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7-2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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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제자 한정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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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의 날을 맞아 민경배 박사에게 축하 케이크를 전달하고, 참석자들은 노래를 제창했다. 사진은 민경배 박사가 촛불을 끄는 모습

 

한정렬 목사(순복음총회신학교)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권평 박사)이 은진교회당에서 지난 5월 6일 주최한 월례발표회에서 '초기 내한 선교사 George Huber Jones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한 목사는 존스 선교사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한국그리스도교 선교사(史)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그 원동력은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했다.

존스 선교사는 미국 뉴욕주에서 1867년 태어나 14세에 하나님께 감동받아 헌신키로 작정했으나 집안 사정상 대학진학을 못했고, 신학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선교를 하고자 한국으로 입국, 이후 배재학당의 활성화와 제물포와 강화에서 선교사역 수행하다가 본격적인 부흥각성운동에 전념하는 등 많은 성과를 냈다는 설명을 한 목사는 했다.

미국 뉴욕주 모하크에서 1867년 8월 14일 부친 찰스와 모친 수잔 사이에서 태어났고, 집안 대대로 웨일즈출신으로서 조부와 부친은 감리교 성도였기에 감리교적인 신앙의 배경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가정사정이 어려워 대학으로 진학을 못해서 존스는 선교사역 내내 학력문제가큰 부담이 되었다고한다. 

14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느끼고, 감동되어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887년 1887년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 선교사로서 지원요청을 해 12월에 로체스타지방회에서 시취시험에 합격해 평신도선교사자격을 받고, 1888년 조선선교사로 파송되었는데 신학을 전공치 않은 그에게 고시의 기회가주어지고 임명된 파격에는 선교사의 길이 예정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 목사는 설명했다.

존스는 1888년 5월 평신도선교사로서 조선에 도착해 배재학당에서 수학교사로 근무, 1891년 제 7차 선교회에서 신학시험에 합격해 장로목사로 임명받았다고 한다.

존스가 한국 체류 초기 아펜젤러 선교사가 최병헌을 어학선생으로 소개했으며, 어학과 정치, 무화, 종교, 역사, 사상 등 다방면적인 배경지식을 전수받았지만 존스 자신이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학문적인 성실성이 있던 것이 융합되어 한국 초기 선교사에서 큰 성과를 이루는 기틀이 되었다고 한다.

1892년 인천지역 선교책임자로 임명받은 존스는 아펜젤러가 세운 제물포교회(내리교회)의 제 2대 담임목사가 되어 현지인들 중 귀신들린자는 고쳐주고, 관리들에게 토색당한 재산을 찾아 돌려주는 등 신앙적으로 또는 실생활적으로 큰 도움이 되어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신학을 전공한 적이 없지만 제물포교회에 지역전도사 1명, 권사 3명, 속회지도자 1명 등으로 훈련시켰고, 5년 후에는 신도수가 510명에 이르는 성과를 올렸는데 이것은 그가 어린시절 교회생활을 성실히 해 교회체제를 잘 알기 때문이라는 점을 한 목사는 부각시켰다.

제물포를 선교거점으로 찾으니 한강변을 따라 연결되는 강화도가 눈에 띄었고, 인구 7만명의 이곳에 매일학교를 세워 선교거점으로서 활용하니 학교가 빠른 속도로 성장해 인천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영화학교로 발전하게되었다고 한다. 이 때 마가레트 벵겔이 제물포에 부임, 1892년 한명의 소녀를 데리고 시작한 소녀매일학교가 1900년에 영화여학당으로 개칭 하는 한편 존스는 마가레트와 결혼해 영화학당의 부부교장이 되었다고 한다.

강화유수의 강력한 반대와 봉쇄로 강화도를 선교지로서 들어갈 수 없었지만 이승환 씨가 노파를 업고 와서 세례줄것을 요청해 최초의 선상세례를 베풀고, 이후 이 씨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는 등 감리교의 첫 강화도 신앙공동체로서 복음을 전파하게되었다고 한다.

미국감리교는 1776~1850년 사이에 기적적인 성장을 이뤄 처음에는 교세가 3%였다가 1850년에는 34%에 달할 정도로 변모했는데 한국의 감리교도 전통적으로 일찌기 심령부흥운동을 열고 있었고, 존스 선교사에 의해 본격적인 부흥운동이 도입되어 1898년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부흥회, 1903년 서울에서 속장권사 등 지도자양성모임에서까지 지속, 1901년 정월과 10월, 12월 평양 사경회 등으로 계속되었으며, 1907년 1월 강화도에서 대규모 부흥사경회를 개최했는데 이 때 길선주 목사에 의한 장대현교회 성령대부흥회도 열리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어윈 하와이사탕수수경작자협회장을 면담해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조선의 경제가 어려워 민초들이 고생하던 시기였기에 조선인들을 노동자로 섭외코자 하였지만 당시 보수적이고 씨족문화에 몰입된 사람들이 주저했고, 이를 들은 존슨 선교사는 교회 내에 이민국을 설치해 내리교회 성도들에게 상황을 설명, 제물포교인 50명, 부두 노동자 20명, 상인, 군인, 공무원, 학생 등 121명을 1차로 이민단으로 보내어 1905년까지 7229명을 보냈다고 한다.

하와이에 도착해 사탕수수농장들로 산재한 노동자들은 기독교적인 이민사회를 구성해 '하와이 그리스도교연합감리교회'를 설립하는 등 한국인전도자에 의한 해외교포선교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1983년 이후 한국선교회에서 신학 4년제 교과를 정하고 신학부를 개강했지만 수업의 난이도와 지원자의 부재로 곧 폐지되었지만 존스 선교사가 1900년 인천 우각동 자신의 서재에서 18명의 학생들과 2주 과정의 신학회로 시작 이후 단기적인 교과로 인해 부족함을 느껴 정규신학교의 필요성이 논의되었고, 안식년을 지나고 1906년 7월 돌아와 1907년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서 재직시 아펜젤러가 추진하다 중단된 신학교 설립에 매진해 '대한성경신학교'라는 이름으로 감리교신학교를 계획, 6월에 3차 한국선교연회에서 '협성신학당' 설립안을 제출 후 서울 서대문 냉천동에 학교부지를 결정, '감리교회 협성신학교'로 명칭을 변경하는 등 1911년에는 3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성과를 냈다고 한다.

존스 선교사는 1909년 5월 미국으로 영구귀국 후 지속적으로 한국선교를 후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엿고, 본부의 선교총무로 있으면서 선교사의 충원이나 선교지원금 등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한정렬 목사는 존스 선교사에 대한 연구는 민경배 은사님에 의해 제안되어 시작했고, 그에 대한 자료가 매우 부족해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선교적인 업적은 그의 일생에 확실히 체험한 중생의 경험과 하나님 간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그의 선교선배이자 멘토였던 아펜젤러의 사고사로 인해 신앙적인 갈등을 잠시 겪었음에도 결국에는 다시 내한해 선교사여그이 끝맺음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충성심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민경배 박사는 한 목사의 연구가 매우 훌륭했다면서 이처럼 존스 선교사 개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차제에 한국에는 훌륭한 내한 선교사들이 다수이니 이들을 비교연구하는 그런 한국그리스도교역사에 대한 과제물들이 나왔으면 한다는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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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평 원장이(첫째 자리) 스승의 날 행사를 진행했으며, 김유준 목사가(둘째 자리)가 1부 예배 설교, 조점순 목사가(셋째 자리) 사회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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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본을 보인 존스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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