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0-1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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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였던 1932년 9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전신, 이하 NCCK)'가 '사회신조'를 채택했던 것이 2022년 현재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심포지엄이 진행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이홍정 목사)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원장 김영주 목사, 이하 기사연)은 공동주최로 사회신조를 주제로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제 4차 학술심포지엄을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개최했다.

 

김학중 NCCK100주년기념사업특결별위원회 위원장(이하 특별위원회)은 2024년은 NCCK가 출범한 이래 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특별위원회가 조직되어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게되었으며, 이미 13권의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이 간행되었으며,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통사를 집필중이고, 이에 따른 신학선언과 100대 인물 및 장소 선정, 역사순례 프로그램 개발, 사료실 설치, 온라인 아카이브 시스템 운영 등의 사업들을 준비 및 착수하고있는 중이기에 이날 심포지엄의 중요성이 크다고 밝혔다. 올해는 사회신조를 채택한 이래 90주년이 되는 해이고, 식민지의 현실에서 발생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교회가 주장했던 '사회신조'가 채택된지 90년을 맞아 이것의 정신유산이 무엇인지 반성과 성찰을 하고, 새로운 희망을 펼쳐내기 위한 방안들이 얻어지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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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정  NCCK 총무는 사회신조는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사는 방법과 연관된다고 밝혔다.

 

이홍정 NCCK총무는 사회신조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사회변혁을 꿈꾸는 한국기도교가 본받아야 할 선언이라면서 그 내용이 다소 과격해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아직도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이 많다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그 동안 선배들이 실천해왔던 것들을 현재 실천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한국전 등 여러 이유로 오히려 봉인되어버린 느낌이지만 이 사회신조가 있는 NCCK와 없는 NCCK는 다른 평가를 받게될 것이라며 필요성을 설명했다. 망각되 사회신조를 꺼내 읽으며, 그 정신을 실천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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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규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한규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은 사회신조 90주년이 뜻 깊은 이유는 내용상 파격적인 것들이 비록 독창성을 의심받고 있지만 90년 전에 채택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정신이 유효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사회신조가 채택은 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발표를 했다는 기록은 아직 확인 못한 한계점이 있다는 설명을 했다. 사회신조가 후대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확인하려면 NCCK문건 중 기록된 바를 찾으면 된다고 한 소장은 설명했지만 이날 발제자 중 누구도 확인했다는 발언은 없었다. 동 신조의 채택 배경은 1932년 현재 사회주의자들이 1920년대부터 반기독교운동을 꾸준히 전개하고있었고, 해외 교회 선교부들이 당시 세계대공황 등의 이유로 보조금을 줄이는 바람에 한국교회의 재정적 어려움도 언급했다. 사회신조가 내용상 남녀동등과 여성교육, 노동시간, 협동조합, 노동조합, 최저임금법, 소작법 등 구체적인 입장을 표했으며,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교회연합체를 넘어 농촌운동과 절제운동, 사회사업 등에 참여 할 신학적 근거로서 작용한 점도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신조의 백미는 소작법인지만 교회의 성도가 지주와 소작인이 함께 있었다는 측면에서 민감한 문제였고, 소작인에 대한 보살핌에 있어 선처에만 의존하는 등 사회신조가 실효성은 없었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적 측면에서 의미는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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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동훈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장동훈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는 신교의 사회신조를 접하면서 가톨릭이 최근에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지만 해방공간에서는 별도의 관여는 없었던 때도 있으며, 그동안 이원론적 인식을 극복하기 어려웠던 특징을 설명하고, 가톨릭이 폐쇄적인 것에 반해 그리스도교가 연합해 사회신조를 논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그리스독교가 교파와 교회 중심적 선교에서 벗어나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의지를 표했던 전통이 NCCK의 전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출범 단계부터 자리했음을 발견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천주교는 교황청으로부터 지역별공의회 출범을 권고받고, 1931년  한국교회 공동 지도서를 발표해 1995년 사목지침서가 발간되지 전까지 사제나 교인들의 신앙과 품행, 규율, 경신례, 성사, 재산, 세속 생활 등을 542개의 방대한 조항으로서 규정하고있었지만 사회적 성격은 극히 일부분을 다룬 것이 사회신조와 차이점이었다고 설명했다. 가톨릭의 교리가 믿을 교리와 행할 교리, 사회 교리 등으로 구분해 전수되지만 성서와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들로서 구체적 사건을 특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안에 따라서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별도의 문헌을 발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신조가 서언에 농후한 노선이나 구체적 실천의 부재, 항일에 대한 의지의 결여 등 당대 신앙인들이 감당했던 역사적 부침과 한계를 고스란히 갖고있지만 그 상징이 동시대 교회 여정의 완주라기보다는 도달할 목적지로서 여기는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한 깃발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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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석 남서울대학교 교수

 

최경석 남서울대학교 교수는 사회신조의 윤리적 부분을 발제하며, 등장의 원인이 당시 시대상황이었을 것임을 설명했다. 사회신조의 12가지 조항은 평등과 약자보호, 노동문제로 나누고, 일본 기독교연맹의 그것과 유사점이 있더라도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사회문제에 대한 구체적 입장이 담겼다는 의의와 동시에 한국 개신교가 반공적 입장을 천명한 최초의 문건이라는 특징도 설명했다. 1919~1932년의 한국 개신교인의 세가지 부류에 있어 일제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었던 선교사나 동맹세력과 민족주의 전통을 계승한 사회운동세력, 탈정치 및 탈 세계적 그리고 탈역사적인 대부분 교회대중으로 구성되었고, 한국 개신가 우파적 민족주의 및 비폭력주의 도덕주의적 성격을 지니며, 일제 강점기의 합법적 제도화된 조직이다 보니 해방이나 강력한 소작쟁의, 노동쟁의 등을 펼치기 어려웟던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시대는 3.1운동 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강화하면서 친일단체의 육성과 자치운동 및 참정권운동 등을 전개해 독립의 분야에서 민족주의자도 일제에 타협적 측과 비타협 측으로 분열되어 사회운동의 방향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된 상태였다고 밝혔다. 농인계층은 몰락의 상황이었고, 청년운동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되어 진행되었고, 여성운동은 계몽주의적 측면에서 진행되고, 독립운동자금모금과 여성해방의 측면에서 움직였음을 설명했다. 세계의 흐름은 당대 제국주의의 팽창으로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했었고, 국제연맹이 1919년 창설되어 군비축소와 민족자결의 원칙이 제시되고, 대전에서의 승전국들은 패전국의 보유 식민지를 위임통치, 러시아의 공산혁명이 1917년 성공,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이 1919년 이후 들어서며, 뉴욕 증시의 몰락이 1929년 발생 후 경제공황이 닥치고,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당이 최대 정당으로 위치, 대전 후 국가간 이권경쟁이 심화, 일제는 만주침략과 군부세력이 전체주의 정책으로 1931년 이후 진행되기고 했으며, 세계 개신교는 근대 에큐메니칼운동을 시작해 국제선교대회와 생활과 노동, 신앙과 직제 등의 활동을 벌였다고 밝혔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사회신조가 채택은 되지만 당시 문제점을 파악했던 점은 있지만 천명에 머물러서 결과론적인 행동은 전무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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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승호 박사

 

손승호 박사(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는 NCCK 100주년 역사정리를 해오던 중 사회신조를 다룰 필요를 본인이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손 박사는 연합단체의 특징은 논의구조와 절차상 시간이 지체되며, 주장 또한 다양한 조정과정을 거치기에 두루뭉술하게 입장이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설명하고, 현재 NCCK가 소수자문제를 다루고는 있지만 이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존재하기에 신속성과 명확성에 대한 담보가 어려운 것이 현실인 것처럼 교회의 문서들이 구체성이 떨어지는 편이라면서 동 사회선언이 선언에 불과하다는 지적들이 있는데 선언에 머무르면 안될 이유가있느냐, 결실이 있어야만 하느냐 하는 생각이며, 그보다 앞서 내용이 숙의되었다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사회신조의 의미의 유무보다는 당대가 아닌 후대, 즉 현재의 우리가 사회신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그 가치를 결정한다면서 그 정신과 활용 가능한 지점들을 오늘의 운동에 좁목해 활용할 때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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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표 연세대학교 교수

 

홍성표 연세대학교 교수는 해방후 정부 수립기의 개신교활동을 주제로 발제하면서 주로 농업운동과 사회운동, 정치적 활동 등을 설명했으나 사회신조가 그 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내용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해방공간(1945~1950)에서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국은 농민들의 삶이 어려웠는데 이 농촌의 문제는 당시 2차 3차 산업이 거의 전무했던 상황이었기에 민족전체의 문제에 해당한다는 것을 기준해 설명했다. 해방을 맞은 한국 개신교는 새나라를 건설한다는 시대적 과제에 응답할 힘과 역량을 갖고는 있었으나 실천한 사례는 보기 어렵고, 지도자들은 농촌문제가 전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은 없었으며, 정교분리라는 사고는 개신교회가 직접적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면서도 사실상 개인들을 중심으로 우익적 정치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광현은 안동이 인민공화국 천지가 되는 것을 반대해서 개인적으로라도 활동하겠다는 다짐을 하거나1930년대 장로교 농촌운동 주역인 배민수는 반공운동에 압도되 공산주의와의 비타협적 운동을 주장하는 등의 상화이었다고 했다. 해방공간에서 일제강점기 농촌운동이 적극적이지 못했으나 김용기의 이상촌 운동, 유재기의 기독교흥국형제단, 강성갑의 교육운동 등은 찾아볼 수 이으며, 이들의 농촌운동은 일제강점기의 개신교 것과는 달리 새 나라의 기초라는 측면이 있었고, 운동의 모범으로서 덴마크 그룬트비의 실천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룬트비는 덴마크의 기독교인들로서 삶의 현장에서 기독교가치와 정신을 실천하는 것에 노력한 활동으로 이 국가의 부흥을 이끌어냈던 것을 제시한 것이고, 덴마크인들의 실천이 조선의 기독교인으로서 조선의 삶의 현실에서 어떻게 기독교의 가치와 정신을 실천할지 고민한 대안으로서 이해해야함을 강조했다. 김용기는 덴마크 같은 이상국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고자 했지만 농민동맹 등의 문제로 두차례 투록 당한 뒤, 이상촌 운동에만 매진했다고 한다. 한경직이나 박형룡, 김재준, 강원룡, 조향록, 여운형, 유영모 등이 김용기의 삼각산농장을 방문하는 등 주목을 끌기도했다는 것이다. 강성갑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8월 공산주의자로 몰려 억울하게 희생당했지만 이후 10월 군법회의에서 가해자였던 서장이 살해혐의로 처형되는 등 오해를 벗었지만 강성갑에 대한 연극이 공연되는 등 일부 추모활동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희생당한 강성갑은 오랬동안 잊혀졌던 상황이라고 밝혔다. 강성갑은 당시 한국사회에서 나타난 농촌문제는 전 국가적인 문제였기에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한얼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새로운 교육활동도 펼쳤는데 이러한 실천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시대는 지났으며, 생활과 행동으로 복음의 진리를 입증해야한다는 지론의 반영이었다고 설명했다. 해방 후 1950년대 개신교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을 떠났던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했을 때는 이념의 문제로 북한지역선교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남한지역에서 새로운 선교 과제모색으로서 대전 기독교연합봉사회를 설립하고, 농촌사업분야의 연합사업을 실시, 복음농민학교를 1950년 4월 첫 사업으로서 설립, 시범농장으로 마련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중단, 전쟁 후 배민수와 협력해 기독교농민학원을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고 밝혔다. 1960년대 개신교는 4.19혁명 후 사회참여를 시작했고, 5.16구데타 등 박정희의 민정이양 의사가 번복, 1964년 한일국교정상화회담 등의 사안들은 사회참여의 필요성을 자극, 1960년대 후반부터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른 민주시민으로서 정치참여에 심층성찰 및 행동을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개신교 내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극명하게 들어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해방 후 정부수립기 그리스도교는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와 관심의 부족으로 한국 개신교의 과거 청산 문제를 중립적 입장에서 통사를 다루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고, 냉전적 반공-친미-분단 체제의 형성에 대한 개신교의 기여 및 친일파-미군정-이승만 정권의 동맹에 대한 개신교지도자의 참여로 집약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반성 및 회개 없이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서 개신교의 기여를 강조하자는 보수 개신교나 소위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하는사람들로 갈라졌고, 지금까지 해방 후 정부 수립기의 개신교 역사에 대한 논쟁은 찾기 어려운 현실인데 남북의 분단과정과 원인에 대한 치열한 논쟁 없는 통일문제에 대한 태조와 자세를 결정하려하는 것은 한계성을 갖을 수 밖에 없으며, 1970년대 개신교가민주화운동에 어떻게든 기여했지만 그 운동에서 개신교의 정체성은 분명히 들어나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는 등 개신교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어떻게 실천할지는 보다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하희정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는 홍성표 교수의 발제에 대해 방대한 연구가 제시되지만 사회신조가 등장하지 않는다며, 사회신조를 마련하는데 일조한 기존의 기독교 단체나 조직들이 어떤 연계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다.

다수의 발제자들은 사회신조가 회의에서 채택은 되었지만 기독신보 등을 통해 발표되거나, 구체적으로 각종 그리스도교인들의 활동에 인용되었다는 등의 증거는 발견할 수 없었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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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혁 박사

 

강혁 박사(장로회신학대학교)는 1970년대의 사회신조를 다루면서 당대 개신교 사회운동 중 사회적 환경과 시대적 요구, 도시산업선교, 도시민민선교와 농민선교, 인권 및 민주화운동, 광주민주화운동, 통일화해운동 등에 대한 설명을 다뤘다. 당시는 한국개신교의 사회운동의 뿌리가 약했으며, 엘리트 중심주의여서 지속이 어려웠고, 보수적 그리스도교의 권위주의적 정치에 맹목적 추종에 대한 반성부족, 소위 진보적 진영의 도덕적 우월의식등도 문제였는데 이 모든 것은 한국그리스도교 전체의 열매라는 인식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사회신조는 전문상 신조를 따르는 이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류를 형제로,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평화를 사회의 기초적 이상으로서 생각하고있다는 특징이 있음을 설명했다. 한국 개신교가 민족의 화해를 이루는 큰 사명을 감당해야하는 이 시기에 철저하게 자기 개혁을 해야하는 과제가 있고, 1932년 채택된 사회신조는 오늘에도 무표화되지 않았고, 한국교회의 대 사회적 신조로서 법적 유효성은 살아있다고 강조했다.

 

고성휘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강혁 씨의 발제에 대해 한국 개신교의 사회운동의 뿌리가 약하다는 지적에는 동의할 수 없담녀서 개신교 사회운동 단체들은 1970년대 이후 더욱 세분화되었다는 점과 1980년대 기독교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족한 언급 등을 보충했으면 한다는 제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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