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0-11(수)

문화
Home >  문화  >  문학

실시간뉴스
  • [문단 포커스] 단어를 잊어가는 ‘무진기행’ 출간 60년 김승옥 작가
    ▲1964년 김승옥이 펴낸 ‘무진기행’이 세상에 나온 지 60년이 됐다. 2024년의 한국 사회는 1964년의 한국 사회보다 긍정적으로 변했을까. 뇌졸중으로 대화가 힘들지만 작가는 “그럼”이라고 답했다. [문단 포커스] 단어를 잊어가는 ‘무진기행’ 출간 60년 김승옥 작가 ‘안개’ 속 그의 분투는 치열했다…“尹과 아내→행복(안개)→부끄러움” 《“무진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83)은 잠시 생각하더니 흰 종이에 한반도 지도를 그렸다. 지도 위에 서울을 표시하고, 이어 평양, 부산, 순천을 적더니 마지막으로 광주를 표시했다. 그러고는 말없이 각 도시를 포함하는 큰 원을 그리고 ‘무진’이라고 눌러 적었다. 무진은 서울일 수도, 부산일 수도, 그 어느 곳일 수도 있다는 뜻이란다. 1960년대 무진기행을 읽고 감명받은 문청들이 서울역으로 가 무작정 무진행 열차표를 달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고 하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 김 작가가 23세 때인 1964년 10월 사상계에 발표한 ‘무진기행’이 올해 60주년을 맞았다. 2003년 뇌졸중이 발병한 이후 정상적인 대화가 힘들어진 그는 재작년 허리 부상에 이어 지난해 초 장협착증이 발견됐다. 큰 수술을 3번 받아 기력이 급격히 약해졌단다. 이후로는 서울 강북구 번동의 집에서 칩거하다시피 했다고. 하지만 ‘무진기행 60주년 얘기를 듣고 싶다’고 가족을 통해 뜻을 전하자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마침 3일 저녁에 서대문에서 가족 모임이 있으니 좀 일찍 나가 인터뷰를 하겠다는 뜻도 전해왔다. 이날 오후, 지팡이를 짚은 김 작가가 느릿한 걸음으로 광화문 동아일보의 인터뷰 장소로 들어왔다. 아내, 장남과 함께였다. 김 작가는 21세, 서울대 불문과 2학년 때 ‘생명연습’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2년 뒤에 ‘무진기행’을 발표하자 문단은 술렁였고, 이듬해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거머쥐자 문단은 충격을 받았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중략)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무진기행 중에서) 이날 작가는 90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떠도는 적절한 답변의 단어를 찾느라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고선 ‘무진’ ‘안개’ ‘남과 여’ ‘선과 악’ ‘부끄러움’ 등의 단어를 반복해 적기도 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장남이 “이런 뜻입니까” 하면 때론 웃으며 긍정했고, 때론 “아니”라고 선을 긋기도 했다. 안개 속에서 길을 찾는 듯한 대화가 출구 없이 이어졌다. 기자는 12년 전에 등단 50주년을 맞은 김 작가를 필답으로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안개’가 짙어진 듯했다. ‘무진기행 발표 60주년이 된 소감’을 묻자 작가는 답 대신 종이를 꺼내 ‘뇌졸중’ ‘동아일보’를 연이어 적었다. 뇌 모습을 그리더니 옆에 다시 뇌졸중이라고 적었다. 알 듯 말 듯했다. ‘무진을 오랫동안 사랑해주시는 독자에게 감사하시냐’고 다시 묻자 그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그러고선 그는 갑자기 ‘무진기행’을 봐야겠다면서 책이 지금 있냐고 물어왔다. 문고본은 찾지 못해서 급한 대로 컴퓨터에 저장된 무진기행의 파일을 노트북 모니터에 띄우자 그는 위아래로 손짓을 해가며 자신이 읽고 싶은 부분을 찾게 했다. 그러고선 그는 직접 손을 뻗어 모니터에 올라온 수많은 문장들 사이에서 몇 문장을 반복해 짚었다. 소설 말미, 정확히는 세 문장이었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찢어 버렸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제약회사 간부인 윤희중은 고향인 무진에 내려와 현지 음악교사인 하인숙을 만나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아내의 전보를 받고 급히 상경하게 되면서 하인숙을 향해 연정의 편지를 쓰지만 이를 결국 찢고 그냥 무진을 떠나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결말 부분이다. ‘특히 마음에 드시는 부분이냐’고 묻자 김 작가는 환하게 웃었다.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고 하며 어렵게 쓰신 부분이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더 환하게 웃었다. ‘무진기행’을 지금도 종종 읽으시냐고 묻자 그건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아내의 전보를 받고 상경한 주인공은 평소 원했던 대로 제약회사 전무가 되었을 것이다. 김 작가에게 무진기행의 결말 이후가 어떻게 됐을지를 묻자 그는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윤과 아내→행복(안개)→부끄러움’ 작가는 아내에게 돌아가 겉으로는 행복하지만 내면에서는 계속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게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실제로는 윤과 같은 삶을 선택하지 않겠냐는 뜻을 비치기도 했다. ▲‘무진기행’을 써달라고 하자 작가는 펜을 들어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눌러썼다. 비록 직접 감사 인사를 말하지는 못했지만 ‘독자들에게 감사하시냐’고 묻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 김 작가는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등을 통해 1960년대 꿈과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삶을 문제적 시각으로 그려냈다. 1964년의 한국 사회와 2024년의 한국 사회. 좀 더 긍정적으로 변화했을까. 그가 다시 펜을 집었다. 그는 1960년에는 군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군인이 없는 사회가 됐다고 했다. 군인은 군사정권이라는 설명도 추가로 곁들였다. ‘세상이 좋게 변한 것이냐’고 되묻자 그는 이번에는 “그럼”이라고 명확히 육성으로 답했다. 앞서 김 작가의 휴대전화로 인사를 담은 문자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가족을 통해서는 대면 인터뷰 진행이 어려울 수도 있으니 선생님이 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미리 전달해주면 좋겠다는 부탁도 전했다. 작가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거의 이틀 만인, 인터뷰 당일 정오쯤에 18줄의 제법 긴 답문이 도착했다. 아쉽게도 대부분 본인의 이력을 다시 기계적으로 언급한 것들이었지만, 이런 부분도 있었다. ‘1966년 단편집 서울 1964년 겨울 창문사(인세 안 됩니다. 김승옥 화냈다)’ 김 작가 아내의 설명으로는 당시 소설가 황순원의 동생이 운영하는 출판사 창문사에서 첫 단편집을 냈는데 인세를 하나도 주지 않아 당시 남편의 불만이 컸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김승옥 부부의 주례 선생님은 황순원 작가였다. 아내는 “황순원 선생님은 동생이 인세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셨을 것이다. 어찌 됐든 황 선생님이 저희의 주례를 서 주셨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니냐”며 웃었다. 김 작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위에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가족들은 얘기했다. 하지만 이날도 김 작가는 작은 회색 수첩과 어느 책에서 찢어낸 자신의 이력이 담긴 종이 2장을 가져와서 무언가 생각이 안 나면 몇 분 동안이나 들여다보곤 했다. ‘수첩을 볼 수 있습니까’ 물었더니 작가는 열어봐 주었다. 문장보다는 단어, 그마저도 어떤 연관성을 찾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는 페이지도 있었다. 그의 이름을 딴 김승옥 문학상은 지난해까지 8회 수상자를 배출했다. 등단 10년이 넘은 작가가 발표한 단편 가운데 수상자를 가린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다시 적절한 단어를 찾느라 한참 ‘안개’ 속을 서성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가 2004년 펴낸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책이 지금 없다고 하자 그 책을 펴낸 아현동에 있는 출판사를 지금 찾아가자고 장남에게 말했다. 기자에게도 그 책을 본 다음에 질문에 대한 답을 문자메시지를 통해 보내겠다고 했다. 김 작가의 장남은 “아버지는 이제 어떤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이전 작품들을 다시 읽으며 그것을 찾으려고 하신다”며 “이제 아현동 출판사에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감각적인 문장을 찾아다니던 20대의 청년은 80대가 돼서도 여전히 비슷한 자리에서 분투하는 모습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젠 앞서 자신이 적어놓은 글들에 기대어 어떤 출구를 찾고 있다는 것. 그는 여전히 무진의 안개 속에 서 있는 듯했다.<동아일보 황인찬 문화부장>
    • 문화
    • 문학
    2024-04-05
  • 프란치스코 교황 첫 회고록 “나도 여인에게 마음 뺏긴 적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바티칸 바오로 6세 홀에서 밤비노 게수 어린이 병원 경영진, 의료진 및 환자와 이야기하고 있다. /AFP 연합 프란치스코 교황 첫 회고록 “나도 여인에게 마음 뺏긴 적 있다” “마라도나엔 ‘어느 쪽이 죄지은 손이냐’ 물어” “할아버지·할머니는 1927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프린세사 마팔다’호를 타고 아르헨티나로 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뱃삯을 마련하지 못해 배를 놓쳤고 이 사건은 우리 가족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9일 출간되는 회고록에 적은 가정사(史)다. 그의 조부모가 타려 했던 배는 항해 도중 브라질 부근에서 침몰해 이민자 300여 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교황은 “2년 후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말 그대로 ‘수용소’ 같은 곳에서 지냈다”고도 했다. 그는 중동·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유럽으로 밀항(密航)하는 과정에 매년 수천 명이 바다에 빠져 숨지는 상황에 큰 우려와 비애를 드러내 왔다.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그들의 고통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던 것이다. 곧 출간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회고록 ‘삶: 역사를 통해 본 나의 이야기’가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교황의 어록 등을 모은 책이 나온 적은 있다. 하지만 올해 88세인 교황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쓴 자서전은 처음이다. 교황은 이 책에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많이 공개했다고 알려졌다. 순탄치 못했던 조부모의 이민 과정을 비롯해 젊은 시절의 사랑, 최근 논란이 된 낙태 및 동성애 축복에 대한 신념, 공산주의자이자 독재에 부역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 사정 등을 밝혔다. 회고록은 바티칸 출입 기자 출신의 이탈리아 언론인 파비오 마르케스 라고나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쓰였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독일·프랑스·영국에서 출간되며 가장 먼저 책을 입수한 이탈리아 매체를 통해 내용이 일부 공개됐다. 교황은 젊은 시절 겪은 ‘사랑의 열병’도 털어놓았다. 그는 “신학생 시절 짝사랑이 있었다. 영화계에서 일하던 여성으로 (나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삼촌의 결혼식에서 만난 한 여성에게 푹 빠진 적도 있다. 교황은 “너무나 아름답고 영리해 머리가 아찔했다”며 “그의 모습이 일주일 내내 머릿속에 떠올라 기도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수회 회원이 된 뒤엔 일본에 가 선교사가 되려고 했다. 그는 “하지만 당시 건강이 좋지 못해 허락받지 못했다”며 “그때 일본에 파견됐다면 내 인생은 다른 길을 갔을 것이고, 지금 바티칸의 누군가가 더 나은 삶(교황의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아르헨티나인답게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은 그는 아르헨티나의 국민 영웅이자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하나로 꼽히는 디에고 마라도나에 대한 일화도 풀어놓았다. 그는 “몇 년 전 바티칸에서 마라도나의 알현을 받았을 때 농담 삼아 ‘어느 쪽이 죄지은 손이냐’고 물었다”고 했다. 마라도나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핸드볼(손으로 공을 건드리는 행위) 반칙으로 결승골을 넣었다. 마라도나는 경기 후 “나는 (공을) 건들지 않았다. 그건 신의 손이었다(fue la mano de Dios)”라고 말해 ‘신의 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의 활약으로 그해 월드컵을 거머쥐었다. 교황은 자서전을 통해 가톨릭 교리에 대한 자신의 신념도 드러냈다. 그는 낙태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낙태는 고용된 살인, 암살이다” “아이를 상품으로 취급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근 프랑스 등 가톨릭 국가가 낙태권 보장을 위해 헌법 개정까지 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됐다. 그는 한편으로 동성 커플을 제한적으로 축복할 수 있게 한 지난해 말 결정도 재차 옹호했다고 이탈리아 매체들은 전했다. 그는 “최악의 모욕엔 귀를 막고 있다. 나에 대해 말하고 쓰인 모든 것을 들여다본다면, 매주 심리학자의 상담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교회 내 보수파가 동성애자에 대한 축복을 허락한 것을 두고 연일 그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는 것을 에둘러 언급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건강과 관련해 “내가 스스로 물러나길 원하는 비판자가 적지 않지만, 나는 건강하며 자진 사임의 가능성은 멀다”고도 했다. 또 자신이 해방 신학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에 대해선 “내가 가난한 이들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가난한 이들은 복음의 깃발”이라고 했다. 교황은 또 자신이 예수회의 아르헨티나 관구장을 지낸 1970년대 후반 군부 독재에 협조했다는 의혹엔 “나에 대한 좌파들의 복수(음해)였다”며 “당시 정권이 내게 올가미를 씌우려 갖은 짓을 했지만, 꼬투리를 잡지 못해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 문화
    • 문학
    2024-03-17
  • 시애틀서 활동 중인 고은지 작가, 소설 ‘해방자들’ 출간
    ▲산호세 출생의 한인 2세로 시인이자 번역가인 고은지(한국명. 필명 E.J.Koh. 35)가 11월7일자에 신작 소설 '해방자들' 출간을 앞두고 있다. 시애틀서 활동 중인 고은지 작가, 소설 ‘해방자들’ 출간 주제 ‘용서의 힘’…2021년 워싱턴州 도서상 받은 시집에 이어 발표한 신작 소설 시애틀, 워싱턴(김정태 기자)-산호세 출생 한인 2세로 시인이자 번역가인 고은지(한국명. 필명 E.J.Koh. 35)는 2020년 회고록인 "타인의 마법 같은 언어"에서 주변 사람들을 용서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의 부모가 캘리포니아 데이비스-그녀가 15살 때, 아버지가 직업 관계로 한국으로 이주했다-에 남매를 남겨두고 떠났을 때, 19살 짜리 오빠와 그녀 자신이 필요한 안정이나 부모의 지도를 해주지 못했던 부모까지 그녀의 분노와 분노가 타오르는 사람들의 목록은 길었다. 고 작가는 복잡한 가족 관계를 탐구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 헤쳐 나가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 공감하고, 수년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렸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평화를 향한 첫 걸음이라면, 마지막이자 종종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시에서 산문에 이르기까지 그녀 작품의 핵심 시금석이며, 고씨가 11월 7일 출간 예정인 데뷔 소설 '해방자들'에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교훈이다. 고 작가는 여러 인터뷰(그리고 회고록)에서 "제게 시 선생님이 '시가 끝날 때까지 어머니를 용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는 일화를 전하면서, 1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녀의 작품 작업과도 관련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 대화를 통해 그녀의 스승은 그녀에게 곤대함, 즉 용서의 뿌리에 자리잡고 있는 비이기적인 정신을 소개했다. 인간관계는 "해방자들"의 핵심이며, 고 작가는 1980년대 군사 독재가 한창일 때 한국에 살고 있는 두 학생 인숙과 성호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엮는다. 성호는 인숙의 아버지가 "지적인" 외모 이상의 이유로 살해된 후 막 임신한 인숙을 그의 고압적인 어머니 후란과 함께 살게 하고 미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시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질투는 두 여자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긴장을 만든다. 그녀의 경우, 후란은 며느리의 완전한 존경심과 노예성에 대한 기대를 포함한 가족 관계에 대한 구시대적인 관념을 고수한다. 후란과 인숙은 결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있는 성호와 합류하고, 헨리와 인숙, 성호의 외동아들을 키우면서 새로운 나라에서 입지를 찾기 위해 몇 년을 보낸다. 광주 학살, 1988년 하계 올림픽, 세월호 사고를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는 드물지만 시적인 산문으로 전해진다. ▲산호세 출생 한인 2세로 시인이자 번역가인 고은지(한국명. 필명 E.J.Koh. 35)의 신작 소설 '해방자들' 표지. 이 책의 출간은 고 작가가 한인 문학, 역사, 영화를 공부했던 워싱턴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한 직후에 이루어졌다. (고 작가는 어바인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창의적 글쓰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창의적 글쓰기와 문학 번역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해방자들'에 대한 아이디어는 그녀가 박사 과정 연구에 전념하고, 회고록을 작성하고, 이민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각색한 2022년 Apple TV+로 각색한 버전인 '파친코'의 작가실에서 일하면서 떠올랐다. 고 작가는 그해에 대해 “저는 찾을 수 있는 한인 문학을 모두 읽었다”며 “시, 청소년 소설, 그래픽 소설, 회고록. 한국 역사에서 이 시기가 정말 흥미로웠는데, 당시에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어서 다시 그 시기로 돌아왔다. 꼭 소설을 쓰려고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작업하는 모든 프로젝트나 책이 같은 장르에 속하더라도 글쓰기 과정은 매우 겸손하다. 마치 글쓰기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며 “매번 나는 이(새로운)것을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 작가의 작품은 시, 산문, 소설, 오페라 및 번역을 포함하는 다양한 하이픈(hyphenate) 궤적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데뷔 시집인 2017년의 "더 시시한 사랑A Lesser Love"은 그녀를 볼만한 사람으로 표시했지만, "타인의 마법 언어들The Magical Language of Others"는 그녀를 현대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떠오르는 목소리 중 하나로 확고히 했다. (이 시집은 2021년 워싱턴 주 도서상, 2021년 태평양 북서부 도서상, 2022년 아시아 미국학 협회 도서상을 받았으며, PEN 오픈 북 어워드의 최종 후보였다.) 고 작가는 시간과 역사, 즉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과 우리의 결정과 행동이 어떻게 과거를 바라보는 렌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때로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 남은 인생의 문을 여는 데 필요한 전부이기도 하다. 작가는 “당신이 (편견, 편견, 질투, 외로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는 질문과 함께 “소설의 감정적 엔진은 사과와 용서에 관한 것이다. 상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느낌을 주는 일에 대해 우리는 언제,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을까? 세대 간 트라우마에 계속해서 직면하는 등 여러 세대가 걸릴 수 있지만, 그것은 앞으로 나아갈 길이 있으며, 이는 우리 각자가 내리는 개별 선택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 문화
    • 문학
    2023-11-01
  • [속보] '사랑의 시인' 김남조 별세…96세 老시인의 엔딩
    ▲2017년 시집 『충만한 사랑』 출간 당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던 김남조 시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속보] '사랑의 시인' 김남조 별세…96세 老시인의 엔딩 “태어나서 좋았다고, 살게 돼서 좋았다고, 오래 살아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2016년 영인문학관 전시 ‘시와 더불어 70년’ 인사말) 6년 전의 이 인사말에서 시인은 "좋은 시대, 좋은 나라에 태어났고 좋은 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얼마나 영광이고 얼마나 과분한지 다 표현할 수가 없다"며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때를 ‘좋은 시대’‘좋은 나라’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났고, 일본 규슈여고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1500명 중 하나뿐인 한국 아이라고 일본 아이들이 구경하러 와서 둘러쌌다. 가슴 속에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불덩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제일 위대해 보이는 사람은 신문에 날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1947년 서울대 국어교육과에 들어가면서 문학소녀의 꿈을 이루나 했는데 6ㆍ25 전쟁과 맞닥뜨려야 했다.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시 '목숨') 1953년 피란지 부산에서 첫 시집 『목숨』을 낸 때가 26세였다. 이어 『사랑 초서』, 『바람 세례』, 『사랑하리, 사랑하라』『심장이 아프다』, 그리고 『사람아, 사람아』(2020)까지 19권의 시집에서 고인이 자신에게 내린 지상명령은 사랑이었다. 이를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 고통 속 치유, 영혼과 사랑의 미학"(유성호 문학평론가)을 선사했다. 스스로는 "누군가는 원고지를 하얀 사막이라 하더라. 나는 늘 백지 앞에서 기죽고 초라하고 캄캄했다. 문학은 모든 것의 뒤에 있으며, 예술가는 저마다 홀로 있는 이들"이라고 돌아봤다. 막막한 가운데 써내려간 1000편 넘는 시에서 많은 이들이 위로받았다. 그의 시 ‘편지’의 첫 구절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가 2019학년도 수능시험 필적 확인 문구로 쓰이면서 당시 응시한 59만여 수험생의 마음을 보듬었다. 그의 시 ‘좋은 것’의 한 구절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는 광화문 교보생명 사옥에 내걸려 바삐 오가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의 시에 곡을 붙인 송창식의 노래 ‘그대 있음에’로도 널리 사랑받았다. 고인은 1955년 숙명여대에서 전임강사로 처음 강단에 섰고, 1993년 명예교수로 정년퇴임했다. 가톨릭 문인회장, 한국시인협회장, 한국 여성문학인 회장, 한국방송공사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93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8년 은관문화훈장, 2007년 만해대상 등을 받았다. ▲결혼 당시의 김남조 시인, 김세중 조각가. 중앙포토 "그대도 쉬고 싶거든/ 예와서 누워라/ 이 말이 좋다/ 내 노년기 깊은 이 시절엔/ 누워 벗하며 멈춘 바람처럼 쉬자는 말이/ 오로지 황홀하다" (시 '사막 13') 남편은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상으로도 잘 알려진 조각가 김세중(1928~86)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다. 미술관 개관을 준비하면서 과로로 세상을 떴다. 시인은 고인의 퇴직금을 기본 자산으로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1주기인 1987년부터 김세중 조각상을 시상했다. 심문섭ㆍ엄태정ㆍ최만린ㆍ최인수ㆍ이불ㆍ서도호 등 한국 미술의 거목이 거쳐 가며 조각상은 숲을 이뤘다. 함께 살던 서울 효창원로 자택을 사재 50억원을 들여 리모델링해 ‘김세중 미술관-예술의 기쁨’을 개관하기도 했다. 장례는 시인협회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12일이다. 유족은 아들 김녕(김세중미술관장)ㆍ석(디자이너)ㆍ범(화가), 딸 정아(가천대 명예교수) 등이다.
    • 문화
    • 문학
    2023-10-10
  •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1주기… 평전-편지화 출간
    ▲책의 한국판인 『이중섭, 그 사람』(왼쪽)과 일본판 『사랑을 그린 사람 』을 손에 든 저자 오누키 도모코 마이니치 신문 전 서울 특파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1주기… 평전-편지화 출간 日기자가 쓴 ‘…그 사람’ 우리말로 번역 이중섭이 가족에 보낸 편지화도 눈길 13일 화가 이중섭(1916∼1956)의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1921∼2022) 여사의 1주기를 앞두고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책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1936년 일본에서 만난 두 사람은 1945년 한국에서 결혼했다. 6·25전쟁 등으로 두 사람이 부부로 함께한 시간은 7년 남짓이었다. 1956년 이중섭이 요절하면서 야마모토는 지난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년 가까이 홀로 살았다. 신간 ‘이중섭, 그 사람’(혜화1117)은 일본 마이니치신문 소속 기자가 일본어로 쓴 이중섭 평전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책은 생전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진 저자와 야마모토 여사의 인터뷰 내용과 한국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상당수의 편지글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서울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2016년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보고 이중섭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후 6년에 걸쳐 이중섭에 대해 취재한 그는 2021년 일본에서 이중섭 평전을 출간했다. ‘이중섭, 편지화’미술평론가 최열(67)이 쓴 ‘이중섭, 편지화’도 같은 출판사에서 함께 출간됐다. 2014년 ‘이중섭 평전’을 펴냈던 그는 신간에선 이중섭이 아내와 아들에게 보낸 편지화에 주목했다. 저자는 은지화, 엽서화와 함께 편지화를 이중섭이 창안한 독립적인 미술 장르로 평가한다.
    • 문화
    • 문학
    2023-08-11
  • “온전할 때 떠나고 싶다” 알츠하이머 남편 마지막 선택 지지한 아내
    ▲에이미 블룸(오른쪽)과 남편 브라이언 어미치의 모습. 브라이언은 생전에 ”우리는 죽음에 관해 좀처럼 얘기하지 않지만 죽음 없이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lena Seibert “온전할 때 떠나고 싶다” 알츠하이머 남편 마지막 선택 지지한 아내 美 소설가 에이미, 남편과 함께한 회고록… 존엄사 논쟁 불붙이다 2020년 1월 스위스 취리히의 ‘조력 자살(존엄사)’ 기관 디그니타스. 미 소설가 에이미 블룸(70)은 남편 브라이언의 옆에 앉아 그의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 ‘약물’을 스스로 마신 남편의 숨소리는 고르게 변했고 이내 마지막 숨을 뱉었다. 나중에 아내 에이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의 존재를 느끼는 감각을 잊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시선과 손을 그에게서 떼지 못했다. 여전히 잠들 때마다 그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남편 브라이언은 67세에 알츠하이머를 진단받고 6개월 뒤 디그니타스를 찾아 스스로 생을 놓았다. 이 과정을 함께한 아내의 회고록이 작년 미국에서 출간됐다. 책은 작년 타임지(誌)가 선정한 ‘최고의 논픽션 1위’에 올랐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책의 제목은 ‘사랑을 담아’(원제 ‘In Love’). 미국에서 ‘조력 자살’이 옳은가에 대한 법적·윤리적 논란에 더 불을 붙였다. 남편 브라이언의 부탁으로 쓰여진 책. 자신의 조력 자살 과정을 아내에게 책으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내 에이미는 남편의 선택을 지지했지만 곳곳에서, 수시로 눈물이 쏟아지는 것까진 어쩌지 못한다. 에이미는 1993년 작품 활동을 시작해 4권의 소설과 5권의 단편소설집 등을 썼다.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남편과 사별 후 3년 6개월이 흐른 지난주 서면으로 만난 에이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부터 코로나 기간 동안 손녀를 돌보면서 매일 이 책을 썼다”며 “수많은 슬픔의 순간이 있었지만, 남편이 원한 것을 성취할 수 있어 약간의 평화로운 감정도 있었다”고 했다. ▲미 소설가 에이미 블룸. /ⓒElena Seibert 50대에 사랑에 홀딱 빠져 각각 재혼해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이들 부부의 행복은 10여 년 남짓이었다. 브라이언은 어느 순간부터 일정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집중력과 방향감각을 잃었으며, 아내가 전혀 입지 않는 취향의 옷을 사들고 와 건네기도 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병원에서 ‘조발성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남은 기억력은 40~50% 수준이라고 했다.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도 아직 또렷하게 의식이 남아있는 남편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했다. 에이미는 남편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일대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고 건축가로 40년 일한 남편의 삶의 원칙 중 하나는 ‘좋든 나쁘든 싸움이 날 것 같으면 첫 주먹은 내가 날려야 한다’였다”며 “치매에 무방비로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고 했다. 디그니타스가 조력 자살을 허가하는 조건은 까다롭다. 불치병에 걸려 견딜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어야 하며, 스스로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일관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우울증을 진단받은 적이 있으면 안 되며, 여러 차례 전문가와 면담도 통과해야 한다. 브라이언은 우여곡절 끝에 디그니타스의 문턱을 넘어 원하는 바를 이뤘고, 에이미는 집에 돌아와 가족과 지인들을 모아 남편의 추도식을 열었다. 그는 “남편이 알츠하이머라는 불치병을 앓은 것은 깊이 유감스럽지만, 그가 죽는 때와 방식을 선택한 것을 지지했던 것만큼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도 조력 자살을 택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임종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우리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에게 달려있습니다.” 조력 자살이라는 선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별을 앞두고 드러나는 사랑과 보살핌, 주변인과의 연대 등을 통해 무엇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란 독자들의 평이 많다. 에이미는 “‘왜 나에게…' 같은 원망을 한 적은 없다”고 했다. “이 세상엔 많은 슬픔과 고통이 있고, 슬픔은 우리가 사랑과 삶에 지불하는 대가라고 생각해요.” 책에는 남편이 떠나기 직전 미식축구 선수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도저히 관심 있는 척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등 익살 맞으면서도 미안함이 가득한 이야기도 담겼다. “남편이 떠난 뒤 제게 남은 것은 우리의 삶과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 모든 것에 친절하고,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필요한 것보다 더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 문화
    • 문학
    2023-07-28

실시간 문학 기사

  • [문단 포커스] 단어를 잊어가는 ‘무진기행’ 출간 60년 김승옥 작가
    ▲1964년 김승옥이 펴낸 ‘무진기행’이 세상에 나온 지 60년이 됐다. 2024년의 한국 사회는 1964년의 한국 사회보다 긍정적으로 변했을까. 뇌졸중으로 대화가 힘들지만 작가는 “그럼”이라고 답했다. [문단 포커스] 단어를 잊어가는 ‘무진기행’ 출간 60년 김승옥 작가 ‘안개’ 속 그의 분투는 치열했다…“尹과 아내→행복(안개)→부끄러움” 《“무진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83)은 잠시 생각하더니 흰 종이에 한반도 지도를 그렸다. 지도 위에 서울을 표시하고, 이어 평양, 부산, 순천을 적더니 마지막으로 광주를 표시했다. 그러고는 말없이 각 도시를 포함하는 큰 원을 그리고 ‘무진’이라고 눌러 적었다. 무진은 서울일 수도, 부산일 수도, 그 어느 곳일 수도 있다는 뜻이란다. 1960년대 무진기행을 읽고 감명받은 문청들이 서울역으로 가 무작정 무진행 열차표를 달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고 하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 김 작가가 23세 때인 1964년 10월 사상계에 발표한 ‘무진기행’이 올해 60주년을 맞았다. 2003년 뇌졸중이 발병한 이후 정상적인 대화가 힘들어진 그는 재작년 허리 부상에 이어 지난해 초 장협착증이 발견됐다. 큰 수술을 3번 받아 기력이 급격히 약해졌단다. 이후로는 서울 강북구 번동의 집에서 칩거하다시피 했다고. 하지만 ‘무진기행 60주년 얘기를 듣고 싶다’고 가족을 통해 뜻을 전하자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마침 3일 저녁에 서대문에서 가족 모임이 있으니 좀 일찍 나가 인터뷰를 하겠다는 뜻도 전해왔다. 이날 오후, 지팡이를 짚은 김 작가가 느릿한 걸음으로 광화문 동아일보의 인터뷰 장소로 들어왔다. 아내, 장남과 함께였다. 김 작가는 21세, 서울대 불문과 2학년 때 ‘생명연습’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2년 뒤에 ‘무진기행’을 발표하자 문단은 술렁였고, 이듬해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거머쥐자 문단은 충격을 받았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중략)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무진기행 중에서) 이날 작가는 90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떠도는 적절한 답변의 단어를 찾느라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고선 ‘무진’ ‘안개’ ‘남과 여’ ‘선과 악’ ‘부끄러움’ 등의 단어를 반복해 적기도 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장남이 “이런 뜻입니까” 하면 때론 웃으며 긍정했고, 때론 “아니”라고 선을 긋기도 했다. 안개 속에서 길을 찾는 듯한 대화가 출구 없이 이어졌다. 기자는 12년 전에 등단 50주년을 맞은 김 작가를 필답으로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안개’가 짙어진 듯했다. ‘무진기행 발표 60주년이 된 소감’을 묻자 작가는 답 대신 종이를 꺼내 ‘뇌졸중’ ‘동아일보’를 연이어 적었다. 뇌 모습을 그리더니 옆에 다시 뇌졸중이라고 적었다. 알 듯 말 듯했다. ‘무진을 오랫동안 사랑해주시는 독자에게 감사하시냐’고 다시 묻자 그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그러고선 그는 갑자기 ‘무진기행’을 봐야겠다면서 책이 지금 있냐고 물어왔다. 문고본은 찾지 못해서 급한 대로 컴퓨터에 저장된 무진기행의 파일을 노트북 모니터에 띄우자 그는 위아래로 손짓을 해가며 자신이 읽고 싶은 부분을 찾게 했다. 그러고선 그는 직접 손을 뻗어 모니터에 올라온 수많은 문장들 사이에서 몇 문장을 반복해 짚었다. 소설 말미, 정확히는 세 문장이었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찢어 버렸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제약회사 간부인 윤희중은 고향인 무진에 내려와 현지 음악교사인 하인숙을 만나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아내의 전보를 받고 급히 상경하게 되면서 하인숙을 향해 연정의 편지를 쓰지만 이를 결국 찢고 그냥 무진을 떠나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결말 부분이다. ‘특히 마음에 드시는 부분이냐’고 묻자 김 작가는 환하게 웃었다.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고 하며 어렵게 쓰신 부분이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더 환하게 웃었다. ‘무진기행’을 지금도 종종 읽으시냐고 묻자 그건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아내의 전보를 받고 상경한 주인공은 평소 원했던 대로 제약회사 전무가 되었을 것이다. 김 작가에게 무진기행의 결말 이후가 어떻게 됐을지를 묻자 그는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윤과 아내→행복(안개)→부끄러움’ 작가는 아내에게 돌아가 겉으로는 행복하지만 내면에서는 계속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게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실제로는 윤과 같은 삶을 선택하지 않겠냐는 뜻을 비치기도 했다. ▲‘무진기행’을 써달라고 하자 작가는 펜을 들어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눌러썼다. 비록 직접 감사 인사를 말하지는 못했지만 ‘독자들에게 감사하시냐’고 묻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 김 작가는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등을 통해 1960년대 꿈과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삶을 문제적 시각으로 그려냈다. 1964년의 한국 사회와 2024년의 한국 사회. 좀 더 긍정적으로 변화했을까. 그가 다시 펜을 집었다. 그는 1960년에는 군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군인이 없는 사회가 됐다고 했다. 군인은 군사정권이라는 설명도 추가로 곁들였다. ‘세상이 좋게 변한 것이냐’고 되묻자 그는 이번에는 “그럼”이라고 명확히 육성으로 답했다. 앞서 김 작가의 휴대전화로 인사를 담은 문자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가족을 통해서는 대면 인터뷰 진행이 어려울 수도 있으니 선생님이 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미리 전달해주면 좋겠다는 부탁도 전했다. 작가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거의 이틀 만인, 인터뷰 당일 정오쯤에 18줄의 제법 긴 답문이 도착했다. 아쉽게도 대부분 본인의 이력을 다시 기계적으로 언급한 것들이었지만, 이런 부분도 있었다. ‘1966년 단편집 서울 1964년 겨울 창문사(인세 안 됩니다. 김승옥 화냈다)’ 김 작가 아내의 설명으로는 당시 소설가 황순원의 동생이 운영하는 출판사 창문사에서 첫 단편집을 냈는데 인세를 하나도 주지 않아 당시 남편의 불만이 컸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김승옥 부부의 주례 선생님은 황순원 작가였다. 아내는 “황순원 선생님은 동생이 인세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셨을 것이다. 어찌 됐든 황 선생님이 저희의 주례를 서 주셨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니냐”며 웃었다. 김 작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위에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가족들은 얘기했다. 하지만 이날도 김 작가는 작은 회색 수첩과 어느 책에서 찢어낸 자신의 이력이 담긴 종이 2장을 가져와서 무언가 생각이 안 나면 몇 분 동안이나 들여다보곤 했다. ‘수첩을 볼 수 있습니까’ 물었더니 작가는 열어봐 주었다. 문장보다는 단어, 그마저도 어떤 연관성을 찾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는 페이지도 있었다. 그의 이름을 딴 김승옥 문학상은 지난해까지 8회 수상자를 배출했다. 등단 10년이 넘은 작가가 발표한 단편 가운데 수상자를 가린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다시 적절한 단어를 찾느라 한참 ‘안개’ 속을 서성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가 2004년 펴낸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책이 지금 없다고 하자 그 책을 펴낸 아현동에 있는 출판사를 지금 찾아가자고 장남에게 말했다. 기자에게도 그 책을 본 다음에 질문에 대한 답을 문자메시지를 통해 보내겠다고 했다. 김 작가의 장남은 “아버지는 이제 어떤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이전 작품들을 다시 읽으며 그것을 찾으려고 하신다”며 “이제 아현동 출판사에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감각적인 문장을 찾아다니던 20대의 청년은 80대가 돼서도 여전히 비슷한 자리에서 분투하는 모습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젠 앞서 자신이 적어놓은 글들에 기대어 어떤 출구를 찾고 있다는 것. 그는 여전히 무진의 안개 속에 서 있는 듯했다.<동아일보 황인찬 문화부장>
    • 문화
    • 문학
    2024-04-05
  • 프란치스코 교황 첫 회고록 “나도 여인에게 마음 뺏긴 적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바티칸 바오로 6세 홀에서 밤비노 게수 어린이 병원 경영진, 의료진 및 환자와 이야기하고 있다. /AFP 연합 프란치스코 교황 첫 회고록 “나도 여인에게 마음 뺏긴 적 있다” “마라도나엔 ‘어느 쪽이 죄지은 손이냐’ 물어” “할아버지·할머니는 1927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프린세사 마팔다’호를 타고 아르헨티나로 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뱃삯을 마련하지 못해 배를 놓쳤고 이 사건은 우리 가족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9일 출간되는 회고록에 적은 가정사(史)다. 그의 조부모가 타려 했던 배는 항해 도중 브라질 부근에서 침몰해 이민자 300여 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교황은 “2년 후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말 그대로 ‘수용소’ 같은 곳에서 지냈다”고도 했다. 그는 중동·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유럽으로 밀항(密航)하는 과정에 매년 수천 명이 바다에 빠져 숨지는 상황에 큰 우려와 비애를 드러내 왔다.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그들의 고통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던 것이다. 곧 출간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회고록 ‘삶: 역사를 통해 본 나의 이야기’가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교황의 어록 등을 모은 책이 나온 적은 있다. 하지만 올해 88세인 교황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쓴 자서전은 처음이다. 교황은 이 책에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많이 공개했다고 알려졌다. 순탄치 못했던 조부모의 이민 과정을 비롯해 젊은 시절의 사랑, 최근 논란이 된 낙태 및 동성애 축복에 대한 신념, 공산주의자이자 독재에 부역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 사정 등을 밝혔다. 회고록은 바티칸 출입 기자 출신의 이탈리아 언론인 파비오 마르케스 라고나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쓰였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독일·프랑스·영국에서 출간되며 가장 먼저 책을 입수한 이탈리아 매체를 통해 내용이 일부 공개됐다. 교황은 젊은 시절 겪은 ‘사랑의 열병’도 털어놓았다. 그는 “신학생 시절 짝사랑이 있었다. 영화계에서 일하던 여성으로 (나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삼촌의 결혼식에서 만난 한 여성에게 푹 빠진 적도 있다. 교황은 “너무나 아름답고 영리해 머리가 아찔했다”며 “그의 모습이 일주일 내내 머릿속에 떠올라 기도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수회 회원이 된 뒤엔 일본에 가 선교사가 되려고 했다. 그는 “하지만 당시 건강이 좋지 못해 허락받지 못했다”며 “그때 일본에 파견됐다면 내 인생은 다른 길을 갔을 것이고, 지금 바티칸의 누군가가 더 나은 삶(교황의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아르헨티나인답게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은 그는 아르헨티나의 국민 영웅이자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하나로 꼽히는 디에고 마라도나에 대한 일화도 풀어놓았다. 그는 “몇 년 전 바티칸에서 마라도나의 알현을 받았을 때 농담 삼아 ‘어느 쪽이 죄지은 손이냐’고 물었다”고 했다. 마라도나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핸드볼(손으로 공을 건드리는 행위) 반칙으로 결승골을 넣었다. 마라도나는 경기 후 “나는 (공을) 건들지 않았다. 그건 신의 손이었다(fue la mano de Dios)”라고 말해 ‘신의 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의 활약으로 그해 월드컵을 거머쥐었다. 교황은 자서전을 통해 가톨릭 교리에 대한 자신의 신념도 드러냈다. 그는 낙태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낙태는 고용된 살인, 암살이다” “아이를 상품으로 취급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근 프랑스 등 가톨릭 국가가 낙태권 보장을 위해 헌법 개정까지 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됐다. 그는 한편으로 동성 커플을 제한적으로 축복할 수 있게 한 지난해 말 결정도 재차 옹호했다고 이탈리아 매체들은 전했다. 그는 “최악의 모욕엔 귀를 막고 있다. 나에 대해 말하고 쓰인 모든 것을 들여다본다면, 매주 심리학자의 상담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교회 내 보수파가 동성애자에 대한 축복을 허락한 것을 두고 연일 그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는 것을 에둘러 언급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건강과 관련해 “내가 스스로 물러나길 원하는 비판자가 적지 않지만, 나는 건강하며 자진 사임의 가능성은 멀다”고도 했다. 또 자신이 해방 신학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에 대해선 “내가 가난한 이들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가난한 이들은 복음의 깃발”이라고 했다. 교황은 또 자신이 예수회의 아르헨티나 관구장을 지낸 1970년대 후반 군부 독재에 협조했다는 의혹엔 “나에 대한 좌파들의 복수(음해)였다”며 “당시 정권이 내게 올가미를 씌우려 갖은 짓을 했지만, 꼬투리를 잡지 못해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 문화
    • 문학
    2024-03-17
  • 시애틀서 활동 중인 고은지 작가, 소설 ‘해방자들’ 출간
    ▲산호세 출생의 한인 2세로 시인이자 번역가인 고은지(한국명. 필명 E.J.Koh. 35)가 11월7일자에 신작 소설 '해방자들' 출간을 앞두고 있다. 시애틀서 활동 중인 고은지 작가, 소설 ‘해방자들’ 출간 주제 ‘용서의 힘’…2021년 워싱턴州 도서상 받은 시집에 이어 발표한 신작 소설 시애틀, 워싱턴(김정태 기자)-산호세 출생 한인 2세로 시인이자 번역가인 고은지(한국명. 필명 E.J.Koh. 35)는 2020년 회고록인 "타인의 마법 같은 언어"에서 주변 사람들을 용서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의 부모가 캘리포니아 데이비스-그녀가 15살 때, 아버지가 직업 관계로 한국으로 이주했다-에 남매를 남겨두고 떠났을 때, 19살 짜리 오빠와 그녀 자신이 필요한 안정이나 부모의 지도를 해주지 못했던 부모까지 그녀의 분노와 분노가 타오르는 사람들의 목록은 길었다. 고 작가는 복잡한 가족 관계를 탐구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 헤쳐 나가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 공감하고, 수년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렸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평화를 향한 첫 걸음이라면, 마지막이자 종종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시에서 산문에 이르기까지 그녀 작품의 핵심 시금석이며, 고씨가 11월 7일 출간 예정인 데뷔 소설 '해방자들'에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교훈이다. 고 작가는 여러 인터뷰(그리고 회고록)에서 "제게 시 선생님이 '시가 끝날 때까지 어머니를 용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는 일화를 전하면서, 1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녀의 작품 작업과도 관련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 대화를 통해 그녀의 스승은 그녀에게 곤대함, 즉 용서의 뿌리에 자리잡고 있는 비이기적인 정신을 소개했다. 인간관계는 "해방자들"의 핵심이며, 고 작가는 1980년대 군사 독재가 한창일 때 한국에 살고 있는 두 학생 인숙과 성호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엮는다. 성호는 인숙의 아버지가 "지적인" 외모 이상의 이유로 살해된 후 막 임신한 인숙을 그의 고압적인 어머니 후란과 함께 살게 하고 미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시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질투는 두 여자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긴장을 만든다. 그녀의 경우, 후란은 며느리의 완전한 존경심과 노예성에 대한 기대를 포함한 가족 관계에 대한 구시대적인 관념을 고수한다. 후란과 인숙은 결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있는 성호와 합류하고, 헨리와 인숙, 성호의 외동아들을 키우면서 새로운 나라에서 입지를 찾기 위해 몇 년을 보낸다. 광주 학살, 1988년 하계 올림픽, 세월호 사고를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는 드물지만 시적인 산문으로 전해진다. ▲산호세 출생 한인 2세로 시인이자 번역가인 고은지(한국명. 필명 E.J.Koh. 35)의 신작 소설 '해방자들' 표지. 이 책의 출간은 고 작가가 한인 문학, 역사, 영화를 공부했던 워싱턴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한 직후에 이루어졌다. (고 작가는 어바인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창의적 글쓰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창의적 글쓰기와 문학 번역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해방자들'에 대한 아이디어는 그녀가 박사 과정 연구에 전념하고, 회고록을 작성하고, 이민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각색한 2022년 Apple TV+로 각색한 버전인 '파친코'의 작가실에서 일하면서 떠올랐다. 고 작가는 그해에 대해 “저는 찾을 수 있는 한인 문학을 모두 읽었다”며 “시, 청소년 소설, 그래픽 소설, 회고록. 한국 역사에서 이 시기가 정말 흥미로웠는데, 당시에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어서 다시 그 시기로 돌아왔다. 꼭 소설을 쓰려고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작업하는 모든 프로젝트나 책이 같은 장르에 속하더라도 글쓰기 과정은 매우 겸손하다. 마치 글쓰기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며 “매번 나는 이(새로운)것을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 작가의 작품은 시, 산문, 소설, 오페라 및 번역을 포함하는 다양한 하이픈(hyphenate) 궤적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데뷔 시집인 2017년의 "더 시시한 사랑A Lesser Love"은 그녀를 볼만한 사람으로 표시했지만, "타인의 마법 언어들The Magical Language of Others"는 그녀를 현대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떠오르는 목소리 중 하나로 확고히 했다. (이 시집은 2021년 워싱턴 주 도서상, 2021년 태평양 북서부 도서상, 2022년 아시아 미국학 협회 도서상을 받았으며, PEN 오픈 북 어워드의 최종 후보였다.) 고 작가는 시간과 역사, 즉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과 우리의 결정과 행동이 어떻게 과거를 바라보는 렌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때로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 남은 인생의 문을 여는 데 필요한 전부이기도 하다. 작가는 “당신이 (편견, 편견, 질투, 외로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는 질문과 함께 “소설의 감정적 엔진은 사과와 용서에 관한 것이다. 상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느낌을 주는 일에 대해 우리는 언제,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을까? 세대 간 트라우마에 계속해서 직면하는 등 여러 세대가 걸릴 수 있지만, 그것은 앞으로 나아갈 길이 있으며, 이는 우리 각자가 내리는 개별 선택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 문화
    • 문학
    2023-11-01
  • [속보] '사랑의 시인' 김남조 별세…96세 老시인의 엔딩
    ▲2017년 시집 『충만한 사랑』 출간 당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던 김남조 시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속보] '사랑의 시인' 김남조 별세…96세 老시인의 엔딩 “태어나서 좋았다고, 살게 돼서 좋았다고, 오래 살아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2016년 영인문학관 전시 ‘시와 더불어 70년’ 인사말) 6년 전의 이 인사말에서 시인은 "좋은 시대, 좋은 나라에 태어났고 좋은 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얼마나 영광이고 얼마나 과분한지 다 표현할 수가 없다"며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때를 ‘좋은 시대’‘좋은 나라’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났고, 일본 규슈여고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1500명 중 하나뿐인 한국 아이라고 일본 아이들이 구경하러 와서 둘러쌌다. 가슴 속에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불덩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제일 위대해 보이는 사람은 신문에 날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1947년 서울대 국어교육과에 들어가면서 문학소녀의 꿈을 이루나 했는데 6ㆍ25 전쟁과 맞닥뜨려야 했다.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시 '목숨') 1953년 피란지 부산에서 첫 시집 『목숨』을 낸 때가 26세였다. 이어 『사랑 초서』, 『바람 세례』, 『사랑하리, 사랑하라』『심장이 아프다』, 그리고 『사람아, 사람아』(2020)까지 19권의 시집에서 고인이 자신에게 내린 지상명령은 사랑이었다. 이를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 고통 속 치유, 영혼과 사랑의 미학"(유성호 문학평론가)을 선사했다. 스스로는 "누군가는 원고지를 하얀 사막이라 하더라. 나는 늘 백지 앞에서 기죽고 초라하고 캄캄했다. 문학은 모든 것의 뒤에 있으며, 예술가는 저마다 홀로 있는 이들"이라고 돌아봤다. 막막한 가운데 써내려간 1000편 넘는 시에서 많은 이들이 위로받았다. 그의 시 ‘편지’의 첫 구절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가 2019학년도 수능시험 필적 확인 문구로 쓰이면서 당시 응시한 59만여 수험생의 마음을 보듬었다. 그의 시 ‘좋은 것’의 한 구절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는 광화문 교보생명 사옥에 내걸려 바삐 오가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의 시에 곡을 붙인 송창식의 노래 ‘그대 있음에’로도 널리 사랑받았다. 고인은 1955년 숙명여대에서 전임강사로 처음 강단에 섰고, 1993년 명예교수로 정년퇴임했다. 가톨릭 문인회장, 한국시인협회장, 한국 여성문학인 회장, 한국방송공사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93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8년 은관문화훈장, 2007년 만해대상 등을 받았다. ▲결혼 당시의 김남조 시인, 김세중 조각가. 중앙포토 "그대도 쉬고 싶거든/ 예와서 누워라/ 이 말이 좋다/ 내 노년기 깊은 이 시절엔/ 누워 벗하며 멈춘 바람처럼 쉬자는 말이/ 오로지 황홀하다" (시 '사막 13') 남편은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상으로도 잘 알려진 조각가 김세중(1928~86)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다. 미술관 개관을 준비하면서 과로로 세상을 떴다. 시인은 고인의 퇴직금을 기본 자산으로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1주기인 1987년부터 김세중 조각상을 시상했다. 심문섭ㆍ엄태정ㆍ최만린ㆍ최인수ㆍ이불ㆍ서도호 등 한국 미술의 거목이 거쳐 가며 조각상은 숲을 이뤘다. 함께 살던 서울 효창원로 자택을 사재 50억원을 들여 리모델링해 ‘김세중 미술관-예술의 기쁨’을 개관하기도 했다. 장례는 시인협회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12일이다. 유족은 아들 김녕(김세중미술관장)ㆍ석(디자이너)ㆍ범(화가), 딸 정아(가천대 명예교수) 등이다.
    • 문화
    • 문학
    2023-10-10
  •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1주기… 평전-편지화 출간
    ▲책의 한국판인 『이중섭, 그 사람』(왼쪽)과 일본판 『사랑을 그린 사람 』을 손에 든 저자 오누키 도모코 마이니치 신문 전 서울 특파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1주기… 평전-편지화 출간 日기자가 쓴 ‘…그 사람’ 우리말로 번역 이중섭이 가족에 보낸 편지화도 눈길 13일 화가 이중섭(1916∼1956)의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1921∼2022) 여사의 1주기를 앞두고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책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1936년 일본에서 만난 두 사람은 1945년 한국에서 결혼했다. 6·25전쟁 등으로 두 사람이 부부로 함께한 시간은 7년 남짓이었다. 1956년 이중섭이 요절하면서 야마모토는 지난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년 가까이 홀로 살았다. 신간 ‘이중섭, 그 사람’(혜화1117)은 일본 마이니치신문 소속 기자가 일본어로 쓴 이중섭 평전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책은 생전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진 저자와 야마모토 여사의 인터뷰 내용과 한국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상당수의 편지글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서울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2016년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보고 이중섭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후 6년에 걸쳐 이중섭에 대해 취재한 그는 2021년 일본에서 이중섭 평전을 출간했다. ‘이중섭, 편지화’미술평론가 최열(67)이 쓴 ‘이중섭, 편지화’도 같은 출판사에서 함께 출간됐다. 2014년 ‘이중섭 평전’을 펴냈던 그는 신간에선 이중섭이 아내와 아들에게 보낸 편지화에 주목했다. 저자는 은지화, 엽서화와 함께 편지화를 이중섭이 창안한 독립적인 미술 장르로 평가한다.
    • 문화
    • 문학
    2023-08-11
  • “온전할 때 떠나고 싶다” 알츠하이머 남편 마지막 선택 지지한 아내
    ▲에이미 블룸(오른쪽)과 남편 브라이언 어미치의 모습. 브라이언은 생전에 ”우리는 죽음에 관해 좀처럼 얘기하지 않지만 죽음 없이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lena Seibert “온전할 때 떠나고 싶다” 알츠하이머 남편 마지막 선택 지지한 아내 美 소설가 에이미, 남편과 함께한 회고록… 존엄사 논쟁 불붙이다 2020년 1월 스위스 취리히의 ‘조력 자살(존엄사)’ 기관 디그니타스. 미 소설가 에이미 블룸(70)은 남편 브라이언의 옆에 앉아 그의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 ‘약물’을 스스로 마신 남편의 숨소리는 고르게 변했고 이내 마지막 숨을 뱉었다. 나중에 아내 에이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의 존재를 느끼는 감각을 잊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시선과 손을 그에게서 떼지 못했다. 여전히 잠들 때마다 그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남편 브라이언은 67세에 알츠하이머를 진단받고 6개월 뒤 디그니타스를 찾아 스스로 생을 놓았다. 이 과정을 함께한 아내의 회고록이 작년 미국에서 출간됐다. 책은 작년 타임지(誌)가 선정한 ‘최고의 논픽션 1위’에 올랐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책의 제목은 ‘사랑을 담아’(원제 ‘In Love’). 미국에서 ‘조력 자살’이 옳은가에 대한 법적·윤리적 논란에 더 불을 붙였다. 남편 브라이언의 부탁으로 쓰여진 책. 자신의 조력 자살 과정을 아내에게 책으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내 에이미는 남편의 선택을 지지했지만 곳곳에서, 수시로 눈물이 쏟아지는 것까진 어쩌지 못한다. 에이미는 1993년 작품 활동을 시작해 4권의 소설과 5권의 단편소설집 등을 썼다.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남편과 사별 후 3년 6개월이 흐른 지난주 서면으로 만난 에이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부터 코로나 기간 동안 손녀를 돌보면서 매일 이 책을 썼다”며 “수많은 슬픔의 순간이 있었지만, 남편이 원한 것을 성취할 수 있어 약간의 평화로운 감정도 있었다”고 했다. ▲미 소설가 에이미 블룸. /ⓒElena Seibert 50대에 사랑에 홀딱 빠져 각각 재혼해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이들 부부의 행복은 10여 년 남짓이었다. 브라이언은 어느 순간부터 일정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집중력과 방향감각을 잃었으며, 아내가 전혀 입지 않는 취향의 옷을 사들고 와 건네기도 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병원에서 ‘조발성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남은 기억력은 40~50% 수준이라고 했다.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도 아직 또렷하게 의식이 남아있는 남편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했다. 에이미는 남편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일대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고 건축가로 40년 일한 남편의 삶의 원칙 중 하나는 ‘좋든 나쁘든 싸움이 날 것 같으면 첫 주먹은 내가 날려야 한다’였다”며 “치매에 무방비로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고 했다. 디그니타스가 조력 자살을 허가하는 조건은 까다롭다. 불치병에 걸려 견딜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어야 하며, 스스로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일관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우울증을 진단받은 적이 있으면 안 되며, 여러 차례 전문가와 면담도 통과해야 한다. 브라이언은 우여곡절 끝에 디그니타스의 문턱을 넘어 원하는 바를 이뤘고, 에이미는 집에 돌아와 가족과 지인들을 모아 남편의 추도식을 열었다. 그는 “남편이 알츠하이머라는 불치병을 앓은 것은 깊이 유감스럽지만, 그가 죽는 때와 방식을 선택한 것을 지지했던 것만큼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도 조력 자살을 택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임종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우리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에게 달려있습니다.” 조력 자살이라는 선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별을 앞두고 드러나는 사랑과 보살핌, 주변인과의 연대 등을 통해 무엇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란 독자들의 평이 많다. 에이미는 “‘왜 나에게…' 같은 원망을 한 적은 없다”고 했다. “이 세상엔 많은 슬픔과 고통이 있고, 슬픔은 우리가 사랑과 삶에 지불하는 대가라고 생각해요.” 책에는 남편이 떠나기 직전 미식축구 선수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도저히 관심 있는 척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등 익살 맞으면서도 미안함이 가득한 이야기도 담겼다. “남편이 떠난 뒤 제게 남은 것은 우리의 삶과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 모든 것에 친절하고,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필요한 것보다 더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 문화
    • 문학
    2023-07-28
  • [속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작가 쿤데라 94세로 별세
    ▲체코 브르노에 위치한 밀란 쿤데라 도서관. AFP=연합뉴스 [속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작가 쿤데라 94세로 별세 프랑스로 망명한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데라가 9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12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체코 공영방송은 쿤데라가 이날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쿤데라는 공산체제였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교수 등으로 활동하면서 소설 『농담』과 희곡 '열쇠의 주인들' 등을 통해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1968년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에 참여했던 쿤데라는 저서가 압수당하고 집필과 강연 활동에 제한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쿤데라는 결국 1975년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고, 1979년 체코슬로바키아 국적을 박탈당했다가 지난 2019년에서야 국적을 회복했다. 쿤데라는 1984년 대표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썼다. 이 작품으로 명실공히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 문화
    • 문학
    2023-07-13
  • ‘리스본행 야간열차’ 작가 페터 비에리 별세…향년 79세
    ‘리스본행 야간열차’ 작가 페터 비에리 별세…향년 79세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저자 페터 비에리가 지난달 27일 별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향년 79세. 4일(현지시간) 스위스 공영언론 스위스인포 등에 따르면 고인의 책을 펴낸 출판사 한저는 이날 “위대한 사상가이자 소설가를 잃었다”며 별세 소식을 전했다. 1944년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난 고인은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을 배웠다. 1971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독일 마르부르크대와 베를린자유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소설가로서는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1995년 ‘페를만의 침묵’을 시작으로 1998년 두 번째 장편 ‘피아노 조율사’를 펴냈다. 2004년 장편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며 그의 대표작이 됐다. 소설은 독일어권 국가에서만 200만부 이상 판매됐고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2013년에는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돼 인기를 끌었다. 마지막 작품은 2020년 현지에서 출간한 ‘언어의 무게’다. 13년 만에 선보인 장편소설로 유럽 문학계의 관심을 받았다. 철학자로서도 인정을 받아왔다. 2014년 인간의 존엄성을 다룬 ‘삶의 격’으로 독일 최고의 철학 에세이에 수여하는 트락타투스상을 받았다. 그 밖에도 ‘자기 결정’, ‘자유의 기술’ 등 철학서를 집필했다.
    • 문화
    • 문학
    2023-07-07
  • 기지촌에서 미국 시골 마을로...엄마의 조현병과 그 너머[BOOK]
    기지촌에서 미국 시골 마을로...엄마의 조현병과 그 너머[BOOK] 전쟁 같은 맛(원제 Tastes Like War.)…그레이스 M 조 지음·주해연 옮김/글항아리 이 회고록은 고전적으로 표현하면 '사모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의 어머니는 상선의 선원이었던 백인 남성과 결혼해 두 자녀를 데리고 1970년대 초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인이다. 동양인이 거의 없던 워싱턴주 시골 마을에서 '중국여자' 운운하는 편견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부지런히 일하며 삶을 일궜다. 딸의 돌잡이 땐 연필을 쥐게 유도하고, 그 자신은 요리를 잘했어도 어린 딸이 무심코 '요리사'가 꿈이라고 했을 땐 실망하며 화를 낸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 딸인 저자는 미국의 명문 대학을 나온 박사로 인류학·사회학 교수가 됐다. 어쩌면 어머니 바람대로 잘 자란 교포 2세나 혼혈2세로 보일 수도 있겠다. 허나 이 책은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나 소수자가 거둔 성공담이 아니다. 저자는 여러 시기의 기억을 교차하며 어머니와 그 자신이 살아온 삶의 내밀하고도 힘겨웠던 면면을 드러낸다. "사는 동안 내게는 적어도 세 명의 엄마가 있었다"는 대목이 이를 압축한다. ▲저자가 어린 시절 살았던 워싱턴주 시골 마을의 집. 책 '전쟁 같은 맛' 서평용 이미지. [사진 글항아리] 첫째로 그의 유년기 엄마는 활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저자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각종 음식 장만은 물론이고 옷감을 끊어다 드레스까지 직접 만들어 입고 지역 교사들을 위한 파티를 열었다. 동네 숲에서는 철마다 블랙베리나 각종 버섯을 산더미처럼 채취해 가공하거나 팔았다. 미국 생활 초기부터 현지의 온갖 요리법을 열심히 익히면서도, 동네 가정에 한국 입양아가 오거나 하면 김치부터 담가 선물했다. 어머니가 달라진 건 저자가 열다섯 살 무렵부터. 환청을 비롯해 조현병 증상이 시작됐지만, 여러 사정으로 다른 가족들은 그 심각성을 절감하지 못했다. 고교생이던 저자는 혼자 정신질환 상담시설을 찾아가는 등 별별 방식으로 도움을 구했으나 기대는 번번이 좌절됐다. 그 순간을 저자는 놀랍게도 "내 한(恨)의 시발점"이라는 한국식 표현으로 전한다. 조현병 전반, 특히 그 사회적 요인에 대해 미국 사회는 물론 의학계의 연구와 시선도 지금과 다를 때였다. 이에 앞서 저자는 미국 이주 전 어머니의 삶에 대한 몇몇 사실들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어머니는 1941년생, 어린 나이에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다. 가족의 강제징용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전쟁 통에 부친과 오빠를 잃었다. 세 자매 중 언니는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어머니나 이모가 단편적으로 들려준 이야기들, 그리고 여러 학문적 연구 등을 통해 접한 사실들을 결합하며 어머니가 살아왔을 삶을 독자들이 가늠하게 한다. ▲1970년대 송탄 기지촌 모습. [사진 글항아리] 이를 통해 전쟁의 비극과 더불어 이후 한국 사회가 망각할 수 없는, 망각해서도 안 되는 모습들이 드러난다. 저자는 혼혈아에 대한 한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된 해외 입양, 그리고 미군 기지촌 여성들에 대해 최근 한국 법원이 국가 책임을 인정한 판결도 거론한다. "어머님이 매춘을 하셨었어요." 이 책의 중반쯤에 나오는 누군가의 말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어머니가 부산의 미 해군 기지촌 클럽에서 일하며 성매매도 했으리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다. 그 슬픔과 수치심과 충격은 저자를 관련 연구로도 이끄는데, 이미 여러 해 조현병을 앓아온 어머니는 외출을 전혀 않고 방 안에서만 지낼 때였다. 저자가 "사회적 죽음"이라 부르는 상태였다. 이런 어머니와 딸의 소통에 그나마 매개가 되는 것이 음식. 어머니는 더는 음식을 하지도, 때로는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뜻과 달리 베이킹을 배우러 다닌 저자는 어머니가 잘하던 블랙베리 파이를 비롯해 어머니를 위해 음식을 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어머니가 불러주는 조리법대로 생태찌개 같은 한국음식도 만든다. 치즈버거도 있다. 훗날 이혼과 별거에 이르기 전, 한국에서 처음 데이트할 때 어머니가 주문한 메뉴이자 그 모습에 아버지가 더욱 반했던 음식이기도 하다. ▲저자 그레이스 M 조. 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 대학 인류학·사회학 교수다. [사진 글항아리] 책 제목의 "전쟁 같은 맛"은 분유를 두고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가족들이 준비해 놓은 간편식 중에도 분유만큼은 전혀 손대지 않았던 어머니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나." 저자가 문헌 자료를 통해 일러주는 대로, 분유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주요 원조 식량이었다. 어머니는 예순여섯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자의 비통함은 상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이 책에도 절절히 드러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글을 쓰는 내내 어머니를 피해자로만 보는 것도, 이민자들이 미국에 빚을 지고 있으니 이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도, 다른 가족들이 수치스럽게 여겨 말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도 거부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사모곡만 아니라 씻김굿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2021년 미국에서 출간돼 전미도서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책이다. 원제 Tastes Like War.
    • 문화
    • 문학
    2023-07-07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더 로드’ 집필 코맥 매카시 별세…美현대문학대표 작가
    ▲2009년 영화 ‘더 로드’ 시사회에 참석한 코맥 매카시. AP=연합뉴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더 로드’ 집필 코맥 매카시 별세…美현대문학대표 작가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코맥 매카시가 13일(현지시간) 별세했다고 로이터·AFP통신이 보도했다. 89세. 이날 출판사 펭귄랜덤하우스는 매카시가 미국 뉴멕시코주 산타페의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매카시의 작품으로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더 로드’가 유명하다. 또 ‘국경 삼부작’으로 불리는 장편소설 ‘모두 다 예쁜 말들’, ‘국경을 넘어’, ‘평원의 도시들’도 그의 대표작이다. 저명한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그를 필립 로스, 토머스 핀천, 돈 드릴로와 함께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로 꼽은 바 있다. 그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윌리엄 포크너 등 미국의 위대한 작가들과 비견됐으며,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1933년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서 태어난 그는 테네시대학에서 물리학과 공학을 전공하다 1953년 공군에 입대해 4년간 복무한 뒤 돌아와 처음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대학교를 그만두고 시카고로 이주해 자동차 부품 창고에서 일하면서 첫 소설 ‘과수원 지기’를 썼다. 1981년에는 ‘천재들의 상’으로 불리는 맥아던 재단의 펠로십에 선정됐고, 이후 멕시코 국경 부근인 텍사스주 엘파소에서 지내며 ‘핏빛 자오선’을 썼다. 미국-멕시코 전쟁이 끝난 뒤 잔혹한 살육이 벌어졌던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매카시표 ‘웨스턴 묵시록’의 시원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매카시 특유의 어둡고 묵시록적인 세계관은 이후 작품들에서도 계속된다. 국경지대를 배경으로 카우보이 소년들의 잔혹한 모험과 씁쓸한 성장 이야기를 그린 ‘국경 삼부작’은 서부 장르 소설을 본격 순수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찬사와 함께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 특히 국경 삼부작의 첫 작품인 ‘모두 다 예쁜 말들’이 1992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미국 문학계의 주류로 진입했다. 또 종말 이후의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린 ‘더 로드’는 2006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추천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2008년에는 에단·조엘 코언 형제가 연출한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하면서 원작자인 그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높아졌다. 하지만 그는 큰 명성을 얻은 뒤에도 은둔 생활을 하며 물질적 쾌락을 거의 누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언론 인터뷰도 극도로 꺼렸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세 차례 결혼했고 매번 이혼했다. 유족으로는 두 아들과 2명의 손자가 있다.
    • 문화
    • 문학
    2023-06-1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