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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천주교 행사 조직위 이사를 맡은 이유는…
스님이 천주교 행사 조직위 이사를 맡은 이유는… “종교 간의 화합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지요.” 15일 경기 남양주 성관사(대한불교조계종)에서 만난 주지 성진 스님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조직위원회(위원장 정순택 대주교)’ 이사를 맡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창설한 이 대회는 교황도 참석하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가톨릭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국제 행사. 한국 천주교는 대회 준비를 위해 지난달 중순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에서 조직위원회 창립식을 열고 이사진을 선임했다. 성진 스님은 현재 선임된 이사 중 유일한 비 가톨릭계다. 성진 스님은 “그동안 신부, 목사, 교무(원불교) 등으로 구성된 만남중창단 활동을 통해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것을 좋게 본 것 같다”라며 “종교와 세대를 뛰어넘는 온 국민의 축제로 만들고 싶다는 취지에 공감해 참여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은 외국처럼 큰 사회 문제로 비화 되지는 않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더 종교적인 이유로 인한 갈등과 마찰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때 공항, 기차역 같은 공공장소에 설치된 트리를 잘 보면 십자가가 없어요. 대신 별이 달렸지요. 공공기관이 왜 특정 종교를 홍보하느냐는 항의가 심하거든요. 이슬람 사원 건립을 놓고 마찰을 벌이는 곳도 있고요. 지금부터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점점 더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진 스님은 “사회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되면 안 되지 않겠느냐”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인들부터 벽을 허무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의 하나로 성진 스님 등 만남중창단은 26~27일 미국 뉴욕 UN 본부 처치센터(Chuch Center for the United Nations)에서 열리는 제5차 국제평화회의(2024 ICCGC-CoNGO)에서 평화와 종교 간의 화합을 노래한다. 또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는 버스킹 공연을, 뉴저지 사찰과 한인 성당에서는 청년들과 토크 콘서트도 갖는다. 성진 스님은 “종교 간 화합의 첫걸음은 목사·신부·교무·스님 등 각 종교인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라며 “4대 종교인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제가 타 종교 행사에 참여해 돕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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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뒷마당에 온 걸 환영해"…美교회가 땅 내놓는 속사정
"신의 뒷마당에 온 걸 환영해"…美교회가 땅 내놓는 속사정 최근 미국에서 교회 등이 시설 부지를 저소득층 주택 건설에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와 대조적인 종교단체들의 이같은 움직임을 외신들은 '이그비(YIGBY·Yes, In God's Backyard)'라고 부르고 있다. "신의 뒷마당에 오는 걸 환영한다"는 의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미국 온라인 매체 복스에 따르면 이그비 현상은 미국의 저소득층 주택 부족과 교회 공동화 현상이 맞물려 나왔다. 지난 10년간 미국 집값이 42% 오르면서 저소득층의 내 집 마련은 '그림의 떡'이 됐다. 수요는 늘고 있지만,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은 700만호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 내 종교 단체들은 신자 수가 줄고 있는 상황이다. 미 공공 종교연구소에 따르면 1999년 당시 미국인의 70%는 예배 등 종교 활동을 했으나 2020년 이 비율이 47%로 줄었다. 여기에 코로나 19의 여파로 신도 상당수가 온라인 예배를 택하면서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 결과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미국인 비율은 31%에서 24%로 줄었다. 교회 입장에선 대규모 시설을 유지할 필요가 줄었단 얘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교회의 65%는 코로나 이후 헌금이 줄어든 반면, 시설과 주차장을 유지·관리하는 비용은 늘고 있다고 복스가 전했다. 때문에 미국에서 종교시설 3분의 1이 향후 몇 년 안에 문을 닫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복스는 "10만곳이 넘는 교회·유대교 회당·모스크가 문 닫는 것"이라고 전했다. 교단 한 곳, 워싱턴 DC 절반 크기 부지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만 해도 일부 교회는 부동산을 수백만 달러에 매각해 이득을 봤다. 하지만 현재 대다수 종교단체는 매수자를 찾지 못해 '급매' 간판을 내거는 처지다. 이에 종교단체들은 비영리 단체, 지자체 등과 협력해 활용도 낮은 부지에 저소득층 주택을 짓는 프로젝트에 뛰어들고 있다. 샌디에이고 흑인 교회인 베델 AME의 하비 본 수석 목사는 재향군인·고령자를 위한 주택 건설에 교회 부지를 제공하기로 하고 지난해 기공식을 했다. 교인 650만명을 거느린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교회(COGIC)'의 경우, 보유 부지 면적만 2만1000에이커(약 84㎢)로 워싱턴 DC의 절반에 달한다. COGIC 측은 성명에서 "저소득층 주택 건설은 교단 사명의 핵심 부분이다"고 밝혔다. 농구선수 출신의 사업가인 매직 존슨, 영화배우 덴젤 워싱턴 등 유명 교인들이 프로젝트에 수백만 달러를 보탰다고 이코노미스트가 전했다. 이전 2000만원 VIP루트 나왔다…"대선 전, 넘자" 美국경 몰린 중국인 지역 사회 차원에서도 주택·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 단체와 윈-윈(win-win)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에 미국 각지에서 이그비 현상과 관련한 법안이 최근 발의됐거나 검토 중이다. 복스에 따르면 지난 3월 주택·도시 문제 위원회 위원장인 셰로드 브라운 상원의원(민주·오하이오)은 의회에 이그비 법안을 제출했다. 부지에 저소득층 주택을 짓는 종교 단체에 보상금을 주며 독려하는 내용이 골자다. 브라운 의원은 "미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저렴한 집을 구하는 건 너무 어렵다"면서 "법안을 통해 교회·사원·유대교 회당 등 종교 단체 부지에 저소득층 주택을 세워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는 (종교적인) 신앙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캘리포니아·애틀랜타·샌디에이고 등에서 비슷한 법안이 통과했고, 메릴랜드·뉴욕·버지니아도 관련 법안을 검토 중이라고 외신들이 전했다. [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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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CK 시국회의' 구성 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종생 목사, 이하 NCCK) 실행위원회는 산하의 프로그램위원회인 '정의평화위원회'와 '화해통일위원회'가 'NCCK 시국회의' 구성 건의 안을 지난 7월 25일 정기실행위원회에 상정했으며, 표결로 가결됬다. 발족 기자회견과 시국토론회, 시국기도회 등의 활동계획이 공개되었으며, 동 안건에 대해 원안 대로 가결하자는 측과 프로그램위원회의 설치 목적이 존재하므로 위원회 차원에서 노력하면 된다는 의견, 위원회를 넘어 NCCK 전체의 활동으로 하기는 여러 이유로 부담이 있다는 의견, 현재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준비로 여유가 없다는 등 다양한 논의가 장시간 진행되었지만 표결 결과 시국회를 구성키로 했다. 한편 실행위원회는 지난 회의에서 의결정족수가 부족해 다루지 못했던 헌장세칙 개정안을 가결했고, 추가 경정 예산안과 교회협인권센터(이사장 이승렬 목사)가 요청한 명칭변경을 위한 대화위원회 구성의 건 등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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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연구 기틀 개척 공로
▲ 민경배 박사는 이날 토론회에 참여해 교회사학 연구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사)국제독립교회연합회(총회장 정인찬 목사)와 웨이크사이버신학원은 제 3회 웨이크사이버신학포럼을 지난 5월 20일 CTS아트홀에서 '한국교회사에서 바라보는 역사신학자 민경배 박사'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민경배 박사는 1972년 한국기독교회사를 발간함으로서 한국교회사의 연구와 교육분야의 체제와 틀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이날 한국의 교회사 연구에 권위자로 평가 받고 있는 이상규 박사(전 고신대학교 부총장)와 박명수 박사(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등이 발제자로 초청되어 민경배 박사의 생애와 학문, 민족의 이해, 내연과 외연으로 구분한 교회사 서술구도 등을 거론했고, 대체로 한국교회사의 기초부터 성숙단계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기여를 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 정인찬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총회장은 토론회 주최자로서 이날 교회를 위한 좋은 대안이 되기를 기대했다. ▲ 정인찬 박사(국제독립교회연합회 총회장)는 동 교단과 웨이크사이버신학원이 민경배 박사에 대한 토론회를 진행하게 됨은 한국교회에 크게 도움이 될만한 일이라면서 이 자리에서 논의된 내용들이 복음전파에 획기적 기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좌로부터 박명수 박사, 민경배 박사, 류금주 박사, 이상규 박사. ▲ 이상규 박사는 생애와 학문의 개괄 발제를 담당했다. ▲ 이상규 박사는 '민경배 교수의 생애와 학문'을 주제로 발제했다. 이 박사는 민경배 박사는 스승인 백낙준 박사의 계보를 잇는 제 2세 학자라고 평가하고, 한국교회사 학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라고 정의했다. 그가 한국에서 교회사연구를 개척했고, 오늘날 교회사학의 발전에 초석을 놓은 학자라면서 한국의 신학도와 목회자 중 민 박사의 책을 한 권이라고 접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는 1934년 6월 22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읍내리 212번지에서 출생했고, 그의 아호인 '솔래'는 송천리의 솔래(松川)에서 취한 것으로 유추했다. 민 박사는 해방 후 월남해 서울에 정착해 1952년 3월 중앙고등학교를 졸업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20기로 입대해 종군했지만 부상으로 22개월 후 명예 제대했다고 설명했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수학하며 1956년 3월 졸업 후 동 대학원에 진학해 1958년 3월 석사학위를 취득, 스코틀랜드 에버딘대학교 신학부에서 수학하며 마가렛 크리스티나 상을 수상하는 등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동 대학원에 진학 1962년 5월 졸업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귀국한 민 박사는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해 신학대학원 과정에서 수학해 1965년 3월 졸업했고, 1967년 11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이상규 박사는 설명했다. 민 박사는 목사안수 후 이미 교수가 되었지만 영국 런던대학교 신학부로 유학해 1969년 8월 졸업했는데 이 때 로버트 토마스 목사(Rev. Robert Jermain Thoma)를 연구해 조명(민 박사는 이 연구를 통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와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던 토마스 목사가 웨일즈 출신이며, 에딘버러대학교 뉴칼리지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순수한 선교의 열정으로 인한 순교였다는 점을 밝힘)했고, 귀국 후 연세대학교의 교수직을 감당하던 중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에서 1984년 3월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민 교수가 1958년 3월 연세대학교에서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대학원 졸업과 동시 불과 24세의 나이로 부산 분교의 전임강사로 임용된 것이라고 밝혔다. 민 박사는 1958년~1999년 8월까지 41년간 교수직을 감당했고, 연세춘추 편집 및 주간, 교목실장, 기독교문화연구소장, 신학대학장 등 보직을 맡았다고 밝혔다. 1984년에 4년간 교무처장, 1988년 4년간 및 1994년 2년간 연합신학대학원장, 1999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정년으로 은퇴하며 명예교수로 추대, 2002년 3월 서울장신대학교 제 2대 총장으로 4년 후 2006년 퇴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 초빙되었고,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원장과 명예원장, 고문 등을 감당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노력하는 중이라고 평가했다. 이상규 박사는 「한국기독교회사」 및 「한국민족교회 형성사론」, 「교회와 민족」 등 50여 권의 저서, 「에큐메닉스」 등 7권의 역서, 1975년 3월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이 발간하는 「신학논단」에 '루터의 내적 발전과 그 신학적 계보'를 발표 한 이래 17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민경배 박사의 학문적 발자취를 설명했다. 민 박사는 백낙준 박사와 더불어 1966년에 '한국교회사학회'를 조직해 한국에서 가장 오랜 신학회로서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고, 1993년에는 연세교회사학회를 조직해 이 모체를 통해 1997년 6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을 거쳐 명예 원장 혹은 고문으로 지속적인 후학 양성에 주력 중이라고 밝혔다. 학회 활동 외에도 서울YMCA연맹 이사 혹은 부이사장으로 활동, 기독교백주년기념사업회 혹은 순교자기념사업회 등에 관여하거나 학술적 자문 활동, 해외 강연에서의 강좌, 국제학술회 참여 등의 다양한 활동을 수행함으로서 교회의 교사(doctor ecclesiae)로서 일생을 살았다고 평가했다. 이 박사는 민 박사의 교회사연구에 대해 한국교회사 분야를 넘어서는 영향력도 있었지만 특히 한국교회사의 전 영역의 다양한 주제를 연구 및 개척했고, 국내외 각종 도서관이나 역사관, 고문서관를 섭렵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의 저술목록은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 선교, 예전, 인물, 기구, 교파, 민족 혹은 독립운동, 외교와 국제관계, 역사인식과 방법론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거나 개척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연구되지 못했던 여러 분야를 선구적으로 연구했고, 한국교회의 기원부터 해방 이후 교회 현실의 문제까지 연구와 재 해석, 사실규명, 사실의 의미 석명 등을 진행했는데 예를 들면 민경배 박사가 연구했던 '로버트 토마스: 한국 초기 선교사의 한 유형과 동서 교섭의 문제' 등이 그러하다고 밝혔다. 한국 기독교의 시원을 서구형 기독교와 미국형의 교파형 선교로 설명하거나 역사환경과 신앙행태의 구조적 차이를 석명하는 역사지리학, 한국교회 찬송가사, 기독교 신앙과 민족문제에 대한 접근 등의 연구방법론은 모두 민경배 박사가 개척한 분야라고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 저 「교회와 민족」에 수록된 '한국 근대 문화와 기독교의 형태 및 그 영향범위'를 이 박사는 살피면서 기독교 접촉의 단계를 넘은 수용 및 토착화의 과정을 연구한 선구적 연구형태였고, 여기서 서북형(黃平道, 체제에서 소외된 서북지방 특유의 종교적 심정)과 기청형(畿淸, 京忠道, 유교 양반의 지식인 계층의 존왕적 충성)이라는 두가지 신앙 형태 혹은 수용 배경을 제시하고, 이것을 민족운동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했으며, 이런 구분은 이미 송창근과 김린서 등에서 보이지만 민 박사는 이를 실증적으로 체계적으로 도식화했다는 공로를 이 박사는 설명하면서 이런 분석의 틀 자체가 선구적 시론이었고, 후학들의 발전적 연구의 토대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민 박사의 저술 「한국기독교회사」는 한국교회 역사 최초의 교본적 통사였으며, 여러 신학교육기관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는데 1968년 출간해, 1972년 증보판, 1982년 개정판, 1993년 증보판, 2007년 순한글판으로 발간되는 등 결국 690쪽의 대작으로 발전되었다고 밝혔다. 이전에도 이런 류의 연구를 백낙준, 김양선, 정인과, 장정심, 변종호 등이 진행했지만 한국기독교회사의 체계적 통사로서는 볼 수 없었고, 민경배 교수의 것은 근대 이전의 기독교의 접촉부터 한국전쟁과 1960년대까지의 한국교회사에 대한 체계적 최초의 통사였다고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가 민족교회 또는 민족교회론을 주창함으로서 당대 주류였던 선교확장사에 대한 반대급부가 되어 논란이 되었고, 민족이라는 말에도 어감상 오해를 받았던 부분들이 있었다고 이상규 박사는 밝히고, 민 박사는 한국교회를 '민족교회'로, 한국교회사를 '민족교회형성사'로 인식함으로서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주체적으로 기술했다고 평가했다. 민 박사 이전의 기존 한국교회사의 연구는 '선교사적' 연구로서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가 주체가 되고, 파송국의 자료를 의존한 역사기술이었지만 민 박사는 선교사 파송국 교회의 연장이 아닌 우리가 주체가 되어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민족교회사'로서 인식했고, 이는 새로운 연구접근방식이고 독창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민 박사의 '민족', '민족교회', '민족교회 형성론'은 배타적 민족주의나 문화민족주의, 혈통에 근거한 개념이 아니라 언어나 역사, 문화,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민족공동체로서의 교회이며, 역사와 고난을 함께 공유한 교회라는 점에서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민 박사는 각기 다른 선교부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어도 교파 중심의 교회가 아닌 민족공동체의 하나의 연합된 교회를 민족교회로 파악하고 있고, 탈 서양 선교사를 지향하되 친일로의 경도가 아니며, 친 동향을 지향하되 반 선교사로 경도되지 않는 성격이라고 이상규 박사는 평가했다. 민경배 박사의 교회관은 '신도들의 세계적인 공동체'라는 개념을 상정하고, 기독교회사는 그리스도라는 뚜렸한 역사상의 인물과 교회라는 신도들의 세계적인 공동체, 사(史)라는 현저한 개념들을 다루고 있으며,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도, 완전할 수도 없다는 명제 속에 어느 한 측에서 반대측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무리하며, 완전할 수가 없을 수 밖에 없는 특정 논리를 들이대며 교회분열을 일삼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고 분석하고, 민 박사는 순결과 연합이라는 두 축의 선택상황이라면 연합에 더욱 의미를 둔 것이라고 이 박사는 밝혔다. 한국교회사를 다루며 '외연과 내연'이라는 신앙현상학을 개발해 역사연구의 틀을 제시한 것이 민경배 박사의 가장 특별한 공로라면서 그가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기간 동안 순수한 신앙의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민족운동과 도덕운동, 사회변혁운동으로 나타나 한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는 역사의 틀이라고 이 박사는 정의했다. 이 연구 틀은 한국 뿐 아니라 모든 나라와 시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원리라고 했다. 그의 저서 「민족과 교회(1981년)」 등에 게재된 논문들에 '내연과 외연'이라는 상관구조를 해명하ㅁ녀서 1903~1907년 한국교회 부흥은 신앙의 내연 구도였고, 1919년 이래 민족독립운동으로 외연 되었으며, 또 다시 김익두나 이용도의 신앙부흥운동을 통해 내연화하고, 1935년 일제의 가혹한 군국주의적 전시체제 하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됨에 따라 마지막 저항으로 외연화 되는 구조인데 결과적으로 신앙운동이 민족운동의 동력이 되는 입체적인 해석방법이라고 이 박사는 일례를 들었다. 민경배 박사의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내연과 외연의 현상학은 기독교인의 현존과 존재 양식, 사회 참여 양식에 대한 역사적 실례를 제시하고, 즉 그리스도인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신앙고백적 삶을 추구하면 결과적으로 사회변혁적 역할도 감당하게된다는 연구의 흐름이라고 이 박사는 설명했댜. 이 외연과 내연의 연구방법론은 현재도 민 박사의 제자들과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에서 지속적으로 사용 및 적용하고 있는 방식으로 알려졌다. 이상규 박사는 논문의 말미에 "우리가 배워하 할 것은 그의 저술이나 학문적 결실만은 아닐 것이다..., 학문에 대한 열정, 진리에 대한 확신, 후학들에 대한 애정,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사랑"을 주장했으며, 실제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학술활동이 아닌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성도들이 모여 성경이 시키는 교제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지하고있다. ▲ 박명수 박사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발제를 담당했다. ▲ 박명수 박사는 '민경배 교수의 한국교회사학에 나타난 "민족" 이해'라는 제목의 발제를 담당했다. 박 박사는 민족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선 단어라고 전제하고, 민족 또는 민족주의는 한국적 상황에서 외세나 제국주의에 대칭되는 차원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공산좌경세력들이 미국을 향해 제국의 프레임으로 보고, 미국에서 온 서양 기독교 세력도 적대하려는 즉, 북한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미국을 중심한 서구문화의 전달자로서 한국 문명화에 앞장서면서 조국의 근대화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겼던 것이라고 박 박사는 평가했다. 부정적 측면으로서 좌측의 민족주의세력이 볼 때 한국교회는 민족주의에 대한 가장 큰 도전세력인 미국의 친미집단이자 반민족주의집단이라는 프레임이 형성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박 박사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원래는 개신교의 핵심 단어였다면서 기독교는 천주교와 달리 민족을 강조했는데 루터교가 독일민족주의와 손을 잡았고,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와 손을 잡는 한편 성경을 강조하느 개신교의 특징상 각국의 자국어성경을 사랑해서 개신교가 들어간 지역마다 민족의식이 함양되었다고 반박했다. 또한 민족은 한국적 상황에서도 우파의 단골개념으로서 빈부와 계급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개념으로서 서구제국주의에 맞서 국민을 단결시키는 용어라고 정의하고, 공산주의는 원래 민족을 부루주아의 용어로 이해하고, 무산의 노동자계급들이 주도하는 계급혁명의 완성을 진정한 해방이라고 주장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좌익은 계급이라는 단어보다는 민족이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계급혁명을 진행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차제에 우리는 한국교회와 민족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박 박사는 민경배 박사의 저작들에 나타난 민족 개념은 현재 일부가 통용하는 반제국주의적 이념 중심의 민족주의가 아닌 서구 기독교와 힘을 합해 민족을 부강케 만드는 현실적 개념으로서의 열린 민족주의였다고 분석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를 정리하는 차워에서 초기 한국교회사가 시도되었으며,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보고서를 중심으로 선교 역사를 정리했는데 이 같은 입장에서 초기 한국개신교사를 총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백락준박사였고, 그는 교회사는 근본적으로 선교사라는 입장에서 한국개신교사를 정리했다고 박 박사는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사를 선교사가 아닌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서술하려는 최초의 학자이며, 복음을 전해준 자의 자료 뿐 아니라 복음을 받은 자의 자료도 분석 정리했다고 박 박사는 설명했다.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을 논할 때 선교사들이 한국 민족교회의 주체가 되기는 힘들다는 한계가 있고, 그들이 한국 민족의 고통을 이해하더라도 우리의 정서를 대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박 박사의 평가다. 그렇다고 민 박가 선교사들을 배타적으로 평가한 것은 아니며,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 못하더라도 한국인의 편이지 일본제국주의의 편은 아니며, 이런 측면에서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은 "탈서양종교사(脫西洋宗敎史)하되 친일로 경도(傾倒)되지 않고, 친동양(親東洋)하되 반선교사로 기울지 않는, 강력한 탈권(脫圈) 에너지가 참된 의미의 '조선 민족의 교회'를 형성 해 나가는 저력"을 근본으로 삼고 있음을 밝혔다.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이 마치 기존의 선교사관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의 주된 비판의 대상은 소위 진보신학의 역사이해에 집중되어 있다는 평가를 했다. 민 박사의 저서 「교회와 민족(1982)」이 출판된 때 그 민족교회론이 활발히 전개되던 때는 한국 신학계에서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이 강하게 대두되던 때였고, 민 박사의 민족교회론은 그러한 주장들에 의구심을 들어냈다고 박 박사는 밝혔다. 한국교회사를 보는 시각 중 일부가 민중사적으로 보려는 것은 조선 말의 권력 체제에서 소외된 농민층의 저항이던 동학혁명의 계승운동으로 간주하려하고, 이는 한국기독교의 사명과 역사를 민중의 저항의 한계에서만 가치를 인정하려할 때 민중의 저항력 결속의 한 에너지에 기독교가 동원되었다는 식의 주객 전도의 왜곡이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측면이라고 제시했다. 민경배 박사의 민족은 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민족공동체이지 어떤 특정 계급을 배제하려나 지칭하려는 계급공동체가 아니라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민 박사는 한국적 신학으로 한국교회사를 바라보려는 시각들에 지나치게 보수적인 시각을 갖은 나머지 한국교회사가 선교사들에게 굴종된 역사이므로 무가치하고, 새롭게 한국인의 신학을 만들어야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초기 한국교회사는 무의한 잘못된 역사로 보여질 것을 우려하는 측면도 언급되었다. 박 박사는 민경배 박사에게 민족교회는 선교사와 대칭 개념이 아니며, 그는 교회의 역사성과 보편성을 믿기에 교회론을 강조하는 이유도 되는데 그에게 교회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성례전에 참여하는 보편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의 민족교회론은 보편교회와 대칭되는 개념을 갖고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편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어떻게 한국교회가 주체적으로 소화했는가를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개신교는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미국 개신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가 제국주의적 선교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러한 고종은 이러한 당시 개신교의 선교사들을 등에 업고 조선 민족을 위협하는 세력들로부터 보호받으려고 했기에 한국 기독교를 서구 제국주의와 동일선상에 둠은 몰 이해한 일이라고 박 박사는 강조했다. 박 박사는 진보주의적 교회사가들 상당수는 선교사를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교회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제국의 침략을 발견하려는 경향을 보였지만 사실 당시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아닌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침략에서 조선을 지켜줄 세력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에 대해 민경배 교수는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가 기여했다는 입장인데 민족주의라는 서구적 개념은 국민 각자가 주인 대접을 받는 민주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개신교가 조선에 등장하면서부터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에 거대한 에너지로 봤다고 박 박사는 평가했다. 조선의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방법은 스스로 전도하고, 자립하며, 통치하는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사용했고, 이것은 책임적 시민을 양성함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종교적인 것 외에도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교육과 경제 독립을 위한 실업교육에 앞섰는데 본래 자립적인 서북사람들은 기독교정신으로 무장해 민족산업을 형성함에 앞장 섰고, 이런 배경으로 근대적 의미의 시민의식을 진 민족운동을 벌일 수 있는 집단이 바로 개신교였고, 독노회를 1907년에 총회를 1912년에 조직함으로서 전국조직망을 갖춘 상태에서 3.1운동을 맞이해 전국적인 독립운동까지 기여했던 애국의식, 책임의식 등의 발로였다고 보는 것이 민경배 박사의 지론이었다고 박 박사는 평가하고, 민경배 박사의 민족교회는 체험적 신앙을 내연으로 해서 한국교회의 반경을 외연으로 확대해가는 복음주의적 교회임을 언급했다. ▲ 류금주 박사는 민경배 박사에게 교육받으며 습득한 교회사학 연구의 방법론을 설명했다. ▲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는 민경배 박사의 직계 제자로서 그에게서 수학했던 역사연구방법론인 '민경배의 한국교회사 서울의 구도: 신앙 내연(內燃)-외연(外延)'을 발제했다. 민경배 박사의 교회사를 보는 시각에서 내연(燃)은 불탄다는 것이고, 외연(延)은 이어지진다는 뜻으로서 이는 곧 신앙이 안에서 불타면 그 에너지가 반드시 바깥으로 나오기 마련이라는 구도라고 설명했다. 민경배 박사는 1934년 생으로서 당시에는 일제 치하로 나라가 없던 시절이었고, 출생된 해의 한국교회는 선교 50주년이었으며, 한국전쟁 때는 공산정권의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월남했고, 수도 서울에 정착해 교회와 조국의 근대화와 발전상을 모두 경험한 교회사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모두 경험한 교회사 박물관 급의 유능한 교회사학자라는 설명을 했다. 류 박사는 민경배 박사가 한국교회사학을 연구해 온 것은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로 개화기부터 근세, 현대까지 한국의 모든 역사와 문화, 학문에 영향을 미친 것은 기독교였음을 체험했고, 한국교회가 잘 됨으로서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 전세계에 밝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한국교회사를 연구함에 있어 복음과 교회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되었던 것이 큰 동기였다는 방향으로 발제를 이어갔다. 민 박사의 교회사에 대한 사상은 연세대학교에서 평생을 교회사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게 했고, 한국교회사학연구원(초대원장 민경배, 이사장 박옥선)을 지난 1997년 6월 창립해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교회사학을 연구하고, 신앙과 교회사를 기반한 교제를 진행해오기도 했으며, 동 연구원은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동북아 3국의 교회사가들을 모아 '동북아시독교사학협의회'를 구성해 10년간 교류해오는 등 사명을 감당했다고 류 박사는 회고했다. 민경배 박사는 11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역사방법론을 지난 2018년 약 1년간 연구발표했다면서 동 방법론은 정량론, 내연외연과 신앙현상학, 신앙지리학, 실체론, 그림처럼 아름답다, 질문-에듀스, 전역사체계화, 입체론, 유기역사론, 역사-시기 완충론, 역사-등거리론 등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류 박사는 실체론에 대해 사크라멘토 곧 성례는 예수그리스도의 역사 통치의 역사내 지점으로서 역사는 허상이 아닌 예수께서 실재 임하셔서 다스린다는 실체를 말함이라고 설명했다. 역사-등거리론은 역사는 하나님의 경륜의 집행 장소로서 각 시대와 각 존재에 독자적 사명을 분여하심으로서 역사를 경륜해가시는 것이며, 사명 받은 존재는 자신의 영역에서 주어진 사명과 기업, 자산과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다는 개념임을 설명했다. 한국교회사를 정리함에 백낙준 박사는 선교사관, 주재용 박사는 민중사관, 민경배 박사는 민족사관이라고 구분하고, 선교사관과 민중사관은 선교의 입장 또는 민중의 입장으로서 사관을 정해놓고 고찰하는 연역적 측면이 있고, 민경배 박사는 연구해보니 신앙과 함께 민족이 각 시대의 실체로 부각되었다는(1880~1960년대 한정) 귀납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류 박사는 분석했다. 정확히는 민경배 박사의 민족사관은 민족교회사관으로서 독자적인 것이 아닌 교회와의 관계에서 고찰되는 것이며, 그의 민족교회사관을 1960년까지 한정하는 이유는 그 '민족'이라는 말이 (특정 시대부터) 기독교회와 무관하게 사용되고, 용법 또한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교회사연구방법론에 수학적 단어인 '함수'라는 개념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류 박사는 이 역학 함수관계를 교회를 중심으로 4방향에서 선교사와 신앙, 일본, 민족, 초월적, 서양적, 동양적, 역사적 요소가 상반되게 위치하는 방식임을 설명했다. 즉 신앙은 초월적 차원에서 이해되고, 민족은 역사적 차원에서 이해, 친선교사는 반일을 전제하고, 친일을 포함한 동양적 기독교는 반선교사적 경향으로서 이를 요약하면 신앙과 민족이 상반되고, 선교사와 일본이 상반되는 방식으로 시간 내에서 교회와 신앙, 세상은 영향을 주고 받은 방식이라고 류 박사는 요약했다. 그 상호작용은 늘 교회와 민족은 한국사에서 초월적 신앙 차원에서도 묘하게 긍정적 교섭이 확인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내연과 외연의 상관관계에 있어 신앙이 안에서 불타오르면 자동적으로 바깥으로 영향이 이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신앙이 먼저 내면에서 불타오른다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은 신앙의 영역이었지만 시기적으로 을사늑약의 주권상실 시기였고, 신앙 자체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 번지는데 이 때 한국교회가 3.1운동을 주도하게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원점, 하나님께 대한 충성 그 자체는 역학상 결과적으로 일제의 국체에 대한 민족의 저항 에너지와 동일시되는 그런 관계라는 설명이다. 신앙의 현상학은 안에서 불타오른 신앙이 외연으로 번질 때 각자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현상화하는 것으로서 같은 신앙 에너지가 신앙운동자체로 발산도 하지만 때로는 도덕 운동, 민족 운동, 사회 변혁력으로 작동하는 것인데 故 주기철 목사는 독립운동을 외치던 사람은 아니었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함으로서 일본 제국의 핵심인 천황 숭배에 저항하고, 일본 정부의 국체에 정면 도전하는 '반일 민족주의자'로서 현상화한 그러한 관계라고 류 박사는 밝혔다. 민경배 박사의 역사관은 나무와 열매 중 나무가 우선하고, 신앙이 선행해야 실천이 이뤄지거나 안에서 신앙이 불타올라야 저절로 외부로 들어나거나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그 가지인 성도들이 자연히 열매를 맺는 내연과 외연의 구도, 직접성, 자동성 등은 지극히 성경적인 역사관이라고 류 박사는 밝혔다. 류금주 박사는 내연과 무관한 민족운동은 한국 교회사의 주류에서 사라졌고, 민족에 대한 주목이 1960년대까지로 한정한다고 해도 민경배 박사의 내연과 외연, 신앙의 현상학 등 다양한 교회사연구의 구도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여전히 적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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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 워싱턴DC서 창립 총회
▲참석자들이 창립대회 직후 예배실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창립대회 직후 행사장 밖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 워싱턴DC서 창립 총회 40여명 참석…공동 발기인에 20개 교단 소속 120명 참여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모임인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이하. 기평넷, Korean Ecumenical Peace Network)가 5월22일 워싱턴 디씨 소재 연합감리교 예배실에서 창립되었다. 이날 창립예배와 총회에는40여명이 참여했으며 공동 발기인에는20개 교단 소속120명이 참여했다. 북미 한인 기독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초대회장 김정호 목사(UMC)가 환영사를 하고 있다. 환영사에서 김정호 목사(UMC)는"남북 관계가 극단적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북미 기독교 평화 네트워크의 시작이 참 귀하다."고 밝히고"우리가 그동안 평화에 많이 목말랐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조국 한반도 평화의 그날이 오면 오늘의 이 모임이 작은 디딤돌이 되었다는 겨자씨 만한 기록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창립을 환영했다. 예배는 김대호 목사(PCUSA), 손태환 목사(PCUSA), 정영민 목사(RCA), 조동호 박사(퀸즈대) 등 연합 찬양팀의 인도로 힘차게 시작되었다. 이어 조원태 목사(PCUSA)의 사회와 김기리 신부(성공회) 박상희 목사(기장)의 축도로 이어졌고, 김정호 목사(UMC)가"다시 또 우물파는 사람들" (창세기26:12-35)을 주제로 설교했다. 이어서 발제 순서에서는 김충성 목사(제자회)가'북미 에큐메니칼 평화운동의 역사'에 대하여, 김진양 목사(UMC)는'북미 기독교 평화네트워크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김충성 목사는60년대 창립된 ‘북미기독학자회’와70년대 창립된 ‘미주 목요기도회’가 한국의 민주화, 인권, 평화통일 운동과 연대하여 기도하고 행동했던 역사를 소개했다. 김진양 목사는"북미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삼았으며 평화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밝히고"분단79주년을 맞이하는 조국이 미, 중의 패권경쟁과 핵무기 및 군비경쟁, 군사훈련 등으로 인해 대결과 갈등이 더욱 심화된 이 시기에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와 연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어서 진행된 총회에서는 정관과 창립선언문을 통과시켰고 초대 회장에 김정호 목사(UMC), 초대 사무총장에 조원태 목사(PCUSA)를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창립 발기인120명의 이름으로 작성된 창립 선언문에서는"그동안 기독교인들로서 정의와 평화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사명을 우리가 잘 감당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다짐한다"고 밝혔다. "하나, 우리는 북과 남 정부가 이전의 평화통일 정책으로 돌아가 대화와 협력에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 우리는 미국과 기타 강대국이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조성하는 대화와 정책을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 우리는 교단의 벽을 넘어 평화를 위한 연대와 협력을 이어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기평넷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미에서 기도운동을 펼쳐 나갈 것이며, 다양한 교단과 학계 그리고 단체들과 연대하여 평화를 위해 애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더불어 기평넷은 공동 발기인으로 참여한120명을 평화용사300명으로 확대할 것이며, 제2차 총회는 내년4월에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열기로 결정하였다. ▲초대사무총장 조원태 목사(PUCSA)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참여자들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참여자들이 연방하원 Bill Foster 의원 사무실에 찾아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대화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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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Focus] 휴스턴 대형 '레이크우드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
▲사진 왼쪽부터 트로이 피너 휴스턴 경찰서장, 조엘 오스틴 레이크우드 교회 목사, 존 휘트미어 시장, 사무엘 페나 소방서장이 11일 오전 레이크우드 교회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 후 기자회견에 참여하고 있다. [Religion Focus]휴스턴 대형 '레이크우드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 ‘달갑지 않았던 목사’ 아들에서 인기 설교자로…총격 사건으로 새 ‘스포트라이트’ 메가와트 미소 등 기독교 브랜드化…십자가·예수상 등 전통적 종교 상징 일체 없는 지구본 앞에서 설교 비평가들, “솜사탕만 있을 뿐, 고기는 없어‘ 혹평도 휴스턴, 텍사스(김정태 기자)-조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는 미국의 종교에서 가장 친숙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일요일 오전(11일 현지시간) 36세의 여성이 총기를 난사해 5살 소년과 50대 남성에 중상을 입힌 끝에 비번 경찰근무 경비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 한 휴스턴 대형교회(Lakwwood Church)를 이끌고 있는 목사는 메가와트 미소와 웨이브진 머리, 인기 있는 기독교 브랜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60세의 그는 이전 농구 경기장에서 매주 약 45,000명의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데, 텔레비전 설교를 통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오스틴은 아버지로부터 소명을 물려받아 신도들의 규모를 거의 5배나 늘렸다. 그의 저서 "Your Best Life Now: 7 Steps to Living Your Full Potential(당신의 최고의 삶 지금: 당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7가지 단계)"는 거의 300만부가 팔렸다. 닐슨 미디어 리서치에 따르면, 2000년대 중반에 오스틴은 미국의 어떤 설교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청했으며 전체 가구의 95%에 달했다. 수년간 그의 봉사는 백인, 흑인, 히스패닉을 거의 동등하게 혼합시켜 왔다. 이는 전국 대부분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다양성이었다. "웃는 설교자"라는 별명을 얻은 오스틴은 2004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여유로운 설교 스타일은 격렬한 설교보다 기분 좋은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다는 비판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느긋한 설교 스타일은 또한 불타는 설교보다 기분 좋은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어 비판을 받았습니다. 오스틴은 소셜미디어 플랫폼 X에서 자신의 1천만 명의 팔로워들에게 자신의 교회 공동체가 "황폐해졌다"고 했다 오스틴은 “이러한 어둠에 맞서 우리는 믿음을 굳게 잡고 악이 승리하지 못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며 “하나님께서는 가장 어두운 시기를 통해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함께 이 비극을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고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굳건히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요일 총격 사건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 오스틴은 자신이 설교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이렇게 큰 무리를 인도하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스틴은 1999년 아버지 존 오스틴(John Osteen) 목사가 돌아가시기 전 일요일까지 설교한 적이 없었고, 그런 소망도 없었다고 말했다. 존 오스틴은 1959년 버려진 사료 상점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기독교 레이크우드 교회( Christian Lakewood Church)를 설립했다. 오스틴은 2004년 AP 통신에 그의 아버지의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뒤에 있는 것을 선호했다고 말했다. 그는 1982년 오클라호마주 털사에 있는 오랄 로버츠 대학(Oral Roberts University in Tulsa, Okla)에서 공부를 마친 후 텔레비전 제작자로 아버지의 참모진에 합류했다. 아버지 오스틴 목사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설교자의 아들은 마지 못해 강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아버지는 병원 침대에서 전화로 아들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오스틴은 2004년 “간호사들은 그가 그렇게 행복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존 오스틴은 5일 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그가 설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그냥 속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비평가들은 Osteen to task for downplaying the sinful nature of humanity and the need for repentance (오스틴이 인류의 죄악된 본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경시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오스틴의 어머니인 도디 오스틴(Dodie Osteen)은 2005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We don’t preach the gospel sad, we preach it glad.(우리는 복음을 슬프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전한다)"고 말했다. 댈러스에 본부를 둔 종교감시단체 트리니티(Trinity) 회장 올레 앤서니는 2004년 AP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To me, it’s cotton-candy theology, There’s no meat. They just make everybody feel good. (나에게 그것은 솜사탕 신학이다. 고기는 없다. 그들은 단지 모든 사람을 기분 좋게 해줄 뿐)"이라고 했다. 오스틴은 휴스턴 로켓츠(Houston Rockets)의 이전 홈구장을 교회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들은 1990년대에 두 번의 NBA 타이틀을 획득했고, WNBA의 휴스턴 코메츠(Houston Comets)는 4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곳은 오스틴이 미래의 신부인 빅토리아(Victoria)와 함께 휴스턴 로켓츠 농구 경기를 보러 나갔던 첫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이전 경기장을 교회로 바꾸는 데는 15개월이 걸렸고 완성하는 데 약 7,500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2005년 개장 당시에는 두 개의 폭포, 세 개의 거대한 TV 화면, 록 콘서트에 버금가는 조명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12열의 풍부한 보라색 좌석이 있는 2개의 합창단 로프트가 폭포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살아있는 나뭇잎으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십자가, 신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기타 전통적인 종교적 상징은 없었다. 오스틴은 2005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그런 상징을 한 번도 표시한 적이 없으며, 단순히 전통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오스틴은 천천히 회전하는 커다란 황금색 지구본 앞에서 설교한다. 교실과 함께 예배당, 세례 장소, 청년들을 위한 모임 공간, 교회의 텔레비전 방송 활동을 위한 전체 층이 추가되었다. 오스틴은 2004년 AP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한테는 이곳이 좋은 레스토랑인 것 같다. 좋은 음식이 있으면 사람들이 올 것“이라며 “그래서 우리는 서비스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을 고양시켜야 한다. 그들은 '‘You know what, I feel better today(오늘 기분이 좋아졌어요)'라고 말하며 떠나야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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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0주년을 하나님께 감사
- ▲ 장만희 한국구세군군영 사령관이 설교를 담당했다. ▲ 제리 필레이 세계교회협의회(WCC) 총무 ▲ 유인촌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김종생 NCCK 총무가 감사 말씀과 광고를 담당했다. ▲ 제리 필레이 WCC 총무가 성찬식에 참여했다. ▲ 김종생 NCCK 총무가 성찬식에 참여했다. ▲ 새로운 100년을 향한 몸기도를 진행하는 모습. ▲ 100인 찬양단의 특송 모습. ▲ 이날 김은섭 목사, 박경조 주교, 김영주 전 NCCK총무 등 주요인사들이 참석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 윤창섭 목사, 총무 김종생 목사, 이하 NCCK)는 지난 1924년 9월 24일 창립된 것을 기념해 'NCCK100주년 에큐메니칼 감사예배'를 지난 9월 22일 서울에 소재한 연동교회당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제리 필레이 총무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매튜스 죠지 추나카라 총무,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유인촌 장관 및 이를 축하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모여든 세계교회지도자들, 국내 교회지도자들 등이 모인 가운데 개최하고, 앞으로도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감사예배는 김영걸 대한예수교장로회 부총회장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회장 윤창섭 목사의 축도, 구세군한국군국 장만희 사령관의 설교 등으로 진행되었다. 장만희 사령관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100년 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라는 명칭으로 모였고, 지금까지 서로를 이해하며 연합하는 정신을 실천해왔고,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며 정의와 생명, 평화를 이 땅에 있어지기 위한 여정을 걸어왔다면서 9개 교단이 모였기에 서로간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으나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한 협력의 정신을 실천하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세계교회와의 끈끈한 연대는 사회정치적인 어려움이 닥칠 때에도 복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왔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었음을 강조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창조세계가 신음하고 있으며, 약육강식의 불의가 호령하고 있다고 토로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권눙과 은총을 입어 이웃들의 상처를 싸매어주는 노력을 NCCK와 한국은 물롤 세계의 교회와 성도들과 함께 수행하자고 강조했다. 제리 필레이 세계교회협의회(WCC) 총무는 올해는 NCCK 100주년이면서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80년, 휴전협정 71년이 되는 중요한 해로서 분단과 전쟁, 독재, 국내외 정세이 긴장 등이 공존해있는 상황이라고 평가하고, 그럼에도 NCCK는 오랜 동안 회원교단과 세계 에큐메니칼 공동체의 동료들과 함께 부정의에 맞선 용감한 시간을 보내온 것에 감사를 표했다. 창조세계를 돌보고, 인권을 지키려는 저항을 지속해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에 영감을 줬다고 분석했다. 우리 모두는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한의 주도적 역할에 헌신해야하며, 이를 위해 도잔소의 정신과 유산을 다시금 발휘하자고 강조했다. 유인촌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NCCK는 한국교회 최초의 연합기구로서 창립되어 100주년을 맞은 것을 축하하고, 지금부터 100년 전의 우리 민족은 어두움에 고통받고있었지만 장로교와 감리교 등 여러 교파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모여 이 사회에 빛과 소망을 주기 위해 모였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협력은 한국 기독교 뿐 아니라 종교계에 훌륭한 모범이 되고있다며, 앞으로도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매튜스 죠지 추나카라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총무, 니콜라스 그리스 메소게아와 라브레오티키 대주교는 바르톨로메오스 세계 총대주교를 대신해 축사했고, 입법부를 대신해 우원식 대한민국 국회의장은 서면 축사를 담당했다. NCCK는 이날 지난 역사를 통털어 직간접적인 인연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100인 합창단을 구성했고, '모든 아픔이 나의 통증이 되어'라는 제목의 찬양을 작곡해 특별찬양 순서를 진행했다. 동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한 마음으로 성찬식에 참예했고, '새로운 100년을 향한 한 몸기도'를 이경호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와 이은영 한국YMCA연합회 제2부회장, 최경아 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 등을 순서자로 모든 참석자들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늘어선 가운데 진행하는 특별함도 연출되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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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종교 일반(해외,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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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0주년을 하나님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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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백 주년에도 남북통일과 평화
- ▲ NCCK 회장 윤창섭 목사 ▲ NCCK 총무 김종생 목사 ▲ NCCK 100주년 특별사업위원회 위원장 김학중 목사 ▲ WCC 제리 필레이 총무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신승민 목사 ▲ 독일복음선교연대 데틀레프 크노헤 의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윤창섭 회장, 총무 김종생, 이하 NCCK)가 지난 1924년 9월 24일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라는 명칭으로 출범되어 올해 9월 24일에 창립 1백주년을 맞아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하던 중 지난 20~21일간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등 전세계의 에큐메니칼 동역자들을 초청해 국제컨퍼런스를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강성영 총장, 전철 원장)과 라마다동대문호텔에서 그 첫번 행사로서 개최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00주년 국제컨퍼런스'의 참석자들은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 일본제국에게 국권을 빼앗긴 조선의 암울한 상황에 미국과 호주, 영국 등 서방으로부터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고, 다양한 교파가 들어왔지만 한 마음로 연합해 조선땅의 복음과 독립을 추구해 성공했지만 지금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한으로 분단된 아픔을 통일과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입을 모았다. 김종생 NCCK 총무는 올해가 NCCK의 100주년이자 한국교회선교 140주년을 맞는 중요한 해에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동료들이 서울에서 한자리에 모인 것에 감사하다면서 군사독재 시절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감히 언급할 수 없었던 시기였음에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해 교회와 시민사회가 통일과 평화를 논하도록 물고를 텃던 과거를 회상했다. 이 때 세계교회는 도잔소(1984년)와 스위스 글리온(1986년)에서의 노력으로 남북한의 교회가 마주 앉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점에 감사를 표하고, 한국의 교회들은 평화통일에 대한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오늘의 1백 주년을 맞게 되었음을 설명했다. 그러나 현재 전 세계는 전쟁중이고,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의 위협은 날로 증가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에큐메니칼 동료들과 함께 신앙과 사랑, 협력으로 평화와 통일이 도래하는데 더욱 노력하자고 환영사를 밝혔다. 김학중 NCCK 100주년기념특별사업위원회 위원장은 인류 역사 수 천년 간 경쟁과 협동이 늘 있어왔고, 이를 통한 진보와 발전이 있었다면서 인간의 이기심으로 파국이 온다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협동과 공생을 외쳐왔는데 NCCK의 1백 주년도 그러한 역사였다고 강조했다. NCCK의 이 컨퍼런스에서는 그저 기념하는 마음을 넘어서 우리의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자고 개회사를 통해 촉구했다. 제리 필레이 WCC 총무는 1924년 설립된 NCCK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국가적 차원에서 처음으로 구현한 조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면서 이 역사는 1948년 이후 WCC로 대표되는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전에 모범으로 평가했다. 백년 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 있었지만 2차 대전 후 독립을 얻은 즉시 한국전쟁이 발생되었고, 1953년에 정전협정을 맺었지만 7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갈등이 지속되는 중이며, NCCK는 이러한 재난과 격변의 시기에도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평화, 사회 정의를 추구함으로서 WCC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줬고, 민주화와 인권, 억압과 불의에 맞서 전세계 그리스도인들과 연대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즉,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는 중요한 일을 '도잔소 프로세스'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함께 해왔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반도는 물론 전세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강자에게 억눌리는 중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NCCK와 WCC 및 세계 에큐메니칼 진영과 함께 하겠다고 'NCCK 100년-도잔소 프로세스 40주년'이라는 제목의 주제 강연을 통해 밝혔다. 매튜스 죠지 추나카라 박사(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무는 '동아시아, 정의로운 평화를 향한 에큐메니칼 순례의 여정'이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NCCK의 평화와 통일, 생명의 가치를 세우기위한 다양한 협력을 했다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한국, 미국, 일본, 북한, 러시아, 중국 등의 지리정치학적 역학관계를 설명하면서 그간 미국의 강력한 국력으로 인해 유지되었던 질서가 이제는 중국 등이 부상함으로서 질서가 혼돈을 맞았다는 평가와 더불어 이에 그리스도인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신승민 원장(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과 데틀레프 크노헤 의장(독일복음선교연대) 등은 '한반도 평화를 향한 민과 민의 연대'라는 제목의 패널토론 발제를 통해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성이 교회와 개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있는 현실을 설명하고, 수 십년간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함으로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면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협력을 촉구했다. ▲NCCK 100주년 에큐메니칼 감사예배는 오는 9월 22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연동교회당에서 개최한다. ▲NCCK 100주년 기념대회는 오는 9월 23일 오후 5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다큐멘터리 영상을 두개로 CBS에게 의뢰해 제작했으며, 제 1부 '다가올 역사'를 오는 9월 24일에 제 2부 '기억될 미래'를 오는 9월 25일 각각 11시 경 CBS방송을 통해 방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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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백 주년에도 남북통일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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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하심 깨닫고 전하기로
- ▲ 류금주 원장(사진 중앙)이 수련회 참석자들과 후원자 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 이하 한교사)은 제 2024년 여름수련회를 대덕한빛교회(김은섭 목사 시무) 수양관인 '해울동산'에서 지난 8월 16~17일간 갖고, 하나님은 한국교회와 한국인들의 미래를 예비하실 뿐 아니라, 창조주이시므로 역사와 문화, 경제, 정치 등 다양한 분야를 통해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치시기 때문에 본 회의 회원들은 한국교회사가들로서 그 내용과 방향, 사명감 등을 발견해 실천하고, 성도들과 한국교회에 전하는 일을 감당해야한다는 의견을 나눴다. ▲김은섭 박사는 대덕한빛교회 담임목사이자 한교사 대표고문으로서 첫 강연을 담당했다. 김은섭 박사는 한교사를 통해 한국 그리스도교에 교회사를 연구하는 시초가 놓여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현재 임상목회자로서 하나님께서 구 한말에 그리스도교를 한국에 보내주셨고, 당시 예수를 믿은 신앙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기도 했지만 성경말씀에 따라 한국을 개화했고, 독립운동에 매진하면서도 한국인들에게 희망과 미래를 알려줌으로서 사회적 및 신앙적 구심점을 구성했던 것을 본받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고 성경과 학문연마, 말씀의 실천에 매진해야함을 강조했다. ▲민경배 명예원장은 한국인들이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3년 정전협정과 1952년 한국교회가 분열 되는 등 한국전쟁은 민족과 교회의 분열을 촉발시킨 면이 있다면서 그리스도인 끼리 빨갱이로 호칭하며 탄압하던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등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때 '눈을 들어 하늘 보라(515장 찬송가)'는 찬송을 외치면서 신앙적 승화시키는 시절이었음을 밝혔다. 천주교가 국내에 전래되어 영동지역에 퍼지자 1758년 국조보감에 산골까지 기독교가 들어왔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전국 방방곡곡에 영향을 미친 전국구 조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벌어진 후 1930년부터 1945년까지 15년간 신문에는 매일 같이 한국인들이 굶어죽은 소식이 나왔을 정도로 비참한 나라였다면서 민 박사의 출신년도인 1931년은 노구교사건으로 만주사면, 중일전쟁 등이 발발했는데 당시 한국인들은 전량상태(양식이 전혀 없음)였기에 국민들은 패배주의와 폐허주의, 허무주의에 빠졌지만 한국교회는 온 국민에게 힘을 주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찬송가 '눈을 들어 산을 보라(515장), '아침 해가 돋을 때(552장)', '주여 나의 병든 몸을(471장)', '아침 해가 돋을 때(225장)' 등을 작곡해 보급함으로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천국으로 향하는 여정으로 승화시키며 희망을 줬다고 밝혔다. 민 박사는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실제의 피사체를 해석해서 아름다운 부분만을 강조함으로서 실제의 모습보다 아름다워지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교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교회사가들이 과거의 한국교회역사를 연구해 현재 시대에 내놓을 때 신앙적으로 사회적으로 교훈적인 요소를 더욱 부각시킬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밝은 사회가 됨은 물론 바람직한 신앙의 모범도 제시할 수 있기 마련이기에 우리들이 이러한 일에 최선을 다 하자고 촉구했다. 한국교회사학자 중 시니어그룹인 민경배 박사, 이만열 박사, 윤경로 박사 등의 연구자로서의 공로가 매우 컸지만 이제는 후학들에게 자리를 넘겨줘야하는 시기에 왔기에 후배 사학자들이 더욱 분발해 복음전파와 신앙증진에 노력해주길 당부했고,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함께 노력하고, 우의를 다지자고 제안했다. ▲류금주 박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경영'을 주제로 강의했다. 류 박사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볼 때 가장 큰 주제는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한 경영을 주목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볼 때 시제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나눠서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이 과거시제로 구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람의 경우 본인의 출생시를 전혀 인지를 못하며, 오직 부모 등 주변인들이 알려준 정보를 믿어야하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뜻의 '만유'에 해당하기에 누구도 자신의 과거를 모르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알 수 있음을 창세기 1장 1절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세계(천사의 나라)를 창조하셨는데 사람은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사후에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것들이 궁금한데 이는 철학의 3대질문과도 겹치는 부분으로서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대답을 주지 못했던 것이 인류사라고 설명했다. 위의 3대 질문은 오직 성경에만 명확히 나왔으며, 사람이 사후에 영과 혼, 육이 나뉘는 것처럼 보이지만 특정한 때가 되면 몸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막살면 안되고, 오직 성경말씀과 신앙 안에 살아야하며, 그렇지 못하고 사후에 뒤늦게 천국을 발견하더라도 기회는 없기에 우리들은 부활함이라는 최종목표를 추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역사세계(아담의 나라)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종말의 때가 정해져있다는 것이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을 통털어 제시된 사실이며, 이 때 하나님의 자녀는 천사보다도 우월한 존재로서 그 순위가 사람 밑에 천사, 동식물, 마귀 등의 순서였지만 아담이 죄를 범하므로 마귀의 밑에 처하게된 세상이라고 설명했다. 메시야의 나라를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후에 반드시 부활하기 때문에 우리의 최종 목표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며, 그 때는 우리 각자가 왕노릇 하는 때가 온다고 설명했다. 다만 고린도전서 15장 40절 이하에 부활의 모습들이 영광스러운 모습,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뉜다는 점이 제시되어 있다며, 우리 한교사의 회원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경영을 염두하고, 성경과 세상, 교회를 연구해 연구결과물들을 생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개회예배는 김은섭 박사의 강연과 여선암 국장의 사회, 한정열 목사의 기도로 진행되었다. 둘 째 특강은 민경배 박사의 강연과 정용 박사의 인도, 유정우 박사의 기도로 진행되었다. 셋째 특강은 류금주 박사의 강연과 정용 박사의 인도, 조점숙 박사의 기도로 진행되었다. 이윤희 목사는 여정 중 식사기도를 조점숙 박사는 레크리에이션 진행 등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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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하심 깨닫고 전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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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천주교 행사 조직위 이사를 맡은 이유는…
- 스님이 천주교 행사 조직위 이사를 맡은 이유는… “종교 간의 화합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지요.” 15일 경기 남양주 성관사(대한불교조계종)에서 만난 주지 성진 스님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조직위원회(위원장 정순택 대주교)’ 이사를 맡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창설한 이 대회는 교황도 참석하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가톨릭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국제 행사. 한국 천주교는 대회 준비를 위해 지난달 중순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에서 조직위원회 창립식을 열고 이사진을 선임했다. 성진 스님은 현재 선임된 이사 중 유일한 비 가톨릭계다. 성진 스님은 “그동안 신부, 목사, 교무(원불교) 등으로 구성된 만남중창단 활동을 통해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것을 좋게 본 것 같다”라며 “종교와 세대를 뛰어넘는 온 국민의 축제로 만들고 싶다는 취지에 공감해 참여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은 외국처럼 큰 사회 문제로 비화 되지는 않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더 종교적인 이유로 인한 갈등과 마찰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때 공항, 기차역 같은 공공장소에 설치된 트리를 잘 보면 십자가가 없어요. 대신 별이 달렸지요. 공공기관이 왜 특정 종교를 홍보하느냐는 항의가 심하거든요. 이슬람 사원 건립을 놓고 마찰을 벌이는 곳도 있고요. 지금부터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점점 더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진 스님은 “사회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되면 안 되지 않겠느냐”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인들부터 벽을 허무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의 하나로 성진 스님 등 만남중창단은 26~27일 미국 뉴욕 UN 본부 처치센터(Chuch Center for the United Nations)에서 열리는 제5차 국제평화회의(2024 ICCGC-CoNGO)에서 평화와 종교 간의 화합을 노래한다. 또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는 버스킹 공연을, 뉴저지 사찰과 한인 성당에서는 청년들과 토크 콘서트도 갖는다. 성진 스님은 “종교 간 화합의 첫걸음은 목사·신부·교무·스님 등 각 종교인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라며 “4대 종교인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제가 타 종교 행사에 참여해 돕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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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뒷마당에 온 걸 환영해"…美교회가 땅 내놓는 속사정
- "신의 뒷마당에 온 걸 환영해"…美교회가 땅 내놓는 속사정 최근 미국에서 교회 등이 시설 부지를 저소득층 주택 건설에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와 대조적인 종교단체들의 이같은 움직임을 외신들은 '이그비(YIGBY·Yes, In God's Backyard)'라고 부르고 있다. "신의 뒷마당에 오는 걸 환영한다"는 의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미국 온라인 매체 복스에 따르면 이그비 현상은 미국의 저소득층 주택 부족과 교회 공동화 현상이 맞물려 나왔다. 지난 10년간 미국 집값이 42% 오르면서 저소득층의 내 집 마련은 '그림의 떡'이 됐다. 수요는 늘고 있지만,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은 700만호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 내 종교 단체들은 신자 수가 줄고 있는 상황이다. 미 공공 종교연구소에 따르면 1999년 당시 미국인의 70%는 예배 등 종교 활동을 했으나 2020년 이 비율이 47%로 줄었다. 여기에 코로나 19의 여파로 신도 상당수가 온라인 예배를 택하면서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 결과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미국인 비율은 31%에서 24%로 줄었다. 교회 입장에선 대규모 시설을 유지할 필요가 줄었단 얘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교회의 65%는 코로나 이후 헌금이 줄어든 반면, 시설과 주차장을 유지·관리하는 비용은 늘고 있다고 복스가 전했다. 때문에 미국에서 종교시설 3분의 1이 향후 몇 년 안에 문을 닫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복스는 "10만곳이 넘는 교회·유대교 회당·모스크가 문 닫는 것"이라고 전했다. 교단 한 곳, 워싱턴 DC 절반 크기 부지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만 해도 일부 교회는 부동산을 수백만 달러에 매각해 이득을 봤다. 하지만 현재 대다수 종교단체는 매수자를 찾지 못해 '급매' 간판을 내거는 처지다. 이에 종교단체들은 비영리 단체, 지자체 등과 협력해 활용도 낮은 부지에 저소득층 주택을 짓는 프로젝트에 뛰어들고 있다. 샌디에이고 흑인 교회인 베델 AME의 하비 본 수석 목사는 재향군인·고령자를 위한 주택 건설에 교회 부지를 제공하기로 하고 지난해 기공식을 했다. 교인 650만명을 거느린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교회(COGIC)'의 경우, 보유 부지 면적만 2만1000에이커(약 84㎢)로 워싱턴 DC의 절반에 달한다. COGIC 측은 성명에서 "저소득층 주택 건설은 교단 사명의 핵심 부분이다"고 밝혔다. 농구선수 출신의 사업가인 매직 존슨, 영화배우 덴젤 워싱턴 등 유명 교인들이 프로젝트에 수백만 달러를 보탰다고 이코노미스트가 전했다. 이전 2000만원 VIP루트 나왔다…"대선 전, 넘자" 美국경 몰린 중국인 지역 사회 차원에서도 주택·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 단체와 윈-윈(win-win)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에 미국 각지에서 이그비 현상과 관련한 법안이 최근 발의됐거나 검토 중이다. 복스에 따르면 지난 3월 주택·도시 문제 위원회 위원장인 셰로드 브라운 상원의원(민주·오하이오)은 의회에 이그비 법안을 제출했다. 부지에 저소득층 주택을 짓는 종교 단체에 보상금을 주며 독려하는 내용이 골자다. 브라운 의원은 "미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저렴한 집을 구하는 건 너무 어렵다"면서 "법안을 통해 교회·사원·유대교 회당 등 종교 단체 부지에 저소득층 주택을 세워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는 (종교적인) 신앙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캘리포니아·애틀랜타·샌디에이고 등에서 비슷한 법안이 통과했고, 메릴랜드·뉴욕·버지니아도 관련 법안을 검토 중이라고 외신들이 전했다. [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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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CK 시국회의' 구성 한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종생 목사, 이하 NCCK) 실행위원회는 산하의 프로그램위원회인 '정의평화위원회'와 '화해통일위원회'가 'NCCK 시국회의' 구성 건의 안을 지난 7월 25일 정기실행위원회에 상정했으며, 표결로 가결됬다. 발족 기자회견과 시국토론회, 시국기도회 등의 활동계획이 공개되었으며, 동 안건에 대해 원안 대로 가결하자는 측과 프로그램위원회의 설치 목적이 존재하므로 위원회 차원에서 노력하면 된다는 의견, 위원회를 넘어 NCCK 전체의 활동으로 하기는 여러 이유로 부담이 있다는 의견, 현재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준비로 여유가 없다는 등 다양한 논의가 장시간 진행되었지만 표결 결과 시국회를 구성키로 했다. 한편 실행위원회는 지난 회의에서 의결정족수가 부족해 다루지 못했던 헌장세칙 개정안을 가결했고, 추가 경정 예산안과 교회협인권센터(이사장 이승렬 목사)가 요청한 명칭변경을 위한 대화위원회 구성의 건 등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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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Focus] 휴스턴 대형 '레이크우드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
- ▲사진 왼쪽부터 트로이 피너 휴스턴 경찰서장, 조엘 오스틴 레이크우드 교회 목사, 존 휘트미어 시장, 사무엘 페나 소방서장이 11일 오전 레이크우드 교회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 후 기자회견에 참여하고 있다. [Religion Focus]휴스턴 대형 '레이크우드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 ‘달갑지 않았던 목사’ 아들에서 인기 설교자로…총격 사건으로 새 ‘스포트라이트’ 메가와트 미소 등 기독교 브랜드化…십자가·예수상 등 전통적 종교 상징 일체 없는 지구본 앞에서 설교 비평가들, “솜사탕만 있을 뿐, 고기는 없어‘ 혹평도 휴스턴, 텍사스(김정태 기자)-조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는 미국의 종교에서 가장 친숙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일요일 오전(11일 현지시간) 36세의 여성이 총기를 난사해 5살 소년과 50대 남성에 중상을 입힌 끝에 비번 경찰근무 경비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 한 휴스턴 대형교회(Lakwwood Church)를 이끌고 있는 목사는 메가와트 미소와 웨이브진 머리, 인기 있는 기독교 브랜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60세의 그는 이전 농구 경기장에서 매주 약 45,000명의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데, 텔레비전 설교를 통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오스틴은 아버지로부터 소명을 물려받아 신도들의 규모를 거의 5배나 늘렸다. 그의 저서 "Your Best Life Now: 7 Steps to Living Your Full Potential(당신의 최고의 삶 지금: 당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7가지 단계)"는 거의 300만부가 팔렸다. 닐슨 미디어 리서치에 따르면, 2000년대 중반에 오스틴은 미국의 어떤 설교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청했으며 전체 가구의 95%에 달했다. 수년간 그의 봉사는 백인, 흑인, 히스패닉을 거의 동등하게 혼합시켜 왔다. 이는 전국 대부분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다양성이었다. "웃는 설교자"라는 별명을 얻은 오스틴은 2004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여유로운 설교 스타일은 격렬한 설교보다 기분 좋은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다는 비판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느긋한 설교 스타일은 또한 불타는 설교보다 기분 좋은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어 비판을 받았습니다. 오스틴은 소셜미디어 플랫폼 X에서 자신의 1천만 명의 팔로워들에게 자신의 교회 공동체가 "황폐해졌다"고 했다 오스틴은 “이러한 어둠에 맞서 우리는 믿음을 굳게 잡고 악이 승리하지 못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며 “하나님께서는 가장 어두운 시기를 통해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함께 이 비극을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고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굳건히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요일 총격 사건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 오스틴은 자신이 설교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이렇게 큰 무리를 인도하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스틴은 1999년 아버지 존 오스틴(John Osteen) 목사가 돌아가시기 전 일요일까지 설교한 적이 없었고, 그런 소망도 없었다고 말했다. 존 오스틴은 1959년 버려진 사료 상점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기독교 레이크우드 교회( Christian Lakewood Church)를 설립했다. 오스틴은 2004년 AP 통신에 그의 아버지의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뒤에 있는 것을 선호했다고 말했다. 그는 1982년 오클라호마주 털사에 있는 오랄 로버츠 대학(Oral Roberts University in Tulsa, Okla)에서 공부를 마친 후 텔레비전 제작자로 아버지의 참모진에 합류했다. 아버지 오스틴 목사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설교자의 아들은 마지 못해 강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아버지는 병원 침대에서 전화로 아들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오스틴은 2004년 “간호사들은 그가 그렇게 행복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존 오스틴은 5일 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그가 설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그냥 속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비평가들은 Osteen to task for downplaying the sinful nature of humanity and the need for repentance (오스틴이 인류의 죄악된 본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경시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오스틴의 어머니인 도디 오스틴(Dodie Osteen)은 2005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We don’t preach the gospel sad, we preach it glad.(우리는 복음을 슬프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전한다)"고 말했다. 댈러스에 본부를 둔 종교감시단체 트리니티(Trinity) 회장 올레 앤서니는 2004년 AP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To me, it’s cotton-candy theology, There’s no meat. They just make everybody feel good. (나에게 그것은 솜사탕 신학이다. 고기는 없다. 그들은 단지 모든 사람을 기분 좋게 해줄 뿐)"이라고 했다. 오스틴은 휴스턴 로켓츠(Houston Rockets)의 이전 홈구장을 교회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들은 1990년대에 두 번의 NBA 타이틀을 획득했고, WNBA의 휴스턴 코메츠(Houston Comets)는 4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곳은 오스틴이 미래의 신부인 빅토리아(Victoria)와 함께 휴스턴 로켓츠 농구 경기를 보러 나갔던 첫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이전 경기장을 교회로 바꾸는 데는 15개월이 걸렸고 완성하는 데 약 7,500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2005년 개장 당시에는 두 개의 폭포, 세 개의 거대한 TV 화면, 록 콘서트에 버금가는 조명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12열의 풍부한 보라색 좌석이 있는 2개의 합창단 로프트가 폭포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살아있는 나뭇잎으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십자가, 신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기타 전통적인 종교적 상징은 없었다. 오스틴은 2005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그런 상징을 한 번도 표시한 적이 없으며, 단순히 전통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오스틴은 천천히 회전하는 커다란 황금색 지구본 앞에서 설교한다. 교실과 함께 예배당, 세례 장소, 청년들을 위한 모임 공간, 교회의 텔레비전 방송 활동을 위한 전체 층이 추가되었다. 오스틴은 2004년 AP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한테는 이곳이 좋은 레스토랑인 것 같다. 좋은 음식이 있으면 사람들이 올 것“이라며 “그래서 우리는 서비스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을 고양시켜야 한다. 그들은 '‘You know what, I feel better today(오늘 기분이 좋아졌어요)'라고 말하며 떠나야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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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Focus] 휴스턴 대형 '레이크우드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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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 발전기금 특별위원회 구성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 윤창섭 목사, 이하 NCCK)는 지난 1월 25일 실행위원회를 서울복음교회당에서 진행했으며, 지난 해 정기총회 회의록을 채택했고, 100주년 기념사업 발전기금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다. 개회예배는 이훈삼 목사(서기)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윤창섭 목사가 창세기 3장 6~9절을 기초로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제목의 설교를 담당했다. 회장 윤창섭 목사는 성경 창세기의 등장인물인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과일인 선악과를 먹은 후 숨어들자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는 부분을 설명하고, 그들이 창조주가 제공한 에덴동산에서 거주하는 기쁨 속에는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한 규정이 곧 경계선이었다고 정의하고, 어디냐는 질문은 장소를 말함 보다는 사람과 하나님 간의 관계를 말함이었다면서 이 관계는 비단 아담과 하와 뿐 아니라 이 세상과 NCCK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등식을 설명했다. NCCK에게 있어서 어디는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맡기신 사명들을 잘 수행하느냐를 묻는 것이며, NCCK가 창립 100주년이라는 기쁨을 맞는 반면 교회로서의 사명 수행을 잘 하느냐 하는 그 경계이기 때문에 NCCK는 이번 1백주년을 기념하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도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어야 하고, 사명을 수행함은 인간적인 힘이 아닌 신앙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실시해야한다고 제언했다. 실행위원회는 지난해 10월 26일 진행된 제 71회기 정기총회에서 결의된 회의록 보고를 받기로 결의했고, NCCK 1백주년 발전기금 특별위원회를 구성키로 결의했지만 NCCK 산하 위원회 위원장이 실행위원회에 언권위원으로 참석키로 하고, 총회나 실행위원 파송이나 교체 등은 회의 1주일 전에 서면으로 사무처에 접수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헌장개정안은 이날 참석한 실행위원회원들이 과반수가 안되어 차기 실행위에 유안건으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한편 NCCK는 한국에큐메니칼대토론회를 오는 2월 26일부터 이틀간 파주시에 소재한 지지향에서 숙박을 하면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기후위기와 생태영성, 사회정의, 인권, 평화통일, 국제협력, 디아코니아, 선교, 지도력형성 등의 방대한 주제를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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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 발전기금 특별위원회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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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신앙비전 후대에 영향 줄 것
- ▲ 권철 목사가 설교를 담당했다. ▲ 김유준 목사(사진 왼쪽)가 사회를 담당했다. ▲ 민경배 목사가 축도를 담당했다. ▲ 권평 원장은 원장으로서 마지막 순서를 담당했고, 차기 원장은 류금주 교수가 취임할 예정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원(원장 권평 박사)은 권철 목사(서교동교회)를 지난 1월 11일 서현교회당에서 열린 제 298회 월례발제회의 예배 설교자로 초청했다. 권철 목사는 성경 신명기 3장 25~27절 말씀을 기초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라는 제목의 설교를 담당했다.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시 가나안 땅을 바라본 모세가 들어가고 싶다는 간청에 하나님께서 거부하시는 내용으로 파악할 수 있다. 권 목사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민수기 20장의 므리바사건(이스라엘인들이 물을 요구하자 모세가 화가나서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옴) 때문일 것이라고 추청하고, 모세는 항상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었지만 작은 일에도 실수하는 나약한 인간이자 성정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모세를 들이지 않으신 것은 모세를 베려한 것일 것이라며, 만약 모세가 약속한 땅에 도달해서 정착했다면 그의 발언이나 주장이 하나님 이상으로 우상처럼 취급되었을 것을 상상할 수 있기에 그가 변질되지 않도록 하나님은 배려하신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잘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흉하게 변질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을 바라만 보라고 하니 야속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장차 그곳에서 일어날 일을 보이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세는 마지막으로 한 말이 신명기 33장 29절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신명기를 통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계속된 불순종과 배반으로 끌려나가는 것이 보이지만 성도가 모든 역경을 거치고, 구원받음을 보이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추하게 마감할 지라도 하나님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예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강조했다. 모세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여기까지 이끄는 일을 감당했으며, 이후 민수기 13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가나안으로 정탐을 보내셨고, 정탐 후 감격을 말함으로 놀라운 영광이 있다는 발언이 있었지만 해당 지역 거류민들의 강대함을 두고 두려워하는 등 광야를 돌아본 기대는 깨졌다고 설명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정탐뿐 아니라 항상 원망과 불평하는 그런 믿음 없음으로 인해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에 못들어가고, 2세대가 비로소 들어간다고 성경에 기록되었지만 신앙의 선조들이 목격한 비전이 후세대에게 빛을 발했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현재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접하는 영광은 우리 이전 세대들이 본 비전으로 인한 것이므로, 마찬가지로 현세대는 차세대를 위한 비전을 보려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밝혔다. 권 목사는 학창시절 민경배 교수가 찬송가 580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설명하면서 이 찬송가가 만들어지던 당시는 한국이 일제로부터 수탈당하던 시기였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 처럼 보였겠지만 한국인들은 그럴 때일 수록 힘을 다해 일해야한다며 희망을 발견하려 노력했던 설명에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10년, 30년, 100년 후를 준비하고 씨를 뿌리는 신앙을 발휘하자고 권 목사는 촉구했다. 이날 예배의 인도는 김유준 목사, 광고는 권평 원장, 축도는 민경배 목사 등이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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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신앙비전 후대에 영향 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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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韓日 성도들의 협력 주목
- ▲ 민경배 박사가 주 발제를 담당했다. ▲ 정용 박사가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권평 박사, 이하 한교사)은 2024년 신년토론세미나를 지난 1월 11일 서현교회(담임 이상화 목사)당에서 진행했다.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의 '일제하의 한일관계사-누가 우리 편인가?'라는 주제의 기조발제 이후 참석한 회원과 열띤 토론을 가졌다. ① 한일관계는 한일관계사 연구에 중요. 민경배 박사는 한일관계는 1895년 민비의 사후부터 최소한 60년을 실제로 엮여 있었기에 한국교회사(주로 구한말부터 범위)를 연구하려면 한일 관계사적인 관점에서 시작해야 하고, 실제로 연구를 진행 하려면 사료 자체가 한문과 일본어로 되어 있기에 두 언어에 능통해야 한다고 기초적인 필요사항을 제시하고, 역사학이나 정치학적인 입장에서는 제국주의 일본으로 부터 조선과 조선인이 탄압 받았다는 것이 큰 물결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는 다양한 일본 그리스도인들이 각 분야에서 조선의 그리스도인들과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한 배려와 노력을 했다는 신앙인 내부적인 부분에도 큰 관심을 가져야 함을 강조했다. ② 일본의 기세는 대단했다. 발제자가 1941년에 초등학교 1학년 때 '대동아전쟁'이 발발했고, 1945년 5학년 때 종전을 했던 시기였다고 밝혀 학자로서 젊은 시절에 겪은 일제시대의 상황을 설명함에 정통함을 표현했다. 일본이라는 섬나라는 당시 세계제일의 대국인 청나라를 1985년 1년 만에 승리 했으며, 러시아를 1905년 1년 만에 승리 했을 뿐 아니라 당대 강국인 미국과 네델란드, 카나다, 영국 등과 4년 간을 홀로 전쟁을 벌인 저력있었음을 설명했다. 조선은 그런 나라의 식민지로서 60년을 같이 있었기에 일본을 모르고는 한국교회사연구는 어려운 것이라고 단언했다. 모 전 대통령의 부친이 함경북도 시골의 농업계장을 했다고 논란이 일은 일도 있지만 일제시대는 산업이라는 것이 농업 밖에는 없었는데 농업계장 정도를 했다고 친일파라는 평가를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일본이 세계열강과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분위기였는데 1896년 1월 12일 일본 국민신보의 기사 중 우리가 군사력으로 해보니 되네? 하는 이야기가 보도될 정도였다고 밝혔다. 당시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시 세계가 놀라던 시기였고, 일본은 세계전 나가야겠네 하면 군국주의적인 색채를 띄게되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일본인들도 자신들이 그렇게 강력한지 몰랐다고 한다. ③ 일본은 교육을 중시했고, 엘리트 주의였다. 일본 교육기관은 천황의 발언을 담은 '교육치부'라는 문서를 매달 1회 씩 낭독했는데 이 문서를 다룰 때는 하얀 면장갑을 끼고, 신성시하는 자세를 갖고 모든 일을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일본정부의 다양한 면을 통해 볼 때 일본이 가장 중시한 정책은 교육정책이었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교육정책으로 일본정신을 일으켰으며, 방식은 엘리트 수재교육이었는데 한국의 경우 평준화의 방식인 것과는 달랐다고 평가했다. 한국은 교육과정이 국민학교와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 순으로 진행하는데 일본은 고등학교 과정이 있었고, 이 고등학교는 일본교육의 근본이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그것에 못 미치는 경우 대학 예과에 진학하는 방식이었다고 밝혔다. 일본 내에는 경성제국대학, 동경제국대학, 경수제국대학 등 제국대학 7개가 있었고, 한국과 일본에 각 1개씩의 제국대학이 있었으며, 동 시대에 일본 명지대나 동지사대 등이 존재했지만 보통의 대학교일 뿐 대세는 역시 제국대학이었다고 설명했다. 경성제국대는 1924년 경 법문, 의학, 공학, 이학, 문학, 노학 등의 학부를 보유한 규모였다고 한다. 민 박사는 일본의 스타급 대학자인 '가와이 에이지로(1891~1944)'는 「학생에게 준다」와 「대학에서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학생과 교양」 등 10여권의 명저를 출간했는데 고등학생의 자격을 유지하려면 세계문학전집을 읽어야만 하며, 이른바 지정의를 상징한 '데칸쇼'를 읽을 필요를 주장했고, 이것을 풀면 데카르트(학문)와 칸트(도덕), 쇼펜하우어(정서) 이며, 여기서 읽은 지식이 세계 강국들과의 투쟁의 자양분이 된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예전은 물론 오늘날에도 이런 주장은 전무하다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밝혀 한국교회사연구를 수행함에도 언어는 물론 일본 정신문명의 근간인 문학과 문화에도 정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피력했다. 한편, 일본의 왕족이 수학하는 학습원을 포함해 정규고등학교는 전국에 38개 뿐이기에 입학경쟁이 매우 심했기에 고등학생이라고 하면 대단한 수재로 취급되었지만 이들의 생활태도는 우리가 보기에는 엉망칭창인 것처럼 살기도 했다고 밝혔다. 민 박사는 지식인을 영어로 하이칼라(High Color)라고 부르지만 일본 고등학생은 만칼라(蠻 Color)로 일컬었는데 이들의 하는 행실이 더러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은 술을 진탕 먹고, 하수구 뚜껑을 열어서 낙시를 하기도 하는 등 온갖 기행을 했지만 일제 시민은 물론 경찰도 건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만칼라들이 용인 받은 이유는 천재를 대담한 인물로 길러내야 한다는 목표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수재들은 보통 두뇌는 명석하지만 행동은 수줍고, 소극적이라는 약점이 있기에 세계를 재패하려면 수재들이 대담한 성격을 갖게 한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민 박사는 분석했다. 한국인으로서 일본 제 1보통학교 졸업자는 8명이었고, 대표적 인물은 주요한이나 채필근 목사(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일본제국대학을 졸업한 목사)가 있고, 1942년까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한국인은 630명, 동경제대 61명, 경도제대 236명 등 전체 1413명이 졸업했다고 하며, 이들은 해방과 한국전쟁 후 남북한을 재건하는데 주요활약을 했다고 밝혔다. 일제시대 한국교회는 성탄절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너는 내용의 연극을 실시했는데 절기로 따지자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다뤘어야 하지만 출애굽을 다룸은 한국교회가 민족해방을 상징하는 것에 열중했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이 때 사리원교회 김장호 목사는 홍해가 아니라 갈대밭을 건너는 것이라고 폄하했는데 이것을 알려준 선생은 월리암 선교사이고, 그는 김용도 목사의 대부이기도 했는데 한국에서 쫒겨난 뒤 그의 대단한 재능을 안타까워한 사람들에 의해 경성제국대에서 성서교수를 하다가 맥아더 장군의 종교고문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군에 군목을 도입함에 기여한 인물이었다는 점들을 들어 일본제국주의 시절의 역사와 인맥들이 현재의 역사를 구축함에 입체적인 영향들이 있다는 일례를 증거했다. ④ 친일파가 누구인가? 한국인들은 친일파라는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일제시대는 모든 조선인이 일본 천황의 밑에서 그의 헌법아래 생존하던 시기였다는 대전제를 가져야한다고 제안했다. 일본의 개화파들은 대다수가 미국에서 7년 이상 유학을 경험한 인재들이었는데 서양에서 배운 세계관을 일본의 발전에 다양하게 활용했다고 밝혔다. 법학의 분야에서 살피면 서양 국가들의 헌법은 기독교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헌법의 기초를 천황제와 신도로 대치해서 응용했던 상황이고, 공교롭게도 이 시기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이 독립운동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진 그리스도교 사상 자체가 천황제에 대한 반대요, 반 헌법주의자가 되는 결과물이 나오게되었다고 설명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왕자 이근을 데려다가 훌륭한 제왕을 시키려고 제왕교육을 시켰다고 많은 일본 서적에 기록되어있는데 한국의 독립가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일본 주류세력은 군벌과 문벌이 통치의 방법을 두고 경쟁하던 시기였는데 그 주류세력은 모두 규슈 북쪽지방출신(사쯔마파, 규슈파)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지금의 기시다 노부스케와 아베 신조, 사이또 이사쿠 등이 사쯔마 출신들이며, 일본의 수상들 상당수는 집안이 같은 출신이라는 특징이 일부 있다고 일본 정계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베는 첫 국무총리 시 동아일보에 자신의 조상이 한국과 연관있음을 밝히기도 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규슈지역은 고대 시대에 한인들이 대거 이주해갔던 지역이었고, 오늘날 일본에서 잘생기고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들 상당수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인의 피가 흐른다고 보는 경향도 많다는 설명을 했다. 남북한이 최초에 정부를 세울 때 헌법의 기초를 남한의 경우 유진오(경성제대)가, 북한은 최용달(경성제대)이 세웠으며, 북한 김일성대학교의 교수 23명 중 일본 제국대학 출신이 20명이어서 90%였으며, 일본에서 경성제국대 출신은 친일파 중 친일파로 분류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기여를 할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최고 학술기관인 학사원 북한과학원의 원사 10명 중 7명이 일본 제국대학 출신으로서 북한이 일본제국주의를 타파했다고 주장하지만 북한을 세우고, 움직인 것은 제국대학 출신들이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제국대학 출신들 아니면 국가체제를 세울 수 없었다고 밝혔다. 남한의 모 일류대의 경우도 최모 씨, 고모 씨, 민모 씨, 정모 씨 등 제국대 출신들이 많았었다고 밝혔다. 아키히도 일본 국왕은 20년 전 뉴스위크지 「일본의 불안한 역사인정」이라는 기사에서 조상 중에 백제 여자공주가 있다는 언급도 있다고 밝혔다. ⑤ 한국과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관계 우리나라에서는 1938년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결정되었고,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1925년 홍천에서 국민학교 선생과 학생들이 퇴학을 당한 것이 최초의 고통받음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조선의 해방 후 미국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본 천황 궁성안에 기독교의 목사를 초청해 예배를 드리는 일이 있었는데 이는 천황의 동생 중 '다까마쯔(이후 일본 ICU대학 설립)'가 주도하는 등 황실에 복음화가 진행되었음을 설명했다. 이토 히로부미(문벌)의 사망으로 인해 후임인 데라우찌 마사타께(군벌)가 공직을 수행하면서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그의 통치에 최대의 방해자라는 인식을 했고, 이들을 모두 없애기로 해서 105인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로 인해 한국그리스도교 주요인사 7백 명이 잡혀갔는데 이 숫자는 당시 한국교계 전체에 해당할 정도였다고 분석했다. 105인 사건을 다루는 경성법원의 판사 중 와타나베 다케시 법원장은 그리스도교 장로였는데 결과적으로 그가 다 잡힌자를 풀어줬다고 밝혔다. 와타나베 법원장은 장로교총회에 찾아가 강단 뒤에서 총회장을 만났는데 아마도 같은 신앙인으로서 함께 애통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2.8선언문(1919년 2월 8일)은 이광수가 작성했는데 일본 제국의 법 아래에서는 반역죄에 해당하는 중죄로서 죽임을 당해야 했지만 출판법위반으로 판결했다고 한다. 민경배 박사는 이것은 바로 한국과 일본의 기독교가 이처럼 세상을 바꾼 증거라고 강조했다. 일본인들은 본래 상대화 개념이 없으며, 오직 상대화 개념은 일본 그리스도인들만 갖고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의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 중 0.5%에 불과하지만 대부분이 최고 엘리트 인사들이라고 밝혔다. 민 박사가 일본 무교회계통의 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는데 여기는 평신도까지 희랍어원문성경을 읽고 있어 놀랐다고 증언했다. 후리야 야소 ICU교수는 일본에 그리스도인이 5%만 있었다면 나라를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3.1운동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반란죄로 다스림이 충분한데 한국에 파송된 일본 판사들은 단순히 소요죄만을 적용해 대거 석방해줬던 일이 있고, 이것은 아무리 우리를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붙들어주는 손이 있다는 증거로서 국가를 떠나 종교와 사상으로서 협력을 했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처럼 판사들을 모두 훌륭한 기독교인들만 데려왔고, 이 일본 기독교인들은 복음의 거룩한 역사를 장식했다고 민 박사는 강조했다. 데라우치는 이토에 비해 강경파였고, 총독 하세가와와 함께 1915년 조선에서 기독교학교와 기독교선생을 금지했던 자였지만 1917년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를 위해 '기독교연합재단'으로 인가를 해주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총독부 내 우사미 갓조 국장급 등 기독교인들이 즐비했는데 이들이 언더우드 목사를 만나 협조를 해 신과대를 만들고, 기독교연합재단이 출범되었다고 밝혔다. 세상이 어둡고 무서웠던 18세기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신상근이 작곡한 '실로암'의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는 내용을 부르짓으니 하나님은 크나 큰 복을 계속 주셨고, 오늘의 한국교회가 번성해 성시화 된 국가로서 복음전파를 위해 충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쿠 도미소코'는 일본정부기관지인 '경성신문사'의 감독직위였으며, 일본 천황을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 실세 중 실세였는데 조선에서 3.1운동으로 인해 식민정부가 진압하는 모습을 보고 훈족(야만)이라고 비판했으며, 나까다에 기요시는 3.1운동을 옹호하는 비슷한 일이 즐비했다면서 일본 정부의 하층부는 조선을 탄압하는 것 같아도 일본 최상층부는 그리스도교적인 사고가 있었던 그런 사실들을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면서 염두해야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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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韓日 성도들의 협력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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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CK 창립 100주년 한국교회와 함께
- ▲ 김종생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종생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는 1924년 9월 24일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된지 2024년 올해로서 창립 1백주년을 앞두고 있어 특별히 신년기자간담회를 지난 1월 11일 광화문 인근에서 가졌다. 김 총무는 "금년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가 1백주년을 맞는 해여서 더 특별하기에 조금 더 긴장되고, NCCK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를 생각있고, 지난 백년을 회상는 의미도 있기에 준비하는 일들이 있다"며 올해 중점을 두고 진행할 사업을 소개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백년사'를 문서인 통사로 정리한다고 설명했다. NCCK가 한국의 일제강점기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의 단체로서 신앙의 양심을 표출해왔던 다양한 사업들을 기독교사회운동사로 정의하고, 이를 담은 총 4권의 통사로서 역사서를 발간할 계획이고, 현재 18권 째 발간한 '한국기독교운동사자료집'을 20권까지 발간할 계획임을 밝혔다. 지난 1백년간 역사 속에서 활동했던 사람들과 전달자, 교회를 기념하기 위해 목회자나 교수, 성도들 등을 '한국교회100대인물'로 선정하고, 약자와 동행했던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목요기도회'가 열렸던 기독교회관 등 NCCK의 주요한 활동지 등을 '한국교회100대방문지'로 선정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사람과 장소의 선정에 있어 친일이나 비인권 등 시비가 혹시 있을 것을 우려해 선정에 앞선 검증을 한국기독교역사학회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도움을 받아 실시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NCCK가 과거사를 정리함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라면서 '한국기독교사회선언'을 올해 11월에 개최하는 정기총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며, 발표에 앞서 한국사회의 진보기독교인은 물론 보수기독교인, 일반 사회인, 반 기도교인들의 목소리까지 계층과 나이를 구분하지 않고 의견을 수용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의견수렴의 일환으로 '에큐메니칼정책토론회'를 오는 2월 26~27일간 파주 출판단지에서 갖을 예정이며, 정보의 수록이나 대화의 모든 방식이 위로부터 하향적인 것이 아닌 아래로부터 위로 의견을 형성하는 구도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NCCK가 1백년간 세계 각처의 교회들과 협력해온 과정 중 주요 동행자로서 세계교회협의회나 아시아교회협의회, 일본교회, 대만교회, 홍콩교회, 호주교회 인사들을 초청해 'NCCK 100주년 기념 국제컨퍼런스'를 오는 9월 20~21일간 한국에서 진행하며, 화해와 통일을 주제로 토론할 예정이라고 한다. 김 총무는 근래 한반도에서는 화해통일이 어려운 시점인 것처럼 보이는 일이 많다면서 현재 남북관계만 해도 적대적 관계로 변한 느낌인데 NCCK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보이며, 한국과 해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대화와 세미나를 갖는 등 노력을 해 힘에 의한 통일의 시도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목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NCCK 창립 1백주년 기념예배는 실제 창립일인 9월 24일의 직전 주일인 9월 22일 실시한다고 하며, 이 자리에 국제컨퍼런스에 참석한 인원들이 함께 할 것으로 보인다. 1백주년 기념대회는 NCCK 제 73회 총회가 열리는 11월 18일에 함께 개최한다고 한다. 김 총무는 NCCK가 교회를 위해 수행할 일들이 많지만 특별히 청년들이 교회에서 떠나는 상황을 목도하기 때문에 상황을 다시금 되돌리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라며,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분석하고, 청년들과 교회가 다시 함께 하기 위한 방안등을 발굴하기 위한 공모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며, 공모사업을 통해 청년들의 고민과 청년 부채, 청년 노동, 청년 신앙, 청년 기호 등을 알아보고, 교회들과 더불어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특별히 방글라데시에서는 여성들이 심각하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서 이 상황을 탈피해 여성들을 세우고, 제 자리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을 진행하겠다고 설명했다. 기독교사회운동사 정리 보존을 위해서는 온라인 아카이브(저장)를 만들어 공개하고, 온라인 역사전시회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와 관련해서는 지난 해까지는 NCCK가 자체적으로 새벽예배를 드렸지만 올해는 다른 단체와 함께 할 수 있을 지를 타진하는 중이며, NCCK의 9개 회원교단 중 일부 총무들이 상대방과 접촉해 의사를 타진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한반도종전평화운동 캠페인을 수년간 벌여서 20만명의 서명을 확보해 지난해 9월까지 한국UN대표부, UN사무처, 미 국무부 등에 전달하며 일단락 지었지만 관련한 활동은 지속할 예정이며, 북한 교회와의 대화를 위해 오랬 동안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협력을 해왔지만 현재는 연락이 안되는 상황이지만 대화를 위한 노력은 지속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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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CK 창립 100주년 한국교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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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해석은 복음 중심으로
- ▲ 정윤석 기독교포털뉴스 대표기자는 요한계시록을 둘러싼 교회 내 문제는 지속될 여지가 많다고 밝혔다. ▲ 진용식 목사는 세대주의 종말론의 특징과 주장, 평가를 발제했다. 기독교포털뉴스(발행인 정윤석 대표기자)가 설립 11주년을 맞아 '바른 종말론'에 관한 세미나를 지난 12월 18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개최했다. 정윤석 대표기자는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10대 종말론 헤프닝'이라는 제목의 발제를 담당했다. 정 대표기자는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경 내 계시록에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내용들이 담겨있는데 이 내용들을 상징성이 있는 특징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의 무리들을 이기시고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승리한다는 내용이지만 수 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에 거론된 단어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시한부 종말론이나 특정한 계산법을 적용해 자신들이 메시야라고 주장하며 재산과 정신을 빼앗는 혹세무민하는 것을 경계해야한다고 밝혔다. 전쟁과 기근, 지진, 테러 등은 예수님 시대 이전부터 당대, 후대,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중이며, 근래에는 특히 통신기술의 발달로 더욱 더 지금이 그 종말의 때인가 하는 우려가 신속히 확산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성경의 예언은 토대로 특정한 계산법을 대입해 정확히 수학적으로 계산해 내는 것이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이런 시도들은 근거도 부족하고, 사기사건으로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시한부 종말론을 가능케하는 성경해석의 틀에서 벗어나야하고, 성경 내용에 대한 세대주의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야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신한부 종말론은 다니엘서의 한때두때반때를 1260일, 2300주야, 70이레 등이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제국의 권력은 유한했고, 오히려 영원한 것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이며, 영원한 하나님을 믿는 그 나라의 백성들은 소망을 품고 이 땅에서 존엄함과 존귀한 존재로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주장이다.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공중재림이나 성도의 집단적 휴거, 7년 대환란 등 이후 천년왕국의 진행, 마태복음 24장 무화과에 대한 이스라엘의 독립과 1948년의 세대별 계산, 지구창조 후 7천년 째 종말이 온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지구 종말 사기의 시나리오에 지나지 않는다고 정 대표기자는 설명했다. 모든 문제가 밝혀진 것같아도 더 큰 문제가 있는데 시한부 종말론이 이단으로 규정되었음에도 그러한 해석이 나오도록 한 교리는 여전히 활개를 치는 중인데 이것을 벗어나지 않으면 언제든 또 사람들을 미혹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라고 강조했다. 직통계시의 유행을 경계해야한다고 밝혔다. 시한부 종말론의 인기는 소위 기도한다는 사람들과 신령하다는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환상과 계시를 받는다는 자들의 체험 때문이고, 이 같은 계시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하면 재림이 임박한 시기에 준비하도록 계시함이 무슨 잘못이냐는 항변도 있고, 한국교회 내 하나님의 음성 듣기나 하나님이 이처럼 말씀하셨다는 식의 언급이 유행하는 중이어서 실제로는 시한부 종말론, 비성경적 주장과 흐름이 대유행을 할 수 있느 풍토가 지속되는 중이라고 현실을 설명했다. 정 대표기자는 종말론의 문제는 요한계시록을 미래적 관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만 초점을 두는 좐점에서 이제는 계시록 해석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미래적 접근보다는 과거적이며, 상징적, 초월적 접근을 하고, 재림 중심이 아니 교회론과 구원론 등 복음 중심의 해석으로의 폭을 넗힐 필요가 있다고 정 대표기자는 제안했다. 김주원 겸임교수(한국침례신학대학교)는 '기독교 이단들의 요한계시록 해석과 정통교회 성경적 반증'이라는 제목으로 십사만 사천, 육백 육십육, 아마겟돈 전쟁 등에 의미를 설명했다. 김 교수는 성경책 내용 중 바울이 한 말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들은 것을 로마교회에 말한 것이고, 베드로의 발언은 예수에게서 배워서 로마교회에 한 말인데 두가지는 고통적으로 시발점이 예수님으로 부터 였음으로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을 교회로 그리스도에게 다시 데려올 때 예수님에 대해 다룬 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를 기반으로 대화해서 상당히 성과가 있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접근하려면 예수님께서 종말을 말씀하셨느냐가 관건이며,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 말씀하신 복음서에서 시작해야 요한복음이 접근가능하며, 소 묵시록의 발전은 요한계시록이라는 등식으로 공부를 해나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끝 즉 종말에 관한 묵이소, 예언이며, 서신이라는 특징이 있는데 묵시서라서 오해와 왜곡의 대상이 되어온 측면도 소개했다. 현재도 이단종파들은 요한계시록을 지나치에 비유적으로 해석하거나 반대로 극단적으로 종말적인 해석을 하는데 두 경우 모두 사람들의 믿음과 생각을 타락시키고 불건전한 행위를 유발해 개인적 차원을 넘어 가정과 사회에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현실을 설명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많은 정통교회 성도들이 이단에 미혹되게 하는 잠재적 위험성이 있으므로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잠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통교회들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공부를 왕성하게 하고, 묵시문학으로서의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도록 성도들을 교육하고, 변증을 위해 도움이 되는 성경공부와 신학교육이 실시되야한다고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이 정통교회 안에서 두려움과 공포의 말씀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담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점이 더욱 밝혀져야한다고 밝혔다. 진용식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대표회장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세대주의 종말론'을 발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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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해석은 복음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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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자원 보존과 활용 연구
- ▲ 사진 왼쪽부터 허은철 박사, 임인재 박사, 소요한 박사, 김인구 박사, 최재웅 박사, 김동석 박사 등이다. ▲ 신평식 사무총장이 심포지엄 후 연구결과물은 도서로 출간될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장종현 목사)은 기독교 종교문화자원 보존과 활용을 위한 학술연구 심포지엄을 지난 12월 21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개최했다. 사무총장 신평식 목사는 한국교회 인물연구 발표를 주제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서 본인은 한국문학을 전공한 경험이 있다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교회의 역사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보통의 역사저서들이 대부분 사실전달위주의 문체로 작성되고있는 편이지만 동 협회가 계획하는 전기는 소설과 같은 문체로도 작성할 수 있을지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국교회인물연구 전기집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1차 자료로서 만들어질 것이지만 이후 영화 등 예술의 분야에서도 가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며, 문화라는 것은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삶의 기반으로서 역할도 하는데 대한민국은 기독교국가라고 자부할 수도 있는데 그 뿌리를 든든히 다지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기 바란다고 밝혔다. 허은철 총신대학교 교수가 '역사학자로서 존 로스의 한국사 이해'를 발제, 이인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박사가 논찬을 담당했다. 소요한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가 '김창식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발제했고, 김인수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가 논찬을 담당했다. 최재웅 한신대학교 교수가 '최초의 오순절 내한선교사 메리 럼지(Mary C. Rumsey)'를 발제했고, 김동석 한국교회사학연구원 박사가 논찬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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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자원 보존과 활용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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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되어 보게 되는 기적
- ▲ 정용 목사는 변화된 존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담당했다. ▲ 고사무엘 목사(사진 왼쪽)는 사회를 담당했다. ▲ 권평 원장(사진 오른쪽)이 광고와 감사인사를 담당했다. ▲ 유정우 고문이 축도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권평 교수, 명예원장 민경배 교수)은 지난 12월 7일 제 297회 월례발표회를 서현교회(이상화 목사 시무)에서 개최하고, 발표회에 앞선 예배는 고사무엘 목사가 사회, 정용 목사가 설교를 담당했다. 정용 목사는 사도행전 9장 15~19절을 중심으로 '변화된 존재'라는 제목의 설교를 담당했다. 정 목사는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이르러 사울을 만나러 가서 메시지를 전하니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보게되었다는 성경의 내용을 소개하고, 아나니아는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유추하고, 그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사람간에 다투지 않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그런 일들도 순종하는 삶이겠지만 아나니아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사울처럼 변화받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복음이 영향미치도록 쓰임을 받는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의 회원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동행함으로서 큰 역사를 이루는 일에 쓰임 받을 것이라고 믿고, 순종과 실천하는 삶을 가지라고 촉구했다. 유정우 고문이 민경배 명예원장을 대신해 이날 축도를 담당했다. 권평 원장은 차기인 298회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월례 발제는 명년 1월 11일 개최한다고 광고를 통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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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되어 보게 되는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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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보수복음과 구국복음의 교세 분석
- ▲ 조점숙 목사는 기청계와 서북계 기독교에 대한 발제를 담당했다. ▲ 한정열 교수(사진 왼쪽)는 이날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그리스도교를 지역적으로 구분 할 때 '서북계'와 '기청계'로 구분하기도 하며, 지리적으로 살피면 서북계는 대략 황해도와 평안도, 영남지방의 교회들이며, 기청계는 서울과 경기, 충청도, 함경도, 감리교의 교회들로 구분하고 있는데 교세를 비교하자면 1900년대 무렵 서북계가 절대 다수를 차지했는데, 그 이유에 대한 학술발표가 진행되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권평 교수, 명예원장 민경배 교수)는 제 297회 월례발표회를 지난 12월 7일 서현교회당에서 개최하고, 조점숙 박사를 초청해 "서북계와 기청계"라는 제목의 발제를 청취했다. 조점숙 목사(온석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 교회사)는 서북계(西北界)는 한국그리스도교의 선교초기부터 해방 이전까지 이끌어 갈 정도로 영향력이 컷다면서 서북계는 교인과 선교사의 숫자 등 모든 면에서 다수였다고 배경을 설명하고, 서북계는 지리적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영남지방이며, 기청계(畿淸系)는 서울과 경기, 충청도, 감리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신앙적 경향은 전자가 보수적이었고, 후자는 사회복음에 관심이 컷다는 차이점이 있었으며, 교세 또한 서북계가 월등히 컸다며 신앙적 성향이 달랐음을 조명했다. 서북계의 영향력이 얼마나 컷느냐는 동 시대에 감리교의 내부사안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서북계의 신앙적 경향은 보수주의신앙과 선교사 주도의 교권 기능이 있었고, 당시 감리교에 대한 영향력을 끼쳤을 정도라고 한다. 1935년 감리교 신생사에서 출간한 「아빙돈 單券註釋(단권주석)」에 대해 장로교의 교권을 점령했던 서북계가 이 책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 책의 대표 편집자였던 유형기 목사의 세계주일학교대회 대표권을 1936년 7월부터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을 정도였다고 조 목사는 설명했다. 서북계와 기청계의 교세차이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고 했다. 1925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14회 회록에 서북계 교회의 직원수는 6140명, 교인수는 10만 737명, 교회수는 2001개, 예산은 약 53만 9백 엔이었고, 기청계는 직원수 815명, 교인수 9천 414명, 교회수 337개, 예산은 약 4만 6천 엔으로서 차이가 몇 배나 발생했다고 밝혔다. 1938년 교세통계는 한국교인 50만명 중 35만명이 장로교인이며, 그 35만명 중 4/5가 평안남도에 있었다고 한다. 1910년까지 장로교회 및 종교학교 통계를 살피면 교회설립 분야에서 서울-경기는 67개소, 서북은 391개소, 기타지역은 225개소이며, 종교학교는 서울-경기가 67개소, 서북이 519개로 차이가 컸는데 이러한 차이는 1900년부터 벌어져온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한양에서 의료선교사역을 진행하던 언더우드는 1900년 미국 북장로교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낸 서신에서 서울에는 1명의 선교사만이 전도사역중이지만 서북지역인 평양에서는 5명의 선교사가 전도사역에 매진하고 있으며, 평양을 중심한 북부지방만이 놀랍게 부흥하므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 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 목사는 서북계가 기청계보다 획기적으로 교세가 늘어난 이유를 양자간의 신앙의 형태가 달랐고, 당시 정치와 사회적인 요인도 결부해 분석했다. 기청계의 1910년 교세통계상 신도수는 평안북도가 7천 901명, 평안남도가 10만 842명, 황해도가 4천 740명, 기청이 2천 975명, 경상도가 5천 726명, 전라도 및 제주도가 5천 509명이었는데 이를 분석하면 황해-평안이 23만 483명, 기청이 2천 975명으로 8배의 차이가 있었다고 밝혔다. 기청계의 교세가 부족한 이유에 대해 민경배 박사의 논문을 인용했는데 기청의 기독교인들은 사회계층 상 지배체제의 중심에 위치한 지식인과 관료들이었기 때문인데 당시 조선시대의 관료들 대부분은 서울 출신자이며, 직업의 특징상 국왕이 전적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체제에서 정책 입안과 실행, 국왕의 권위를 대행하는 왕권 사회에서 소수의 선택된 집단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울은 관료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통치 철학인 유교 전통의 본산지였는데 여기에서 외래종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어렵기 마련이었다고 설명했다. 기청계의 서울 양반들이 교회에 입교하게 되는 계기는 일제나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려는 개화(改化)를 위한 동기이며, 이를 달성할 수단은 기독교로의 입교로서 서양 문화와 문명에 이르는 '힘'을 추구한 것으로 조 목사는 분석했다. 서울 양반들의 기독교 입교의 대표자는 이원긍(종이품 가선대부 법무협판 역임), 이상재(종이품 가선대부 의정부참찬 역임), 김정식(경무관 역임), 이승인(부여군수 역임), 홍재기(개성군수 역임), 이승만(철학박사), 인국선(증경군수), 김린 등을 거론해 사회적 신분을 설명했다. 위 신하들이 입헌제를 실시해 왕권을 제한할 우려를 느낀 고종 황제는 수구세력과 결탁해 독립협회는 해산하고 4백여 명을 구금했던 시기에 감옥에 간 사람들로서 여기서 성경과 그리스도를 접하고 입교하기에 이른 것으로서 기청계는 서울의 관리와 양반층으로서 입교의 동기가 현실적인 힘의 실재 추구였다고 분석했다. 서북지역의 경우 홍경래의 난 이래 중앙정계의 진출이 좌될 된 지역으로서 이들에게는 유교적 가치보다는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진출할 곳은 사실 기독교계통 밖에는 없었던 현실을 설명했다. 조 목사는 민경배 박사의 논문 중 서북계의 신앙의 특징이 신앙적 형태가 대중운동적 성격이 있었고, 일반 대중이나 신자 개개인의 주도적 선교에 의해 이뤄졌다는 평가를 인용했다. 이것은 현지인을 향한 전도는 현지인들이 담당한다는 네비우스의 선교원칙과 일치했고, 때문에 압도적 수적 성장과 내적 발전을 이뤘다는 주장을 펼쳤다. 서북계는 성서에 기초한 인간의 존귀성과 정의, 윤리의 가치, 민주주의적 평등, 자유의 기본적 확립 등의 긴요함 등을 대변하는 근대적 가치를 신앙 안에서 깨닫고 스스로 신앙으로서 불타올랐다는 것이기에 사회정의의 구현과 일제의 침투에 대한 강한 저항운동의 모습으로 나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서북계의 보수적 신앙의 형태는 1930년대에 기독교민족주의자들과의 결합으로 그 목적이 신앙보다는 방법으로 전이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지만 모든 교회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며, 경향이 그러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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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보수복음과 구국복음의 교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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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섬김에 협력 관계로 발전해야
- ▲ 서헌재 한국교회법학회장은 동 학회가 준비한 '표준사역계약서' 양식을 설명했다. ▲ 황영복 상임이사가 개회예배 사회를 담당했다. ▲ 송준영 목사는 부교역자에 대한 교회 내 헌법적, 신앙적 위치를 설명했다. ▲ KMS(한국어머니합창단)는 이날 '예수', '우리'라는 제목의 특송을 담당했고, 동 학회 운영이사들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사역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성도의 숫자가 교역자보다 많기 때문에 담임목사 혼자 교회운영을 감당할 수 없어 부목사나 전도사 등과 협력해야한다는 것이 교과서적인 개념이지만 실제로는 일부가 상급나는 갑질을 일삼고, 하급자는 배신이나 사회법에 고소를 하는 등 갈등이 있어 이를 해소해야한다는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사)한국교회법학회(학회장 서헌재 목사, 중앙대학교 명예교수)는 '교회 부교역자의 지위와 역할'을 주제로 제 32회 학술세미나를 지난 11월 23일 사랑의교회당(당회장 오정현 목사 시무)에서 개최했다. 개회예배 사회는 황영복 목사(상임이사)가 담당하고, 개회사는 김병덕 목사(직전상임이사)가 담당했다. 동 학회는 교회 내에서 최고지위인 담임목사를 제외한 부목사나 전도사 등이 복음의 사역자인지 아니면 근로자인지에 대한 명제를 다뤘고, 이에 따라서 일부는 적은 사례비에 혹사를 당하거나 인격적인 모독을 겪는 등 결과로 퇴직금 부지급을 이유로 담임목사가 벌금형을 맞아 전과가 생기는 등 사태가 터지는 중이지만 핵심원인은 당사자간의 배려와 사랑이 부족해서라 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서헌재 목사는 '부교역자, 사역자인가 근로자인가?'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교호의 대표자인 담임목사 외에 부목사, 전도사 등 부교역자가 담임목사를 보좌함으로서 교회사역이 진행되는 현실이라고 설명하고, 그럼에도 내부적으로는 부교역자들 자신이나 채용주체인 담임목사, 교우들의 인식에서 근로자인지 사역자인지에 대한 정의가 애매하고, 때로는 서로 근로법을 적용한 소송이 벌어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서 목사는 법원에서는 부교역자의 사역이 담임목사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 종속적 관계인가와 부교역자에게 지급하는 비용이 사례비인지 생활보조비인지 등이 판단기준이라고 요약했다. 한국교회의 대응방법을는 부교역자 청빙(사역)계약의 중요성이 있으므로 동 법학회가 수립한 '표준사역계약서'을 제시했으며, 부교역자를 채용 또는 청빙함에 있어 계약의 차이는 이들의 지위와 적용법이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경우 부교역자도 헌신과 영적지도자인 목회자인 점을 감안해 근로자가 아닌 사역자로서 대우하지만 이를 위해 민법상 위임계약인 '사역계약서'나 '청빙계약서' 형식의 계약을 함이 바람직하고, 부목사는 담임목사를 보좌하고, 협력해 목회하는 사람임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진지훈 목사(제기동교회)는 '부교역자의 교회법상의 지위와 성경적 모델'을 발제했다. 부목사의 고용을 담임목사나 당회가 결정하는 것이 아닌 교회 내 공동의회에서 결정한다면 교회 공동제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부목사가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당회원이 되고, 당회의 결의에 따라 사역을 한다면 근로자가 아닌 당회 내 협의의 당사자가 됨으로서 사역자로서의 지위를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도사의 경우 제도적 보완을 통해 사역자로인정받기는 어렵다며, 유급직원으로서 필수적인 업무를 부과하되 교회 내에서 개인 신앙영역은 본인에게 맡겨야 함이 옳다고 밝혔다. 유급직원이지만 전도사도 동역자로서 인격적 대우를 하고, 성도는 사역자로 존중해줘야한다고 강조했다. 성경에는 모세와 아론의 동역방식, 모세가 천부장부터 십부장까지 방백을 세웠던 일들, 모세와 여호수아간의 관계 등을 좋은 동역모델로 제시했다. 서승룡 목사(한국실천신학회장)는 '목회 현장에서 부교역자의 역할과 계발'을 발제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담임목사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의한 발전을 이뤄왔지만 최근에는 교회 핵심동력이 담임목사 외에도 부교역자나 장로, 평신도들에게 옮겨지는 추세이기에 담임목사의 리더십에 부응하는 교회 내 다양한 직분자에게 헬퍼십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교인들도 부교역자들에 대한 인식도 담임에게만 존중하고, 부교역자는 무시하는 그런 태도를 바꿔야할 것이며, 부교역자에 대한 호칭이나 임기, 사역, 처우에 대한 법적 보장이 되어야만 실효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백현기 변호사(법무법인 로고스)는 법원의 판단은 교역자의 법적지위에 관해 부목사는 근로자가 아니며, 전임전도사는 근로자이며, 교육전도사는 근로자가 아닌 것으로 보고있다고 간추려서 설명했다. 교회 내 항존직과 임시직이라는 규정은 폐지되야한다고 주장하고, 이 직책들에 대한 정의가 교단별로 다양한 측면이 있지만 존재성을 따지는 직분을 마치 직위로서 임시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나머지 신분보장이 안되는 것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우려가 많다고 설명했다. 법원에서는 부교역자에 대해 근로자로서의 직위 여부를 따지지만 교회 문화적으로 볼 때 종교인으로서 예배와 기도, 찬양, 심방, 성경공부 등을 수행하는 영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므로 교회와 교회법학회는 성경적으로 근로자가 아닌 사역자로서 비춰지도록 해야하고, 법원에서도 근로자가 아닌 사역자로서 이해하도록 노력 할 것을 제안했다. 송준영 목사(성성교회 담임, 서울특별시교회와시청협의회 대표회장)는 '부교역자에게 요구되는 영성과 법적 지위'에 대한 토론순서에서 교역자라는 말은 교회 내 평신도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부교역자라 하더라도 평신도와는 구분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신학생만 해도 신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실제적으로 부교역자로서 첫 것음을 떼는 것이라고 볼 만큼 특별한 성격을 갖게 되며,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교회법상 전도사는 "신학교나 성서학원 졸업자로서 노회 전도사 고시에 합격한 자"로 규정했고, 전도사의 지위는 목사직으로 안수 받기 전이나 대부분 실제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러 여건상 목사는 아니지만 목회자로서 소명받은 사람에게 목회자의 길을 열어준 것으로 해석했다. 또한 교단 헌법에 "전도사는..., 지교회에서 시무하는 유급 교역자"라는 규정이 있다고 해서 근로자로 규정함에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헌법 상 전도사의 직무규정에 "미조직교회에서는 당회장의 허락으로 재직회 임시 회장이 될 수 있다"고 규정했는데 이는 시무 목사가 부재한 밎직교회에서 전도사가 당회장의 허락 하에 실질적인 대표자로서 제직회 임시의장이라는 것인데 '유급' 이라는 문구에만 집중해 근로자로서 법원이 판결함은 바로 이어 나오는 '교역자'라는 문구를 간과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즉 전도사도 부교역자로서 목회자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으며, 부목사도 교역자로서 최종적인 수련과정에 해당하기에 전적으로 담임목사를 위해 고용된 근로자로서 보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김상백 박사(좁은길교회 담임목사)는 사회에서는 리더십의 흐름이 과거의 수직적이었던 것이 최근에는 수평적으로 바뀌는 중이라며서 특히나 교회 내에서도 젊은 층인 MZ세대가 익숙한 방식대로 변모하는 과도기여서 구세대와 신세대의 부조화가 벌어지는 것으로 평가했다. 기성세대인 담임목사는 부교역자들은 밑에 사람이 아닌 차세대의 영적지도자가 될 인재라는 인식으로 바뀌어서 양육에 초점을 두고, 신세대는 구세대에 대한 존중의 자세를 가져야할 것을 강조했다. 박상흠 변호사(법무법인 우리들)는 성직자의 활동은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으로서 성직자 자신의 영적 개발과 사명감이 충만한 영혼구원을 위한 희생하는 이러한 사역을 세상법의 잣대대로 임금을 수수하려는 근로의 대상으로 재단하지 말아아하며, 교회는 사회법으로 나가서 갈등을 표출하기 보다는 자체적인 해결을 노력할 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가치가 돋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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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섬김에 협력 관계로 발전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