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0-1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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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배 박사가 발제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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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전원장 권평 박사가 사회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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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이하 한교사)은 민경배 박사(연세대 명예교수)를 초청해 '한일관계사 서론'의 강연을 맡겼고, 민 박사는 향후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아시아국가와 전 세계의 모든 역사와 정치, 문화 등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경배 박사는 지난 6월 6일 진행된 한교사 월례발표회에서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했던 1900년대 일본에서는 군벌세력과 문벌세력이 주도권을 다투던 시기 였다면서 이 때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 군대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더니 가능성이 보인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일본을 근대화시킨 세력은 군벌과 문벌이었으며, 전자는 야마가다 아리또모가 대표적 인물이었고, 후자는 이토 히로부미가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밝혔다. 민 박사는 이토는 조선을 다스릴 총독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인물로서 조선을 합병하는 것을 반대했던 인물이며, 최대한의 자치권을 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을 수 차례 가연한 바 있으며, 이날은 이토가 조선의 이현 왕세자를 모셔다가 좋은 왕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좋은 학교를 다니도록 주선한 인물이었지만 안중근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민 박사는 일본인 주류의 뿌리가 한국민족 출신자가 상당히 많았다는 설명을 했다. 일본의 50대 천황 '간부덴노(황무천황)'의 모친이 백제 공주였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뉴스위크 2002년 3월 18일자의 보도를 제시하고, 백제 공주의 피가 천황가에 있다는 것은 한국인으로 볼 수도 있다는 평가를 했다. 

 

임진왜란(1592년 발발)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 뿐 아니라 한중일 3국의 관계를 재 정립한 측면도 있다고 밝혔다.  전란 당시 일본은 한국인 약 10만명을 데려갔는데 이들은 유능하거나 인물이 출중한 여성 등 당대 제일의 엘리트들이었는데 만약 무능했다면 잡아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후손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일으킨 사람들이었다고 밝혔다. 

 

일본 구주 후꾸오까의 사쯔마와 조슈의 출신자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주동했는데 야마가다 아리또모와 총리를 거친 이토 히로부미와 사또 에이사쿠 및 아베신조와 기시 노브스께 등이 모두 사쯔마파라고 설명했다. 아베 신조의 경우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본인이 한국계임을 고백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국력이 증대되자 2차 대전을 일으켰는데 이 때 전후에 활약한 사람이 일본 외무상인 도고 시게나리가 있었고, 이 또한 사쯔마 출신자였다는 점을 들어 한국교회사와 한국 그리스도교를 연구함에 있어 한국적 상황도 중요하지만 일본이나 중국 등의 주변국에 얽힌 이야기들도 동등하게 다뤄야 입체적인 연구가 되고, 인류사회와 그리스도교를 위한 기여자가 되는 방식의 자세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제 치하 시절 성탄절을 맞으면 성탄절 전야에 교회마다 성극을 공연했는데 대부분은 아기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아닌 출애굽 이야기를 다뤘다고 한다. 당시 모든 교회가 모세의 홍해 건넘을 다룬 것은 표면적으로는 신앙의 이야기 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민족해방을 염원한 애국적인 사건들이었다고 분석했다. 

 

김장호 씨가 1918년 자유주의신학적으로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은 사실은 갈대밭을 건넌 것이라고 한 것을 두고 민 박사는 민족 반역적인 발언이라고 평가하고,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그를 즉각적으로 처단했다고 밝혔다. 

 

윌리암 커가 김장호의 배경이었다고 민 박사는 설명했는데 북장로교는 그를 즉각 잘라냈지만 이후 일본정부가 채용해 경성제국대에서 성경을 가르치도록 배려했다고 밝혔다. 커는 이후 한국 동란 시절 맥아더 밑에 들어가 한국군종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게 되는데 그의 인생을 볼 때 비판받을 일도 있지만 그리스도교를 위해 기여한 일들도 많기에 역사연구자는 역사를 접할 때 단편적이거나 표면적인 것만 보지 말고 좀 더 다양하고, 입체적인 내용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조선에서 한일간에 정미조약이 비준 될 때인 1907년은 왕은 그대로 두되 모든 행정은 일본인이 주도하는 이른바 나라가 망한 시기였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전국적 조직인 교단을 확립했는데 독노회 문서의 첫장은 "천하 만국에 복음을 전한다"라고 언급되어 있다며, 처참하게 나라가 망한 순간에도 한국교회는 세계만국기를 걸었고, 세계복음을 언급하는 현실을 초월하는 정신세계, 신앙세계를 가졌었다고 설명했다.

 

맥아더 장군이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 미드웨이호에서 항복조인식을 할 때 전 일본국민들에게 했던 연설은 "오늘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신학적이다"라고 밝혔고, 파레드 자카리는 8개의 박사학위 소지자였는데 "앞으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이다"라고 했고, 일본 최고의 직장으로 일컬어져 수재가 모이는 산께이신문의 신입사원들이 전세계를 유랑하고 써낸 보고서에 역시 "앞으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이라는 내용으로 논문집을 만들고, 시바 료따로(일본 최고의 문학가, 사상가)는 "세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유와 인권, 정의의 개념은 기독교에만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증거를 민경배 박사는 제시하고, 한교사 안에서 만나는 모든 회원들은 이 같은 학술적인 생각은 갖되, 우선은 서로간의 교통과 친교에 매진해 상호간에 협력과 도움을 주는 관계를 지속하자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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