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이소룡 사망 50주기…일본계 미국인 기무라 부자의 아름다운 ‘우정과 신의’
해마다 忌日에 묘비 닦아…16년 나이차 불구, 스승과 친구로 섬겨
▲시애틀의 준 팬 궁푸 연구소(The Jun Fan Gung Fu Institute of Seattle)의 수석 강사인 앤디 기무라(Andy Kimura)가 시애틀 캐피톨 힐 인근 레이크 뷰 공동묘지에서 이소룡과 브랜든 리 부자의 묘비를 청소하고 있다. 기무라는 1960년대에 아버지 타키 기무라(Taky Kimura)가 이소룡과 함께 공부했던 브루스 리가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쳤던 진번쿵후(振藩功夫, Jun Fan Gung Fu)라는 간판을 내걸고 무술을 가르쳤던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기무라와 그의 학생들은 이소룡의 기일 외에도 종종 무덤을 청소한다.
▲48년 동안 매년, 타키 기무라(Taky Kimura)는 이소룡의 사망 기념일에 묘지를 방문하고 묘비를 청소했다. 그는 영화와 무술 철학으로 세상을 사로잡은 배우뿐만 아니라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그의 인생을 바꾼 사람을 기리기 위해 꽃을 놓고, 향을 피우고, 몇 마디를 하고,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머물렀다. 매년 이소룡의 기일에 타키 기무라의 아들 앤디는 이소룡과 브랜든 이 부자의 묘비를 청소하는 그의 아버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특집:이소룡 사망 50주기…일본계 미국인 기무라 부자의 아름다운 ‘우정과 신의’
해마다 忌日에 묘비 닦아…16년 나이차 불구, 스승과 친구로 섬겨
시애틀, 워싱턴(김정태 기자)-브루스 리(Bruce Lee 李振藩-리전판/예명 이소룡李小龍, 1940~1973)와 아들 브랜든(Brandon Bruce Lee 李國豪,1965~1993)의 묘비가 해마다 7월20일(현지시간)이면 유난히 빛난다.
시애틀 컨벤션센터에서 승용차를 타고 5번 북쪽 방향으로 10여분 정도 운전하면, 레이크 뷰 공동묘지(Lake View Cemetery 1554 15th Ave. E Seattle, Washington), 50년 전 스타 스티브 맥퀸과 척 노리스가 운구를 맡았던 그곳에 브루스 리 부자가 잠들어 있다.
당산대형(唐山大兄-1971),정무문(精武門-1972), 맹룡과강(猛龍過江;-The Way of the Dragon-1972), 용쟁호투(龍爭虎鬪; Enter the Dragon-1973), 사망유희(死亡遊戱, Game of Death-1978 유작) 등으로 "아뵤~!!" 괴성과 함께 쌍절곤으로 악을 응징하면서, 동양의 무술을 스크린 속에서 완성시킨 인물 브루스 리, 이소룡(이하 이소룡으로 표기-편집자)
매년 참배하러 오는 수천 명의 방문객들의 손으로 쓴 메모나 귤 한 움큼으로 장식된, 끊임없이 꽃과 동전으로 장식된, 캐피톨 힐의 레이크 뷰 공동묘지에 있는 유명한 무술가와 그의 아들의 무덤은 결코 외롭지 않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들은 확실히 보살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앤디 기무라가 그의 아버지 타키 기무라를 껴안고 있다. 2021년 아버지 타키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 앤디는 브루스 리의 우정의 유산과 무술계에서의 그의 역할을 공유하기 위한 아버지의 노력을 이어받았다. 그는 "나에게 학생들,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의 전화로 넘쳐났다“며 "그 사람들은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도왔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고, 그 대가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주인'이 되고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시했다"고 말했다. (사진; 앤디 기무라 제공)
숨질 때까지 이소룡과의 우정 지킨 일본계 미국인 타키 기무라
타키 기무라(Taky Kimura. 1925~2021)는 48년 동안 매년-한 때 이소룡의 제자였고, 전설적인 이소룡의 협력자-이소룡의 사망 기념일인 7월 20일에 묘소를 찾아가 묘비를 청소했다. 그는 영화와 무술 철학으로 세상을 사로잡은 배우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그의 인생을 바꾼 사람을 기리기 위해 꽃을 놓고, 향을 피우고, 몇 마디를 하고,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기무라는 2021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교훈과 훈련뿐만 아니라 평생 자신에게 인상을 남긴 친구로부터 받은 보살핌에 보답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 이후로 기무라의 아들 앤디(Andy)가 아버지의 일을 계속하고 있다.
올해는 이소룡이 32세의 나이(1973년7월20일 홍콩에서 사망.)에 아내 린다 리 캐드웰(78·Linda Lee Cadwell)과 남매(아들 브랜든 브루스 리Brandon Bruce Lee-1965~1993/ 딸 섀넌 에머리 리(李香凝 Shannon Emery Lee-1969~현재 54세)를 남기고 뇌부종, 즉 뇌부종으로 인해 때아닌 죽음을 맞이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며, 그의 유명한 1인치 펀치보다 더 강력한 유산이다.
▲이소룡(Bruce)과 아들 브랜든(Brandon), 아내였던 린다(Linda)와 딸 섀넌 리(Shannon Lee)의 가족 사진. (사진: 린다 파머 / Shannon Lee 제공)
중국인 아버지와 영국계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한 이소룡은 생후 3개월 후 부모가 홍콩으로 데리고 건너가 18살 때까지 생활했다. 그의 부모는 하루도 싸움을 거르지 않을 정도로 속을 썩였던 아들이 19살 때 단돈 100달러를 손에 쥐어주고 샌프란시스코의 지인에게 보냈다. 그곳에서 잠시 지낸 후 부친의 지인이 살고 있는 시애틀로 이주했고 1959년에 에디슨 기술학교를 졸업한 후 워싱턴대(UW)에 진학해 철학·연극·심리학 등을 전공했다.
이소룡은 1959년부터 시애틀에서 본인의 이름을 딴 진번쿵후(振藩功夫, Jun Fan Gung Fu)라는 간판을 내걸고 무술을 가르쳤다. 이 당시 인근에 있던 가필드 고등학교라는 학교에 무술 시범 차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 학교 여고생들 중 린다 C. 에머리(Linda C. Emery, 1945~)가 있었다. 그녀는 이소룡의 쿵후 제자가 된 이후 교사가 되기 위해서 이소룡이 다녔던 UW에 진학했고, 1964년 8월 17일에 그와 결혼하면서 졸업까지 불과 몇 학점만을 남겨둔 채로 대학을 중퇴하게 된다. 그리고 이소룡이 사망할 때까지 남매를 낳아 길렀다.
▲이소룡이 맹룡과강(猛龍過江;-The Way of the Dragon-1972) 시사회에서 딸 셰넌을 안고 있다.(사진: 셰넌 리 제공)
▲이소룡의 딸 셰넌이 브루스 리 감독의 의자에 앉아 멜론을 먹고 있다.(사진 제공:셰런 리)
이소룡은 중국계 미국인 무술배우이자 무술가, 영화 감독, 각본가이며, 절권도의 창시자이자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무술가이자 문화적 아이콘으로 평가된다.
그의 죽음 이후 수십 년 동안, 대중들은 이소룡의 여러 무술 형식에 대한 숙달과 특히 아시아계 미국 배우들을 위해 그가 무술 영화에 혁명을 일으킨 방식에 매료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둘러싼 경외심 속에서 이소룡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신화와 거짓에서 진실을 분류하고, 이소룡을 전설 위로 들어 올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소룡의 가장 나이가 많은 제자들과 친구들 중 일부가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유산은 이소룡의 딸 섀넌(Shannon)과 키무라(Kimura)의 아들 앤디(Andy)와 같은 다음 세대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현재 이소룡의 유산을 관리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이소룡의 가르침이 지나치게 상업화되거나, 잘못 해석되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소룡의 딸 섀넌 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임기를 마친 브루스 리 재단(Bruce Lee Foundation-https://bruceleefoundation.org/11693 San Vincente Blvd. LA, CA. 90049)을 23년 째 운영하면서 아버지를 기리고, 그의 철학적 측면을 홍보하기 위한 여러 프로젝트(온오프라인 전시회, 학생들의 대학 진학 재정 지원 프로그램과 이소룡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도록 여름 캠프 등 운영)를 시작했다.
섀넌과 앤디는 브루스 리의 가르침에 흠뻑 젖은 채 성장했고, 이제 50대가 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유산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그러한 것들을 관련성 있게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
▲앤디는 “아버지의 노래를 계속 불러야 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책임감을 느낀다”며 “(그리고), …그(브루스 리)가 제안한 것에 대한 아이디어가 앞으로도 계속 젊은이들과 사람들이 계속 이용할ㄹ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40년대 인종차별주의에 겁먹고 소극적이었던 기무라
이소룡의 당당함과 자신감 넘친 우정으로 활기 찾아
이소룡이 사망한 이후, 앤디의 아버지 타키 기무라(Taky Kimura)는 때때로 이소룡의 묘소 방문객들을 만나 그들에게 무엇이 그들을 그곳에 오게 했는지 묻곤 했다. 어떤 이들은 그저 경의를 표하기 위해 왔지만, 다른 이들은 이소룡의 철학에 감동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이소룡의 생각과 삶에 대해 더 많이 공유하고, 한 번은 그가 한때 비밀이었던 무술 클럽에 누군가를 초대해서 이소룡의 무술 스타일이었던 절군도를 가르치기도 했다.
1940년대에 인종차별주의에 겁을 먹고 환멸을 느낀 후 일본 수용소에서 나온 기무라는 뻔뻔하고 자신감이 넘치면서도 철학적인 이소룡과의 우정에 의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들은 함께 무술가가 그들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격투 스타일을 적응하고 개인화해야 한다는 것을 핵심 신조로 삼은 이소룡의 선구적인 무술 철학과 스타일을 세계와 공유했다.
이소룡의 철학이 그의 삶과 무술 연습 모두에 영향을 주었듯이, 이소룡과 함께 한 기무라 씨의 훈련은 그의 정신과 몸을 되살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소룡은 자신의 일기 가운데 "마음을 비우십시오"라는 명언을 남겼다.
▲앤디는 "(아버지가) 겪은 모든 일들은, 여러 면에서, 이소룡의 삶보다 훨씬 더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엄청난 손실을 겪고 그것에서 돌아왔기 때문“이라며 "이소룡의 철학과 우정은 그가 돌아오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일종의 음과 양으로 본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없었다면 이소룡이 지금의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 아버지는 이소룡이 없었다면 지금의 모습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무라, 살아 생전에 이소룡의 철학 전파
이소룡 생전에 기무라에게 ‘전권도’ 전수
“물처럼 형태도 없고 형체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컵에 물을 넣으면 컵이 됩니다. 병에 물을 넣으면 병이 됩니다. 찻주전자에 넣으면 찻주전자가 됩니다. 이제 물은 흐르거나 충돌할 수 있습니다. 물이 되어라, 친구여.”
이소룡은 자신이 훈련시킨 사람들에 대해 항상 신중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보다는 자신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무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찾았다. 그는 절권도(Jeet Kune Do)의 핵심 교리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키 기무라에게 이소룡의 유산을 존속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했고, 앤디가 이소룡의 유산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더 조용하지만 놀라운 유산을 기릴 복합적인 의무가 있다고 느끼는 이유이다.
▲브루스 리가 사망유희(死亡遊戱, Game of Death-1978 유작) 촬영장에서 딸 섀넌, 아들 브랜든과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기무라, 36살 때 17살 아래인 19살 이소룡과 운명의 만남
격투기 선수인 타키 기무라와 이소룡은 전투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시애틀에서 주목을 받자 만났다. 기무라Kimura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을 가두었던 감금 수용소인 아이다호 주 미니도카와 캘리포니아주 툴레 레이크에서 석방된 후에도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소룡은 그의 새로운 무술에서 타키 기무라를 포함한 첫 번째 학생들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젊은 타키 키무라는 일본계 미국인이 미국에서 2등 시민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수감된 후 소외감을 느꼈다. 공개적으로 그는 고개를 숙이고 백인들이 지나갈 때 보도에서 벗어났다.
반면에 이소룡은 대담했다. 그는 1959년에 타키 기무라를 만났을 때, 19세의 이소룡은 자신감 있고 두려움이 없었으며, 용감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다. 자기표현과 자기 계발에 대한 그의 생각은 바로 타키 기무라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당시 36세였던 타케이 기무라는 때때로 충동적인 이소룡에게 필요한 실용성이었습니다. 그는 무술 클럽 운영의 실질적인 측면에서 그를 도왔고, 화를 풀고 때로는 무술 시연에서 바보상자 역할을 했다.
▲브루스 리가 사망유희(死亡遊戱, Game of Death-1978 유작) 촬영 현장에서 아내 린다가 안고 있는 딸 섀넌의 볼에 뽀뽀를 하고 있다.
기무라 아들 앤디, “부친과 이소룡의 우정은 상호존경”
이소룡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앤디는 아버지의 투옥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여전히 느끼고 있지만, 아버지가 이소룡의 우정에서 찾은 치유의 치유책도 느끼고 있다.
앤디는 “(아버지 타케이 기무라)의 감옥에 수감된 것에 대한 그의 모든 분노를 내가 짊어진 것 같다”며 “나는 방에 들어갈 자신감이 있고 이유가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공연하는 사람들을 항상 존경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이게 나를 어떻게 보이게 할까? 이것이 내 사람들을 어떻게 보이게 할까?' 그렇게 자랐다”고 말했다.
앤디 기무라Andy Kimura는 현재 이소룡이 첫 번째 무술 학교를 시작한 시애틀 차이나타운 국제 지구에 있는 아버지의 식료품점 지하에 있는 소박한 개인 클럽에서 성장한 Jun Fan Gung Fu Institute를 운영하고 있다. 그곳에서 타케이 기무라(이소룡이 절권도를 가르치도록 인증한 소수의 사람 중 한 명)는 수십 년 동안 엄선된 학생들을 계속 가르쳤다.
▲브루스 리가 자신의 무릎 위에 딸 섀넌을 앉힌 채 아들 브랜든을 끌어안으며 웃고 있다.
매년 이소룡의 기일에 앤디는 이소룡과 아들 브랜든의 묘비를 청소한다. 그는 꽃을 꽂고, 향을 피우고, 몇 마디 말을 하고,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머뭇거린다.
앤디는 자신의 아버지와 이소룡의 독특한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평화와 목적 의식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앤디는 “(아버지가) 겪은 모든 일은 여러 면에서 이소룡의 삶보다 훨씬 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많은 엄청난 손실을 겪었고, 그로부터 돌아왔기 때문“이라며 “이소룡의 철학과 우정은 그가 돌아올 때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일종의 음과 양으로 보고 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없었다면 이소룡이 지금의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확실히, 나의 아버지는 이소룡이 없었다면 지금의 모습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앤디는 "그는 정말 모든 것을 차단하고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며 “단순히 공연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상대하고 시간을 들여 모든 개인을 실제로 보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될 수 있다. 아버지는 정말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지도하는데 시간을 내셨다”고 말했다.
이소룡의 아이디어와 무술의 숙달이 50년 이상 세계적인 상상력을 사로잡았지만, 그는 또한 그가 알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삶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소룡의 사망 50주기에 그의 딸 섀넌(Shannon), 그녀의 어머니 린다(Linda) 및 앤디(Andy)는 캐피톨 홀에 잠든 그의 무덤에 모여 묘비를 청소하고, 꽃을 놓고, 향을 피우고, 몇 마디 말을 하고 그들의 삶을 모두 바꾼 남자를 기렸다.◎
▲차이나타운 인터내셔널 디스트릭트 식료품점 지하에 있는 앤디와 그의 아버지 타키 기무라는 수십 년 동안 엄선된 학생들에게 브루스 리의 무술 형태인 절권도(Jeet Kune Do)를 가르쳤다. 앤디는 "우리는 그렇게 경기를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