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0-1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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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재경 박사

 

 

십자군 전쟁은 11~13세기 중세 서구의 기독교가 회교도를 정벌하고,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했던 성지인 예루살렘을 군사력으로 회복하려 했던 운동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현재의 역사적 정의에 대해 아담의 살림베네(Salimbene of Adam, A.D. 1221~1289)는 성경과 영적인 관점에서 달리 평가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장재경 박사(연세대학교 교회사 강사)는 '「연대기」에 나타난 아담의 살림베네의 십자군 인식연구'라는 제목으로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권평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 이하 한교사)이 지난 10월 5일 개최한 제 295회 월례발표회에서 발제를 담당했다.

 

장재경 박사는 아담의 살림베네는 1238년 프란시스코회 수도사로 활동했으며, 그가 생존했던 시기의 경험들과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한 「연대기」를 그의 말년에 작성했으며, 여기에 십자군의 활동과 당시 교회나 정부, 일반인들에게서 관련해 벌어진 사건들을 기록했으며, 그가 신앙적으로 영향받았었던 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of Fiore)의 신앙과 신학의 해석들도 설명했다.

 

살림베네가 작성한 연대기는 분명히 중세 십자군의 여러 형태에 대한 시사점을 많이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작성자인 살림베네가 어떻게 십자군을 이해했는지는 연구가 많지 않았다며, 이것을 연구한다면 과거 사회의 십자군과 관련한 정치와 경제, 신학, 사회에 대한 수 많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는 점을 장 박사는 강조했다.

 

살림베네의 십자군에 대한 기록은 성지를 향한 십자군 뿐 아니라 스페인에서 이뤄진 렝키스타운동, 프리드리히 2세와 그 지지자들의 정치적 성향, 소년 십자군, 목자들의 십자군 처럼 평신도 차원에서의 운동, 여러 종교적 운동 등 매우 다양한 십자군의 형태를 묘사해서 책에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연대기에 이집트로 향하는 십자군이 1219년 다미에타 도시를 점령한 사건이나 1239년 프랑스인들이팔레스타인의 성지에서 패배한 사건, 1244년 무슬림들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의 파괴와 가자 근처의 라 포비 전투에서 십자군의 궤멸, 프랑스 성왕 루이가 이끈 십자군이 1248년에는 승리했지만 1250년에는 패배와 이후의 결과를 다루었고, 1270년 우리의 두번 째 십자군 원정에서 전염병으로 병사들과 왕 자신의 사망 및 프랑스로 시신을 안전히 옮김을 묘사하는 등 공공연한 정보를 담았다고 밝혔다.

 

살림베네는 성지와 기독교 내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십자가 운동을 다루었는데 1212년의 소년 십자군, 1251년 프랑스의 목자들이 왕의 복수를 위해 바다 건너 사라센인들을 죽이겠다는 이야기,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 민중들이 프란시스코회와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에게 적대적으로 대한 이야기 등 비공식적인 이야기들까지 폭 넓게 다뤘다는 것이다.

 

살림베네는 십자군운동에 대한 정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여러 운동을 묘사할 시 구체적인 묘사보다는 상당수를 간략히 설명하거나 가끔은 잘못된 서술이나 일부의 사건은 배제와 치우침의 묘사도 하는 특징이 보였다고 장 박사는 평가했다.

연대기에서의 십자군에 대한 묘사를 평가할 때 살림베네는 십자군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살림베네에게 영향을 줬던 요아킴의 주장과 십자군에 대한 인식을 살펴야 알 수 있다고 밝혔다.

 

피오르의 요아킴이 살림베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줬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라고 장 박사는 평가했는데 요아킴은 살림베네를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묵시론적인 성경 주해와 예언들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살림베네에게는 역사 이해의 분야에서 영항을 줬다고 한다.

 

요아킴은 인류의 역사를 성부시대(아담~그리스도), 성자시대(구약 웃시야왕~요아킴), 성령시대(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트~역사의 완성) 등 셋으로 나눠 구분했고, 요한계시록의 용 일곱머리가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으로 보았고, 1187년 살라딘을 6번 째 용의 머리일 뿐 7째 용머리가 진정한 적그리스도라는 인식을 가졌다고 장 박사는 설명했다. 요아킴은 1220년 신성로마제국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가 7번 째 용머리 즉, 교회를 위협하는 적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성지를 향한 십자군은 미래 종말론적으로는 역사의 중심 사건이 아니라고 평가했고, 당대 교황은 십자군이라는 외부 사안에만 매달린 나머지 기독교 세계 내부의 일에는 제대로 대처를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었는데 결국 무력으로는 세계의 평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요아킴 사상의 추종자들이 십자군에 대해 부정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고 장 박사는 분석했다.

 

연대기에 십자군 운동이 부실하게 기록된 이유는 살림베네가 요아킴 주의자들의 사상에 매료되었던 것이고, 심층적으로는 그 역사관 하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은 역사의 결정적 분수령으로서 인식되기 어려웠던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살림베네는 프리드리히가 사망한 1250년이 아닌 1260년을 지나서야 요아킴의 사상과 거리를 두는데 1260년에 새로운 시대가 임할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무너지는 내적 갈등을 겪는 것으로 추론했다.

 

살림베네는 1271년 그레고리우스 10세가 교황이 된 후 동방정교회와의 연합이나 십자군을 통한 팔레스타인 성묘의 회복을 원했으나 실현되지 않았음을 언급하면서 누가복은 21장 24절(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에게 밟히리라)의 구절과 요한계시록 11장 2절(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 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의 구절을 인용하며, 십자군을 통한 예루살렘의 회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생각을 들어내기도 했다는 것이 장 박사의 주장이다.

 

장 박사는 요한계시록 11장 2절에 대한 「예레미아서 주해」를 인용해 동 구절의 42라는 숫자는 세대를 가르키며, 30년을 한 세대로 보고, 42를 곱하면 1260년이 새 시대가 시작되는 시기로 계산했고, 프리드리히(일곱번 째 용머리) 사망 후 10년이 지난 1260년을 맞았다는 설명을 했다. 살림베네는 일련의 사건으로서 십자가군병의 실패와 원인을 죄와 구원이라는 틀에서 고찰하면서 성지나 이슬람 세력을 향한 십자군운동에 대해 이전보다는 많은 관심을 갖는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밝혔다.

 

살림베네는 이후 요아킴 사상과는 거리를 두는 것 같았지만 완전한 단절은 아니었고 다양한 분야의 신학적 판단에서 요아킴의 방법을 차용했다고 설명했다.

 

장재경 박사는 살림베네의 연대기가 난해하고 새로운 이야기로 대중에게 알려질지도 모르겠지만 십자군 운동에 대한 기존의 수많은 연구와 자료들이 철저히 특정한 방향과 방법으로 진행되었지만 살림베네의 저작을 통한다면 당대 지도자위주의 역사관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민초들의 다양한 생각도 읽을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기에 교회사연구자들에게 다른 길도 공개하고, 함께 연구하자는 취지로 발제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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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시대의 교회·정치·사회·사람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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