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아이콘’ 가수 장미화의 ‘서풍이 부는 날’ 히트 업데이트할 기세
曲 배경이 된 50년 전 ‘억울한 사형 선고’ 한국인 故이철수 사건 담은 다큐영화 개봉
▲장미화가 10월30일 KBS 가요무대에서 '서풍이 부는 날'을 열창하고 있다.(사진 위 아래)
‘긍정의 아이콘’ 가수 장미화의 ‘서풍이 부는 날’ 히트 업데이트할 기세
曲 배경이 된 50년 전 ‘억울한 사형 선고’ 한국인 故이철수 사건 담은 다큐영화 개봉
‘억울한 사형 선고’ 한국인 돕기 위해 나섰던 일본인 3세 랑코 야마다 변호사 내한 인터뷰
어느날인가 서풍이 부는 날이면 / 누구든 나를 깨워주오//
무명바지 다려입고 흰모자 눌러쓰고/땅콩을 주머니에 가득 넣어가지고
어디론가 먼길을 떠나고 싶어도/내가 잠들어 있어 못가고 못보네//
그래도 서풍은 서풍은 불어오네 /내마음 깊은 곳에 서풍은 불어오네
아아~서풍아 불어라 불어라 장미화 노래 ‘서풍이 부는 날’ 가사
절망을 희망으로 노래하는 가수 장미화
장미화가 35년 전인 1988년 10월10일 발표한 노래 ‘서풍이 부는 날’이 오늘 날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지만, 최근 들어 다시 히트 업데이트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풍진(風塵) 세상에는 파안대소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지만, 차마 드러내지 못할 가슴 아픈 사연의 가시를 가슴 깊숙한 곳에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렇기 때문에 문학·음악·영화·그림 등 예술작품 전반에 걸쳐 이런저런 사연을 표현한다. 그런데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희망을 향한 푯대로 생각하고 인내한 끝에 인생에서 승리한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의 비극을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이고 자포하기 하는 사람도 많은 게 사실이다. 장미화는 전자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하겠다.
장미화의 ‘서풍이 부는 날’은 경쾌한 리듬의 곡이지만, 그 곡의 배경에는 아픈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을 알고 나면 고통의 어둠 속에서 내일의 밝은 빛이 자신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2년 9월 이철수(아래 줄 가운데)씨가 1973년의 샌프란시스코 살인 사건이 무죄라는 배심원 평결을 받고 변호인단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아래 줄 왼쪽이 그를 돕던 랑코 야마다 변호사. /커넥트픽쳐스
50년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故이철수 사건
1973년 6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한 중국인이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 곧바로 한국인 이민자 이철수(당시 21세)가 용의자로 체포됐다. 백인 목격자들이 “동양인 남성이 총 쏘는 걸 봤다”고 했다. 이철수의 총기와 살인에 쓰인 총기가 달랐다는 사실, 목격자들이 묘사한 살인범의 체구와 이철수의 체구가 크게 차이 났다는 사실 등은 경찰에 의해 은폐됐다. 미심쩍은 증언을 바탕으로 재판은 일사천리.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명 높은 교도소에 수감된 이철수는 수감자와 싸움이 붙어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다. 가중 처벌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를 한인 사회는 치욕으로 여기고 침묵했다.
묻히는 듯했던 이철수 사건을 한 기자가 파헤쳤다. 한국인 최초로 미 주류 언론사인 ‘새크라멘토 유니언’에서 일하던 이경원 기자였다. 차이나타운 취재 중 정황을 전해 들은 그는 6개월간 사건을 파고들었다. 1978년 1월 기사가 보도되자 아시안 커뮤니티가 들끓기 시작했다. “백인 경찰과 사법부의 불의(不義)에 맞서려면 소수 민족이 뭉쳐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일본계, 중국계, 필리핀계, 흑인계, 라틴계, 심지어 인디언과 에스키모계까지 들고일어났다. 후원금 모집과 가두시위에 나선 이들은 이철수구명운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사설 탐정을 고용해 사건 현장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상황을 목격한 또 다른 증인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재심 판결은 무죄. 그가 실제로 저지른 살인은 10년간의 복역으로 갈음하는 플리바게닝(유죄협상제)을 통해 1983년 3월 이철수는 석방됐다.
▲50년 전에 한국인 친구 이철수를 돕기 위해 나섰던 랑코 야마다 변호사는 “한국이나 일본이라는 국적을 넘어선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발전을 위한 힘”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 리’(감독 하줄리·이성민, 18일 개봉)는 지난해 선댄스영화제 US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됐고 토론토 릴 아시안 영화제에서 베스트장편영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이철수 구명 운동의 잔다르크’로 불렸던 랑코 야마다(72) 변호사는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 아시아가 뭉쳐야 발전한다는 사실은 50년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국적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인 3세로 캘리포니아주립 샌타크루즈대학에 다니던 1972년 여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언니 가게 일을 돕다 이철수를 알게 됐다. 야마다 변호사는 “가게를 닫고 나면 철수와 어울려 국수를 먹으며 친해졌다”며 “철수는 사교적이고 낙천적인 청년이었고, 거리 한가운데서 살인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했다. 야마다 변호사는 이듬해 철수 사건을 신문을 보고 알게 됐다. 경악한 그는 수감된 이철수에게 “너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믿는다”고 편지부터 썼다. 이철수를 위해 싸워줄 의욕 있는 변호사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 악몽, 그건 철수만의 문제나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결심했죠. 변호사가 되기 위해 UC헤이스팅스 로스쿨에 진학했고 나중에 변호인단에 합류했어요.” 이철수는 후에 “랑코의 우정은 내 어두워진 세상에 순수한 빛이었다”고 술회했다. 지난해 작고한 유재건 전 국회의원(15~17대)도 당시 미국 변호사로 구명에 참여했다.
야마다 변호사는 이철수 석방 운동을 하다 남편도 만났다. 기금 모금을 위해 코미디 이벤트를 하던 일본인 3세였다. “그때는 동양인이면 하나였죠. 철수가 풀려나던 날의 흥분은 지금도 잊지 못해요.”
이철수 석방은 미국 소수계가 연합해 일군 최초의 인권 승리였다. 타 민족에게 배타적이었던 한인 사회였으나 이 사건 이후 화합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다큐멘터리는 이철수를 영웅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그가 출소 후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약에 빠져든 일까지 그대로 담았다. 야마다 변호사는 “제 사비로 마약 재활 프로그램에도 넣어줬는데, 현실의 삶은 그에게 너무 큰 짐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철수는 갱단의 방화에 가담했다가 증인 보호프로그램에 들어가 은둔하던 중 지병이 악화돼 2014년 숨졌다.
야마다 변호사는 “철수가 숨지기 몇 년 전 안부 전화가 마지막이었다”며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동지애를 통해 함께 많은 걸 이뤄낼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싱어송 라이터 출신의 오준영이 가수 장미화에게 ‘서풍이 부는 날’을 준 배경
이국 땅 미국에서 억울하게 살인사건 누명을 쓴 고 이철수가 9년만인 1982년에 대심원에 의해 무죄평결을 받은 사건을 접한 오준영(68)은 1988년 어느 날 감옥생활을 했던 이철수가 어렸을 적에 떠난 한국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을 담은 가사에 곡을 붙인 ‘서풍이 부는 날’을 완성했다. 오준영은 1974년에 가수이자 영화배우 겸 방송MC였던 임성훈의 ‘시골길’이라는 곡을 써서 작사가와 작곡가로 데뷔한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는 1988년 김연숙의 ‘초연’을 작곡하였고 한때는 템페스트의 ‘동그란 얼굴’·‘가을비’를 작곡하기도 했다.
오준영은 1988년 9월 ‘서풍이 부는 날’을 장미화에게 넘겼다. 장미화는 그해 10월10일 자신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담긴 ‘내 인생 바람에 실어/ 서풍이 부는 날’ 등을 타이틀 곡이 담긴 ‘장미화’ LP를 발매했다.
오준영은 왜 ‘서풍이…’을 장미화에게 준 걸까?
굳이 나이를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장미화가 무대 위에서 폭넓은 성량으로 노래할 때면 관객들은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홍시를 닮은 그녀의 목소리에 저절로 탄식과 환성을 지르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1965년 KBS 장미화는 1973년 불러 ‘안녕하세요’가 톱 가수로 올라서는 동시에 이 노래는 아직도 ‘불멸의 국민가요’ 부동의 1순위에 말뚝을 박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출생의 장미화(본명 김순애)는 1965년 KBS 주최 ‘아마추어 톱 싱어 선발대회’ 대상으로 데뷔, 신중현에게 발탁 되어 미8군 무대에 서며 가수로 데뷔했다. 장미화는 장르를 가르지 않는 소화력을 가진 탁월한 가창력을 바탕으로 허스키한 목소리와 화려한 무대 매너로 많은 사랑을 받는 가수이다.
미8군 무대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그룹사운드 ‘레이디버드’에서 보컬로 활약했던 장미화는 일찍이 해외 각지를 순회하며 풍부한 무대 경험을 쌓았다. 체계화된 공연 시스템 그리고 자유로운 문화 전반을 접하고 돌아온 그에게 한국 사회는 어딘가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 얼어붙은 길거리에 화사함을 불어 넣은 게 바로 1973년 솔로 데뷔곡 ‘안녕하세요’였다.
2020년 남양주시 홍보대사·2012년 농촌교육농장 홍보대사·장미화의 아름다운손길 대표·산마김치 대표이사·그룹 '에드 포' 멤버인 ‘영원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 장미화’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가수이다. 그녀는 한마디로 이 풍진 세상에 등불을 밝히는 ‘긍정의 아이콘’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가슴 아픈 개인사가 있다. 언론 매체를 통해서 그 개인사는 공개되었기에 생략한다.
오준영은 이철수가 감옥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극적인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온갖 어려움을 견디고 극복하면서 희망이었던 무죄 평결을 받아낸 것을 지켜보면서, 어떠한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면 꿈은 실현된다는 의미에서 경쾌하고 밝은 리듬의 곡이 장미화에게 적격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고 본다.
배고픈 사람도 배부르게 만드는 장미화의 음성에 담긴 마력(魔力)
장미화는 그같은 오준영의 작사 작곡의 의미를 간파하고,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서풍이 부는 날’을 오페라 무대에 선 가수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노래했다. 그 결과 아직까지 장미화의 노래 ‘서풍이 부는 날’은 한국 국민은 물론 미국에서 생활하는 우리 동포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애창곡’으로 남아 있다.
장미화는 지난 10월30일 가요무대에서 ‘미국에 잠시 머물 때,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민자의 이야기로 엮은 노래를 알게 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요무대를 빠짐없이 시청하시는 교수님 부부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며 박상철 신청인이 신청한 ’서풍이 부는 날‘을 다시 한번 열창, 무대 밖 밤 거리에 물든 단풍을 더 짙게 물들이게 했다.
’배고픈 사람도 힘 있고, 오곡이 무르익은 것처럼 느껴지고, 배부른 느낌‘을 주는 풍부한 성량을 내뿜는 장미화. 대중음악가들은 그녀가 부르는 ’서풍이 부는 날‘이 ’고 이철수 사건‘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 리‘ 개방과 더불어 다시 힛트할 것이라는데 동의했다. 더 나아가 가수 이전에 인간미가 넘치는 장미화의 모든 노래는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고,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한 여름을 지나 다시 단풍이 온누리를 물들이며 반복되는 그날까지 팬들의 가슴 속에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