단을 확립했는데 독노회 문서의 첫장은 "천하 만국에 복음을 전한다"라고 언급되어 있다며, 처참하게 나라가 망한 순간에도 한국교회는 세계만국기를 걸었고, 세계복음을 언급하는 현실을 초월하는 정신세계, 신앙세계를 가졌었다고 설명했다. 맥아더 장군이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 미드웨이호에서 항복조인식을 할 때 전 일본국민들에게 했던 연설은 "오늘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신학적이다"라고 밝혔고, 파레드 자카리는 8개의 박사학위 소지자였는데 "앞으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이다"라고 했고, 일본 최고의 직장으로 일컬어져 수재가 모이는 산께이신문의 신입사원들이 전세계를 유랑하고 써낸 보고서에 역시 "앞으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이라는 내용으로 논문집을 만들고, 시바 료따로(일본 최고의 문학가, 사상가)는 "세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유와 인권, 정의의 개념은 기독교에만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증거를 민경배 박사는 제시하고, 한교사 안에서 만나는 모든 회원들은 이 같은 학술적인 생각은 갖되, 우선은 서로간의 교통과 친교에 매진해 상호간에 협력과 도움을 주는 관계를 지속하자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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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2
  • 교회사학과 복음 위한 27년
    ▲ 류금주 원장이 설교를 담당했다. ▲ 김동석 부원장이 사회를 담당했다. ▲ 민경배 명예원장이 축도를 담당했다. ▲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창립 27주년을 기념해 학술지인 '교회사학'을출간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 이하 한교사)이 지난 6월 6일 창립 27주년을 기념하는 예배를 가졌으며, 설립 이래로 매월 빠지지 않고 진행했던 월례학술발표회를 303회로 진행하기도 했다. 창립기념예배는 부원장 김동석 목사의 인도로 진행되었다. 류금주 목사(원장)는 이날 '뜻을 반납하러 오신 예수'라는 제목의 설교를 마태복음 26장 42~46절 말씀을 근거로 진행해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셨던 창세기 시절에 첫 사람인 아담과 그의 처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원죄가 들어왔지만 예수로 인해 그 죄가 사해짐을 받았기에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내용으로 순서를 담당했다. 류 목사는 오늘 말씀의 성경본문에는 십자가 처형을 앞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죽음 이후의 상황을 고통스러워한 나머지 이를 회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이후 하나님이 뜻대로 해달라는 요청을 하던 때라고 설명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살 던 때 하와에게 접근한 마귀 루시엘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한다고 설명했다. 사실 루시엘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좌를 탐냈던 일로 인해 심판을 받았던 즉,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을 뜻을 세웠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루시엘 자신이 심판받았던 똑같은 상황에 사람을 끌어들여 빠뜨리려는 시도이며, 두가지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 처럼 되려 했다는 것으로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이전에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만 있었지만 이후에는 모든 사람 각자가 뜻을 세우고, 죽음에 이르게 된 상황에 처한 것이라는 설명을 류 목사는 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뜻을 하나님께 반납한다는 것은 즉, 예수가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뜻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수님은 사람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뜻을 반납하는 것이 그의 공생애의 요약인데 이 본문이전에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한 것은 완전한 사람으로서 사망 후 음부에서 마귀에게 희롱당하는 것이 싫었을 것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류 목사는 피흘림은 두가지로 볼 수 있다며, 외적으로는 십자가에서 피흘렸고, 내적으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은 상황으로 볼 때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께서 어떤 이유가 되었던 십자가를 지시지 않는다면 구세주로서 오신다고 오랬동안 예언되었던 것들이 이뤄지지 않게 됨으로 모두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류 목사는 밝혔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아담으로 인해 생긴 뜻(사람의)을 하나님께 반납하신 것인데 이것은 고통과 희생을 수반한다고 설명했다. 그 고통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공동체의 모두는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하며, 우리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27주년을 맞이하며 향후 그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류금주 목사는 강조했다. 개회예배는 민경배 목사의 축도, 정용 목사의 기도, 박수현 전도사의 반주 등으로 진행되었다. '교회사학' 제 18권 제 1호에는 '20세기 초의 글로벌 정치상황과 한반도의 기독교 경험(김동석)'과 '기독교는 한국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가(류금주)', '일제하 한국 기독교회와 공산주의 관계사(민경배)', '곽안련 선교사 생애 연구(정용)', '서북계와 기청계(조점숙)', '20대 청년 만우 송찬근의 삶과 사상(주재용)', '칼 귀츨라프 선교활동지에 대한 고찰(최태성)', '나와 민경배 박사님(박정규)', '청암 박정규 박사의 정류 이상근 학술상 수상 기념문집에 대한 서평(이상웅)' 등의 연구논문과 에세이 등이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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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2
  •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 워싱턴DC서 창립 총회
    ▲참석자들이 창립대회 직후 예배실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창립대회 직후 행사장 밖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 워싱턴DC서 창립 총회 40여명 참석…공동 발기인에 20개 교단 소속 120명 참여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모임인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이하. 기평넷, Korean Ecumenical Peace Network)가 5월22일 워싱턴 디씨 소재 연합감리교 예배실에서 창립되었다. 이날 창립예배와 총회에는40여명이 참여했으며 공동 발기인에는20개 교단 소속120명이 참여했다. 북미 한인 기독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초대회장 김정호 목사(UMC)가 환영사를 하고 있다. 환영사에서 김정호 목사(UMC)는"남북 관계가 극단적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의 시작이 참 귀하다."고 밝히고"우리가 그동안 평화에 많이 목말랐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조국 한반도 평화의 그날이 오면 오늘의 이 모임이 작은 디딤돌이 되었다는 겨자씨 만한 기록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창립을 환영했다. 예배는 김대호 목사(PCUSA), 손태환 목사(PCUSA), 정영민 목사(RCA), 조동호 박사(퀸즈대) 등 연합 찬양팀의 인도로 힘차게 시작되었다. 이어 조원태 목사(PCUSA)의 사회와 김기리 신부(성공회) 박상희 목사(기장)의 축도로 이어졌고, 김정호 목사(UMC)가"다시 또 우물파는 사람들" (창세기26:12-35)을 주제로 설교했다. 이어서 발제 순서에서는 김충성 목사(제자회)가'북미 에큐메니칼 평화운동의 역사'에 대하여, 김진양 목사(UMC)는'북미 기독교 평화네트워크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김충성 목사는60년대 창립된 ‘북미기독학자회’와70년대 창립된 ‘미주 목요기도회’가 한국의 민주화, 인권, 평화통일 운동과 연대하여 기도하고 행동했던 역사를 소개했다. 김진양 목사는"북미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삼았으며 평화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밝히고"분단79주년을 맞이하는 조국이 미, 중의 패권경쟁과 핵무기 및 군비경쟁, 군사훈련 등으로 인해 대결과 갈등이 더욱 심화된 이 시기에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와 연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어서 진행된 총회에서는 정관과 창립선언문을 통과시켰고 초대 회장에 김정호 목사(UMC), 초대 사무총장에 조원태 목사(PCUSA)를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창립 발기인120명의 이름으로 작성된 창립 선언문에서는"그동안 기독교인들로서 정의와 평화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사명을 우리가 잘 감당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다짐한다"고 밝혔다. "하나, 우리는 북과 남 정부가 이전의 평화통일 정책으로 돌아가 대화와 협력에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 우리는 미국과 기타 강대국이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조성하는 대화와 정책을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 우리는 교단의 벽을 넘어 평화를 위한 연대와 협력을 이어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기평넷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미에서 기도운동을 펼쳐 나갈 것이며, 다양한 교단과 학계 그리고 단체들과 연대하여 평화를 위해 애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더불어 기평넷은 공동 발기인으로 참여한120명을 평화용사300명으로 확대할 것이며, 제2차 총회는 내년4월에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열기로 결정하였다. ▲초대사무총장 조원태 목사(PUCSA)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참여자들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참여자들이 연방하원 Bill Foster 의원 사무실에 찾아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대화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2024-05-29
  • 한글 발전은 내한 선교사들의 공로
    ▲ 정용 박사는 발제를 담당했다. ▲ 고사무엘 목사는 토론을 담당했다. ▲ 송훈 박사는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 이하 한교사)은 제 302회 정기 월례발제회에 정용 박사(백석대학교 외래교수)를 초청해 발제를 맡김으로서 구한말 내한한 외국선교사들이 복음전파를 위해 한글을 익히고 사용하면서 한글문법을 확립하고, 외국어 성경책을 국문으로 번역, 한글사전의 출판, 한국 내 한글사용의 문화 정립하는 등 공로가 큼을 아는 기회로 삼았다. 사회는 송훈 박사, 발제는 정용 박사, 논찬은 고사무엘 목사 등이 순서를 담당했다. ▲ 정용 박사는 개화기 당시 한국어의연구는 뜻밖에도 한반도의 밖에서 이뤄졌다면서 연구자는 중국과 일본에 외교 또는 선교의 목적으로 체류하는 자들이 인근 국가였던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되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던 한문에 비해 언문 또는 반절로 격하되 한자의 보조수단 정도로 쓰이다가 1882년 로스-서상윤이 한글성서를 번역해서 기사회생했고, 1886년 헐버트의 한글 자강활동으로 대중화가 되었다고 밝혔다. 조선에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글은 비천해 아녀자나 쓰는 '암말' 취급을 받던 시기에 서양인들은 한국인들과 의사소통을 위한 연구에 공으 들였고,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워나가며 한국문법과 한국사전으로 정리했는데 정작 조선인 한국어선생들은 문법이나 영어의 체계를 몰랐던 편이었다고 설명했다. 대부분 내한 서양선교사들은 한국의 계몽과 근대화 과정에 헌신했고, 선교를 위해 한국어를 익힘에 최선을 다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속했던 문화에서 생산된 문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함으로서 한글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고 정 박사는 분석했다. 정 박사는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한글을 연구하는 학회의 많은 학자들이 구 한말의 주한외국인 선교사들의 공로를 논문에 단지 몇 줄에 불과하게 기술함으로서 인정하는 편인데 초기 한국 기독교가 한글문화에 끼친 지대한 역할에 비하면 너무나 저평가 된 것이라며, 노고에 걸맞는 평가를 학계로부터 받아야한다고 강조했다. 개항 전후의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의 국민들이 신분계층에 따른 교육기회가 제한되었던 틀을 깨고, 교육의 대상을 크게 확장하기 위해 미션스쿨을 세웠지만 필요경비를 학습자가 부담하는 형태였기에 여전히 극빈층은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권서인이나 전도부인들이 쪽 복음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한글을 먼저 깨우친 선교사가 편찬한 '초학언문'을 활용해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한글의 우수성을 먼저 알아본 선교사들이 큰 기여를 한 셈이라고 강조했다. 한글은 그 체계가 하늘과 구름, 바람, 사람과 같은 두, 세 음절의 단어어로 구성되고, 열 다섯개의 자음문자와 모음문자들을 가진 것으로 인식했고, 1833년 7월 1일 발행된 Chinese Repository에 한글의 영어식 발음법이 세계 최초로 수록, 1932년 7월 25일 충청도 장고도와 도대도에 머물었던 찰스 구즐라프(Charles Gutzlaff)는 그해 11월 발행된 Chinese Repository에 조선어로는 발표 했고, 이 자료는 1833년 로버트 모리슨에 의해 한글의 영어식 발음법이 완성 되는 등 성과가 있었다고 정 박사는 밝혔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익히거나 연구함에 따라 성과물들이 발견된다고 정 박사는 설명했다고 밝혔는데 로우니는 1866년 '한국어에 관한 소견'이라는 논고를 집필, 존 로스는 매킨타이어와 함께 1877년 '한국어 입문' 출간 해 차후 '조선어 법'으로 수정 보완 출판되어 이후에 내한 하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등 주한 서양선교사들의 연구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로스는 1877년 한국어회화교재인 'Corean Primer'를 출간, 리델 신부는 1880년 '한불 자전', 1881년 '한국어 문법'을 출간, 달레 선교사는 1874년 '조선교회사' 서론에 조선어를 소개 했고, 언더우드 목사는 1890년 '한영문법', 1890녀 '한영자전'을 출판, 게일 선교사는 '텬로역정', '한영자전'을 이창직과 함께 번역, 스왈론은 1892~1898년 간 '한국학 휘보 Korean Repository'에 한국어교수법과 관련한 기고문을 게재, 베어드 선교사는 1893년 출간했던 '천로지귀'의 개역 수정판을 출간하거나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50가지 도움들'이라는 책의 서술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주한 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전략은 언더우드의 '영한문법'에서 살피면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고,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50가지 도움들'에는 한국어를 귀로 들으면 입으로 재현하거나 한국인들의 생활에 동화될 것, 학습한 것을 밖에서 사용할 것 등의 실천적인 내용들로 가득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50가지 도움들'은 한국어 학습에 쉽게 입문하도록 도왔고, 여러 어휘를 쉽게 익히도록 구성, 다양한 상황에 응용하고, 학습자의 주도적 문법체계를 돕는 등의 특징이 있어 초기 개신교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서로는 오랫 동안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베어드는 외국인들이 한국어발음을 규격화하려고 했으며, 출신지에 따른 발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어의 로마자화'표기법을 강조했다고도 한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동료였던 언더우드나 게일 선교사처럼 성경번역이나 문서사역은 안했지만 엄청난 분량의 서신을 남겼다고 한다. '마포삼열 자료집'에는 한국에 거주하며 한국인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며 선교했던 경험들이 기록되어있기에 이를 주목해야한다고 정 박사는 강조했다. 한국어를 익힘에 오랜 기간이 사용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한국 장로회 선교회 규칙과 내규' 1901년판을 보면 신임 선교사들이 3년간 매년 시험을 치뤄야하며, 시험위원회는 시험 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어학공부를 위한 지도를 해야하며, 새 선교사 어학교사는 위원회의 승인을 받을 것, 위원회는 시험 결과는 매년 본부에 보고할 것, 신임선교사는 5년간 공부할 것 등으 규정했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한다. 마포삼열 선교사 서신을 통해 대부분의 수업에 토착어를 사용할 것, 선교사 출신 교사들에게 빠른 시일 내에 한국어를 익히게 할 것, 수업이 토착적으로 이뤄지는 규칙을 정할 것 등을 주장했다는 등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한다. 정용 박사는 언어는 해당 문화를 발전 시키는 원동력이자 외부에 알리는 수단이기에 자체적으로 문화이며, 인류 사회 문화의 핵심이 되는 '말'과 '문자'로 표현할 만큼 중요함을 강조하고, 한글이 문자학적으로 세계 각 문자들 가운데 매우 독특하고 우수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글은 2007년 UN 산하 세계지식재산기구 43차 총회에서 183개국 만장일치로 '국제특허 협력조약(PCT) 국제 공개어'로 채택되었다며, 우리는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야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다만 주한 선교사들의 한글에 대한 큰 공로는 그들의 교육행위 자체가 모두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 평가절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로는 한글교육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 논문을 연구하는 내내 한국어를 연구하는 전문학자들은 한글 발전에 기독교가 기여했던 것을 인정을 하긴 하지만 그들의 논문에 단지 몇 줄에 한정한 분량이며, 그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느낀다며, 이제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한국어 발전에 그리스도교가 기여했던 부분들을 적극 연구해 세상에 제시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 고사무엘 목사(전문연구원)는 논찬을 담당했다. 고 목사는 정용 박사가 제시한 조선 선교과정에서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익히며 선교에 활용했고, 한국어의 기틀을 다짐과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부분들을 대다수 동의했다. 세계에는 많은 국가와 민족, 부족이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말이 존재하지만 이들 중 고유한 각자의 글자를 갖는 경우는 별로 없으며, 대부분 타 문화권의 글자를 차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에서는 고유의 말과 글자로 종교행위는 물론 학문활동까지 이뤄진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상당수의 문화권에서 영문 알파벳을 차용해서 각 민족의 언어를 표기하지만 정확한 발음을 표기함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한글만은 표음문자이고, 한글이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세계 어떤 언어이든지 발음으로서 표현하는 우수성을 갖고있다고 밝혔다. 한국어와 한글의 우수성이라는 장점을 이제는 한국이 세계선교의 중심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구가 될 것이라면서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의 노력과 성과를 내던 모습을 본받아 세계 선교중심 국가가 되도록 노력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자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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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그리스도인 평판 위한 협력
    ▲ 김동석 목사(믿힘연구원 원장)는 그리스도인은 사역을 위해 협력해야함을 강조했다. ▲ 민경배 명예원장은 한국교회사 연구와 협력에 최선을 다 해줄 것을 강조했다. ▲ 류금주 원장은 한교사 27주년의 시작을 회상하며, 협조를 부탁했다. ▲ 조점숙 목사는 1부 예배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 이하 한교사)은 제 302회 월례발표회와 예배를 지난 5월 9일 서현교회당(이상화 목사 시무)에서 개최했으며, 김동석 목사(믿힘연구원 원장)가 '좋은 평판'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담당했다. ▲ 김동석 목사는 사도행전 11장 23~26절 말씀을 기초로 '좋은 평판'이라는 설교를 담당했다. 김 목사는 바울과 바나바가 활동하던 시기의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함으로서 교회가 성장하던 상황에 대한 설명을 했다. 성경 본문은 회당에서 유대인 외에도 비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예수를 믿게되는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는 당대에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안디옥교회에는 유월절이 지난 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남았는데 이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하면서 재정적인 문제가 발생했고, 바나바가 밭을 팔아 교회에 헌금하는 등 헌신이 있었으며, 교회의 양적 성장으로 인해 동역자가 필요해진 바나바는 바울을 초청해 더욱 교회가 부흥 하는 등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평판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설명했다. 그 평판은 사람들로부터 멸시 또는 칭찬 받는 두가지 의미였겠지만 5천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해 현재 시각으로 봐도 대형교회의 범주에 드는 것이기에 평판이 좋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한국교회도 조선의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줬고, 그리스도인들은 근세로부터 현재 까지 많은 역할을 해서 현재 한국인구의 20%에 달하는 사람들이 성도에 해당하는 이 때 안디옥에서 처럼 우리도 평판을 만들어감에 고민해야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안디옥에서 비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해 교세가 크게 증가했던 사실이 있으며, 이 상황을 바나바는 독점하지 않고 바울을 동역자로 초청해 협력했고, 결과적으로 바울이 현재의 그리스도교에서 기초척인 것들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한교사도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단체로서 예수님의 이끄심을 기반으로 노력함으로 민경배 명예원장의 평판에 힘을 얻어 발전을 지속하는 중이지만 후배 학자들로서는 그 평판의 유지와 발전, 계승을 수행해야하는 과제가 있기에 이제는 중간 세대가 차세대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직접적인 인재영입에 힘 쓰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자고 촉구했다. ▲ 민경배 명예원장은 이날 모임이 한교사 창립 27주년을 겸해 모인 것을 축하하며, 기념 케익을 절단했다. 민 명예원장은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이 시작하기 전에는 이와 같은 단체가 한국교회에 없었다면서 교회사를 연구하는 단체와 사람들로서 나름 복음적인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성공에 이름을 축하했다. 한교사는 모임의 목적이 학술보다는 연구자요 성도로서 서로 친교를 우선하고, 교육과 학술을 위한 노력도 겸하는 것이므로 앞으로도 지금까지 했던 것 처럼 협력하자고 촉구하고, 회원 확장을 위해 노력하기를 당부했다. 1부 예배의 사회와 기도는 조점숙 목사, 광고는 류금주 원장, 축도는 민경배 목사 등이 담당했다.
    •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2024-05-17
  • '선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 강조
    ▲ 왼쪽부터 순교자의소리가 5월 7일 발간한 「최초의 한국어 성서와 한국 개신교의 기원」, 지난 2022년 10월 발간한 「21세기 존로스 독자판 누가복음전서」. ▲ 저자 최성일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 왼쪽 부터 현숙 폴리 대표, 최성일 교수, 에릭 폴리 CEO. 순교자의소리(이하 VOM, 에릭 폴리 CEO, 현숙 폴리 대표)는 전 세계의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물질적으로 신앙적으로 돕는 전문적인 선교단체로 인정받고 있는데 「최초의 한국어 성서와 한국 개신교의 기원(최성일 교수 저)」을 출간해 귀추를 주목받고있다. 「최초의 한국어 성서와 한국 개신교의 기원」을 출간한 순교자의소리는 지난 5월 7일 정릉의 사무처에서 저자 최성일 한신대학교 신학과 명예교수와 함께 기자회견을 가졌다. 주최측은 한국 최초의 상주 개신교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1885년 4월 5일 입국) 등 이 국내에 입국하기도 전에 존로스 선교사(주로 중국 체류)가 1882년 '누가복음전서'라는 최초의 한국 쪽복음을 번역해 국내로 반입시킴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교사의 내한보다 먼저 준비시켰던 상황을 설명하고, 말씀이 현재 한국교회의 교세정체를 극복하는 방법임을 강조했다. ▲ 에릭 폴리 목사(VOM CEO)는 순교자의소리 설립 초창기에 신앙에 관련한 대부분의 문서를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사용하고자 노력하던 중 이었을 때였는데 한국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초청해 대접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들은 한국교회의 역사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오직 미국교회의 발전 근황과 교회당 건축, 교회 성장 등에만 치중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회상했다. 폴리 목사는 당시 너무 놀랐고,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는 초기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느꼈으며, 20년 이상 해당분야를 연구한 결과 이제는 잊혀진 한국교회 초기의 역사로 돌아가 연구해야한다는 점을 확신했다고 밝혔다. 에릭 폴리 목사는 초기 한국교회의 주한외국인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은 두가지로 생각된다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등의 계열 선교사들이 조선인을 선교하는 방식은 대부분 선교사들이 조선에 세운 병원이나 학교 또는 그들의 선진화된 주거모습을 보여주는 등 기독교인이 된다면 종교적인 어떤 혜택이 주어질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방식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존로스 선교사의 경우 성경책을 나눠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는 방식의 선교전략이었다고 밝혔다. 존 로스 선교사가 나눠주는 성경책은 엘리트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내용이었고, 번역자들은 소위 전문적인 위원회도 아니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도 아니었지만 그 번역 과정 중에 종사자들이 회심해 그리스도인이 되어 큰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설명이다. 존 로스의 성경들이 있은 후 한국 땅에 본격적으로 주한선교사들이 발을 들이게 되었으며, 성공적인 한국선교가 이뤄졌는데 이는 존로스 번역성경 1만 5천권이 사전에 배포된 때문이며, 존 로스는 선교에는 성경말씀이 먼저 들어가야한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폴리 목사는 설명했다. 위에 언급한 두 선교당사자들은 교류는 했지만 정책을 단일화 한 일은 없지만 적어도 1930년대까지의 조선 선교계는 존로스의 방식이 주효했다고 강조했다. 에릭 폴리 목사는 한국교회는 1989년 이래로 교인 감소가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증가세는 없었는데 더해 코로나펜데믹을 거치면서 30%의 교회가 없어지는 등 극심한 혼란을 겪는 중이지만 존 로스 선교사의 방식대로 말씀과 성경책을 중시하고, 앞세우는 신앙전통을 세워야 극복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존 로스의 방식에서의 선교는 삶의 조건이 유려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우선해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이것은 현재 북한 지하교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통해 증명된다고 강조했다. 북한 지하교회가 현재 한국교회보다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다면서 남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교회가 평안하기 위해 교회 우호적인 정치인들을 선출하자는 주장도 상당수가 하고있지만 VOM의 사역 결과 그런 인과관계는 없다면서 존 로스가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만이 교회의 평안과 복음의 전파를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에릭 폴리 목사는 영어로 작성된 최성일 교수의 논문만을 과거에 접하고,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 어렵게 접촉해 한국문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했고, 최 교수의 은퇴 후 수개월간 국문으로 번역해 오늘날 한국어판이 번역 출간되었다고 한다. ▲ 최성일 교수는 본인과 존 로스의 만남은 '섭리적 사건'이었다고 전제하고,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으로서 교회성장에 관심이 많았기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학교에서 실천신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취득 후, 지도교수의 거부로 윗 단계로 진학 못하던 중 우연히 만난 교수님이 에버딘으로 초청했고, 그 교수님이 요구한 한국교회사 약사 리포트르 작성하니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스 선교사를 연구할 것을 추천받아 선교신학분야로서 오늘의 연구성과를 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섭리적 사건이라고 회상했다. 존 로스 선교사가 1882년 누가복음 쪽복음부터 시작해 1887년 신약전서를 완본으로 엮었는데 그의 저작들로 인해 조선 말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이미 어느 정도 틀이 만들어져있기에 조선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 일에 주력할 수 있도록 역할을 했던 측면이 있다면서 선교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명확하지만 그 말씀이 번역되었다고 해서 다 된 것은 아니며, 그 성경책으로 인해 회심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 핵심인데 존 로스의 시대에는 그 역할을 했지만 오늘 날에도 지속 될지는 고민을 개인적으로 해왔다고 최 교수는 심정을 밝혔다. 에릭 폴리 CEO가 늘 존 로스가 교회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고, 그대로 활동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선교열정은 한국교회에서 지속 될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은 늘 마음에 새기고 외워야 하는 것인데 요즘에 선교자들은 선교도구로서 성경책을 대하는 점 걱정되기에 이 책이 출간됨으로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선교의 본질이지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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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일반(해외, 국내)
    2024-05-07
  • 사회에 기여하는 지식인형 그리스도인
    ▲ 김동석 박사는 '20세기 초의 글로벌 정치 상황과 한반도의 기독교 경험'을 발제했다. ▲ 송훈 박사는 주 발제에 대한 토론을 담당했다. ▲ 정용 박사는 사회를 담당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고대시대는 물론 중세시대에도 교회와 세상 간에 상호적 영향력을 매우 크게 끼쳐왔던 것이 분명하다는 전제 아래 특히 한국 그리스도교는 이 땅에 전래된 구한말부터 근세, 현재에 이르기까지 분명하게 영향력을 미쳐왔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세상사에 대한 끝없는 공부와 봉사, 실천의 자세를 가져야한다는 주장을 김동석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부원장, 믿힘연구원 원장)가 강조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은 제 301회 월례발표회의 주 발제자로 김동석 박사를 초빙해 '20세기 초의 글로벌 정치 상황과 한반도의 기독교 경험'을 주제로 지난 4월 11일 서현교회당에서 논의했다. 토론순서는 송훈 박사, 사회는 정용 박사가 담당했다. ▲ 김동석 박사는 '20세기 초의 글로벌 정치 상황과 한반도의 기독교 경험'이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입장을 갖는 것에 대한 발제를 했다. 기독교적 혹은 교회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표했던 일들이 역사라는 장에서 많지는 않았지만 몇 몇 중요한 인물들에게서 그 활동이 발견되기에 논의는 해야 하며, 동 주제에 대한 '신앙교육'차원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기독교와 정치의 역사적 경험 이스라엘의 경우, 역사 중 통일국가를 이룬 기간은 사울 왕과 다윗 왕, 솔로몬 왕 때까지이며,이후로는 독립국가를 이룸에 실패하던 중 B.C 142년 하스모니안 왕조가 유일했고, 이외에 거의 1천 년 간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들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았지 독립국인 적이 없다고 김 박사는 분석 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의 신화를 꿈꾸며 '메시야'사상을 이어 오던 중 로마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줄 초인을 기다렸는데 그는 메시야 예수였다는 것은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다리던 그 초인 예수는 정치적 해방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라는 신앙적 가르침을 전파했고, 정치적 처형을 당했음에도 이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유대를 넘어 전세계인들을 향한 메시지가 되었고, 로마의 정식 종교가 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멸망 후 기독교는 위기와 혼란을 겪지만 당시에 종교적이거나 정치적, 지식인이라는 이미지를 지닌 교황이 극복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기독교는 중세시대에 '종교적 형식'을 완성해가며 영향력이 커지는데 A.D 12C 전 후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동로마의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들이 서방에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고, 종교적인 학문을 연구하던 대학들은 인문주의자가 되어 문예부흥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후 계몽주의자들의 근본이 되었고, 종교개혁 전통보다는 문예부흥의 전통을 선호하는 상황으로 변모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1530년대 영국 헨리 8세는 로마교회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기독교회(성공회)를 수립하는 종교적이면서도 정치적인 행위를 실시했고, 잉글랜드에서는 국교로서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서는 개신교인 장로교를 국교 또는 보편적 신앙으로 따르는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이에 반발하는 순수 신앙주의자들인 급진적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고 한다. 대항해 시대 무렵 유럽의 국가들은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을 거치는 동안 종교적 활동인 '선교'를 실시함으로서 세계적인 활동을 벌였고, 가톨릭교회는 1200년대부터 선교를 실시, 이를 본 개신교는 18세기부터 선교를 실시해 19세기에 한국선교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이 기독교계의 선교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같은 시간을 공유하면서 나타났다는 특징이 있는데 당대 일련의 강대국들이 국제 패권을 장악하려는 각축의 상황이었고, 피식민지는 대표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시아의 인도와 중국, 대만 등이었으며, 두 가지를 모두 수행자는 대다수가 강대국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서양을 침략을 돕는 세력이라는 평가를 피식민지인들에게 받기도 했다고 김 박사는 분석했다. 그러나 한국만은 일본인이 침략했고, 서양인들이 선교를 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 국가와 식민을 한 국가는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고 밝혔다. ◎ 세계 정치 제도의 변화와 기독교 17세기 이전의 대부분 국가들은 군주제였고, 특징적으로는 연방 형태의 국가연합, 경제적으로는 '농노제'를 실시하는 봉건제도를 갖추었다가 '해상무역'으로 인해 서구 정치 제도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유럽의 중산층인 부르주아와 계몽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신분의 변화를 촉발했고, 중산층은 자본가 계급으로서 귀족중심의 사회가 변화해야 함을 주장,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 명예혁명 후 시민 또는 민중의 목소리를 국정에 반영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18세기 이후 이 혁명들로 인해 시작한 민주주의체제의 영향력이 현재까지 이어졌다는 설명을 함으로서 통치체제의 변화가 도래했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독일은 내륙국이었지만 식민지의 확장과 자원의 필요가 늘어나 기존 제국주의자들인 영국이나 프랑스, 네델란드, 스페인 등을 대적하기 위해 독일을 포함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과 삼각동맹을 체결해 식민지 확장을 통한 자원이동의 통로 확보를 추구해서 마찰을 빚게 되는데 이것이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라고 정의했다. 국가를 구분함에 있어 과거에는 개신교 정신과 가톨릭 정신을 기준 삼았다면 제 1차 세계대전부터는 정치적 및 경제적 이익을 기준으로 추구하는 시대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했고, 일본이 이 승전국에 포함되면서 국제사회에 등장해 제국주의국이 되어서 한국을 점령하고 중국으로 진출하려는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39년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등이 삼국동맹을 체결해 제 2차 세계대전을 감행했고, 이에 반대하는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가 연합국으로서 맞서 연합국이 승전국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는 소련을 중심으로 동유럽·아시아국가와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으로 양분해 냉전시대를 맞이했는데 이것은 패권을 장악하려는 강대국 간의 갈등이었으며, 이념을 통한 적대감은 한국전쟁을 통해 명확해졌다고 평가했다. 냉전이념갈등은 소련이 1991년 붕괴되면서 해소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반에서는 아직도 이념갈등 중이며, 북한과 대한민국(대통령 윤석열)의 갈등은 주변국인 중국과 미국, 러시아, 일본 등이 엮여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기독교는 유럽과 미국의 종교로서 존재하는 중이며, 중국과 북한은 종교자유를 운운하나 형식적인 기독교가 되기를 강요하거나 실제로는 탄압하고있는 것으로 보이며, 일본은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기독교복음화율은 매우 낮고, 대한민국은 천 만 명의 기독교인구를 가진 기독교적 국가의 특징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 19C 말 20C 초 美英의 민주주의 제국주의는 초기에 피지배국의 자원을 수탈해 상품을 생산하다가 산업혁명으로 과잉생산된 상품을 피지배국에 판매하므로 소비적 시장착취를 하는 방식으로 변모했다고 김 박사는 평가했다. 영국으로부터 사람들이 이주한 미국에는 영국의 13개 식민지가 있었고, 여기 주민들은 본토의 차별에 반발해 독립전쟁을 수행, 전쟁에 승리한 미국은 왕을 대신 할 민주적 대통령제를 채택, 1백년 후 미국인들은 내한선교사로서 조선에 입국을 해 다양한 영향력을 주게된다고 밝혔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다양한 환경문제를 겪었는데 저임금 고노동, 아동방치, 공해, 도시의 빈곤화, 도시빈민의 증가 등 다양한 문제가 시작되고, 사회적으로는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등장하는 시기에 명예혁명으로 의회민주주의국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당시 등장한 활동가들은 여성의 교육권을 주장하는 등 점차 중산층 여성들의 교육기회가 확대와 여성참정권의 목소리도 등장 했다고 한다. 교회가 소외된 어린이들을 모아 식사 제공과 성경공부를 하는 '교회학교'운동을 전개했고, 이것이 미국으로 전래되 복음전도를 위한 교회학교활동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이처럼 미국과 영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독교는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적어도 1920년대까지는 미영 선교사들이 그 시대적 정신으로부터 부자유스러웠을 것기에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에 신앙적 대응을 충분히 못했을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기독교 선교를 통해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깨달음과 기독교적 신앙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 한일병합에서의 기독교 구한말 한국인들에게는 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군주제는 매우 익숙했을 것이며, 한일병합시기 조선 민중은 새로운 국가에 대한 기대가 크지는 않았을지라도 독립협회 세력들은 공화주의를 꿈꿨지만 아마도 실제로는 입헌군주제 정도였을 것으로 김 박사는 추측했다. 당시 서학에 대응한 '동학운동'은 국가의 대개조를 이루지는 못했고, 정부와 탐관오리의 척결 정도의 차원을 요구하는 수준이었다고 하며, 이 운동으로 인해 조정은 청나라와 일본에 도움을 요청해 청일전쟁이 발발해 일본이 한반도를 장악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분석했다. 삼일만세운동이 강력했지만 일본을 몰아내는 것은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서구의 민주주의와 동구의 볼세비키 혁명 등을 주동한 계층은 계몽주의적 사고를 하는 부르주아, 인텔리겐차들이었으며, 이들은 민중을 계몽하거나 선동할수 있는 설득력을 갖고있었는데 구한말의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럴만한 충분한 지식과 통일된 관점이 부족했고, 더 근본적으로 사회적 기득권층이 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삼일운동 후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 헌장 제 1조는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명시해 공화제를 채택함으로서 '주권재민'의 공화제를 지향하는 정부를 꿈꾸는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고 밝혔다. ◎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과 기독교 유럽 강국들이 피식민지를 무력통치와 자원수탈을 하다가 시장으로 다룬 것처럼 일본도 조선통치를 함에 있어 같은 방식을 채택했는데 일본을 내지로, 조선을 외지로 칭하면서 내선일체정책을 추진하는 중 조선인들에게 신민으로서 의무를 강요하고 일본인과는 차등되는 대우를 했으며, 중국진출전쟁준비를 하면서는 더욱 강화된 문화통치와 차별정책을 썼다고 한다. 당시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학교들이 설립되고, 여기서는 민족의식이 고취되는 등의 긍정적 효과도 동반했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기존 제국들은 이익이 줄어들 것을 우려해 이를 제한하려는 마찰이 발생하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다가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는 중에 '미국 등 연합국 하나님'과 '독일과 이탈리아의 하나님'간의 전쟁으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진영이 나뉘었다고 분석했다. ◎ 사회주의 사상과 기독교 삼일운동 이후 한반도에서는 서구유럽의 공화제 기반 민주주의 정치제도와 공산주의 사상에 기반한 사회주의 정치제도를 각 각 추구하는 세력과의 대화와 갈등이 연출되는데 공산주의 사상에 담긴 반종교성에 대해 기독교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게 했고, 반공정서를 지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교회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고, 미국의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적 특징을 받아들이는 편이었기에 미국의 반공주의와 반사회주의적 관점이 한국교회의 주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는 중요한 신앙의 교리로 반공을 택하는데 이는 19세기 말 등장한 공산주의에 대한 세계적 정신흐름을 기독교적으로 거부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모든 사회는 지식인들이 사회적 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마련인데 그런 노력이 축적되면 사회적 변혁을 끌어낸다는 명제를 제시하고,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꾸준한 학습을 실시하는 특징이 있다고 밝혔다. 사회에서 지식인으로서 목회자와 평신도 전문가들의 사상이 올바르게 발전 또는 퇴보하는 경우가 가능하다며,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때 친일파는 척결의 대상이지만 당대에 가장 훌륭한 지식인이고 정치인이었다는 측면은 그들의 생각이 시대의 발전과 퇴보를 결정하는 변화의 요소이며, 신념을 이유로 각자의 선택을 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각자의 신념이 올바른지 그른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풍토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 송훈 박사(명지대학교 출강, 전문연구원)는 논찬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성경말씀과 복음을 세상과 정치, 문화, 경제, 환경 등에 대해 모두 대응 가능하기에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송 박사는 미국이 20세기 초반 세계 최고의 사회의 진보를 이뤘는데 1920년대의 경우 전세계 공업생산량의 44%를 달성하고, 국민 5명당 자동차 1대를 소유해 이동의 자유를 누린 세게 최강국이었다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내리막을 겪었다고 평가했다. 산업혁명의 영광스러운 시기에 어두운 곳에서 가난한 자들, 소외받는 자들, 착취 당하던 자들과 함께 했던 기독교인의 성결운동과 사회복음운동이 빛을 발휘했다고 한다. 같은 시기 한반도의 조선은 기독교와 정치권력, 정치적 이념간의 충돌이 벌어지는 중이었다고 1920년대의 사회를 설명했다. 김동석 박사가 이 시기 조선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자강을 이루려던 민족주의적인 기독교지도자들, 신사참배에 반대해 학원을 폐교한 선교사들, 공산주에 유물론에 맞선 반공주의 기독교인들, 기독교인이면서도 친일파였던 자들의 내선일체적인 활동을 소개하고, 이들이 추구한 기독교적인 신념이 무엇인지, 그 신념이 21세기 현재에는 무슨의미인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송훈 박사는 이에 대해 정치와 기독교의 관계를 어떤 신념으로 구축함이 이 땅에 샬롬(평화)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하도록 강권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교회사학자들은 남북전쟁 후 수포쿠스 재판을 거치며 복음주의자들이 당시의 상식에 기반한 현대주의와 성경 간의 균형을 맞출 전통의 신앙유산을 상실했음을 주제발제자가 지적한 것으로 분석했다. 이 시대에 근본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우드로 윌슨과 월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같은 인물들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종교지형에서 전통적 교회들이 탈 권위화와 쇠락이 이어졌다는 것은 교회권위가 지켜지는데 정치적 권력이 아닌 당대의 미국 문화와 전통적 신앙을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을 해야하는지 요구하는 사건이었다고 분석했다. 주제 발제자는 올바른 교회의 정치적 참여의 방식이 무엇인지, 어떤 신념으로 정치의 영역에서 교회의 가치를 구현할지에 대한 과제를 던졌다고 밝혔다. 아쉽게도 김동석 박사는 한국의 현 세대의 문화가 교회에게 전쟁의 대상인지, 창조적 방식으로 이 사회를 거룩하게 할 수 있는지에 관련해 복음적 기독교인들이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살아갈 방법이나 차세대를 위한 교육의 방향은 언급하지 않았다고 송훈 박사는 지적했다. 송훈 박사는 이에 빈센트 바코트(아브라함 카이퍼의 추종자)의 관점을 대안으로 소개했다. 바코트는 선과 악, 너와 나, 찬성과 반대의 이분법적 논리에 쉽게 매몰되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윤리와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찬반이 아닌 복음에 기반한 대안적 접근을 시도하라는 권고를 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바코트가 제시하는 선한 방식의 사회 변혁 방법은 애통함, 기대를 줄임, 고난을 감수함 등의 세가지 영역을 설명했다고 한다. 첫 째 애통함에 관해서 성경의 저자들과 선지자들이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짓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우리들도 간구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공적책임을 하려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저항은 항상 완강하기 때문에 절망보다는 애통하고, 인내함으로서 우리는 사명을 완수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둘 째 기대를 조절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은 물론 세상을 당장이라도 변화시키실 수 있겠지만 종 종 우리는 인내하도록 요청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종말론적 신앙을 갖고 곧 대규모로 세계적 변혁이 일어날 것을 믿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 변혁이 안 일어나는 것은 또 아니기 때문에 절망하거나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제안했다. 인류의 역사는 꾸준한 진보로 인해 변화되었으며, 그 역사마저도 최종적으로는 종결자가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기억하고 인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적 책임을 감당하려면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공적 책임을 다 하고 그리스도를 닮는 변화를 추구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고난까지도 받아들일 자세를 가져야한다고 밝혔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행하기 위한 공적영역에서 의무를 다하는 자들은 고난이 따른다는 명제는 예수 또한 알고, 이를 가르치신다고 설명했다. 바코트는 개인적 신앙과 공공의 변화를 소개하면서 도르테 줼레(독일 신학자)를 소개했다고 한다. 도르테 줼레는 홀로코스트의 재앙이 유럽을 덮었을 때 "가스 냄세가 나지 않나요?"라고 질문해 교회 예배당에서 경건한 예배를 드렸던 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독가스로 쓰러져간 유대인의 아픔을 신경쓰는지를 지적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기독교의 전통교리들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공적의미가 있음을 인식해야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주신 사명을 깨달아 수행할 제자로서 이땅에 정의를 선포하는 자들이 되야 한다는 것이 바코트의 주장이라고 설명했다. 송훈 박사는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의 장은 권력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풀뿌리 운동이 현장이고, 거룩한 삶의 일상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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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일반(해외, 국내)
    2024-04-25
  • 예수님을 만난 그물은 찟어지지 않아
    ▲ 조점숙 목사가 설교를 담당했다. ▲ 왼쪽부터 사회 여선암 전문연구원, 설교 조점숙 목사. ▲ 류금주 원장이 광고순서를 담당했다. ▲ 민경배 명예원장이 축도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이하 한교사)은 지난 4월 11일 서현교회당(이상화 담임목사 시무)에서 제 301회 월례발표회를 진행했고, 이날 설교를 담당한 조점숙 목사는 요한복음 21장 7~11절을 바탕으로 '찟어지지 않는 믿음'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조점숙 목사는 어부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망과 부활 후 어촌으로 되돌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상황을 언급하고, 여기 어부들이 물고기를 밤이 새도록 못잡던 상황에 명령 하시되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고, 그물이 찟어질 만큼 물고기를 잡았던 일을 설명했다. 조 목사는 이 그물은 예수님을 만난 시점을 중심으로 찟어지던 그물에서 안찟어지는 그물이 되었는데 원인은 핵심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힘 입은 것이며, 우리 성도들의 복음사역도 마찬가지임을 분석했다. 이 바닷가의 제자들은 스승인 예수님을 뵙고도 누구인줄 모르다가 그제서야 부활하신 예수라는 것을 알아챘다고 설명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던진 그물에는 생선 153마리가 잡히므로 성과가 상당했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물이 찟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하며, 이 그물이 이전에는 찟어지기 일쑤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찟어지지 않는 그물로 바뀌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조 목사는 제자들의 마음의 변화도 심각했다고 했다. 스승을 만난 제자들은 자신들이 시골에 숨어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창피함을 느끼거나 죄송한 마음 등 복잡한 상태였음이 명백하지만 이에 예수님은 모닥불에 구운 생선과 떡을 준비해서 먹으라고 베푸셨는데 이것은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하신 끝없는 은혜의 현장으로 만드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밥을 먹이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차례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신 바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에게 복음을 먹여야 하지만 명령을 수행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며, 이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과 배고픔, 힘듬, 두려움이 모두 고쳐지는 기적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을 믿고 나아가자고 강조했다. 이날 예배 순서는 축도 민경배 목사(명예원장), 광고 류금주 원장, 사회는 여선암 전문연구원, 반주 박수연 전도사 등이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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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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