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엽 작가(오른쪽)가 자신의 전시 작품을 배경으로 윤영애 작가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달항아리 작가] 정희엽 서양화가, 영상 통해 ‘제6회 개인전’ 선보여
한민족의 정서 담긴 오방색 모티브로 채색, 작품 성취도 높여
정희엽 서양화가는 끊임없이 ‘달항아리’ 그림에 천착(穿鑿)하고 있는 ‘달항아리 작가’이다. 정 작가가 전시회 등 오프라인 뿐만 아니라 최근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서 관객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사 크리스티 뉴욕에서 오는 18일 높이 45cm 크기 백자대화 달 항아리 경매(한화 예상가 26억~36억원)를 앞두고 지난 2월 말 서울 팔판동 크리스티 코리아에서 서울 프리뷰를 통해 조선시대 달항아리와 그 외 다양한 청자와 백자 총 7점이 전시되었던 전시장을 찾은 적이 있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2년 전인 2023년 3월21일 추정가였던 12억~15억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에 18세기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달항아리가 456만달러(당시 한화 약 59억6500만 달러)에 낙찰되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박물관 갤러거 갤러리에서는 지난 3월2일 '한국의 달항아리, 다시 차오르다(Lunar Phases: Korean Moon Jars)' 특별전이 개막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6월8일까지 계속될 전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달항아리 3점을 포함해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달항아리 6점과 현대 도예가들이 만든 6점 등 총 12점을 선보인다.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받은 다양한 회화, 사진, 비디오, 설치미술 등 현대미술품 9점도 함께 전시한다.
15년 전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개최되었던 ‘스코프 마이애미 아트페어’에서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 작가의 ‘달항아리’ 그림 3점을 한화 4,000만원에 구입, 빌 게이츠 재단이 설립한 필라델피아 뮤지엄에 소장되어 관객을 맞이하는 등 미국 미술애호가들에게 한국의 달항아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유튜브 ‘예윰갤러리’를 통해 제6회 정희엽 개인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정희엽 작가의 '달 항아리' 연작화.
들어가며
우리나라 골동계의 역사이자 산 증인이었던 우당 홍기대(1921~2019)는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경성의 고급 지필묵 가게인 구하산방(九霞山房-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점원으로 시작해서 고미술과 인연을 맺었고, 광복 이후 구하산방을 물려받아 수집가들과 교류했다. 그가 2014년 출판한 저서 ‘조선백자와 80년’에 따르면,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보물 1056호 '청화백자철화삼산뇌문산뢰'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삼성에 갔다. 이건희 회장에 대해 그는 "컬렉터로서 신사답고 좋은 사람"이라며 "물건 값도 깎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당대의 수장가 간송 전형필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고, 6·25 이후엔 도상봉, 김환기 등이 그의 가게에 매일 드나들었다고 했다.
홍기대의 증언을 정리하면, 김환기가 커다랗고 둥근 백자대호를 1950년대 처음 ‘백자 달항아리’로 이름 붙였다. 김환기와 교분이 두텁던 미술사학자 최순우(전 국립중앙박물관장)는 그 후 달항아리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최순우는 1963년 4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잘생긴 며느리'라는 제목의 기고를 통해 달항아리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2010~2011년에 걸쳐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한자식으로 된 문화재 지정명칭을 우리말로 개선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때 다수 문화재위원들의 공감을 얻어 결정되었다.
김환기는 1940년대 말~1950년대 초 백자를 열심히 화폭으로 옮겼다. 그의 백자 항아리 그림에는 달이 등장한다. 김환기는 '청백자 항아리'(1955)라는 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신변(身邊)에 놓여있는 이조백자(李朝白磁) 항아리들을 늘 다정한 애인 같거니 하고 생각해 왔더니 오늘 백발이 성성한 노 감상가 한 분이 찾아와서 시원하고 부드럽게 생긴 큰 유백색 달항아리를 어루만져보고는 혼자말처럼 '잘생긴 며느리 같구나' 하고 자못 즐거운 눈치였다." …"내 뜰에는 한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칠야삼경(漆夜三更)에도 뜰에 나서면 허연 항아리가 엄연하여 마음이 든든하고 더욱이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月光)으로 인해 온통 내 뜰에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정희엽 작가의 '달 항아리' 연작화.
정희엽 작가의 그림 ‘달항아리’에 담긴 함의
정 작가의 ‘달 항아리’ 그림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다양한 채색 바탕에 ‘달 항아리’의 곡선미를 드러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민족의 정서에 부합하는 조화와 화합을 추구하는 ‘오방색(五方色)’을 십분활용해서 창작한 걸 알 수 있다. 흰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검정색을 말하며, 음양오행사상을 기반으로 한 한국 전통문양인 오방색은 중앙과 동서남북의 5가지 방위를 상징한다. 음양의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두 기운이 만나 오행을 생성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오방색이 오덕(五德)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각각 상징한다고 생각해 어린아이용 두루마기를 오방색 천으로 만들었다. 또한 궁궐이나 사찰의 단청, 요리에 올라간 고명, 색동저고리에도 다섯 가지 색을 사용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에 제작된 백자 원래 달항아리는 몸통 한가운데 볼록한 부분이 어긋나 있다. 달덩이처럼 완벽하게 동그란 모양이 아니라 약간 불균형적하고 뒤뚱거리는 모양이다. 커다란 항아리의 경우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든 다음 이 둘을 서로 붙여 완성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접합한 부분이 약간 뒤틀렸다. 조선시대 도공들은 이 접합 부위를 깔끔하게 다듬지 않고 어긋나게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 부분을 칼로 깎아내어 매끈하게 다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왜 그랬을까? 그것은 조선백자가 완벽하고 인위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약간 불완전하지만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을 추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정 작가는 어찌 생각하면 ‘불완전하지만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을 칼로 깎고 다듬은 후 완전에 가까운 원형에 오방색을 입혀 한국적인 정서가 지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품으로 재탄생시키고 있다.
▲정희엽 작가의 '달 항아리' 연작화.
음영의 극대화 통한 ‘달 항아리’의 신비로움 담아
정 작가의 창의력은 강한 느낌의 ‘오방색’ 색채를 지양하고, 그것을 변형시킨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옅은 색으로 채색했다. ‘달 항아리’ 앞에 선 관객에게 바람 한 점 없는 호숫가를 채우는 잔잔한 물결의 실루엣을 바라볼 때 느끼는 포근함, 안정감과 평화로운 느낌을 안겨 준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거기에 더해서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작업실에 딸린 부엌에서/ 그가 양쪽 손목을 긋던 새벽…스며 오는 것 / 번져 오는 것(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수록 시 ’마크 로스코와 나, 마크 로스코와 나2‘ 부분)이라고 했던, 미국 추상회화의 대가 마크 로스코(1903~1970)가 “그 그림을 응시한다면, 마치 음악이 그런 것처럼 당신은 그 색이 될 것이고, 전적으로 그 색에 젖어들게 될 것”이라고 설파한 것처럼, 정 작가의 많은 ’달 항아리‘ 그림 중 음영을 극대화한 작품 등은 작가 특유의 색채와 함께 ’달 항아리‘에 빠져 들게 만든다.
▲정희엽 작가의 '달 항아리' 연작화.
나가며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싸늘한 사기지만 살결에는 다사로운 온도가 있다.…내가 아름다움에 눈뜬 것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되었다.…”-김향안 회고록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부분.
김환기가 아내 김향안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하면서 ’아름다움에 눈뜬 것이 우리 항아리‘였던 것처럼, 정 작가가 연작화 ’달 항아리‘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도 그와 같은 창작 의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인간의 시각적 서사에 섬세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선들은 우리가 인지하는 감정, 경험, 그 주름에 대한 독특한 카ㅔ고리 안의 경험, 그리고 삶의 다양한 상황을 연결하는 끈이며, 그것들이 모여 사유의 융합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서 항아리를 모티브로 우리의 서성거림의 연속성을 탐닉해 왔다.(중략) 사유하고 떨림에 지친 우리의 가슴에 충실한 태도로 조형적 복귀에 가담하고, 시각을 구두선처럼 단색조 회화에 다가가는 경외감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걷고, 색조와 동질성을 회복하고 싶다”-정희엽 작가 노트
정 작가가 천착하는 그림 ’달 항아리‘가 어디까지 더 변화와 변모를 거듭할지 모르지만, 그가 화폭 속에 담는 ’달 항아리‘ 작품 앞에 선 관객에게 한국의 전통미와 함께 사랑·평화·행복을 안겨주는 한국미술계를 빛낼 ’항아리 작가‘ 정희엽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