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보수복음과 구국복음의 교세 분석
조점숙 목사, 한국교회사학연구원 297회 발제
▲ 조점숙 목사는 기청계와 서북계 기독교에 대한 발제를 담당했다.
▲ 한정열 교수(사진 왼쪽)는 이날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그리스도교를 지역적으로 구분 할 때 '서북계'와 '기청계'로 구분하기도 하며, 지리적으로 살피면 서북계는 대략 황해도와 평안도, 영남지방의 교회들이며, 기청계는 서울과 경기, 충청도, 함경도, 감리교의 교회들로 구분하고 있는데 교세를 비교하자면 1900년대 무렵 서북계가 절대 다수를 차지했는데, 그 이유에 대한 학술발표가 진행되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권평 교수, 명예원장 민경배 교수)는 제 297회 월례발표회를 지난 12월 7일 서현교회당에서 개최하고, 조점숙 박사를 초청해 "서북계와 기청계"라는 제목의 발제를 청취했다.
조점숙 목사(온석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 교회사)는 서북계(西北界)는 한국그리스도교의 선교초기부터 해방 이전까지 이끌어 갈 정도로 영향력이 컷다면서 서북계는 교인과 선교사의 숫자 등 모든 면에서 다수였다고 배경을 설명하고, 서북계는 지리적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영남지방이며, 기청계(畿淸系)는 서울과 경기, 충청도, 감리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신앙적 경향은 전자가 보수적이었고, 후자는 사회복음에 관심이 컷다는 차이점이 있었으며, 교세 또한 서북계가 월등히 컸다며 신앙적 성향이 달랐음을 조명했다.
서북계의 영향력이 얼마나 컷느냐는 동 시대에 감리교의 내부사안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서북계의 신앙적 경향은 보수주의신앙과 선교사 주도의 교권 기능이 있었고, 당시 감리교에 대한 영향력을 끼쳤을 정도라고 한다. 1935년 감리교 신생사에서 출간한 「아빙돈 單券註釋(단권주석)」에 대해 장로교의 교권을 점령했던 서북계가 이 책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 책의 대표 편집자였던 유형기 목사의 세계주일학교대회 대표권을 1936년 7월부터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을 정도였다고 조 목사는 설명했다.
서북계와 기청계의 교세차이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고 했다. 1925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14회 회록에 서북계 교회의 직원수는 6140명, 교인수는 10만 737명, 교회수는 2001개, 예산은 약 53만 9백 엔이었고, 기청계는 직원수 815명, 교인수 9천 414명, 교회수 337개, 예산은 약 4만 6천 엔으로서 차이가 몇 배나 발생했다고 밝혔다.
1938년 교세통계는 한국교인 50만명 중 35만명이 장로교인이며, 그 35만명 중 4/5가 평안남도에 있었다고 한다.
1910년까지 장로교회 및 종교학교 통계를 살피면 교회설립 분야에서 서울-경기는 67개소, 서북은 391개소, 기타지역은 225개소이며, 종교학교는 서울-경기가 67개소, 서북이 519개로 차이가 컸는데 이러한 차이는 1900년부터 벌어져온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한양에서 의료선교사역을 진행하던 언더우드는 1900년 미국 북장로교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낸 서신에서 서울에는 1명의 선교사만이 전도사역중이지만 서북지역인 평양에서는 5명의 선교사가 전도사역에 매진하고 있으며, 평양을 중심한 북부지방만이 놀랍게 부흥하므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 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 목사는 서북계가 기청계보다 획기적으로 교세가 늘어난 이유를 양자간의 신앙의 형태가 달랐고, 당시 정치와 사회적인 요인도 결부해 분석했다.
기청계의 1910년 교세통계상 신도수는 평안북도가 7천 901명, 평안남도가 10만 842명, 황해도가 4천 740명, 기청이 2천 975명, 경상도가 5천 726명, 전라도 및 제주도가 5천 509명이었는데 이를 분석하면 황해-평안이 23만 483명, 기청이 2천 975명으로 8배의 차이가 있었다고 밝혔다.
기청계의 교세가 부족한 이유에 대해 민경배 박사의 논문을 인용했는데 기청의 기독교인들은 사회계층 상 지배체제의 중심에 위치한 지식인과 관료들이었기 때문인데 당시 조선시대의 관료들 대부분은 서울 출신자이며, 직업의 특징상 국왕이 전적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체제에서 정책 입안과 실행, 국왕의 권위를 대행하는 왕권 사회에서 소수의 선택된 집단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울은 관료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통치 철학인 유교 전통의 본산지였는데 여기에서 외래종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어렵기 마련이었다고 설명했다.
기청계의 서울 양반들이 교회에 입교하게 되는 계기는 일제나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려는 개화(改化)를 위한 동기이며, 이를 달성할 수단은 기독교로의 입교로서 서양 문화와 문명에 이르는 '힘'을 추구한 것으로 조 목사는 분석했다.
서울 양반들의 기독교 입교의 대표자는 이원긍(종이품 가선대부 법무협판 역임), 이상재(종이품 가선대부 의정부참찬 역임), 김정식(경무관 역임), 이승인(부여군수 역임), 홍재기(개성군수 역임), 이승만(철학박사), 인국선(증경군수), 김린 등을 거론해 사회적 신분을 설명했다.
위 신하들이 입헌제를 실시해 왕권을 제한할 우려를 느낀 고종 황제는 수구세력과 결탁해 독립협회는 해산하고 4백여 명을 구금했던 시기에 감옥에 간 사람들로서 여기서 성경과 그리스도를 접하고 입교하기에 이른 것으로서 기청계는 서울의 관리와 양반층으로서 입교의 동기가 현실적인 힘의 실재 추구였다고 분석했다.
서북지역의 경우 홍경래의 난 이래 중앙정계의 진출이 좌될 된 지역으로서 이들에게는 유교적 가치보다는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진출할 곳은 사실 기독교계통 밖에는 없었던 현실을 설명했다.
조 목사는 민경배 박사의 논문 중 서북계의 신앙의 특징이 신앙적 형태가 대중운동적 성격이 있었고, 일반 대중이나 신자 개개인의 주도적 선교에 의해 이뤄졌다는 평가를 인용했다. 이것은 현지인을 향한 전도는 현지인들이 담당한다는 네비우스의 선교원칙과 일치했고, 때문에 압도적 수적 성장과 내적 발전을 이뤘다는 주장을 펼쳤다.
서북계는 성서에 기초한 인간의 존귀성과 정의, 윤리의 가치, 민주주의적 평등, 자유의 기본적 확립 등의 긴요함 등을 대변하는 근대적 가치를 신앙 안에서 깨닫고 스스로 신앙으로서 불타올랐다는 것이기에 사회정의의 구현과 일제의 침투에 대한 강한 저항운동의 모습으로 나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서북계의 보수적 신앙의 형태는 1930년대에 기독교민족주의자들과의 결합으로 그 목적이 신앙보다는 방법으로 전이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지만 모든 교회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며, 경향이 그러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