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가 성숙해진 과정 다뤄
주재용 박사, 『초대 그리스도교 사상사』 출간
▲ 주재용 박사는 평생 동안 교회를 위한 학문활동을 했다.
주재용 박사(전 한신대학교 총장)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돌아가신 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과 이후 등장한 속사도 및 교부들이 차례로 등장해 종교개혁 전까지 약 5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이합 집산하던 모습과 사상, 교리, 교의 등이 변천해온 모습을 단 한권의 책에 정리해 최근 발행했다.
'교부 문헌으로 쓴 초대 그리스도교 사상사(도서출판 동연)'를 저술한 주재용 박사는 예수님의 사후 초기 그리스도교의 모습과 상황에서 시작해 콘스탄틴 황제로 인해 국교가 된 이래 이단 종교 등 많은 도전자에게 대항하며 교회 내 교리와 교의, 질서, 신앙과 삶의 방식을 세워온 속사도들과 교부들의 신학과 사상을 정리해 수록했으며, 특히 2세기의 클레멘트부터 4세기의 어거스틴까지의 각 교부들의 신학적인 주장과 당대 사회적 분위기 등을 중점적으로 비교했다.
주 박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적 삶이라면서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신앙생활의 질서를 위해 매우 기본적 '신앙의 규범'을 제정했고, 구원의 메시지를 갖고 이교 문화권에 진출하면서 이교 철학과 종교와 주우하는데 이 때 상대방의 교설과는 다른 것을 보여야했고,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근본적 사상을 구체적 언어로 표현하는데 이것이 '교의'라고 정의했다.
2세기 초부터 그리스도교회는 안으로는 많은 오해와 이설을 극복해야 했고, 밖으로는 이교와의 접촉으로 인해 개종해오는 초신자들을 지도할 지침을 마련해야했는데 이 때 지도한 사람들이 2세기의 교부들이었고, 그들로 인해 '진리의 표준', '신앙의 규범' 등의 만들어져 이후에 '신앙 형식', '신조'로 발전되는데 니케아신조나 사도신경 등이 그 상황의 산물이라고 밝혔다.
사도신경만 해도 첫 구절에 이원론적 두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거부하는 '방어적 교의'가 담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교의가 교회에 의해 '교회법'으로 받아들여져 교의가 법이 되는 상황이 왔으며, 교의를 받아들임은 교회법을 받아들인다는 결론인데 이러한 교의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자 중세 사회는 교회법을 시민법 혹은 국가법으로 받아들이면서 교회법이 전 사회를 지배하는 위치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즉, 교의를 파괴하는 자는 교회법을 어겨서 이단자를 넘어 범죄자가 되는 등식이어서 이러한 교의에 대한 계몽운동이 저항하고 투쟁하기도 했다고 한다.
교의는 교회 삶의 현실적 표현이 아닌 교회삶을 억압하는 교권의 도구가 되어버렸다고 주 박사는 분석하고, 그리스도교의 교의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교의와 교리를 구분하는 일은 간단하지도 않으며, 소모적인 행위라면서 시대에 따라 다양한 학자들이 교리와 교의를 동의어로 보기도 하고, 아니라고 보기도 했으며, 역할의 관점에서 해당 집단의 공식적 신념에 적용된다는 입장과 교회의 삶의 현실을 분명히 체계화해 교설에 적용해 신자의 규범이 된다는 등 다양한 사례를 설명했다. 또한 정당성에 대해서 교회의 합법적 권의로 인정된 것만이 교의가 된다거나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근본적 그리스도교 사상의 구체적 표현이 교회에 의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진 신앙진술이라는 표현, 또는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고 교회가 반포했거나 교황이 직권으로 결정했던지 교회에 위해 정의된 진리라는 주장들이 제시되지만 계몽주의자들에게 교의가 해체된 이래 교의사는 끝났다고 보는 등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이 책에 구체적으로 논증되어 있으며, 협의적으로 교부시대 것을 넘어서 종교개혁 이후의 교리의 발전과 교회 회의나 교황에 의해 반포되지 않은 신앙의 형식 등도 지속적으로 교의사로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영어권 학자들의 최신 주장들도 보인다.
중세기에는 교리사 연구가 불가능했다고 하는데 이는 교리 불변성의 주장 때문이었지만 16세기에 종교개혁은 교리사 길을 열린 셈이라고 한다. 루터는 교리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한 공의회나 교황이 포고했다고 해서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고 한다. 교리사의 저술은 계몽주의시대에 비로서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과거의 신조적 진술에 대해 그 기원과 발전, 세대에서 타당성이 검증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교의나 교리사에 대한 입장이 상이 하지만 주 박사는 교리는 절대적이며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규범적이며, 성서에 대한 교회의 시대적 공식적 진술이라고 설명하고, 교리사의 연속성은 인정해야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성령의 역사를 믿어야 하지만 교리 자체가 절대 무엇인가를 표시하는 반면 역사는 상대적이고 변화적, 해석적인 특징이 있음을 주지했다.
교리사의 발전은 새로운 시대와 상황에서 물려받은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면서 교리사의 과제는 교리의 형성동기를 확인, 서술, 전승된 교리 전통을 통해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고찰하는, 즉 폐기할 것이 아닌 재 해석 해야 할 필요성을 주 박사는 강조했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시대가 지나고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된다고 서술되어있는데 즉, 유대교나 이교도와의 갈등을 극복하고, 해소 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고, 그리스교도교의 선교활동의 결과로 이교도가 개종해 들어올 때 이들에게 신앙의 긍정적 요소를 강조할 필요성, 신흥종교로서서 열광과 환상이 잦아들며 조직체로서와 교회의 통일을 이루거나 생활을 안내할 규율 등이 필요했는데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의 은사를 지닌 사람들"을 통해 확이할 수 있음을 이 책은 설명했다.
1세기 말부터 일어난 이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이 때의 '사도 교부'는 신약성경 시대를 바로 계승한 속사도시대의 그리스도교의 저술가들이라고 정의하고, 2세기의 클레멘트부터 교부 중 가장 영향력이 컸다는 4세기의 어거스틴까지 다뤘고, 어거스틴은 별도로 장을 분리해서 자세히 다뤘다.
사도 교부들의 글들은 서신 형식일 뿐 아니라 원 사도들과 사상이 맥을 같이 하며, 사도 시대와 고 가톨릭 시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함을 설명함으로서 이 책이 다루려는 내용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로마의 클레멘트(A.D 30~101)를 첫 사도로 다뤘는데 88~97년 경 로마의 감독(베드로 이후 세 번째 로마의 감독)으로 재직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고린도교회에 '클레멘트 제 1서신'을 보냈는데 개인자격이 아닌 로마교회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문서였다고 밝혔다.
클레멘트는 분열을 가져오는 악덕에 대항해 구약성서가 보여주는 것은 복종과 친절, 겸손과 스토아철학 등 조화의 이론을 제시했고, 애녹의 순종이나 노아의 충성, 아브라함의 말씀에 복종을 언급하며 일치의 덕목을 권고하는 지극히 교회를 위한 공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설명을 했다.
터튤리안과 키프리안 등 2~3세기의 신학자들이 서방신학의 기초를 놓았으며, 이후에는 그리스도교가 콘스탄틴 황제 가 로마제국의 통치자가 된 324년 이후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며 교회의 중심이 동방으로 옮겨셔 초대교회의 신학적 논쟁은 주로 동방교회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주된 신학적 논쟁인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구원론 등을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디옥학파, 카파도기아 신학다들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동방지역에 속했다고 설명했다. 영지주의의 도전이나 마리시온의 개혁, 몬타니즘의 반동, 아폴리나리우스논쟁, 네스토리우스논쟁 등이 모두 동방교회에서 일어났고, 이를 해결하기위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공의회 등이 모두 이 지역과 연관 깊다는 것이다.
또한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교회의 신학적 결정권까지 행사했고, 황제의 결정에 따라 교회의 상황이 달라지는 상황이었던 반면 서방교회의 감독들인 비교적 독립적이어서 정치적인 영향이 적었지만 신학적 논쟁의 관점에서 지적 고립의 원인이기도 했다는 설명이다. 서방에서도 일부 갈등과 지배권의 다툼이 생기기도 하는 등 계속된 신학적 논쟁으로 교회는 혼란에 빠지고 보편적 교회의 평화를 위협했다고 한다.
교회의 궁극적 안정은 확고한 교리적 토대와 정치권력과의 적극적 관계, 국가교회적 새로운 질서 등이 필요하다는 그런 임무를 4세기~5세기의 서방교회신학자들인 암브로스와 제롬, 어거스틴 등이 지적 및 정치적으로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어거스틴(354년~430년)이 초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부라는 평가와 서방신학의 특유한 성격을 결정적으로 확립했고, 그의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로마교회와의 싸움 도구로 수용되었다는 의의를 설명했으며, 실제로 이 책의 결론부에서 따로 구분해 자세히 다루고, 의의를 설명했다.
어거스틴의 저작 중 고백록과 하나님의 도성,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서 주석에 관한 저술들, 마니교도들을 반대한 저술들, 도나투스주의자들을 반대한 저술들 등과 죄론, 은총론, 예정론 등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있다.
주재용 박사는 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 전신)을 거쳐 캐나다 맥길대학교 교회사 전공으로 Ph.D.학위를 수여받고, 한신대학교에서 37년간 교수직을 감당하고, 한신대학교 제 12대 학장, 초대 총장으로 재직했다고 한다.
이 책은 1399페이지에 달하는 규모이며, 초기교회의 교부들의 신학에 대해 저자가 평생의 노력이 담겼다고 알려졌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