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신민회의 이상과 기독교성 연구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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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의 이상과 기독교성 연구 논의

허정윤 교수, 신민회의 독립운동 다뤄
기사입력 2019.09.1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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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정윤 교수(케리그마신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신민회의 항일운동과 기독교와 연관성, 분열 등에 대해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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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박종현 박사)은 허정윤 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원 연구교수)를 초청해 '신민회의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일고'라는 주제로 제 252회 월례세미나를 은진교회당에서 개최했다.
허정윤 교수는 안창호 선생의 제안으로 창립된 신민회는 일제시대에 상당한 위치를 차지했던 독립운동단체였고, 비밀조직이었기에 일본정부에게 오랬동안 알려져있지 않아오다가 안중근 열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의 폭살로 인해 감시가 심해지면서 정체가 들어나 해외로 망명하던 중 발각되었다고 설명했다. 신민회 조직은 105인 사건으로 인해 조직이 대거 구속되었고, 망명 후 독립운동의 방법론과 좌우진영의 구분 문제들에서 양분되는 등 인적분열로 인해 조직이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다가 일본의 패망이 이른 후 남북한의 분열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평가했다.
신민회의 창립은 새로운 정신을 깨우치기 위한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해 일제로부터 벗어나자는 자강적인 측면이 있었으나 비밀결사체임에도 일제정부에 발각되어 국외로 망명하면서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전략으로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105인 사건에 연류되어 신민회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신민회의 규모는 약 8백명의 대규모조직이었는데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전략으로 채택하고, 국외에 신영토를 마련해 신한민촌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해 기회를 기다리려는 기조로 삼았다.
1910년 무렵 105인 건으로 신민회의 국내조직은 마비되었는데 마침 당시 조선의 그리스도교는 부흥운동으로서 1백 만명 구령운동을 벌이는 중이었는데 일제의 눈에는 십자군병을 양성하는 것으로 인식했을 것으로 평가했다.
망명지의 현실에서 독립전쟁론은 신민회 발기인들에게는 각가 다른 의미였고, 결과적으로분열로 나타다면서 항일 독립운동과 해방 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1단계 분열은 1차 망명자그룹의 청도회의에서 일어났는데 기초정책인 독립전쟁론을 추진함에 있어 안창호와 이갑 등의 신한민촌을 건설해 독립군의 기틀을 다지자는 점진적 방식에 반해 유동열 등의 독립전쟁을 벌이자는 급진파의 안이 대립한 결과 급진적으로 진행하던 중 체포되어 좌절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2단계 분열은 서간도 유하현에서 이동녕과 이회형 형제들이 망명했을 때 흉년과 괴질이 덮쳐서 이회영 형제들이 합니하에 새 신한민촌을 개척하자 이동영은 블라디보스톡으로 넘어가 이상설과 합류해 대종교인으로 개종하는 방식의 분열을 설명했다. 이 때 국내에서 병상목회를 하던 전덕기 목사가 별세했다고 밝혔다.
3단계는 이동휘가 하바로브스크 군옥에서 김악렉산드라의 후원으로 풀려나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당위원장이 됨으로서 신민회와 기독교를 져버리는 분열이었다고 설명했다.
4단계는 신민회의 총감독이었던 양기탁이 무관학교생들을 블라디보스토크의 유동열에게 훈련차 보냈다가 러시아내전에 휘말려 희생된 것이 원인으로서 양기탁은 본래 신민회의 독립전쟁론보다는 중국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었고 이를 추진하던 중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모친상으로 인해 방면되었는데 장로교인으로 분류되었던 그가 종교가 국가를 위해 존재해야한다는 주장을 신문에 여러번 게재하고, 이후에는 다시 망명해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주력하는 등 신민회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분열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허정윤 교수는 신민회의 발기인들이 초기 항일독립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며 많은 희생을 치루었지만 분열로 인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고,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설립하려는 지향은 있었지만 신민회의 급진파와 점진파의 독립운동 방법론이 임시정부를 분열케 함으로서 임시정부의 정치를 공허하고 유명무실한 존재와 권위를 생산하던 중 일제가 세계 2차 대전에서 패한 뒤 한반도에서 퇴각하고, 승전국인 미-소권력에 의해 분열된 2개의 국가형태로 성립된 것으로 평가했다.
허 교수는 신민회는 기독교적 단체였다고 평가하고, 이들이 독립운동의 주도적 단체로서 당시 의병활동에 견줄정도의 영향력이었으나 신민회의 자유문명국이라는 기독교적 가치와 이상이 내재되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 사학자들이 후속연구를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그럼으로서 신민회의 목적에 내재한 기독교적 이상과 가치가 현재와 미래의 한반도 역사에 실현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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