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韓日 성도들의 협력 주목
민경배 박사,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신년토론세미나 발제
▲ 민경배 박사가 주 발제를 담당했다.
▲ 정용 박사가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권평 박사, 이하 한교사)은 2024년 신년토론세미나를 지난 1월 11일 서현교회(담임 이상화 목사)당에서 진행했다.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의 '일제하의 한일관계사-누가 우리 편인가?'라는 주제의 기조발제 이후 참석한 회원과 열띤 토론을 가졌다.
① 한일관계는 한일관계사 연구에 중요.
민경배 박사는 한일관계는 1895년 민비의 사후부터 최소한 60년을 실제로 엮여 있었기에 한국교회사(주로 구한말부터 범위)를 연구하려면 한일 관계사적인 관점에서 시작해야 하고, 실제로 연구를 진행 하려면 사료 자체가 한문과 일본어로 되어 있기에 두 언어에 능통해야 한다고 기초적인 필요사항을 제시하고, 역사학이나 정치학적인 입장에서는 제국주의 일본으로 부터 조선과 조선인이 탄압 받았다는 것이 큰 물결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는 다양한 일본 그리스도인들이 각 분야에서 조선의 그리스도인들과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한 배려와 노력을 했다는 신앙인 내부적인 부분에도 큰 관심을 가져야 함을 강조했다.
② 일본의 기세는 대단했다.
발제자가 1941년에 초등학교 1학년 때 '대동아전쟁'이 발발했고, 1945년 5학년 때 종전을 했던 시기였다고 밝혀 학자로서 젊은 시절에 겪은 일제시대의 상황을 설명함에 정통함을 표현했다.
일본이라는 섬나라는 당시 세계제일의 대국인 청나라를 1985년 1년 만에 승리 했으며, 러시아를 1905년 1년 만에 승리 했을 뿐 아니라 당대 강국인 미국과 네델란드, 카나다, 영국 등과 4년 간을 홀로 전쟁을 벌인 저력있었음을 설명했다.
조선은 그런 나라의 식민지로서 60년을 같이 있었기에 일본을 모르고는 한국교회사연구는 어려운 것이라고 단언했다.
모 전 대통령의 부친이 함경북도 시골의 농업계장을 했다고 논란이 일은 일도 있지만 일제시대는 산업이라는 것이 농업 밖에는 없었는데 농업계장 정도를 했다고 친일파라는 평가를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일본이 세계열강과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분위기였는데 1896년 1월 12일 일본 국민신보의 기사 중 우리가 군사력으로 해보니 되네? 하는 이야기가 보도될 정도였다고 밝혔다. 당시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시 세계가 놀라던 시기였고, 일본은 세계전 나가야겠네 하면 군국주의적인 색채를 띄게되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일본인들도 자신들이 그렇게 강력한지 몰랐다고 한다.
③ 일본은 교육을 중시했고, 엘리트 주의였다.
일본 교육기관은 천황의 발언을 담은 '교육치부'라는 문서를 매달 1회 씩 낭독했는데 이 문서를 다룰 때는 하얀 면장갑을 끼고, 신성시하는 자세를 갖고 모든 일을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일본정부의 다양한 면을 통해 볼 때 일본이 가장 중시한 정책은 교육정책이었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교육정책으로 일본정신을 일으켰으며, 방식은 엘리트 수재교육이었는데 한국의 경우 평준화의 방식인 것과는 달랐다고 평가했다.
한국은 교육과정이 국민학교와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 순으로 진행하는데 일본은 고등학교 과정이 있었고, 이 고등학교는 일본교육의 근본이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그것에 못 미치는 경우 대학 예과에 진학하는 방식이었다고 밝혔다.
일본 내에는 경성제국대학, 동경제국대학, 경수제국대학 등 제국대학 7개가 있었고, 한국과 일본에 각 1개씩의 제국대학이 있었으며, 동 시대에 일본 명지대나 동지사대 등이 존재했지만 보통의 대학교일 뿐 대세는 역시 제국대학이었다고 설명했다.
경성제국대는 1924년 경 법문, 의학, 공학, 이학, 문학, 노학 등의 학부를 보유한 규모였다고 한다.
민 박사는 일본의 스타급 대학자인 '가와이 에이지로(1891~1944)'는 「학생에게 준다」와 「대학에서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학생과 교양」 등 10여권의 명저를 출간했는데 고등학생의 자격을 유지하려면 세계문학전집을 읽어야만 하며, 이른바 지정의를 상징한 '데칸쇼'를 읽을 필요를 주장했고, 이것을 풀면 데카르트(학문)와 칸트(도덕), 쇼펜하우어(정서) 이며, 여기서 읽은 지식이 세계 강국들과의 투쟁의 자양분이 된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예전은 물론 오늘날에도 이런 주장은 전무하다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밝혀 한국교회사연구를 수행함에도 언어는 물론 일본 정신문명의 근간인 문학과 문화에도 정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피력했다.
한편, 일본의 왕족이 수학하는 학습원을 포함해 정규고등학교는 전국에 38개 뿐이기에 입학경쟁이 매우 심했기에 고등학생이라고 하면 대단한 수재로 취급되었지만 이들의 생활태도는 우리가 보기에는 엉망칭창인 것처럼 살기도 했다고 밝혔다.
민 박사는 지식인을 영어로 하이칼라(High Color)라고 부르지만 일본 고등학생은 만칼라(蠻 Color)로 일컬었는데 이들의 하는 행실이 더러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은 술을 진탕 먹고, 하수구 뚜껑을 열어서 낙시를 하기도 하는 등 온갖 기행을 했지만 일제 시민은 물론 경찰도 건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만칼라들이 용인 받은 이유는 천재를 대담한 인물로 길러내야 한다는 목표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수재들은 보통 두뇌는 명석하지만 행동은 수줍고, 소극적이라는 약점이 있기에 세계를 재패하려면 수재들이 대담한 성격을 갖게 한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민 박사는 분석했다.
한국인으로서 일본 제 1보통학교 졸업자는 8명이었고, 대표적 인물은 주요한이나 채필근 목사(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일본제국대학을 졸업한 목사)가 있고, 1942년까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한국인은 630명, 동경제대 61명, 경도제대 236명 등 전체 1413명이 졸업했다고 하며, 이들은 해방과 한국전쟁 후 남북한을 재건하는데 주요활약을 했다고 밝혔다.
일제시대 한국교회는 성탄절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너는 내용의 연극을 실시했는데 절기로 따지자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다뤘어야 하지만 출애굽을 다룸은 한국교회가 민족해방을 상징하는 것에 열중했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이 때 사리원교회 김장호 목사는 홍해가 아니라 갈대밭을 건너는 것이라고 폄하했는데 이것을 알려준 선생은 월리암 선교사이고, 그는 김용도 목사의 대부이기도 했는데 한국에서 쫒겨난 뒤 그의 대단한 재능을 안타까워한 사람들에 의해 경성제국대에서 성서교수를 하다가 맥아더 장군의 종교고문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군에 군목을 도입함에 기여한 인물이었다는 점들을 들어 일본제국주의 시절의 역사와 인맥들이 현재의 역사를 구축함에 입체적인 영향들이 있다는 일례를 증거했다.
④ 친일파가 누구인가?
한국인들은 친일파라는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일제시대는 모든 조선인이 일본 천황의 밑에서 그의 헌법아래 생존하던 시기였다는 대전제를 가져야한다고 제안했다.
일본의 개화파들은 대다수가 미국에서 7년 이상 유학을 경험한 인재들이었는데 서양에서 배운 세계관을 일본의 발전에 다양하게 활용했다고 밝혔다.
법학의 분야에서 살피면 서양 국가들의 헌법은 기독교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헌법의 기초를 천황제와 신도로 대치해서 응용했던 상황이고, 공교롭게도 이 시기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이 독립운동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진 그리스도교 사상 자체가 천황제에 대한 반대요, 반 헌법주의자가 되는 결과물이 나오게되었다고 설명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왕자 이근을 데려다가 훌륭한 제왕을 시키려고 제왕교육을 시켰다고 많은 일본 서적에 기록되어있는데 한국의 독립가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일본 주류세력은 군벌과 문벌이 통치의 방법을 두고 경쟁하던 시기였는데 그 주류세력은 모두 규슈 북쪽지방출신(사쯔마파, 규슈파)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지금의 기시다 노부스케와 아베 신조, 사이또 이사쿠 등이 사쯔마 출신들이며, 일본의 수상들 상당수는 집안이 같은 출신이라는 특징이 일부 있다고 일본 정계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베는 첫 국무총리 시 동아일보에 자신의 조상이 한국과 연관있음을 밝히기도 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규슈지역은 고대 시대에 한인들이 대거 이주해갔던 지역이었고, 오늘날 일본에서 잘생기고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들 상당수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인의 피가 흐른다고 보는 경향도 많다는 설명을 했다.
남북한이 최초에 정부를 세울 때 헌법의 기초를 남한의 경우 유진오(경성제대)가, 북한은 최용달(경성제대)이 세웠으며, 북한 김일성대학교의 교수 23명 중 일본 제국대학 출신이 20명이어서 90%였으며, 일본에서 경성제국대 출신은 친일파 중 친일파로 분류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기여를 할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최고 학술기관인 학사원 북한과학원의 원사 10명 중 7명이 일본 제국대학 출신으로서 북한이 일본제국주의를 타파했다고 주장하지만 북한을 세우고, 움직인 것은 제국대학 출신들이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제국대학 출신들 아니면 국가체제를 세울 수 없었다고 밝혔다.
남한의 모 일류대의 경우도 최모 씨, 고모 씨, 민모 씨, 정모 씨 등 제국대 출신들이 많았었다고 밝혔다.
아키히도 일본 국왕은 20년 전 뉴스위크지 「일본의 불안한 역사인정」이라는 기사에서 조상 중에 백제 여자공주가 있다는 언급도 있다고 밝혔다.
⑤ 한국과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관계
우리나라에서는 1938년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결정되었고,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1925년 홍천에서 국민학교 선생과 학생들이 퇴학을 당한 것이 최초의 고통받음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조선의 해방 후 미국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본 천황 궁성안에 기독교의 목사를 초청해 예배를 드리는 일이 있었는데 이는 천황의 동생 중 '다까마쯔(이후 일본 ICU대학 설립)'가 주도하는 등 황실에 복음화가 진행되었음을 설명했다.
이토 히로부미(문벌)의 사망으로 인해 후임인 데라우찌 마사타께(군벌)가 공직을 수행하면서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그의 통치에 최대의 방해자라는 인식을 했고, 이들을 모두 없애기로 해서 105인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로 인해 한국그리스도교 주요인사 7백 명이 잡혀갔는데 이 숫자는 당시 한국교계 전체에 해당할 정도였다고 분석했다.
105인 사건을 다루는 경성법원의 판사 중 와타나베 다케시 법원장은 그리스도교 장로였는데 결과적으로 그가 다 잡힌자를 풀어줬다고 밝혔다. 와타나베 법원장은 장로교총회에 찾아가 강단 뒤에서 총회장을 만났는데 아마도 같은 신앙인으로서 함께 애통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2.8선언문(1919년 2월 8일)은 이광수가 작성했는데 일본 제국의 법 아래에서는 반역죄에 해당하는 중죄로서 죽임을 당해야 했지만 출판법위반으로 판결했다고 한다.
민경배 박사는 이것은 바로 한국과 일본의 기독교가 이처럼 세상을 바꾼 증거라고 강조했다.
일본인들은 본래 상대화 개념이 없으며, 오직 상대화 개념은 일본 그리스도인들만 갖고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의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 중 0.5%에 불과하지만 대부분이 최고 엘리트 인사들이라고 밝혔다. 민 박사가 일본 무교회계통의 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는데 여기는 평신도까지 희랍어원문성경을 읽고 있어 놀랐다고 증언했다.
후리야 야소 ICU교수는 일본에 그리스도인이 5%만 있었다면 나라를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3.1운동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반란죄로 다스림이 충분한데 한국에 파송된 일본 판사들은 단순히 소요죄만을 적용해 대거 석방해줬던 일이 있고, 이것은 아무리 우리를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붙들어주는 손이 있다는 증거로서 국가를 떠나 종교와 사상으로서 협력을 했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처럼 판사들을 모두 훌륭한 기독교인들만 데려왔고, 이 일본 기독교인들은 복음의 거룩한 역사를 장식했다고 민 박사는 강조했다.
데라우치는 이토에 비해 강경파였고, 총독 하세가와와 함께 1915년 조선에서 기독교학교와 기독교선생을 금지했던 자였지만 1917년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를 위해 '기독교연합재단'으로 인가를 해주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총독부 내 우사미 갓조 국장급 등 기독교인들이 즐비했는데 이들이 언더우드 목사를 만나 협조를 해 신과대를 만들고, 기독교연합재단이 출범되었다고 밝혔다.
세상이 어둡고 무서웠던 18세기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신상근이 작곡한 '실로암'의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는 내용을 부르짓으니 하나님은 크나 큰 복을 계속 주셨고, 오늘의 한국교회가 번성해 성시화 된 국가로서 복음전파를 위해 충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쿠 도미소코'는 일본정부기관지인 '경성신문사'의 감독직위였으며, 일본 천황을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 실세 중 실세였는데 조선에서 3.1운동으로 인해 식민정부가 진압하는 모습을 보고 훈족(야만)이라고 비판했으며, 나까다에 기요시는 3.1운동을 옹호하는 비슷한 일이 즐비했다면서 일본 정부의 하층부는 조선을 탄압하는 것 같아도 일본 최상층부는 그리스도교적인 사고가 있었던 그런 사실들을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면서 염두해야한다고 제언했다.