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나이가 벼슬
김태훈 조선일보 문화부문 논설위원
얼마 전 버스로 출근하는데 누군가 다가오더니 대뜸 “야, 비켜!”라고 반말을 했다. 나이 든 분이어서 그러잖아도 일어서려 했는데 어이가 없었다. 사회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나이만 많으면 덮어놓고 반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다툼이 벌어져도 결국 “너 몇 살이야?”로 가는 게 한국 사회다. ‘나이가 벼슬’이라는 말도 한국에만 있을 것 같다.
▶이런 풍토의 배경에 유교적 상하질서인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학 전문가들은 장유유서는 사회 관계가 아닌 가족 내부의 위계질서만 다룰 뿐이고 그마저도 나이가 아니라 항렬을 기준 삼는 규범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이로 위아래를 가리는 잣대로 잘못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존댓말과 반말을 엄격히 구분하는 한국어의 특성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나이부터 묻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 못지않게 존댓말이 발달했는데도 웬만해선 서로 나이를 묻지 않는다. 일본어 반말은 상하 관계 규정이 아니라 친밀함을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매사 나이를 앞세우는 풍토는 사회적 비효율도 낳는다. 나이 적은 후배가 먼저 승진하면 멀쩡히 일할 수 있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퇴사하는 것은 사회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나이 따지기와 복잡하고 지나친 존댓말이 조직 내에서 생산적이고 솔직한 논의를 방해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문화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출판사 민음사 편집부는 지난해 2월부터 동료 간에 반말로 대화한다. ‘예의 있는 반말’을 쓰자는 뜻에서 ‘평어체’라고 한다. 반말을 쓰되 ‘야’, ‘너’라고 하거나 이름 뒤에 ‘~야’로 부르지 않는다. 부장급인 박혜진 팀장은 “대리나 평사원도 나를 ‘혜진’이라 부르며 자유롭게 의견을 말한다”고 했다. 반말 쓰기의 사례를 소개하고 장점을 분석한 ‘말 놓을 수 있는 용기’라는 책도 최근 출간됐다. 모두 경직된 나이 서열 문화를 깨기 위한 노력이다.
▶나이 서열 문화가 가장 깨지지 않을 곳이 정치권이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출판기념회에서 자신의 돈봉투 연루 의혹에 반발하면서 한동훈 법무장관을 겨냥해 ‘어린 X’이라고 했다. 논리적 잘잘못을 가리기보다 나이로 상대를 비하한다. 그런데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일부러 예의를 갖추지 않음으로써 욕 보이려는 경우도 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아버지 뻘인 안철수 의원을 향해 ‘안철수씨’라고 부른 것도 한 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