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0-1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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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6(현지 시각)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를 만나기 위해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기다리고 있다. /로이터 뉴스1

 

최장 70년 재위, 처칠·대처 등 총리 16명 겪어... 가장 위대한 국왕 뽑히기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서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영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한다.”

 

195226일 금발의 앳된 아가씨가 대영제국의 왕위에 올랐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첫 대관식이자, 영국 역사상 최초로 TV로 중계된 왕실 행사였다. 새로운 여왕의 등장을 전 세계에 알린 이날부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전 세계 54개 영연방 국가와 여기 속한 24억명의 한결 같은 관심과 추앙을 받는 인물로 살아왔다.

 

여왕은 1926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화 킹스 스피치의 실제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말더듬이조지 6세다. 조지 6세는 자신의 형인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 오른 지 1년도 되지 않아 미국 여성 월리스 심슨과 결혼하겠다며 왕위를 포기하자 느닷없이 왕이 됐다. 군주가 될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 장녀였던 엘리자베스는 일찌감치 왕위 후계자 교육을 받아야 했다. 왕가는 2차 대전 기간에도 런던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전쟁을 겪었다. 엘리자베스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1947년 엘리자베스는 그리스 왕자 출신인 해군 장교 필립공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이후 찰스, , 앤드루, 에드워드 등 31녀를 낳았다.

 

엘리자베스 2세는 윈스턴 처칠, 마거릿 대처, 보리스 존슨을 비롯해 트러스까지 16명의 총리를 겪었다. 입헌 군주제 국가의 군주답게, 그는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거나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일이 드물었다. 다만 적절한 선에선 의견을 표현하기도 했다. 대처 전 영국 총리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을 선포할 당시 국왕의 승인을 요구했을 때가 대표적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전쟁을 승인하면서도 앤드루 왕자가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는데, 부모로서 매우 걱정스럽다며 전쟁에 대한 불만을 에둘러 표시했다. 대처가 총리직을 끝낸 다음 엘리자베스 2세는 무슨 일이든 그저 강하게 밀어붙이는 그녀를 싫어했다고 사석에서 말한 바 있다.

 

그는 영국적십자사 등 620여 개 사회단체를 후원하며 자선 활동에 힘을 쏟았다. 왕족 여성 중 군복무를 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1945년 당시 20세였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전쟁에 직접 참가해 조국에 봉사하고 싶다며 아버지 조지 6세를 설득, 영국군에 입대했다. 그는 구호품 전달 서비스 부서(ATS)에서 근무했다. 처음엔 취사, 매점 관리 등 비()전투 업무에 배치됐지만, 나중에는 탄약 관리와 수송 등도 담당했다. 당시 그가 무릎을 꿇고 트럭 바퀴를 갈거나 보닛을 열고 수리하는 모습을 찍은 흑백 사진이 남아 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착실히 다져 온 왕실의 권위와 인기는 19817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결혼으로 한층 높아졌다. 유치원 보모로 일하다 왕세자빈이 된 다이애나의 이야기는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로 부각되며 전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린 결혼식은 전 세계로 중계됐다. 둘 사이에서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가 연이어 탄생하며 왕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가 결혼 전부터 사귀던 커밀라 파커 볼스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않으면서 왕세자빈과 불화를 일으켰고, 결국 결혼 15년 만인 1996년 두 사람이 이혼하자 왕실에 대한 호감은 급격히 떨어졌다. 설상가상 19978월 다이애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다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전 국민의 원망이 찰스에게 쏠렸다. 이는 왕실 이미지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고, 왕실 폐지 주장까지 이어졌다.

 

여왕은 그 후 화해와 소통에 더 큰 노력을 기울였다. 20115월 영국 군주로서는 조지 5세 이후 100년 만에 아일랜드를 공식 방문했다. 20126월에는 독립을 요구하며 오랫동안 유혈 분쟁을 해온 북아일랜드를 찾았고, 그의 사촌 마운트배튼 경을 암살한 아일랜드 공화국군 IRA의 총사령관과 역사적 만남을 가졌다. 유튜브에 왕실 소식을 전하는 로열 채널을 열고, 페이스북과 트위터 계정을 만드는 등 국민과 접점도 늘려갔다. 이러한 노력은 윌리엄 왕세손의 결혼과 조지 왕자, 샬럿 공주의 탄생과 함께 다시 한 번 영국 왕실의 인기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해리 왕손이 미국인 여배우 메건 마클과 결혼한 뒤 왕실을 떠나고, 이후 왕실의 인종차별 이슈 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국가 원수로서 각국 정상들과 활발한 외교 활동도 벌였다. 지난해 6월 영국에서 열린 주요 7(G7) 정상회의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온실 식물원인 에덴 프로젝트에서 각국 정상을 환영하는 만찬을 주최해 각국 왕실과 귀빈을 대접했다. 같은 해 11월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COP26)에는 건강 문제로 동영상 메시지만 발표했다. 휴식을 취하라는 의사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한국 정상과도 세 차례 만남을 가졌다.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했고,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영국 국빈 방문 행사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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