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아름다움, 예술작품으로 승화…‘다섯 번째 계절展’ 소묘
‘감성토끼 캘라그라피 연구소’ 주최·주관…인사동 갤러리 라메르
한글의 아름다움, 예술작품으로 승화…‘다섯 번째 계절展’ 소묘
‘감성토끼 캘라그라피 연구소’ 주최·주관…인사동 갤러리 라메르
인사동, 서울(김정태 기자)-한글의 아름다움을 캘리그라피 작품으로 승화시켜 명품 브랜드 한글을 탄생시킨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다섯 번째 계절展’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리고 있다. 감성토끼 캘리그라피(원장 정보람)가 주최·주관하고, (사)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후원하는 전시회는 9월3일까지 이어진다.
예술 藝術: 1.기예와 학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공간 예술, 시간 예술, 종합 예술 따위로 나눌 수 있다.-표준국어대사전
무덥던 날, 미술전 취재를 마친 후 갤러리를 나서려다가 무심코 1층 제1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다섯 번째 계절전’(이하 계절전으로 표기)으로 발길을 옮긴 것은 한글 서체로 빚은 예술작품을 접하는 ‘행운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시장 입구 오른쪽 벽에 걸린 50호가 넘는 캔버스에 짙고 엷은 블루색 바탕에 능수버들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듯한 작품이 시선을 고정시켰는데, 버드나뭇가지인 줄 알았던 블루색의 그 나뭇잎은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었던 것. 작고 큰 글씨가 한 점 바람결에 따라 흐르는 듯 굽이치는 모습이 마치 호수에 투영된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김춘수 시 ‘꽃’ 전문
캘리그라피로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화병으로 만들고, 형형색색의 장미꽃이 그 화병에 꽂힌 작품을 비롯해서 한반도 지도와 독도에서 제주도까지 한글로 채운 작품은 독특하고 다양했다.
2004년 국립국어원은 '글이 가지고 있는 뜻에 맞게 아름답게 쓰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kallos(아름다움)와 graphy(쓰기)의 합성어 캘리그라피(Calligraphy)를 신어(新語)로 선정하였다. 이 캘리그라피를 통해 한글이라는 명품을 예술작품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는 ‘계절展’에는 강신아 작가에서 허인자 작가에 이르기까지 20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단체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계절전을 통해 관객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얼까? 행사를 주최·주관한 ‘감성토끼 캘리그라피 연구소’ 원장 정보람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모두 시작했던 계절도 다르고, 글씨를 시작한 이유도 모두 달랐지만, 뭇을 들고 글씨를 쓰며, 같은 공간 혹은 다른 공간에서 계절의 변화와 온도를 함께 느끼며, 글씨로 체워진 우리만의 ‘다섯 번째 계절’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중략) 전시를 보는 모든 분들 마음 속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붓을 들고 정신을 집중시켜 한 땀 한 땀 쓴 글씨가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기까지에는 작가 자신의 피말리는 수고가 녹아 내린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신을 비롯한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행복’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필소리 유정은 작가는 주말을 맞아 남편(배영희)과 두 아들 성찬(의정부 상우고 1학년)·성경(회룡초등학교 4학년)과 함께 자신의 작품인 알렉사드로 푸시킨의 묵화 바탕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싯구를 넣은 소품과 옅은 브라운 톤을 채운 캔버스 중앙에 십자가를 배치하고 ‘주기도문’ 등 작품 두 점이 전시된 전시장을 찾았다.
유 작가는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캘리그라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푸시킨의 시처럼,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도 설움의 날을 참고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다”며 “잘할 수 있을 것 같던 자신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유롭게 남아 있던 일정은 어느 순간 바짝 뒤를 따라왔다. 붓을 내려놓은 지금 작품의 결과를 떠나 준비에 쏟은 시간과 버려진 화선지, 먹 그리고 나의 노력은 머지않아 기쁨으로 마주하기를 바란다”는 소박한 바람을 피력했다.
특히 유 작가는 작품 ‘주기도문’에 대해서 “좋은 성경 구절도 많지만, 기본에 집중하자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 작품 구상의 방향을 잡았다”며 “흐름체의 자유로운 흐름과 변형으로 주기도문을 읽어나가기엔 힘들 수 있지만, 눈이 아닌 마음으로 마주하며 작품 안에 담긴 의미가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차분하고 평화로움마저 느끼게 하는 서체로 ‘반야심경(般若心經. 90x100cm 잿물염색순지, 펄먹물)을 출품한 은월 고은준 작가는 “처음 시작할 때 30년 뒤에 전시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하게 될 줄 몰랐다”며 “반야심경을 쓰면서 복잡한 머리와 마음을 조금이나마 비워내고 싶었다. 작업하는 동안 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참 좋았다”고 했다.
“흐르는 맑은 물결 속에 잠겨 / 보일 듯 말 듯 일렁이는 / 얼룩무늬 돌멩이 하나…”로 시작하는 나태주 시인의 시제 ’돌멩이‘글자에 강한 인펙트를 가미해서 마치 글자를 통해 돌멩이를 느낄 수 있는 작품(70X60cm. 화선지에 먹, 동양화 물감 외 혼합재료)을 전시한 낮별 심국보 작가는 “나는 언제나 바란다/ 글씨를 쓰는 즐거움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일상에 지친 분들에게 마음을 다독여 줄 수 있는 소통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지윤 작가는 조선 전기에 정극인(丁克仁)이 문집 불우헌집(不憂軒集)에 남긴 상춘곡((賞春曲) 제목을 매끄럽고 부드러운 서체로 써 내려간 후 내용은 각(角)을 돋보이는 서체로 작품화, 속세를 떠나 자연에 몰입하여 봄을 완상하고 인생을 즐기는 지극히 낙천적인 노래인 이 작품을 형상화했다.
이 작가는 “글을 읽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곁에 두고 즐기고자 하는 정극인의 삶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산을 오르며 이웃과 함께 느린 걸음으로 두리번 거리는 화자의 모습이 민체(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던 글씨체)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뜰은 걸음과 거칠게 뻗친 나뭇가지와 같은 느낌으로 표현해 보았고, 정형화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스며들었으면 한다. 욕심으로 점철된 삶보다는 흐르는대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행복에 더 가까워 지리라 생각한다”고 했다.
이처럼 전시 작품에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문구도 있지만, 주기도문에서 반야심경과 훈민정음 해례본, 상춘곡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해외의 근현대 시와 수필 속의 글 등 글씨체 만큼이나 다양한 점이 눈길을 끈다.
한글을 예술 작품으로 업그레이드시키면서 궁극적으로 한글의 글로벌화에 앞장서고 있는 모든 회원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