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5-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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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금주 박사가 한국최초의 개신교 순교자에 대한 발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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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배 교수는 류금주 박사의 대학시절 은사이기도 하고, '로버트 토마스, 성경을 주고 떠나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의 원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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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참석한 한국교회사학연구원 회원들.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부원장, 전 서울장신 교회사교수)는 '로버트 토마스, 성경을 주고 떠나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라는 제목의 발제를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권평 박사, 이하 한교사)이 지난 4월 8일 은진교회당에서 개최한 제 266회 월례발표회에서 담당했다.

류금주 박사는 '한국 최조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J. 토마스_그가 주고받은 평지들, 기록들'을 저술한 민경배 박사의 제자로서 동 저서를 중심으로 민 박사가 수집한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1차 자료들을 중심으로 발제를 이끌어갔다.

토마스 목사의 모교인 런던대학교의 뉴칼리지(New College)에서 약 50년 전 수학했던 민경배 교수가 토마스의 고향과 학교, 선교회본부에서 토마스목사의 배경과 전도활동 등 1차적인 자료들을 발굴해 한국교회와 역사계에서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바로잡은 공로가 있음을 류 박사는 밝혔다.

류 박사는 민 교수가 수집한 토마스 목사에 대한 1차적이고 직접적인 자료들을 수집해 한국기독교계에서 토마스 목사의 출신지와 출신대학 등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보통은 토마스 목사의 출신지를 스코틀랜드이며, 출신교를 에든버러 대학교의 뉴칼리지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민경배 교수는 본래 토마스 선교사가 웨일즈 인이고, 런던대학교 뉴칼리지 출신이라고 논문을 통해 밝혔다고 했다.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유학했던 민경배 교수는 나탈(Geoffrey F. Nuttal) 교수와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 목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대부분 웨일즈 인들이 성을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것에 착안해 웨일즈 인명부에서 토마스 목사를 발견, 런던대학교 기록물 보관소에서 1850~1860년대 교수회의록에서 여러 차례 그 이름을 발견,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서 중국 상해로 갔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추가로 여기에서 토마스가 주고 받은 서신들을 입수하는 등 이를 기초로 토마스에 대해 연구하고, 번역, 편술함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공람되어서 한국교회가 직접적으로 교회의 씨앗이 된 로버트 토마스의 순교의 피와 그 선교 여정에 다가서도록 한 큰 공로가 크다고 평가했다.

민경배 교수가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 목사라고 책의 머릿말에 자신 있게 붙이리 수 있었던 것은 토마스 목사의 편지들과 기록 등을 직접 대조, 연구하면서 그의 대학시절(1856~1864), 런던선교회 파송중국선교사 시절(1864~1865), 중국에서의 독자 선교 시절(18695~1866), 토마스 순교 이후(1866~1899) 등을 모두 밝혀내서 저서에 담았기 때문이다.

류금주 박사의 이날 발표를 통해 토마스 목사와 한국의 인연은 1차로 1869년 9월부터 4개월간 서해안 소래포구 일대를 시작으로 한국을 방문해 한국어와 글을 배우고 한국인들이 성경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면서 성서반포의 확신과 자신이 개신교선교를 여는 최초의 선교사였다는 것을 직감, 2차로 1866년 9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한국인들에게 성경을 나눠주기 위해 제너럴셔면호를 타고 대동강변에 이르렀다가 조선군에 의해 순교했다는 것이 알려졌고, 그간 토마스 선교사가 중국선교지에서 이탈했다는 오해가 있었지만 사실은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파견선교사자격으로 방문했던 것이라는 점도 거론되었다.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 선교사는 1840년 9월 5일 태어났고, 웨일즈 라드노주 라야다에서 ㅂ친 로버트 토마스와 모친 메리 로이드의 아들로서 2남 3년 중 둘째 아들이었다. 1839년 라야다교회에 부임한 부친은 토마스가 8세 되던 해 하노버회중교히 목사로 부임했다. 토마스는 1856년 고등학교 졸업 후 은들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그해 런던대학교에 입학, 1859년까지 재학, 뉴칼레지에서 1857년 9월부터 1년간 재학했고, 1860년 10월 복교해 1863년 5월에 신학교육과정을 다 마치기까지 선교사가 되기 전까지 유럽어를 대부분 익혔고, 워타만 박사에게서 18개월간 배웠으며, 도처에서 설교를 하며 재능이 상당함을 인정받았다. 1863년 5월 뉴칼레지를 졸업한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파송 중국선교사로 임명, 6월 4일 목사안수를 받고, 얼마 후 캐롤라인 고드페리 양과 결혼, 7월 21일 중국으로 떠나 12월 초 상해에 도차갰다는 이야기들을 류 박사는 밝혔다.

류 박사는 1864년 중국생활 4개월만에 아내가 유산으로 사망, 여러 갈등으로 런던선교회를 사임, 중국 황립해상세관의 통역연수관으로 취익하고, 선교회에는 상해가 아닌 다른 곳으로 전직을 조건으로 복직의사를 밝히던 중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지푸 주재원 알렉산더 월리엄슨과 알게되어 한문성서를 얻어 한국으로 1차 선교여행을 하게되었다는 점을 설명했다.

류금주 박사는 토마스 목사의 한국행을 위한 특장점은 특출난 언어감각이었다고 한다.그는 인간적으로 모범적인 인성이있었고, 광활한 선교적 시야가 있었는데 당시 정교회나 천주교등에서 한국선교를 위한 시동을 걸고 있었다는 점들을 토마스가 발견했고, 특히나 중국 베이징에서의 선교과정에서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관문이라는 특징이 있어 선교학과 문화학상 중심과 변방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고 있어 한국으로 자연스레 건너 오는 혜안을 가졌던 특출난 혜안의 소유자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경배 교수는 토마스 선교사의 출신지나 소속기관, 개인적 성격 등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있지만 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혜안이라고 강조했다. 민 교수는 토마스가 중국선교사로서 머물렀던 지역 중 하나는 현재도 촌동네에 속하는데 그런 시골에 런던출신자가 중국으로 왔고, 나아가 한국선교를 위해 접근했다는 그런 세계관과 봉사정신에 대해 우리는 인정해야하는데 기본적으로 그가 선교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있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기에 우리들은 그런 점을 배워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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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 목사임을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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