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인 성공의 역사 대한민국의 시작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서거 57주기 추모식’ 엄수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중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57주기 추모식'에서 유족들이 분향을 하고 있다.
▲19일 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서거 57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의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맨 앞줄 왼쪽 세 번 째 국회의원 최재형 의원의 모습도 보인다.
“극적인 성공의 역사 대한민국의 시작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서거 57주기 추모식’ 엄수
황교안 이승만기념사업회장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건국대통령을 잃어…老애국자께서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그 길을 오지 못한 슬픈 역사 앞에 우리는 깨어나야”
박민식 보훈처장 “이제는 이승만 대통령을 음지에서 양지로 모셔야 할 때…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가해야 하고, 이념과 진영이 연결 지어선 안 될 것”
정동제일교회 천영태 목사,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에서도 지켜 주신 하나님…그 중심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승만 대통령이 계셨음을 확신한다”
유족 대표 이인수 박사, “이승만 초대 대통령님의 간절한 소원이 어서 이루어지도록 따뜻한 기도 부탁드린다”
▲1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서거 57주기 추모식'에서 양아들 이인수 박사와 며느리 조혜자 여사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2022.7.19
국가보훈처는 19일 오전 11시 현충원 현충관에서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회장 황교안) 주관으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서거 57주기 추모식’을 개최했다.
추모식에는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해서 이진복 청와대 정무수석,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 등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 회원과 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해 이 전 대통령의 뜻을 기렸다. 행사는 애국가, 조총 발사 및 고인에 대한 묵념, 추모 기도, 기념사업회장의 식사(式辭), 내빈 추모사, 한미상호방위조약 담화문 낭독, 추모의 노래, 분향 및 유족인사, 현충원 참배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승만 박사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는 기념식 30분 전 박상원(세계한인재단 상임대표 총회장·美세인트미션大 총장) 박사와 김성만 세계한인재단 지도목사의 부축을 받아 기념식장에 입장한 후 앞쪽 의자에 자리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 서거 57주기 추모식’ 식장에 들어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박상원(세계한인재단 상임대표 총회장·美세인트미션大 총장-사진 오른쪽) 박사와 김성만 세계한인재단 지도목사(사진 왼쪽)가 이인수 박사를 부축해 추모식장 무대 앞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2022.7.19.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서거 57주기 추모식 현장 사진.
이승만 박사가 생전 출석했던 정동제일교회 천영태 목사는 추모기도를 통해 "끊임없는 침략과 동족과의 비극적 전쟁에서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 중심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승만 대통령이 계셨음을 확신한다. 이승만 장로님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뜻이 이 땅의 지도자들을 통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 자유를 주셨으니, 굳게 서서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말씀을 붙들고 흔들리지 않고 그 뜻을 받들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했다.
▲황교안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왼쪽부터), 조보현 배재학당재단 이사장이 추모식사를 하고 있다. 오른쪽은 한미상호방위조약 담화문 낭독하고 있는 최재형 의원.
황교안 ‘이승만 건국 대통령 기념 사업회’ 회장은 추모식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독립운동가, 건국을 위해 만난(萬難)을 이겨낸 건국대통령, 나라를 위해 공산당괴 끝까지 싸운 반공지도자였다. 한 시도 편안한 날 없던 가난한 나라의 지도자 이승만이 남긴 것은 오직 대한민국이었다”며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의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동표여!’라고 했던 그의 메시지야 말로 시공을 초월한 메시지였다”고 강조했다. 황 회장은 이어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잃었다”며 “老애국자께서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그 길을 오지 못한 슬픈 역사 앞에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이승만은 왕의 나라를 백성에게 돌려주겠다는 꿈을 꾸었고, 반역이라는 고초를 넘어 기어이 백성에게 나라를 안겨주었다”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성경구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낭독했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이어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대한민국의 역사는 전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극적인 성공의 역사이며, 그 대한민국의 시작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계셨다”며 “왕의 나라를 백성에게 돌려주려다 5년 7개월의 옥고를 치른 공화주의자의 삶,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선구자이자 외교관, 독립의지의 토대를 마련한 자유주의자의 삶까지, 그의 일생은 격변했던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심이자 혁명적인 삶 그 자체였다. 농지개혁, 의무교육 도입, 한미상호방위조역 체결 등을 통해 부국강병의 초석을 다졌고, 오늘날 국가 번영의 근간이 됐다”고 전했다.
박 처장은 또 “마땅히 기릴 업적이 묻히고 폄훼돼선 안 된다. 대한민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모든 이는 마땅히 추양받아야 한다”며 “그럼에도 이념, 진영에 따라 축소되거나 왜곡되는, 있어선 안 될 일이 벌어져 왔다. 피와 땀으로 헌신한 위대한 지도자의 행보와 업적이 함부로 재단돼 규정돼 왔다. 이제는 이승만 대통령을 음지에서 양지로 모셔야 할 때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가해야 하고, 이념과 진영이 연결 지어선 안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조보현 배재학당재단 이사장은 “1898년 졸업연설에 나선 졸업생 이승만의 영어연설 제목은 ‘조선의 독립’이었고, 그는 한성감옥에서는 ‘독립정신’을 집필했다. 우리의 건국대통령께선 미래를 내다보신 혜안이 참으로 깊으셨다”며 “식민지배와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민주주의를 성취하며 선진국이 된 나라는 세계의 오직 대한민국 뿐이다. 이런 나라의 미래를 보고 디자인한 중심 인물이 이승만 건국대통령”이라고 했다.
▲이인수 박사가 1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이승만 건국대통령 서거 57주기 추모식에 앞서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2022.7.19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는 “57년 세월이 엊그제 같은데, 조국을 그리워하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한없이 그립다”며 “이승만 초대 대통령님의 간절한 소원이 어서 이루어지도록 따뜻한 기도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황교안 이승만대통령기념사업회장 내외가 19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이승만 건국대통령 서거 57주기 추모식에 앞서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한편 보훈처의 보도 자료에서 밝힌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공적 내용(1949년, 대한민국장)은 아래와 같다.
❍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896년 서울에서 협성회를 조직하였으며, 협성회보와 매일신문 주필로 활동하였음
❍ 독립협회에서 독립민권사상을 고취하고 1898년 내각 중심제 정부를 조직하고 고종 황제를 양위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했다가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으며, 감옥에서 독립정신 등을 저술하고 1904년 8월까지 5년 6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렀음
❍ 1905년부터 미국에서 워싱턴대학 학사, 하버드대학 석사, 프린스턴대학 박사를 취득하고 1910년에 귀국하였음
❍ 1910년 서울에서 황성기독청년회 학감 등으로 활동했다. 1913년 미국 하와이에서 한인중앙학원을 인수 운영하면서 태평양잡지를 창간했음
❍ 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로부터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임명되었으나 미국 국무성으로부터 여행권을 발급받지 못해 참석하지는 못했음
❍ 1919년 4월 상해에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며,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표자대회를 소집하여 독립방략을 논의하고 독립의지를 세계여론에 호소했음
❍ 1919년 8월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해 외교운동과 독립자금을 모집했고 1921년 5월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임시정부 전권대사로 한국 독립문제를 의제로 상정시키려는 외교활동을 했음
❍ 1924년 호놀룰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의 종신총재로 추대되었음
❍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문제를 환기시켰으며,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으로 미국 대통령과 국무성을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벌였음
❍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연합 창립총회에서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임정 대표의 참석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폈음. <끝>
▲이인수 박사 내외가 1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이승만 건국대통령 서거 27주기 추모식에서 분향후 참배하고 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전 회장 이기수 박사(왼쪽부터), 신철승 현 회장, 박상원 세계한인재단 총회장 겸 미국세인트미션대 총장이 추모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중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57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분향을 하고 있다.
▲박상원 세계한인재단 총회장이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중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57주기 추모식'이 시작되기 전에 무대를 배경으로 잠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황교안 이승만대통령기념사업회장과 유가족 이인수 박사 등이 1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이승만 건국대통령 서거 57주기 추모식에 앞서 묘역을 참배하기 위해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