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침례교는 항일운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
오지원 박사,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초청 발제
▲ 오지원 겸임교수는 한국침례교가 일제시절 항일운동과 신앙운동을 벌였다고 밝혔다.
▲ 김동석 박사는 논찬을 담당했다.
▲ 류금주 박사는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침례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1905년부터 항거했으며, 그 수위는 교단의 폐쇄, 산하 각종 학교의 폐쇄되는 정도로 강력했다고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명예원장 민경배)이 개최한 학술모임에서 제시되었다.
오지원 침신대학교 겸임교수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이 초청해 개최한 월례발표회에서 '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라는 제목으로 지난 7월 11일 발제했다.
류금주 원장은 동 발표회에서 사회를 담당했다.
▲ 오지원 겸임교수는 한국침례교는 일제의 식민통치 시절 항일 활동을 활발히 벌였지만 그간 연구가 없었던 관계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면서 사실 한국침례교는 당시 교단 폐쇄, 산하의 학교를 폐쇄하는 정도로 애국, 애족과 더불어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바 있다고 밝혔다.
오 교수는 2015년 개최한 기독교한국침례회 105차 정기총회에서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교단이 폐쇄된 1944년 5월 10일을 교단의 기념일로 재정했던 바 있으며, 사단법인 침례교역사신학회가 필자에게 관련 연구를 의뢰함으로서 연구가 실시되어 『신사참배 거부로 수난당한 침례교 대표 32인(누가출판사, 오지원 저)』이라는 서적을 집필했고, 동 책자의 내용과 연관된 내용을 이날 월례발표회에서 발제했다.
침례교는 교단적으로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정교분리적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일제에 저항하게 되었다고 경과를 설명했다.
침례교는 을사늑약(1905년 11월 17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서울지역 연합 위국 기도회(이토 히로부미의 서울에 도착한 1905년 11월 9일 이튿날부터)'를 서울 내 장로교와 침례교, 감리교를 주축으로 개최한 것이 최초 항일운동의 시작이라고 밝혔다. 동 기도회는 당시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19일자에 보도되었으며, 학이 깊은 물가에서 울면 소리가 하늘까지 들린다는 '성문우천(聲聞于天)'이라고 표현되었고, 이날 위국기도문도 자세히 보도 되었다고 설명했다. 기도문의 내용은 대한의 위기 극복의 비결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이라며 하나님께 바로 서는 지도자의 모습을 강조하고, 난국의 원인은 일본보다는 국민과 기독교인 전체 공동체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의 이 보도는 그 동안 당시 침례교의 지도자였던 펜윅 선교사(Rev. Malcom C. Fenwick)사 및 대한기독교회 사역자들이 당시에 비정치화와 비민족화의 신앙으로 철저해 대부흥운동을 배격하고 을사늑약과 국권침탈, 3.1운동 등 거국적 활동을 안 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오히려 항일운동과 애국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들어낸 역사적 증거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침례교인들도 국가적 위기를 외면하지 않았고, 침례교인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량 내에서 최선을 다 한 항일운동이었으며, 침례교 뿐 아니라 서울지역의 장로교와 감리교 등 타 교파와 연합함으로서 당시 교단간 갈등요인인 선교지분할정책의 문제를 극복한 좋은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펜윅 선교사는 1906년에 일제의 내정 간섭으로 점차 힘을 잃어가는 대한제국을 바라보며 조선에 대한 애국적 내용을 담은 '내 나라 대한(My country Tai Han)'이라는 노래를 발표하는 등 침례교 항일운동사상의 토대를 이미 가지고 있었고, 침례교인들은 초교파적 위국기도회에 참여해 침례교항일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는 평가를 오 교수는 했다.
'내 나라 대한'이라는 노래는 애국가적인 성격을 지녔어도 내용상 통상적인 민족주의 등이 아닌 철저한 기독교적인 교리와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는데 1절은 열성조가 낳고 돌아가신 한국의 유구한 역사, 2절에는 한국의 지리적 아름다움, 3절은 을사늑약 등 국가적 위기 극복을 위해 하나님과 예수님, 성경을 쫏음, 4절 회개와 죄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나라를 세우자는, 5절에서는 한국의 만세와 나라를 다시 세울 것 등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침례교는 1918년 일제에게 포교계 제출을 거부하고 교단과 교회를 폐쇄했는데 이는 일제가 1915년 8월 '포교규칙'과 '개정사립학교규칙'을 제정해 조선통치에 특별히 방해가 되는 한국기독교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침례교는 이에 대해 신앙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오 교수는 설명했다. 당시 한국침례교는 제 1대 감목인 펜윅 선교사가 2대 감목을 이종덕 목사로 지명했지만 교단 내 일부는 신명균 목사가 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 어긋나 교단이 분열 되는 등 주도권 다툼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제의 이와 같은 탄압에 대응하기에는 더욱 어려운 분위기였다. 특히 학당의 폐쇄는 학생들의 학습권이 훼손된다는 반대와 교회의 폐쇄를 불러올 포교계 제출은 그저 일제 정부의 단순한 법적 절차일 뿐이라는 반발 등으로 더욱 어려웠지만 침례교는 학당을 폐쇄했고, 일제로 부터 교회 폐쇄령(1918년)을 받게되었다고 한다.
한국침례교의 저항은 이종덕 당시 감목의 투옥을 불러들였으나 1918년 풀려난 이 감목은 원산을 떠나 간도의 종성동에서 신자들을 재 규합해 신앙을 돈독히 했으며, 일제의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뀐 1920년 침례교는 다시 교회 문을 열 수 있었다고 한다.
펜윅은 1926년 제 21차 대화회(총회)에서 학교교육 금지령을 내렸는데 아 갑작스러운 결정에 대해 일부에서는 근본주의신앙이기 때문에 세속교육에 심한 거부감이 있었다고 혹평하기도 했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이 벌어지는 스콥사건이 벌어지는 중이었으며, 일제는 신사참배를 중심으로 공교육을 점령해 한국에 천황주의적 역사관을 심음으로서 민족의식을 퇴색하게하고, 창조론 중심의 기독교사학 또한 악영향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에 의한 것이었다고 오 교수는 해석했으며, 따라서 학교교육금지로 교단 인재양성에 장애를 줬다는 식의 평가보다는 일제에 항거한 이 행위는 마땅했다고 재 평가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한국침례교는 신사참배를 배격한 이유는 당시 식민정부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조선인들을 동원하기 위한 작전이었기 때문이며, 김영관 당시 침례교 감목은 1935년 10월 5일자 달편지를 통해 전국 교회의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불복할 것을 당부했고, 1938년 총독부가 동아기독대에 참배할 것을 요구하자 또 다시 불응할 것을 당부, 1939년 긴급 임원회에서 김영관 감목이 교단 산하에 신사참배를 거부를 당부함은 일제와의 마찰을 불러들인다는 교단 내 일부의 반발에 갑론 을박이 벌어지자 감목직을 사임했으며, 1939년 제 5대 감목인 이종근 목사도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에 굴하지 않기로 결의해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벌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중 1940년 일제는 동아기독교회 원산총부에 교규 제출을 요구했고, 일제가 이를 검토하던 중 우태호 전도사(미남침례회 해외선교회 일본국 한국선교사)가 입국해있던 중 교단 임원들과 원만하지 못한 관계에 놓였으며, 동아기독교회 실태를 파악해 일본 헌병대에 불순한 단체로 고발, 논란이 된 부분은 '복음찬미'에 "대왕님 예수 씨 보혈"의 용어, "주의 재림"의 내용 등이 천황에 대한 모독과 국체명징(國體明徵)에 벗어난다는 트집이었다고 한다. 이로서 원산총부는 압수수색을 당해 신약젼서와 복음찬미, 교단 서류들을 몰수당하고, 이종근 감독(총회장)과 전치규, 김영관 목사 및 총 32인의 교단지도자들을 체포해 수 개월간 모진 고문과 옥고를 줬으며, 일제는 '재림신앙(말세론)'을 빌미로 9인을 예심에 회부했는데 유대민족의 재건이라는 민족주의적 측면을 가장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오 교수는 해석했다.
1944년 5월 10일 함흥재판소는 일련의 내용들을 이유로 동아기독교회 교단 해체령을 공포하는 등 한국침례교는 신앙과 민족, 국가를 위한 항일운동을 지속하며 어려움을 당했다고 밝혔다.
오 교수는 동 주제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면서 선행연구가 없어서 어려움이 많았으며, 교단이 폐쇄되는 바람에 교단자료가 소실되어서 오히려 일제 기록물을 상당수 참고할 수 밖에 없었던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에 대한 연구가 향후 더욱 많이 진행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 김동석 박사(믿힘연구원 원장, 한국교회사학연구원 부원장)는 주제 발제에 대한 논찬을 담당했다.
한국침례교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감명받았다며, 위국기도회를 침례교가 장로교와 감리교 등과 공동으로 진행했다는 것은 위기의 시대에 민족의 비극을 외면치 않고 참여한 애국운동이었다고 평가했다. 펜윅의 애국은 민족주의적 애국보다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애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국가와 민족의 위기 시절 항일운동을 전개함은 매우 위험한 일 이었다면서도 한국침례교가 몇몇의 시기마다 적극적으로 기독교신앙에 입각한 애국적 항일운동을 펼쳤으며, 암흑기를 거친 교단이 오늘날에도 한국교회에서 중요한 교단으로 활동함에 감사를 표했다. 논문에서는 소극적 저항으로 보이는데 '항일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과 침례교의 항일운동사의 선행연구가 없는 이유에 대해 질문했다.
오지원 교수는 항일운동의 활동은 기독교인들로서 기도교신앙에 충실하다는 것 자체가 일제의 의도에 반하는 것으로서 항일운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고, 교단폐쇄 시기에 일제가 대부분의 자료를 소각했기에 남은 자료가 많지 않았기에 총독부의 자료를 참고한 일이 많았으며, 본인의 학교에서 한국교회사 전공으로서 1호 박사에 해당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