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이라도 밥먹으러 오라고 할 것 같은데...." 故김수미 빈소 조문 행렬
"촬영장에 김치 10가지 싸와"… 동료들 기억 속의 '수미 누나'
"당장이라도 밥먹으러 오라고 할 것 같은데...." 故김수미 빈소 조문 행렬
"촬영장에 김치 10가지 싸와"… 동료들 기억 속의 '수미 누나'
25일 오후 2시 한양대병원 특6호실에 배우 김수미씨의 빈소가 차려졌다. 분향소에는 빨간 벙어리 장갑을 끼고 흰 머플러를 두른 채 활짝 웃고 있는 김씨의 영정사진이 놓였다. 김씨의 아들 정명호(49)씨는 “황망한 상황에서 영정사진을 급히 골라야 했는데, 웃는 사진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연예인 박은수, 조인성, 김형준, 신현준이 빈소를 조문했다. 연예인 임하룡, 탁재훈, 임원희, 이상민, 김준호, 김혜수, 정훈희, 서영희, 이광수, 김우빈, 임영웅, 박명수 등도 빈소에 화환을 보냈다.
산업화로 치달으며 농촌이 급속히 해체되던 시절, 당대 최고 차범석 작가가 극본을 쓴 ‘전원일기’가 1980년 방송을 시작했다. 드라마는 양촌리 유지인 김 회장(최불암) 집과 가난한 일용이(박은수)네 두 가정을 통해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웃음은 주로 ‘일용 엄니’ 담당이었다. 홀몸으로 아들을 키운 ‘일용 엄니’는 가난했고, 까막눈이었으며 질투심이 많고 엉뚱했다. 그 ‘일용 엄니’ 김수미(본명 김영옥)씨가 25일 세상을 떠났다. 75세.
예기치 못한 죽음이었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김수미씨가 25일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오전 8시께 119구조대에 의해 서울성모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씨의 마지막을 발견한 사람은 아들 정명호씨였다. 김수미씨는 피로 누적 등으로 지난 5월부터 활동을 중단해왔다.
극중 65세 일용 엄니를 맡은 김수미의 나이는 당시 31세였다. 아들 역의 박은수보다 두 살이 어렸다. ‘김 회장’ 최불암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이연현 PD와 캐스팅을 논의하면서 김수미가 해내겠나 하는 의구심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녹화 첫날, 김수미가 흰머리로 분장하고 이 하나에 검은 칠을 딱 하고 나타난 거다. 그리고 대사를 하는데 ‘아, 이건 되겠다’ 싶었다. 첫 방송부터 김수미가 가장 주목받았다.”
‘30대 할머니’는 배우로서 매우 위험한 선택이라 김수미도 처음엔 배역을 거절했다. “김수미가 안 하면 일용네 집안을 모두 빼버린다”(담당 PD)는 협박, “네가 하지 않으면 다른 탤런트들까지 피해를 입지 않겠느냐”(김혜자)는 설득에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1949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친 뒤 가족과 함께 상경했다. 숭의여중고를 마친 김수미는 고 3 때 봄가을로 양친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대학 국어국문과에 합격했으나 등록금 25만원을 내줄 사람이 세상에 한 명도 없어 울었다”고 했었다.
1970년 김영애, 안옥희, 염복순, 허진 등과 함께 MBC 공채 탤런트 3기에 합격하며 연기자가 됐다. 1971년 이후 ‘수사반장’ ‘행복’ ‘아다다’ ‘민비’ ‘113 수사본부’ ’새아씨’ 등에 출연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개성 강한 외모의 김수미는 ‘조신한 타입’을 선호하던 당시 취향 탓에 주연 대신 조연을 주로 맡았다. 김수미의 연기력은 ‘전원일기’를 통해 비로소 피어나, 당시 조연 배우로는 드물게 MBC 연기대상과 백상예술상 등 여러 연기상을 받았다.
22년간 ‘일용 엄니’ 인생이 끝난 후 ‘배우 김수미’의 인생이 새로 시작됐다. 김수미는 준비된 ‘B급 오락물’의 주연이었다. 2005년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카리스마 있는 뱀파이어 역할을 시작으로, ‘욕쟁이 할머니’의 탄생을 알린 영화 ‘마파도’ ‘가문의 영광 3-가문의 부활’은 김수미의 연기 폭이 얼마나 더 확장될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후로도 수많은 ‘욕쟁이 할머니’ 캐릭터가 나왔지만, 그 원조는 단연 김수미였다.
가수 정훈희의 주선으로 만나 결혼한 사업가 정창규씨와의 결혼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억척스럽게 가정을 지키고 돈을 벌었다. 교회 간증을 통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편을 미워했고 증오했다. 늘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나니까 옛날에 연애할 때의 감정으로 돌아갔고,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풀리지 않던 앙금이 다 없어졌다.”
김수미는 ‘요리하는 연예인’의 원조 격이다. 최불암씨의 회상. “우리가 ‘전원일기’ 스튜디오 촬영분을 일주일에 한 번 아침 9시부터 자정까지 찍었는데, 어느 날 김수미가 총각, 열무, 배추, 파 등 김치 열 가지와 밥을 해 갖고 왔다. 다들 맛있다고 난리가 났다. 그랬더니 그다음부터 매주 밥과 김치를 갖고 와 그걸 기다리는 맛이 있었다”고 했다.
2005년 간장게장 사업을 시작해 ‘간장게장 김수미’로도 유명했고, 2018년 tvN에서 방송된 ‘수미네 반찬’을 통해 요리 실력을 뽐냈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밥 잘해주는 누나’로 불릴 만큼 음식으로 동료와 선후배를 챙겨왔다. ‘전원일기’에서 김 회장네 둘째 아들로 나왔던 배우 출신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스타를 잃었다기보다는 가족을 잃은 것 같은 슬픔”이라며 “후배 배우들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했다. ‘일용 엄니’로 시작해 ‘욕쟁이 할머니’를 거쳐 ‘수미 누나’로 기억될 의미 있는 역행, 김수미의 일생이다.
김씨와 ‘전원일기’에서 호흡을 맞춘 박은수(77)씨는 “몇 부작짜리 드라마로 계획됐던 ‘전원일기’가 최장수 드라마가 된 것, 종영 수십년 후에도 회자되는 것 모두 김수미 덕”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최불암·김혜수가 전원일기의 기둥이었다면 김수미는 전원일기의 인테리어였다”며 “아직 연기를 더 해야 하는 훌륭한 배우가 가버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씨는 “처음에는 어리고 예쁜 배우가 할머니를 연기할 수 있겠나 싶었는데 ‘일용엄니’ 캐릭터를 기가 막히게 만들더라”며 “가성으로 만드는 쇳소리, 애드리브에 매번 감탄했다”고 했다. 박씨는 “김씨가 다재다능하니 사업을 했겠지만, 연기만 했다면 이런 일(사망)은 없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한편 박씨는 “김씨는 순발력이 좋아 촬영장의 스태프들이며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였다”며 “정해진 시간보다 촬영이 빨리 끝나 빈 시간이 생기면, 애드리브를 쳐서 시간을 꼭 맞춰줬다”고 회상했다.
작년 김씨와 뮤지컬 ‘친정엄마’에서 호흡을 맞춘 김형준(37)씨는 “당장이라도 선생님이 밥 먹으러 오라며 부를 것 같은데, 너무 황망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선생님은 뮤지컬 연습 때마다 먹을 것을 잔뜩 만들어 오셔서 나눠주셨고, 연기도 많이 도와주셨다”고 회상했다.
김씨는 “지난 봄 시즌 ‘친정엄마’에 나는 출연하지 않았지만 선생님을 뵈러 깜짝 방문했는데, 선생님께서 몸이 안 좋으시다며 만나주실 수 없다고 했다”며 “선생님답지 않은 모습에 무슨 일인지 걱정했는데 이렇게 급하게 가셨다”고 했다. 김씨는 “예전 뮤지컬 연습 때 선생님이 저를 혼내시는 모습이 방송에 나온 적이 있었다”며 “선생님 이미지가 나빠졌을까봐 걱정돼 그 이후 쉽게 연락을 드리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말했다.
김씨의 외조카인 장주원(33)씨는 “이모는 매년 온 가족을 모아 김치를 수백 포기씩 담았다”며 “정작 이모가 먹는 양은 적었고, 가족과 지인들에게 김치를 나눠줬다”고 했다. “매년 김장을 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장씨의 말에 김씨는 “오랜만에 친지들을 만나고, 김치도 나눠줄 수 있으니 좋다”고 답했다고 한다. 장씨는 “이모는 요리를 맛있고 빠르게 했다”며 “특별한 음식보다도 집밥을 잘 했다”고 했다. 장씨는 “방송에서 비춰지는 이모는 유쾌하고 털털한 모습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소녀같았다”며 “이모는 꽃과 독서를 좋아했고, 음악 듣는 것도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손자 권준희(10)군은 “할머니와는 매주 한 번씩 통화하던 사이”라며 “할머니가 유쾌하고 농담도 잘 하셔서 할머니와 통화하던 시간을 좋아했다”고 했다. 권군은 “지난 6월 할머니와 계곡에 놀러갔다”며 “함께 백숙을 먹고, 내가 물장구를 치는 동안 사진을 찍어주던 할머니가 그립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명호 나팔꽃에프앤비 대표, 딸 주리씨, 며느리 서효림(배우)씨. 장례식장은 한양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7일 오전 11시.
"웃으며 잠시 기억해달라"... 영정사진 찍으며 故김수미가 전한 말
배우 김수미가 심정지로 갑작스레 별세한 가운데 고인이 생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찍은 영정사진이 재조명되고 있다.
김수미는 지난 2018년 SBS 예능 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게스트로 출연해 이승기 등 당시 멤버들에게 영정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멤버들은 갑작스러운 김수미의 부탁에 순간 당황했지만, 김수미는 “아름답고 멋있게 찍고 싶다”며 “너희가 찍어준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쓸 거야”라고 했다.
이에 멤버들과 김수미는 영정사진을 찍기 위해 가을 단풍이 가득한 수목원을 찾았다. 이승기가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하냐고 묻자 김수미는 자신이 그려온 장례식의 모습을 설명했다. 그는 “어느 장례식장에서도 볼 수 없는 영정사진을 갖고 싶다”며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사고치고 가는 구나’라며 와서 헌화하고 영정사진을 봤을 때 웃을 수 있게 하고 싶다”고 했다. 또 “장례식장에서 상여 나갈 때 ‘아이고’하는 곡소리를 내지 않나. 그런 것 없었으면 좋겠다”며 “웃으면서 ‘갔구나. 우리는 김수미를 잠시 기억하자’ 그렇게 보내주면 된다”고 했다.
김수미는 붉은 단풍이 깔린 곳에서 평소 아끼는 분홍색 드레스와 검은색 모피를 입고 특별한 영정사진을 찍었다. 그는 “굳이 검은 옷이나 칙칙한 옷을 입고 찍을 필요 없다”며 “장례식장에 사진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명을 다해서 갈 때 돼서, 나이 많아서 가는 영정사진은 이것(밝은 사진)도 좋다”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거야. 누구나 죽잖아”라고 했다. 그는 마치 화보 사진을 찍듯 단풍이 깔린 바닥에 누워 포즈를 취하게도 했다. 붉은 단풍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이 단풍 색깔을 봐. 나 더 살련다. 너무 아름답다. 너무 행복하다”며 “너무 좋으니까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