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6-2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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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훈 교수가 빅터 채핀 선교사에 대한 발제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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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를 담당한 김동석 박사, 발제를 담당한 송훈 박사

 

송훈 교수(숭실대학교 교회사 초빙교수)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권평 교수)이 지난 4월 7일 개최한 월례발표회에서  1910년대 구한말 한국선교 현장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불가 3년간의 선교 중 유명을 달리했던 빅터 채핀 선교사의 삶과 선교를 대입해 선교정책과 현장의 상황을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대한 발제를 담당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의 감리교 선교의 위기와 빅터 채핀의 짧았던 선교사로서의 삶'을 발제한 송훈 교수는 채핀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했던 1913년 4월 경은 내한선교사들에게는 침체기에 해당했고, 당시 한국을 식민지 삼은 일본 정부는 교회를 탄압하던 시기인데다가 식량난까지 겹쳐서 어려움이 가중되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1. 1920년까지 감리교 선교정책


한일강제합방(1910년) 후 10년간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는 큰 위기를 겪었다는데 감리교가 더욱 큰 타격을 입었던 이유는 장로교와는 달리 감리교는 학원과 병원선교에 집중하고, 네비우스적 선교정책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기에 자생력이 부족하고, 본국교회로부터의 후원에 매달리게 됐지만 후원마저 줄어드는 어려움에 봉착했다고 한다.

북감리교는 조선 선교의 초기부터 지역교회 자립보다는 미국식 순회전도정책을 고수했는데 이 순회전도정책 자체가 다양한 유관기관들의 충분한 협조하에서 실행해야함에도 그렇지 못해서 전체적인 선교성과가 부족해졌다고 설명했다.

미국식 순회전도시스템은 정규적인 예배와 대면전도활동,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 속회 종교 교육 등 기본구성요소가 탄탄하게 결합되야하는데 감리교 선교부는 주로 의료, 보건, 학교사역에 집중하기도 바쁘고 함께 일하던 조선인 조사들은 목회자가 부재시 평신도 설교자와 인도자로서 성도의 영적 훈련을 담당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북감리교선교부는 평신도를 훈련시켜 이들이 교호를 세우고 자립하기를 바랬지만 이들을 대상으로 한 제대로 된 신학훈련과 선교방법론은 부재했던 반면 북장로교는 신학훈련보다는 지역교회를 섬기기 위한 평신도 지도자, 전도자, 설교자들을 세우는데 노력해 실질적으로 자립을 이루는 편이었다고 밝혔다.

감리교는 선교비가 본국에서 오기에 높은 비용의 인건비나 건물 등의 유지비용우로 사용케 되어 고비용적이었고, 장로교는 네비우스선교방식으로서 저비용적으로 자립이 가능하던 것과는 달리 어려움이 있어왔던 것에 더해 한일합방 후 일본 식민정부가 학교나 병원의 운영에 고비용적인 지침을 요구하고,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못하게 하는 등 어려움이 배가됬다고 설명했다.


2. 한일 강제병합 후 북감리교 위기

 

감리교는 독립을 추구하는 애국주의자들과 불편한 관계를 감내해가면서 일본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던 중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가 외국인 선교부에 대한 강경억압정책으로 전환하자 상당한 위기를 또한 맞게되었다고 한다.

1906년 이토 히로부미 총독과 선교사들의 면담에서 해리스 감독에게 정치적 문제는 일본정부가, 영적 구원문제는 선교사들이 맡으라고 할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였고, 강제 병합 후에도 해리스는 한일강제병합의 정당성과 선교에서의 긍정적 효과를 역설해왔을 정도지만 105인 사건이 벌어짐으로서 일방적인 선교사들의 구애에 불과했다는 것이 들어났다고 밝혔다.

감리교 선교부의 이런 태도는 일본에 협조적인 미국정부나 본국의 교회들에게 조선 선교의 안정감을 들어내려했을 것이라고 송 교수는 유추하기도 했다.

감리교회들은 성도의 감소 등으로 재정자립도가 부족했고, 본국으로부터의 펀드가 줄어드는데다 당시 일본의 수탈로 인해 물가가 급등해지니 지출도 늘어나는 3중고를 격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3. 빅터 D. 채핀의 입국과 사역


채핀 선교사는 1903년 4월 입국해 1916년 6월 5일 지병으로 숨을 거둠으로서 약 3년여의 짧은 선교기간을 보냈을 뿐이고, 오히려 그의 부인애나 베어 선교사(채부인)가 오히려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고 송 교수는 밝혔다.

채핀의 입국을 전후해 그에 대한 자료가 부재함으로 동기는 잘 알 수 없었다며, 1881년 8월 11일 인디애나 뉴하모니에서 출생했고, 14세에 감리교회에서 신앙의 확신 경험, 18세에 개종,1909년 아이오와의 대학의 졸업, 1903년 조선에 입국했다고 한다.

채핀은 원애 다코다 연회 소속의 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입국 후 조선선교부연회로 이명 완료, 1915년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선교사로서의 입국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서울의 언더우드 밑에서 전도활동을 도운 채핀은 1916년 3월 북감리교의 선교부에서 탈퇴, 장로교 소속목회자로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의 입국 후 J. 토마스 선교사가 감독으로 일하던 초교파 단체인 동양선교회를 통해 선교사들에게 소개받고 일을 시작했으며,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새문안교회에서 동사목사로 일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채핀 목사의 개인적 능력은 상당했고, 열정도 높았다는 것이 당시 선교사들의 평판이었지만 감리교선교사로서 택함 받지 못한 것은 행정적인 이유도 있고, 특히 신체가 선교사직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도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

1910~1920년 채핀 선교사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인들에게 망국의 슬픔과 일본의 수탈, 정체성을 강탈당할 위기, 노골적인 교회 핍박 등이 닥치던 분위기였고, 지역교회들을 중심으로 자립정책을 쓴 장로교에 비해 재정자립이 부족해 본국의 도움을 받는 기관선교에 매진했던 감리교는 순회전도시스템을 초기부터 고수했고, 그나마도 제대로 적용하지도 못했던 것이 패착의 원인으로 송 교수는 평가했다.

송 교수는 대한민국과 북한이 통일을 향후 추진할 때를 대입해보자면 북한 선교를 한국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를 고민해볼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북한선교에 나서는 한국교회는 촘촘한 지역교회를 기반으로한 선교를 해야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이런 결론은 한국인들에게 별로 유명하지도 못했던 선교사를 연구한 것이지만 그를 연구함으로서 자립심이 중요하다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송 교수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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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교회를 기반한 선교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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