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0-1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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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순교기념교회 기념 엽서이다. 동 엽서는 일본인들이 제작한 것이며, 현재 북한 과기대학교가 있는 장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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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배 연세대학교 명예교수가 주 발제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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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유정우 박사(사진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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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목사가 타고 대동강으로 들어온 상선 제너럴셔면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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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목사가 1866년 8월 1일 마지막으로 작성한 편지.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사실을 두고 한국이나 영국에서 오해나 억측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지만 사실은 토마스 목사의 선교열정을 집중하며, 그리스도인들의 교훈으로 삼아야한다는 주장을 민경배 박사(명예원장, 연세대학교 명예교수)가 주장했다.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권평 박사, 이하 한교사)이 지난 6월 8일 주최한 제 292회 발표회 주 강사로 초청되어 '한국 최초의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論'이라는 제목의 발제를 담당했다.

 

평생동안 한국교회사를 연구한 민경배 박사는 1970년 무렵 영국 런던대학교 뉴칼레지에 유학하던 시기까지 선교사로서 한국 최초로 순교했던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 목사(Rv. Robert Jermain Thomas)'에 대해서 에딘버러대학교 뉴칼레지 출신이고, 스코틀랜드 출신자로(백낙준 박사의 1926년 예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에 의거)만 알고있었지만 런던대 은사였던 '나탈 박사(Dr. Geoffrey F. Nattal)'와의 대화 중 의문점이 생겨 함께 연구한 결과 사실과는 달랐다는 것을 설명했다.

 

민 박사는 토마스 목사의 출신은 런던대학교 뉴칼리지를 수학했고, 웨일즈 출신자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은 나탈 교수와 함께 런던대학교 창고에서 백년은 지난 각종 서류들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확인했다고 밝혔다.

 

나탈 박사는 토마스 목사가 에딘버러 뉴칼레지 출신이라는 것이 의심스러운 이유는 그의 이름 중 토마스가 성으로 쓰이는 경우는 웨일즈가 유일하기 때문이며, 웨일즈 출신자가 궂이 먼 에딘버러까지 공부하러 갈 이유는 없다는 가설을 제시했는데 민경배 박사와 나탈 박사가 함께 런던대 뉴칼리지 기록물보관소에서 먼지 쌓인 학교서류를 살피던 중 토마스의 이름을 도처에서 발견해내면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토마스 목사의 자료를 모으던 중 그가 런던선교회 파송 중국선교사로 상해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런던선교회 리빙스톤라이브러리를 방문해 당당자인 프레처 여사의 도움으로 서신 등 모든 자료를 복사해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토마스가 웨일즈 하노바 회중교회 목사 아들임을 밝히고, 이곳을 동료 교수인 이경희 교수, 양승두 교수, 차일환 교수 등과 함게 1970년 3월 경 방문해 토마스 목사의 사진과 기념비문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 목사는 영국 웨일즈 라드노주의 롸야다에서 부친 로버트 토마스 목사와 모친 마리 로이드 사이에 태어났다고 한다. 부친은 몬마우스주 아버가버니의 하노바교회 회중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했다고 한다. 동기들은 자매가 리찌, 애니, 랄리가 있고, 사무엘이라는 형이 있었다고 한다. 1855년에 하노바교회에 교인으로 등록, 1856년 런던대학교에 입학, 이듬해 뉴칼레지에 등록, 1863년 5월 23일 문학사학위 수여, 1863년 6월 4일 하노바교회에서 목사안수 수여, 1863년 아내 캐롤라인 고드페리와 결혼과 동시에 중국 상해로 떠나서 12월 1일에 도착했다고 한다. 아내 캐롤라인은 1864년에 3월에 조산으로 사망, 12월 7일 지푸 해상세관에 통역사로 취업, 1865년 7월 27일 세관을 그만두고 런던선교회 복직을 타진했지만 지리적인 이유로 어려웠고, 1865년 9월 4일 배를 타고 한국으로 떠나 9월 13일 서해안에 도착, 서울로 가려 했지만 조선정부의 종교적인 탄압도 심했고, 풍랑으로 인해 1865년 12월 중국으로 다시 귀환했다고 한다.

 

토마스 목사는 1866년 7월 13일 미국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또 다시 조선행, 대동강에 들어갔다가 모래사장에 좌초되어 평양주민들에게 선박이 불타고 죽임을 당한 것이 1866년 9월 5일(음력 7월 27일)이라고 민 박사는 밝혔다. 토마스 목사가 이전에도 약간 그랬지만 이 때는 한국인들의 요청으로 성경책을 나눠주기 위해 입국을 시도했다고 한다.

 

민경배 박사는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평가를 두고 영국의 어느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으며, 런던선교회는 역사책에 "중국에서 자기가 일하도록 되어 있는 곳을 떠나 한국에 가더니 물에 빠져 익사한 것같다!"고 단 한줄만 기록했고, 프레처 여사가 쓴 논문의 제목에는 '버릇 없는 선교사'라고 표기된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영국이나 한국이나 토마스 목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는 편이서 연구가 어렵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있고, 침입자요 적이라는 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민경배 박사는 한 선교사에 대한 평가는 평가주체마다 다를 수는 있다고 전제하고, 그럼에도 토마스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편지를 쓰는 등 효심이 깊은 사람이었으며, 조선의 내부사정이나 조선천주교의 사정들을 꿰고 있는 등 외국인으로서는 막강한 정보력이 있었다고 한다.

 

토마스 목사는 외국어능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그는 유럽의 언어들은 자유롭게 구사하고, 한국말이나 몽골어, 러시아어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매우 친화적인 성격이 있어서 누구든지 가까이할 수 있었다고 한다. 

 

1863년 사무엘 노스 뉴칼레지 학장은 토마스에게 "힘과 진실성과 영향력이 넘쳐서 아주 뛰어난 재질을 가졌다"고 평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민경배 박사는 토마스 목사의 한국행은 하나님의 경륜이었다고 평가했다. 그가 한국으로 온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지만 가정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겼고, 본인의 생명도 위협을 받았지만 런던선교회는 그의 행적을 두고 '순교'라는 말 대신 익사라고 하고, 당시 현지 선교사들은 험담을 해대서 외톨이로 전전하던 중 한국으로 갈 기회가 열리는 등의 모습을 보면 순수한 선교의 열정이 강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날 발제를 마친 뒤 참석자들은 토마스선교사에 대해 한국교회의 평가가 지나치게 고평가되거나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라는 식의 평가들이 많다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민 박사는 그가 성경책을 조선인에게 나눠줬다는 것은 당시 타고온 배가 불에 타는 중이었는데 그럴 개연성은 적으며, 무기를 차고 다녔다는 평가도 그저 당시 서양인들이 해외여행 중 호신용으로 차고 다녔을 뿐이며, 상선을 타고다녔으니 사업가라는 인식도 당시는 요즘처럼 여객선이 없고, 그저 상선 아니면 군함을 타고 여행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설명했다.

 

토마스 목사에 대해 중요한 점은 그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선교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한국교회라도 그의 순수한 복음의 열정을 전세계로 알림으로서 기여하는 것들이며, 역사연구에는 정확한 사실에 기반한 결과물을 산출하는 학풍이 있어야 토마스 목사같은 귀한 신앙선각자들이 오해를 받지 않는 다는 것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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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토마스의 복음 열정을 주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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