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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검색결과

  • 신앙대로 이웃을 돕다가 정치와 종교에 영향 줘
    ▲ 저자 김명구 박사는 '공덕귀-생애와 사상'에 대한 주 발제를 담당했다. ▲ 윤상구 씨는 공덕귀 여사의 자녀로서 개인적으로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밝혔다. ▲ 함재봉 박사가 사회를 담당했다. ▲ 김용호 박사는 토론순서를 담당했다. ▲ 김일환 박사는 토론을 담당했다. 공덕귀 여사는 故 윤보선 제 4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영부인이자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아픔이 있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평생을 바쳤고, 교회와 정치계의 연결점으로서 신앙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명구 박사(월남시민문화연구소 소장, 전 연세대학교 교수)는 '공덕귀-생애와 사상(도서출판 박영사)'을 저술했으며, 동 서적에 관해서 종로목요서평이 지난 4월 18일 서울YMCA회관 5층에서 개최한 토론회에서 발제를 담당했다. ▲ 김명구 박사는 '공덕귀-생애와 사상'에는 대한민국 제 4대 대통령인 윤보선과 결혼한 영부인 공덕귀의 일생 여정과 그의 생활, 사상, 종교, 정치계에서의 역할 등을 기술했다. 한일합방이 있은지 1년 뒤인 1911년 4월에 태어난 공덕귀 여사는 기독교인으로서 인도선교사 혹은 신학자가 되고자 꿈꾸었는데 정치인의 아내로서의 역할은 몸에 안맞는 옷과 같다고 느꼈고, 청와대로 들어가는(1960년) 것을 싫어했던 소탈한 성격이었다고 평가했다. 안동교회 여전도회장이 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서울노회 여전도연합회 회장,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중심에서 활동을 했다고 한다. 공덕귀는 교회 내부에 집중된 교회여성들의 활동과 역할을 비판하면서 밥통만 들고 다니는 그런 일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여성운동과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등으로 연결되어 정치적 저항의식이 있었다고 밝혔다. 유신시대의 민주화회복운동에 초점을 맞췄고, 민청학련사건을 계기로 구속자 가족협의회 회장이 되어 구속자들의 가족을 돕고, 석방운동을 펼쳐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큰 활약을 펼쳤고, 양심범 가족들의 우산의 역할동 하는 등 많은 활동은 알려졌으되 그 행동의 원천적 사상은 잘 알려지있지 않기에 이 부분을 김명구 박사가 주목해 연구했다고 강조했다. 공덕귀는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나 경제적 존재로 그치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신부적 인간 의식이 행동의 발로였고, 당시 많은 신학자들이 정부가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유린한다며 정의와 자유, 평화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질식 당하는 그런 현장에서 하나님 역시 고통당하신다는 의식이 있었고, 공덕귀 또한 그랬다는 평가를 했다. 당시 안동교회 유경재 담임목사는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때는 가차 없는 비판을 했다는 판단을 한 것처럼 공덕귀에게도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고, 그 나라는 인간의 삶의 자리와 역사와 세계 속에서도 이뤄지는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가 땅에서도 열리고, 자비로운 통치가 이 땅에서 실현되야하는 것이라는 인식이었다고 설명했다. 공덕귀가 원하는 나라는 개인의 구령에서만 그치는 초월적 세계가 아닌 사회적 변혁도 실현되는 삶의 자리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뤄지고,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은 인간은 죄와 악의 세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해야한다는 믿음이었다고 한다. 공덕귀의 사상이 변하는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공덕귀가 처음 접했던 호주장로교회는 영미 복음주의적 전통 아래있었다고 설명했다. 복음주의는 성경과 영적 회심을 두축의 신학으로서 영혼구원의 문제와 초월적 하나님과의 접촉, 하나님의 절대성과 중생실천을 강조했지만 성경적 윤리에 입각한 중생실천을 강조하는 한편 사회적 과제나 이슈를 직접 해결한다는 의식은 없다고 설명했다. 판단은 개인의 영역에 집중되었다는 것인데 공덕귀는 이같은 신앙의 터전에 속했다가 일본 유학파인 송창근을 만나면서 사회구원적 신학으로 변모했다고 밝혔다.송창근 목사는 교회강단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성이나 예수의 기독성만이 울려퍼져야 하며, 두루 모은 사상을 논하는 곳이 아니라는 입장이면서도 적극적인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청빈을 강조하면서 도시빈민과 깡패, 불량청소년, 노숙자 등과의 소통과 복음을 전하는 등 영혼구원과 사회구원 양자를 포함하는 그런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공덕귀가 일본 교리츠여자신학교에 유학 당시 일본 신학계는 다이쇼 시대 신학적 풍토(노동자와 여성, 빈곤자, 민중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신학)가 유지되던 중이었고, 대부분의 일본 신학교는 바르트의 신학적 영향 아래 있었으며, 당시 일본으로 유학간 채필근, 최태용, 윤성범, 서남동, 송창근, 김재준, 정대위, 박봉량, 박순경, 전경연, 지동식, 홍현설, 채필근, 김철손, 문익환, 황재경 등과 신학적 입장이나 신앙적 교류의 관계가 이후 한국의 재건시대에 그리스도교와 정치계, 학계, 문화계의 매개자로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설명했다. 윤보선과 공덕귀의 결혼은 신앙적 입장의 변화나 향후 역할에도 영향을 주게된다는 설명이다. 윤 대통령은 윤치소의 아들이며, 윤치호의 조카로서 기호 기독교민족주의계의 후예였는데 하나님의 뜻과 행동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국가와 기독교적 정체성을 융합하는 그러한 모습, 복음을 개인구령의 차원을 넘어 국가를 위한 헌신의 차원으로 확장하는 등 남편의 정치철학적 입장을 지지하게된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공덕귀이 통일관에 세간의 관심도 다뤘다. 공 여사가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된 박 모 교수의 구명운동을 적극적이었다는 상황은 해당 교수의 열정과 학문적 독특성, 탁월성, 열정, 소신에 깊은 인상을 받은 때문이었지 박 모 교수의 주장대로 같은 통일운동을 함께 하기로 했는데 건강 문제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그런 것은 아니며, 오히려 공 여사는 반공사상을 갖공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 증거로 강원용 목사르 비롯해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나 장기천 감리교 감독회장을 '통일을 위한 어머니의 금식기도회'의 강사로 청빙한 것 등을 제시했다. '공덕귀-생애와 사상'은 공덕귀 여사를 주인공으로 다뤘지만 공 여사가 태어나기 전의 아시아의 정세, 조선과 일본의 관계로부터 전기문이 시작되며, 한국 땅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 호주장로교나 미국장로교의 역할을 다루고, 당시 조선의 교육계, 산업계, 민주화 운동 당시 한국 정치계의 동향 등을 자세히 다룸으로서 한국 근현대 문화사에 대한 설명을 주로 할애한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 윤상구 씨가 특별히 공덕귀 여사의 장남으로서 이날 참석했다. 윤상구 씨는 모친 공덕귀 여사는 평생을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으로 사신 분이었다면서 삶이 힘드셨음에도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사신 분이었고, 가정 내에서 어른들은 두 명의 아들을 출생한 것에 대해 늘 감사와 배려를 한 기억이 난다고 밝혔다. 부친 윤보선 대통령도 오래전 세대로서 나름 가부장적일 수 있었겠지만 자상하신 분이었다고 설명했다. 공 여사는 민주화운동을 하며 잡혀간 자들의 가족들을 집으로 초청해 사랑을 나눠줬고, 어디로 잡혀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내려 관청에 수없이 드나들면서 영부인의 대접을 받기도 하는 등 모범적인 삶을 살았음을 증언했다. ▲ 한편 이날 토론은 함재봉 박사(한국학술연구원 원장)의 사회, 김용호 박사(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원장)와 김일환 박사(서울장신대학교 외래교수)가 토론자를 담당했다.
    • 뉴스
    • 정치
    2024-05-10

종교 검색결과

  • 한글 발전은 내한 선교사들의 공로
    ▲ 정용 박사는 발제를 담당했다. ▲ 고사무엘 목사는 토론을 담당했다. ▲ 송훈 박사는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 이하 한교사)은 제 302회 정기 월례발제회에 정용 박사(백석대학교 외래교수)를 초청해 발제를 맡김으로서 구한말 내한한 외국선교사들이 복음전파를 위해 한글을 익히고 사용하면서 한글문법을 확립하고, 외국어 성경책을 국문으로 번역, 한글사전의 출판, 한국 내 한글사용의 문화 정립하는 등 공로가 큼을 아는 기회로 삼았다. 사회는 송훈 박사, 발제는 정용 박사, 논찬은 고사무엘 목사 등이 순서를 담당했다. ▲ 정용 박사는 개화기 당시 한국어의연구는 뜻밖에도 한반도의 밖에서 이뤄졌다면서 연구자는 중국과 일본에 외교 또는 선교의 목적으로 체류하는 자들이 인근 국가였던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되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던 한문에 비해 언문 또는 반절로 격하되 한자의 보조수단 정도로 쓰이다가 1882년 로스-서상윤이 한글성서를 번역해서 기사회생했고, 1886년 헐버트의 한글 자강활동으로 대중화가 되었다고 밝혔다. 조선에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글은 비천해 아녀자나 쓰는 '암말' 취급을 받던 시기에 서양인들은 한국인들과 의사소통을 위한 연구에 공으 들였고,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워나가며 한국문법과 한국사전으로 정리했는데 정작 조선인 한국어선생들은 문법이나 영어의 체계를 몰랐던 편이었다고 설명했다. 대부분 내한 서양선교사들은 한국의 계몽과 근대화 과정에 헌신했고, 선교를 위해 한국어를 익힘에 최선을 다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속했던 문화에서 생산된 문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함으로서 한글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고 정 박사는 분석했다. 정 박사는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한글을 연구하는 학회의 많은 학자들이 구 한말의 주한외국인 선교사들의 공로를 논문에 단지 몇 줄에 불과하게 기술함으로서 인정하는 편인데 초기 한국 기독교가 한글문화에 끼친 지대한 역할에 비하면 너무나 저평가 된 것이라며, 노고에 걸맞는 평가를 학계로부터 받아야한다고 강조했다. 개항 전후의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의 국민들이 신분계층에 따른 교육기회가 제한되었던 틀을 깨고, 교육의 대상을 크게 확장하기 위해 미션스쿨을 세웠지만 필요경비를 학습자가 부담하는 형태였기에 여전히 극빈층은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권서인이나 전도부인들이 쪽 복음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한글을 먼저 깨우친 선교사가 편찬한 '초학언문'을 활용해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한글의 우수성을 먼저 알아본 선교사들이 큰 기여를 한 셈이라고 강조했다. 한글은 그 체계가 하늘과 구름, 바람, 사람과 같은 두, 세 음절의 단어어로 구성되고, 열 다섯개의 자음문자와 모음문자들을 가진 것으로 인식했고, 1833년 7월 1일 발행된 Chinese Repository에 한글의 영어식 발음법이 세계 최초로 수록, 1932년 7월 25일 충청도 장고도와 도대도에 머물었던 찰스 구즐라프(Charles Gutzlaff)는 그해 11월 발행된 Chinese Repository에 조선어로는 발표 했고, 이 자료는 1833년 로버트 모리슨에 의해 한글의 영어식 발음법이 완성 되는 등 성과가 있었다고 정 박사는 밝혔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익히거나 연구함에 따라 성과물들이 발견된다고 정 박사는 설명했다고 밝혔는데 로우니는 1866년 '한국어에 관한 소견'이라는 논고를 집필, 존 로스는 매킨타이어와 함께 1877년 '한국어 입문' 출간 해 차후 '조선어 법'으로 수정 보완 출판되어 이후에 내한 하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등 주한 서양선교사들의 연구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로스는 1877년 한국어회화교재인 'Corean Primer'를 출간, 리델 신부는 1880년 '한불 자전', 1881년 '한국어 문법'을 출간, 달레 선교사는 1874년 '조선교회사' 서론에 조선어를 소개 했고, 언더우드 목사는 1890년 '한영문법', 1890녀 '한영자전'을 출판, 게일 선교사는 '텬로역정', '한영자전'을 이창직과 함께 번역, 스왈론은 1892~1898년 간 '한국학 휘보 Korean Repository'에 한국어교수법과 관련한 기고문을 게재, 베어드 선교사는 1893년 출간했던 '천로지귀'의 개역 수정판을 출간하거나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50가지 도움들'이라는 책의 서술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주한 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전략은 언더우드의 '영한문법'에서 살피면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고,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50가지 도움들'에는 한국어를 귀로 들으면 입으로 재현하거나 한국인들의 생활에 동화될 것, 학습한 것을 밖에서 사용할 것 등의 실천적인 내용들로 가득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50가지 도움들'은 한국어 학습에 쉽게 입문하도록 도왔고, 여러 어휘를 쉽게 익히도록 구성, 다양한 상황에 응용하고, 학습자의 주도적 문법체계를 돕는 등의 특징이 있어 초기 개신교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서로는 오랫 동안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베어드는 외국인들이 한국어발음을 규격화하려고 했으며, 출신지에 따른 발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어의 로마자화'표기법을 강조했다고도 한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동료였던 언더우드나 게일 선교사처럼 성경번역이나 문서사역은 안했지만 엄청난 분량의 서신을 남겼다고 한다. '마포삼열 자료집'에는 한국에 거주하며 한국인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며 선교했던 경험들이 기록되어있기에 이를 주목해야한다고 정 박사는 강조했다. 한국어를 익힘에 오랜 기간이 사용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한국 장로회 선교회 규칙과 내규' 1901년판을 보면 신임 선교사들이 3년간 매년 시험을 치뤄야하며, 시험위원회는 시험 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어학공부를 위한 지도를 해야하며, 새 선교사 어학교사는 위원회의 승인을 받을 것, 위원회는 시험 결과는 매년 본부에 보고할 것, 신임선교사는 5년간 공부할 것 등으 규정했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한다. 마포삼열 선교사 서신을 통해 대부분의 수업에 토착어를 사용할 것, 선교사 출신 교사들에게 빠른 시일 내에 한국어를 익히게 할 것, 수업이 토착적으로 이뤄지는 규칙을 정할 것 등을 주장했다는 등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한다. 정용 박사는 언어는 해당 문화를 발전 시키는 원동력이자 외부에 알리는 수단이기에 자체적으로 문화이며, 인류 사회 문화의 핵심이 되는 '말'과 '문자'로 표현할 만큼 중요함을 강조하고, 한글이 문자학적으로 세계 각 문자들 가운데 매우 독특하고 우수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글은 2007년 UN 산하 세계지식재산기구 43차 총회에서 183개국 만장일치로 '국제특허 협력조약(PCT) 국제 공개어'로 채택되었다며, 우리는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야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다만 주한 선교사들의 한글에 대한 큰 공로는 그들의 교육행위 자체가 모두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 평가절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로는 한글교육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 논문을 연구하는 내내 한국어를 연구하는 전문학자들은 한글 발전에 기독교가 기여했던 것을 인정을 하긴 하지만 그들의 논문에 단지 몇 줄에 한정한 분량이며, 그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느낀다며, 이제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한국어 발전에 그리스도교가 기여했던 부분들을 적극 연구해 세상에 제시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 고사무엘 목사(전문연구원)는 논찬을 담당했다. 고 목사는 정용 박사가 제시한 조선 선교과정에서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익히며 선교에 활용했고, 한국어의 기틀을 다짐과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부분들을 대다수 동의했다. 세계에는 많은 국가와 민족, 부족이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말이 존재하지만 이들 중 고유한 각자의 글자를 갖는 경우는 별로 없으며, 대부분 타 문화권의 글자를 차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에서는 고유의 말과 글자로 종교행위는 물론 학문활동까지 이뤄진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상당수의 문화권에서 영문 알파벳을 차용해서 각 민족의 언어를 표기하지만 정확한 발음을 표기함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한글만은 표음문자이고, 한글이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세계 어떤 언어이든지 발음으로서 표현하는 우수성을 갖고있다고 밝혔다. 한국어와 한글의 우수성이라는 장점을 이제는 한국이 세계선교의 중심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구가 될 것이라면서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의 노력과 성과를 내던 모습을 본받아 세계 선교중심 국가가 되도록 노력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자고 촉구했다.
    •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2024-05-17
  • 그리스도인 평판 위한 협력
    ▲ 김동석 목사(믿힘연구원 원장)는 그리스도인은 사역을 위해 협력해야함을 강조했다. ▲ 민경배 명예원장은 한국교회사 연구와 협력에 최선을 다 해줄 것을 강조했다. ▲ 류금주 원장은 한교사 27주년의 시작을 회상하며, 협조를 부탁했다. ▲ 조점숙 목사는 1부 예배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 이하 한교사)은 제 302회 월례발표회와 예배를 지난 5월 9일 서현교회당(이상화 목사 시무)에서 개최했으며, 김동석 목사(믿힘연구원 원장)가 '좋은 평판'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담당했다. ▲ 김동석 목사는 사도행전 11장 23~26절 말씀을 기초로 '좋은 평판'이라는 설교를 담당했다. 김 목사는 바울과 바나바가 활동하던 시기의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함으로서 교회가 성장하던 상황에 대한 설명을 했다. 성경 본문은 회당에서 유대인 외에도 비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예수를 믿게되는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는 당대에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안디옥교회에는 유월절이 지난 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남았는데 이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하면서 재정적인 문제가 발생했고, 바나바가 밭을 팔아 교회에 헌금하는 등 헌신이 있었으며, 교회의 양적 성장으로 인해 동역자가 필요해진 바나바는 바울을 초청해 더욱 교회가 부흥 하는 등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평판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설명했다. 그 평판은 사람들로부터 멸시 또는 칭찬 받는 두가지 의미였겠지만 5천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해 현재 시각으로 봐도 대형교회의 범주에 드는 것이기에 평판이 좋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한국교회도 조선의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줬고, 그리스도인들은 근세로부터 현재 까지 많은 역할을 해서 현재 한국인구의 20%에 달하는 사람들이 성도에 해당하는 이 때 안디옥에서 처럼 우리도 평판을 만들어감에 고민해야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안디옥에서 비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해 교세가 크게 증가했던 사실이 있으며, 이 상황을 바나바는 독점하지 않고 바울을 동역자로 초청해 협력했고, 결과적으로 바울이 현재의 그리스도교에서 기초척인 것들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한교사도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단체로서 예수님의 이끄심을 기반으로 노력함으로 민경배 명예원장의 평판에 힘을 얻어 발전을 지속하는 중이지만 후배 학자들로서는 그 평판의 유지와 발전, 계승을 수행해야하는 과제가 있기에 이제는 중간 세대가 차세대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직접적인 인재영입에 힘 쓰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자고 촉구했다. ▲ 민경배 명예원장은 이날 모임이 한교사 창립 27주년을 겸해 모인 것을 축하하며, 기념 케익을 절단했다. 민 명예원장은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이 시작하기 전에는 이와 같은 단체가 한국교회에 없었다면서 교회사를 연구하는 단체와 사람들로서 나름 복음적인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성공에 이름을 축하했다. 한교사는 모임의 목적이 학술보다는 연구자요 성도로서 서로 친교를 우선하고, 교육과 학술을 위한 노력도 겸하는 것이므로 앞으로도 지금까지 했던 것 처럼 협력하자고 촉구하고, 회원 확장을 위해 노력하기를 당부했다. 1부 예배의 사회와 기도는 조점숙 목사, 광고는 류금주 원장, 축도는 민경배 목사 등이 담당했다.
    •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2024-05-17
  • '선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 강조
    ▲ 왼쪽부터 순교자의소리가 5월 7일 발간한 「최초의 한국어 성서와 한국 개신교의 기원」, 지난 2022년 10월 발간한 「21세기 존로스 독자판 누가복음전서」. ▲ 저자 최성일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 왼쪽 부터 현숙 폴리 대표, 최성일 교수, 에릭 폴리 CEO. 순교자의소리(이하 VOM, 에릭 폴리 CEO, 현숙 폴리 대표)는 전 세계의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물질적으로 신앙적으로 돕는 전문적인 선교단체로 인정받고 있는데 「최초의 한국어 성서와 한국 개신교의 기원(최성일 교수 저)」을 출간해 귀추를 주목받고있다. 「최초의 한국어 성서와 한국 개신교의 기원」을 출간한 순교자의소리는 지난 5월 7일 정릉의 사무처에서 저자 최성일 한신대학교 신학과 명예교수와 함께 기자회견을 가졌다. 주최측은 한국 최초의 상주 개신교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1885년 4월 5일 입국) 등 이 국내에 입국하기도 전에 존로스 선교사(주로 중국 체류)가 1882년 '누가복음전서'라는 최초의 한국 쪽복음을 번역해 국내로 반입시킴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교사의 내한보다 먼저 준비시켰던 상황을 설명하고, 말씀이 현재 한국교회의 교세정체를 극복하는 방법임을 강조했다. ▲ 에릭 폴리 목사(VOM CEO)는 순교자의소리 설립 초창기에 신앙에 관련한 대부분의 문서를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사용하고자 노력하던 중 이었을 때였는데 한국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초청해 대접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들은 한국교회의 역사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오직 미국교회의 발전 근황과 교회당 건축, 교회 성장 등에만 치중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회상했다. 폴리 목사는 당시 너무 놀랐고,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는 초기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느꼈으며, 20년 이상 해당분야를 연구한 결과 이제는 잊혀진 한국교회 초기의 역사로 돌아가 연구해야한다는 점을 확신했다고 밝혔다. 에릭 폴리 목사는 초기 한국교회의 주한외국인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은 두가지로 생각된다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등의 계열 선교사들이 조선인을 선교하는 방식은 대부분 선교사들이 조선에 세운 병원이나 학교 또는 그들의 선진화된 주거모습을 보여주는 등 기독교인이 된다면 종교적인 어떤 혜택이 주어질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방식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존로스 선교사의 경우 성경책을 나눠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는 방식의 선교전략이었다고 밝혔다. 존 로스 선교사가 나눠주는 성경책은 엘리트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내용이었고, 번역자들은 소위 전문적인 위원회도 아니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도 아니었지만 그 번역 과정 중에 종사자들이 회심해 그리스도인이 되어 큰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설명이다. 존 로스의 성경들이 있은 후 한국 땅에 본격적으로 주한선교사들이 발을 들이게 되었으며, 성공적인 한국선교가 이뤄졌는데 이는 존로스 번역성경 1만 5천권이 사전에 배포된 때문이며, 존 로스는 선교에는 성경말씀이 먼저 들어가야한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폴리 목사는 설명했다. 위에 언급한 두 선교당사자들은 교류는 했지만 정책을 단일화 한 일은 없지만 적어도 1930년대까지의 조선 선교계는 존로스의 방식이 주효했다고 강조했다. 에릭 폴리 목사는 한국교회는 1989년 이래로 교인 감소가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증가세는 없었는데 더해 코로나펜데믹을 거치면서 30%의 교회가 없어지는 등 극심한 혼란을 겪는 중이지만 존 로스 선교사의 방식대로 말씀과 성경책을 중시하고, 앞세우는 신앙전통을 세워야 극복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존 로스의 방식에서의 선교는 삶의 조건이 유려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우선해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이것은 현재 북한 지하교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통해 증명된다고 강조했다. 북한 지하교회가 현재 한국교회보다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다면서 남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교회가 평안하기 위해 교회 우호적인 정치인들을 선출하자는 주장도 상당수가 하고있지만 VOM의 사역 결과 그런 인과관계는 없다면서 존 로스가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만이 교회의 평안과 복음의 전파를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에릭 폴리 목사는 영어로 작성된 최성일 교수의 논문만을 과거에 접하고,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 어렵게 접촉해 한국문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했고, 최 교수의 은퇴 후 수개월간 국문으로 번역해 오늘날 한국어판이 번역 출간되었다고 한다. ▲ 최성일 교수는 본인과 존 로스의 만남은 '섭리적 사건'이었다고 전제하고,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으로서 교회성장에 관심이 많았기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학교에서 실천신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취득 후, 지도교수의 거부로 윗 단계로 진학 못하던 중 우연히 만난 교수님이 에버딘으로 초청했고, 그 교수님이 요구한 한국교회사 약사 리포트르 작성하니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스 선교사를 연구할 것을 추천받아 선교신학분야로서 오늘의 연구성과를 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섭리적 사건이라고 회상했다. 존 로스 선교사가 1882년 누가복음 쪽복음부터 시작해 1887년 신약전서를 완본으로 엮었는데 그의 저작들로 인해 조선 말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이미 어느 정도 틀이 만들어져있기에 조선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 일에 주력할 수 있도록 역할을 했던 측면이 있다면서 선교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명확하지만 그 말씀이 번역되었다고 해서 다 된 것은 아니며, 그 성경책으로 인해 회심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 핵심인데 존 로스의 시대에는 그 역할을 했지만 오늘 날에도 지속 될지는 고민을 개인적으로 해왔다고 최 교수는 심정을 밝혔다. 에릭 폴리 CEO가 늘 존 로스가 교회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고, 그대로 활동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선교열정은 한국교회에서 지속 될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은 늘 마음에 새기고 외워야 하는 것인데 요즘에 선교자들은 선교도구로서 성경책을 대하는 점 걱정되기에 이 책이 출간됨으로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선교의 본질이지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고 강조했다.
    •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2024-05-07

문화 검색결과

  • 첨단 수채화 기법으로 예술 혼 담다
    ▲ 이연형 화가는 수채화 기법을 활용해 다양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 이연형 수채화가가 관람객들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수채화 화가로서 28회의 개인전시회와 17회의 해외 초대전시회, 350여 회의 단체전시회를 가져온 이연형 작가가 5월 1일 오늘부터 7일까지 서울 인사동에 소재한 갤러리루벤에서 개인전시회를 개최 중이다. 이연형 수채화가는 '꽃들의 함박웃음을 머금은 지금이 좋다'는 주제로 이번 전시회에 도침장지와 한지에 수채화를 그렸고, 다양한 종이에 크로키를 표현한 작품 등 수 십 점의 작품을 발표했다. 동 개인전에 소개된 대다수의 작품들이 수채화이지만 절반 이상은 유화처럼 보이는 등 타 수채화에 비하면 매우 독특한 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연형 화가는 자신은 수십년간 미술활동을 했기 때문에 축적된 작품이 수 백 개도 넘지만 이번 전시회에는 비교적 최근의 작품들로서 엄선해서 전시했다고 밝혔다. 또한 제작한 작품 중에는 가로길이만 6미터가 넘는 대작들도 많지만 이번 전시회의 컨셉과 전시공간의 구조상 그런 대작은 제외했고, 전시된 것중 큰 것은 약 1.6미터 정도 이하의 것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화가는 자신의 작품은 '도침 장지'를 활용해 그림을 그리는 것도 있는데 도침 장지란 전통 한옥의 바닥재로 사용하는 장판지와 그림용 한지를 여러장 겹쳐서 수작업으로 다듬이질을 함으로서 생산되는 매끄러운 종이임을 설명했다. '도침 장지'를 사용한 작품제작시에는 안료를 칠할 때 유화와 수채화의 기법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으며, 이 종이는 물 흡수 현상이 일반종이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이연형 화가만의 독특한 색칠기술을 사용하고있다고 한다. 때로는 도침 장지의 보존을 위해 콩기름으로 코팅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 안료를 칠할 때 또다른 현상이 발생하기에 쉽지는 않은 제작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연형 화가는 장지 기법의 여러 겹의 색이 만들어 내는 색감의 깊이는 수십 번 칠한 색들이 위에 칠한 색을 통해 우러나올 때 손합된 매체의 긴 기다림은 또 다른 생명창조의 역동성과 고요함에 대한 그리움으로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수련시간과도 같은 느낌이며, 편협한 자신의 공간에서 그려지는 누드 크로키는 활력과 쉼이 되는 숨이자 삶, 사랑이라면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내면의 자신을 찾아가며 예수르이 깊이를 보편적 일상의 기억으로서 공유하는 그런 삶을 소망한다고 강조했다. 이 화가는 현재 도봉문화원 수채화반과 인물 크로키반 지도강사로서 활약중이며, 'Lee Yeon Hyoung 화실'을 운영하고 있고, (사)한국미술협회 22대 이사를 역임, 동덕여자대학교 상임이사 역임, 예술대학 회화과 동문회장 역임, 한국야외수채화가회 회장 역임, 드로잉 길 회장 역임, (사)도봉미술협회 지부장 역임, 현재 대한민국기독교미술협회(이사장 려용덕, 사무총장 우찬무) 회원 등의 활발한 예술계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번 개인전에는 역할에 걸맞은 인사들과 제자들이 다수가 관람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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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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