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태극기' 한국교회의 미래
김은섭 박사, 한국교회사학연구원 한경직 목사에 대한 강의
김은섭 박사(대덕한빛교회 담임목사)는 故 한경직 목사(전 영락교회 담임목사)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수 십년 간 진행해 온 전문가로서 '한경직과 나라사랑'이라는 제목의 발제를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의 초청으로 지난 10월 10일 서현교회당에서 개최된 제 307회차 월례세미나의 주 발제를 담당했다.
▲ 김은섭 박사(대덕한빛교회 담임목사, 위의 사진)는 한경직 목사에 대해 한국교회가 인정한 목회자이며,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한 애국자이고, 세계가 인정한 한국의 종교인, 한국 교단들로 부터 인정 받는 목회자로서 한국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커다란 선물이었다고 강조했다.
한경직 목사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상징을 제시한다면 '십자가'와 '태극기'라면서 전자는 예수님 사랑, 후자는 나라사랑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한경직 목사는 1902년 12월 29일 평양의 동북쪽인 평안남도 공덕군 공덕면 간리에서 한도풍 씨의 맏 아들로 태어났고, 그가 7살이던 시절 어머니의 사망과 조선의 망국으로 마을 어른들이 통곡하던 사건이 가장 심리적으로 많은 타격을 줬던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한경직의 고향인 간리의 자작마을에는 당시 약 20~3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동네였지만 마펫 선교사와 한석진의 전도를 받아 1895년 경 자작교회가 세워지고, 동 교회가 운영하는 진광소학교가 설립되어 소년 한경직은 교회의 우용진 전도사와 학교의 홍기주 선생에게서 신앙과 애국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우 전도사와 홍 선생의 권유로 민족적 학교로 알려진 정주 오산학교에 진학했으며, 나라를 도로 찾는 일은 청년이 할 일이라는 애국사상과 민족의 부흥을 위해 현대의 학문 특히 과학을 배웠고, 애국심과 과학적 지식이 있더라도 인간 됨됨이가 중요한데 이를 발전시킬 방안으로 예수를 믿어야 함을 배웠는데 이 지식들은 오늘날 한경직 목사가 모태신앙인이 아니었음에도 교육을 통해 그리스도교인 다운 신앙과 한국인 다운 애국심을 갖추게 된 원인이었다고 김 박사는 분석했다.
또한 졸업반 시절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이승훈 선생을 만나 일제에 의해 당한 고문의 상처를 봤고, 이승훈 선생은 일본인들이 조선 땅을 점령해 주인 행새 하고, 많은 조선인이 아첨하고 있지만 본인은 죽을 때까지 한국인으로 살겠다는 각오를 접하고, 이 경험은 한 목사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산학교에서 배운 대로 민족봉사를 위해 숭실대 이과에 입학했고, 낮에는 학업을 저녁에는 방위량 목사 집에서 비서직을 감당하면서도 주일에는 창동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숭실대학 YMCA회장으로, 웅변대회에 참가하고, 사경회 인도 및 전도대를 조직해 안동과 봉천 및 무순 등에서 순회전도를 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했다고 한다. 봉천서탑교회에서 전도강연 중 삼천리 금수강산 같은 말을 사용했다고 일본 형사에게 중지명령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숭실대학을 졸업한 한경직은 소래해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정신적 분야에서 일하라는 소명을 받아 기존의 자연과학분야에서 신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엠포리아대학을 거쳐 프린스턴신학교에서 3년간 신학수업을 받으며 학생회장을 감당하고 설교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교회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자 했지만 지병으로 인해 알버커키의 장로교 요양원에서 2년간 임원 후 7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으로 귀국했지만 이 땅은 마치 일본인이 지은 거대한 감옥 같았고, 일본 경찰의 감시와 방해에 시달렸다고 한다.
숭인상업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매일 기도회를 갖는 등 복직하다가 일제의 형사들이 사상이 불온하다는 평가를 해 교원인가가 취소되고, 미국 유학을 문제시해 숭실대학 교수 취임도 반대를 받자 본래의 계획대로 교회로 돌아가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한경직 목사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천국 건설과 우리나라 건설, 평화로운 세계건설의 사명을 줬다고 믿었으며 세계의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국에서 평화가 온다는 사고를 했다고 설명했다.
한 목사의 나라사랑의 원리는 '안꼴겉꼴'이라면서 이는 '겉꼴안꼴'이라는 속담을 차용한 것으로 '속에 있는 것이 바깥에 나온다'는 의미인데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마음이 고와야 하고 그러면 얼굴에 아름다움이 들어나는데 아름다워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죄를 회개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화평, 즐거움이 충만케 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한 목사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 사회 등 어떤 분야라도 이를 좀 먹게 하는 것은 인간의 죄로 보았고, 죄를 소멸해야 우리민족을 바로 구원하고 우릐 건국도 바로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듯이 '안꼴'이 바뀌면 '겉꼴'도 변하는 도식인데 그 핵심 대처 방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입장으로 밝혔다.
사상의 실천을 위해서는 죄와 무지, 가난이 인간의 삶을 해롭게하고 민족을 바로 서지 못하게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경직 목사는 위의 문제 해결을 위해 지적 교육과 가난 구제를 위한 다양한 방면의 도움을 주는 봉사를 중요한 사업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한 목사의 첫 목회지는 신의주제2교회였는데 1933년 전도사로 시작해 1934년 만주의 안동제21교회당에서 열린 의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신의주제2교회에는 영적인 갈금함을 느낀 많은 청년들이 몰려들었고, 한 목사는 이들에게 온건한 신학적 기초, 건강한 사상을 가르치는 한편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구체적 애국의 길을 제시하고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청년계몽에 앞장 섰다고 한다.
이런 교육을 받은 신의주의 청년들은 유물론을 내세워 폭력으로 억압하는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이후 1945년 11월 반소(反蘇)와 반공(反共)을 외친 신의주학생의거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한경직 목사의 둘 째 목회지는 영락교회(현 위임목사 김운성)였고, 전도와 교육, 봉사의 3대 사업을 제시하고 4대 지도방침으로 복음주의신앙과 청교도적인 생활, 에큐메니칼 정신, 올바른 사회봉사와 사회참여 등을 실천해 영적으로는 천국건설을 세속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국가건설을 목표로 했다고 김은섭 박사는 설명했다.
사회민주당에서의 활동은 1945년 일제의 항복으로 일본인 평북도지사가 접촉해 일본이 물러나는 전환기의 지역 치안을 책임지고 유지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으로 신의주자치위원회를 조직해 경찰권을 인수받아 치안과 질서유지를 한 바 당시 단 한건의 사건 사고가 없었지만 이후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공산당을 조직해 동 자치위원회를 개조해 한경직 목사를 포함해 주요인사들을 축출한 후 공산당원으로 보충하는 일이 발행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한경직 목사는 여기서 함께 활동하던 인사들을 포함한 '사회민주당'을 조직하자 공산당이 이들을 체포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급히 서울로 탈출해 다시 돌아가지 못한 채 영락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대한기독교구국회의 활동은 6.25 전쟁 중에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세워서 반공 및 계몽활동을 펼쳤고, 미국 유학으로 영어가 자유로운 한 목사가 외국인민간원조기관의 한국측 창구역할을 감당해 수많은 구호활동을 펼침과 동시에 교회가 구호품 배분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월드비전과의 인연은 밥 피어스가 1950년 내한 했을 때 9주간 함께 하면서 친해진 후 세상에는 비전이 필요하다 미국인인 당신이 하라고 강권해 미국으로 귀국 후 1950년 9월 22일에 월드비전을 등록해 한국에서는 선명회(한국 월드비전 전 명칭)라는 명칭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밥 피어스의 딸 메릴리 피어스 던커는 자신의 부친은 한 목사와 동료이자 학생이었고, 한 목사는 늘 조언을 해줬고, 부친은 그를 영적 멘토로 봤다고 해 월드비전의 사역들은 한 목사의 사상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했다고 김 박사는 설명했다.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1951년 1월 9일 피란의 수도 부산 중앙교회에서 결성했는데 한 목사는 회장으로 피선되어 미국 트루먼 대통령, 유엔군 맥아더 사령관 등에게 한국인 구호를 위한 호소문을 발송하는 등의 노력으로 이후 막대한 원조구호기금과 물자를 공급받기도 했다고 한다.
1961년 군사혁명 후 미국정부가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한국사회 지도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자 했을 때 한국정부는 한경직과 김활란, 최두선 등을 사절단으로 보내 상황을 전달케 했는데 한 목사는 이에 대해 한국의 민주정권만 유지된다면 군사정부는 언제든지 교체된다는 생각으로 임했으며, 나라를 사랑하는 구국일념으로 유엔 및 미국 정부, 정치계, 교계에서 다양한 외교활동을 벌였다고 분석했다.
영락교회의 초기 성격은 북한 공산당의 학정과 신앙박해를 피해 월남한 북한 출신 기독교인들의 보금자리였다면서 동 교회 교우들은 기독교와 유물론 공산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는 사고가 있었고, 반공운동에 적극적이었다면서 1950년을 구국전도의 해로 정하고, 거교회적 기독교 구국운동으로서 신도대회 및 기도회, 지리산에서의 특별전도집회 등을 개최했다고 한다.
전국복음화운동을 1965년에 주도했으며, 군복음화운동이나 한국100주년기념대회 등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이는 민족을 복음화시킨다는 것은 기독교정신을 기초로 민족정신이 세워져야 나라가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그 기저에 자리잡고있다고 설명했다.
유신이 1972년 선포되고, 대통령긴급조치가 1974년 선포되자 한 목사는 조향록, 강원용, 지동식, 윤창덕 제 목사들과 이천환 주교, 전용섭 사령관, 이해영, 김관석 목사 등과 서면으로 긴급조치를 해제할 것과 교역자와 학생들의 사면을 요청했고, 긴급조치들은 1974년 8월 23일 해제되었는데 이런 요구가 영향을 줬을 것으로 분석했다.
전두환 장군을 위한 조찬기도회(1981년)에 한경직 목사가 참석한 것에 대해 대외홍보에 이용되었다는 인식이 퍼지고 이에 대한 비판이 일자 한 목사는 "우리는 김일성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해달라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죠" (이하 중략) "야합과 동조하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의분이 있는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권력과 종교는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정치지도자들이 정치를 잘 할 수 있게 기도해주고 격려해주면 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권력이나 정치에 빠지면 백해무일할 뿐입니다"라며, 나라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김 박사는 밝혔다.
김은섭 박사는 故 한경직 목사는 대한민국의 숨겨진 애국자라고 평가하고, 한국이 광복을 맞이한 즈음 좌익과 우익으로 심각한 갈등 중이었는데 북한의 경우 소련 군정의 무력으로 손쉽게 좌익정권이 들어섰지만 남한은 미군정하에 그렇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모두가 가난과 기아에 빠져있는 상태에서 부자의 재물을 뺏어서 나눠먹자는 좌익의 사상이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어보였겠지만 공산주의를 실제로 체험하고 월남한 이북 출신 청년들에게는 허구적 이야기에 불과했으므로 그들은 우익의 첨병이 되어 남한에 우익정부를 수립함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그 청년들의 주축이 영락교회에 있었으며 이들에게 사상적 기반과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제공한 것은 한경직 목사였다고 김 박사는 평가했다.
특히나 당시는 건국이라는 개념이 시대적 사명이었고, 여기에 한 목사는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서 우리사회의 기틀을 형성했음을 암시했다.
한 목사는 교회의 나라사랑에 대한 일정한 기준을 제시했다면서 과거 군사정부가 들어선 상황에서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아무리 정부가 나쁘다고 해도 무정부보다는 낫다는 것을 오래 전에 깨달은 때문으로서 교회는 나랏일에 참견하지 않고, 전도와 교육, 봉사를 통해 성도를 훈련시켜 나라를 사랑하는 인재로 양성해 성도가 자신의 자리에서 나라사랑을 실천케 하려는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김은섭 박사는 한경직 목사는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대한민국기를 열정적으로 살아온 선각자라면서 민족을 향한 마음이 신앙으로 정화되어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교회의 과거가 아닌 미래라고 강조했다.
▲ 류금주 박사(청교도신학원 교수, 위의 사진)는 논찬을 통해 김은섭 박사는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기념사업회 연구목사로서 8년간 활동하며 한국교회의 대표적 목회자인 한경직 목사에 관한 연구와 출판, 홍보, 교육 등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낸 학자로 소개하고, 오늘의 발제는 다년간의 연구활동을 집약 농축한 결과물로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김 박사의 논문 서술방식은 논지 전개에 적절한 항목을 설정했고, 핵심사안을 간결히 제시함으로서 한경직 목사의 나라사랑의 형성과정 및 의미를 명확하게 체계화 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김 박사의 논문 서술 방식은 교회사학 연구 방식에 매우 적합하다며, 나라사랑의 형성과정과 실천과정을 역사적 전개에서 한 목사의 생애의 흐름과 획기에 따라 제시했음을 설명했다.
목표와 원리와 실천의 구조로 짜여졌고, 목회사역 및 목회 외적 사역의 기술은 한국교회와 대한민국, 세계를 잇는 구조적 짜임새가 돋보인다고 밝혔다.
김 박사의 에수사랑과 나라사랑의 구조는 겉꼴과 안꼴의 구조로 대입함으로서 그의 스승인 민경배 박사(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의 내연(內燃)과 외연(外延)의 원를 정확히 추종하고 있어서 역사적 사실이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다는 설명을 가능케 했다고 분석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