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후서 전략 총괄 '얼음 아가씨'…최초 '여성 비서실장' 발탁된 수지 와일스
[트럼프를 만든 사람들] [1] 트럼프 "뒤에 있을 사람 아니다"
막후서 전략 총괄 '얼음 아가씨'…최초 '여성 비서실장' 발탁된 수지 와일스
[트럼프를 만든 사람들] [1] 트럼프 "뒤에 있을 사람 아니다"
“수지. 이리 와요. 이리 오라고.” 6일 미국 플로리다주 웨스트 팜비치 카운티 컨벤션센터에서 대통령 선거 승리 연설을 하던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연단 아래 있던 여성에게 손짓을 하며 무대로 불러냈다. 캠프 공동 선대 본부장을 맡은 수지 와일스(67)였다. 트럼프는 “얼음 아가씨(ice baby). 우린 이 사람을 얼음 아가씨라 부른다”며 각별한 친근감을 표했다. 그러면서 “뒤에 있는 걸 좋아하는데, 뒤에 있을 사람은 아니다”라고도 했다.
트럼프에게 이끌려나온 와일스는 환호하는 지지자들 앞에서 수차례 “감사하다”고 외치면서도 직접 마이크를 들고 한마디하라는 트럼프의 권유는 끝내 사양했다. 선거운동을 이끌었던 막후 실세 와일스에 대한 트럼프의 각별한 신뢰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트럼프는 이날 승리 연설에서 와일스의 이름을 일곱번이나 말했다.
와일스는 박빙이라던 예측을 깨고 대선을 완승으로 이끈 공신(功臣)으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역사상 첫 백악관 여성 비서실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됐고 실제 선거 이틀 뒤인 7일 이 자리로 발탁됐다. 백악관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정책 결정과 인사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입법 과정에서 의회 수뇌부와의 협상도 이끄는 실세 중의 실세다. 다른 고위직과 달리 상원 인준 과정이 필요 없어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측근이 기용된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와일스는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트럼프 캠프 내에선 사실상의 ‘리더’”라며 “와일스가 전면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트럼프 2기에선 최전선에 나서서 중책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며 백악관 입성 가능성을 전망했는데 현실이 됐다.
와일스는 트럼프 2기 정책, 캠페인 메시지·예산·조직·유세 계획 등을 총괄해온 트럼프 캠프의 최고 ‘막후 실력자’다. 유명 프로 풋볼 선수 출신 스포츠 캐스터 팻 서머롤의 딸이기도 한 그는 스물두 살 때 뉴욕 출신 공화당 하원 의원 잭 켐프 의원실에서 일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이듬해인 1980년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후보 선거 캠프 부국장으로 처음 선거를 치렀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Let’s 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를 앞세워 재선에 도전하던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전례 없는 압승(선거인단 538석 중 489석 확보)을 거두는 현장을 지켜봤다.
와일스는 이후 공화당 의원 보좌관, 지역 시장 자문역 등을 거치면서 ‘선거 베테랑’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44년 전 때 레이건과 거의 똑같은 선거 슬로건(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을 내세운 트럼프 캠프를 이끌며 승리를 일궈낸 것이다. 그는 2020년 트럼프 대선 캠프에 합류하기 전에는 릭 스콧 플로리다 연방 상원 의원,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밑에서도 오랫동안 일했다. 2018년 디샌티스가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핵심적 역할도 했다.
와일스는 30대였던 1990년대 중증 알코올중독에 빠져 공인(公人)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아버지 서머롤에게 “당신과 내가 같은 성(姓)을 쓴다는 게 부끄럽다”고 호되게 꾸짖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2013년 사망한 서머롤은 생전에 “그때 딸아이 편지를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회고했다. ‘얼음 아가씨’라는 별명처럼 냉정한 이미지도 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품이 넉넉한 정장과 미러 선글라스(렌즈 바깥쪽이 거울처럼 보이는 선글라스), 은색에 가까운 금발이다. 그는 대외 발언을 거의 하지 않고 캠프 내부의 기강을 잡고 트럼프의 메시지와 전략을 가다듬는 데 집중해왔다. 뒤에서 상관을 험담하거나 비밀 이야기가 새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미 정치 매체 폴리티코는 최근 전했다. 트럼프에게 직언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참모로, 다른 참모들의 말을 단칼에 자르는 트럼프도 와일스의 말은 일단 경청한다고 한다.
이번 대선 경선 때 와일스는 캠프 자원봉사자들이 유권자들을 임의로 찾아가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유권자 등록은 하지 않았지만 트럼프 지지 성향이 강한 지지자들을 추려내 이들을 집중적으로 설득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이런 전략은 주효했다. 올해 1월 공화당 경선이 열린 아이오와주에서 트럼프는 ‘젊은 보수’를 앞세워 돌풍을 일으키던 디샌티스에 비해 조직과 자금에서 열세였음에도 승리하며 기선을 제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본선 단계에선 ‘선거 부정’ 등 각종 음모론을 자제하라고 설득하면서 트럼프가 중도층을 겨냥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와일스는 냉철하고 고도로 조직적이며 문제 해결사”라며 “트럼프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도 균형을 잡고 캠페인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대외 발언을 삼가던 그는 최근 들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와일스는 민주당 성향의 백만장자 마크 큐번이 “트럼프는 주위에 강하고 지적인 여성은 두지 않는다”고 비판하자 지난달 31일 소셜미디어 엑스(옛 트위터)에 이례적으로 반박 글을 올리고 “(강하고 지적인 여성은) 바로 여기 있다!”라고 했다. 그가 엑스에 글을 올린 건 작년 2월 이후 거의 2년 만이다. 와일스는 트럼프 2기의 초대 비서실장으로 내정됐지만, 행정부나 의회 고위직 경험이 없다는 점은 약점으로 거론된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2017년 트럼프 1기 출범 직후 그의 딸 캐럴라인 와일스가 백악관 일정 담당 비서로 채용됐지만 연방수사국의 인사 검증을 통과하지 못해 한 달 만에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